<카오스(chaos) 이론과 불교>
‘카오스(chaos)’란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상을 말한다.
즉, 복잡, 무질서, 불규칙한 상태를 말하며,
장래의 예측이 불가능한 현상을 가리킨다.
카오스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우주가 생성되는 과정 중 최초의 단계로
천지의 구별이 없는 무질서한 상태, 즉 고대 그리스인들이 주장한
우주개벽설(cosmogonia)에서 만물 발생 이전의 원초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혼돈상태라는 의미에는
서로 깨어지고 부서지는 상태가 아니라, 마치 교향악을 연주하듯
조화를 이룬 가운데 혼동하는 복잡함 속의 일정한 규칙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오스 이론을 통해 복잡한 현상을 일으키는
여러 요인들 중에서
2~3개 정도의 요인만을 분석함으로써 예측도 가능하다.
이것은 언뜻 봐서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현상의 배후에는
정연한 질서가 감추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는 알려지지 않은 법칙을
파헤치는 것이 카오스 연구의 최대 목적이다.
카오스에는 완전히 새로운 과학을 탄생시키는 가능성이 있다.
카오스 이론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미국의 에드워드 로렌츠(Edward Norton Lorenz, 1917~2008)이다.
기상학자인 로렌츠는 1963년에 기상현상의 대류현상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 하던 중 처음의 조건[초기조건]이
아주 조금만 다를지라도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불안정한 현상이 존재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초기조건(初期條件, initial condition)---주어진 프로그램이나
루틴(routine)의 시작에 앞서 필요한 데이터나 제어조건을 말함.
카오스 이론을 필두로 등장하기 시작한 현대과학의 이론들은
종래의 과학 패러다임 자체를 변혁시키며 인류의 지적 영역을 확대해 왔다.
카오스 이론이란 그동안 무시해왔던 불규칙한 현상의 배후에 있는
규칙성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의 등장은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견돼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있다.
일찍이 중국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
그리고 석가모니가 설파한 불교사상 속에 카오스 이론을 비롯한
현대과학의 중요한 개념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 수학계의 거장이자 오랫동안 카오스 이론과 불교사상을 연구해온
김용운(金容雲, 1927~2020) 교수의 저서 <카오스와 불교>에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사상과 현대과학으로 이어지는
서양철학이 하나가 되는 과정을 살피면서,
앞으로의 과학문명이 이끌어나갈 새로운 지식 세계를 가늠했다.
이 책 속에 흐르는 불교사상은
모든 현상에는 본질이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해가므로,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철학.
이러한 사상들은 20세기 이후의 과학이 절대성, 완전성, 확정성,
명백성을 부정하면서 상대성, 변화, 무아(無我)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가령 카오스 이론의 특징 중 하나인
프랙털(fractal)은 전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곧 전체임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프랙탈(fractal)---프랙탈은 단순한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복잡하고 묘한 전체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순환성(recursiveness)’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연계의 리아스식 해안선, 동물혈관 분포형태, 나뭇가지 모양,
창문에 성에가 자라는 모습, 산맥의 모습도 모두 프랙탈이며,
우주의 모든 것이 결국은 프랙탈 구조로 돼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카오스와 불교는 한 결 같이 연기(緣起)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기계론적인 과학이 아니라 성장하고 사멸해가는
모든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복잡한 과정을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것이 카오스 이론이다.
“북경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다음날 뉴욕에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기상학자 로렌츠의 ‘나비효과’는
카오스 이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인연(因緣)과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 인간사 자체가 우주의 한 부분이고
우주는 카오스이며,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일즉다 다즉일]라는 관점에서
우리네 개개 인간사 자체가 곧 카오스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진즉부터 불교가 말해온 진리이다.
다음은 김용운 교수의 저서 <카오스와 불교>의 요약이다.
『석가모니는 처음엔 존재론적인 사색에서 출발해
‘연기(緣起)의 철학’을 터득했다. 연기의 철학 위에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원리가 수립된 것이다.
또한 그 길을 걷게 한 것은 중생의 구제(救濟)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인 정열로 연기론을 기반에 두고 실천론을 제시했다.
그의 최초의 설법 ‘초전법륜(初轉法輪)’에는
확고한 실천적인 세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벨기에 물리학자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2003)은
과학자적 도(道)를 견지하면서 자연적인 대상은 물론
인문, 사회과학의 영역에까지도 그 이론의 적용범위를
넓혀갈 것을 시도했다. 시간의 흐름 위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면서
변해가는 것들은 자연, 인문, 사회과학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카오스의 대상이다.
불교는 종교이지만 프리고진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자연과 사회 모두를 포함한 거대한 지(知)의 체계이기도 하다.
불교가 사회학, 철학, 현상학, 심리학 등 다양한 내용을 갖는 것은
연기의 기반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불교는 연기의 인간관에서 출발해 모든 학문 분야를
하나의 체계에 포함시키고 있으므로, 프리고진은
카오스의 입장에서 불교의 여러 분야를 과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목적은 자연해석이다.
그러나 종전의 과학은 물질을 소립자까지 분해하는 등
무생물 분해에서 출발했고, 그 방법론에 충실했던 물리학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의 모습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카오스 이론은 극히 작은 단순한 것일지라도
하나의 상호의존관계 ― 불교의 상의상관 관계의 요인으로 보고,
그들의 얽힘이 오늘날 새롭게 관심을 끄는 복잡성(Complexity)을
나타내게 하며, 복잡계(complex system)의 양상(새 질서)을 띰을 중요시한다.
생물은 세포로 구성되는데, 그 속에 있는 염색체의 얽힘,
즉 연기가 복잡하고도 다양한 생명을 탄생시킨다.
생명은 근사(近似)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또 세분화할 수 없으므로
전체를 통째로 봐야한다.
산을 산으로 보되 나무의 모임만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강을 물 분자의 집합으로만 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전체를 요소 사이의 관계로 보는 입장에서
그것이 지닌 생명력의 창발(emergence)을 읽어낼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이 변화의 파도를 슬기롭게 넘어가기 위한 길이 중도(中道)이며,
그때마다 적절한 삶의 방법, 즉 방편이 있다.
한편 카오스의 과학 또한 변화를 중심과제로 삼고 생산적인 것과
무질서적인 변화의 의미를 파헤친다. 특히 변화의 시작인 요동(움직임)에서
카오스로 이어지고, 그 가장자리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질서를 위한
자기조직이 있다.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명의 진화를 생각해 보자.
이들 모두가 기적과도 같은 수많은 진화단계의 역사를 지나는데,
한 생물 종이 진화를 맞이하기 전에는 먹이, 천적, 풍토 등의 환경변화(무질서)를
비롯한 크고 작은 요동이 있었다.
이때 진화를 하느냐(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느냐),
멸종하느냐(무질서, 혼돈으로 치닫느냐)를 결정하는 자리가
카오스의 가장자리이며, 이로부터 사소한 계기에 의한
선택에 따라 진화하기도 하고 멸종하기도 한 것이다.
카오스의 가장자리는 어둠 속에서 가냘픈 빛을 발하는
좁은 길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왼편은 금방이라도 굳어버리게 되는 잔인한 시멘트 반죽의 바다이고,
오른편은 불모의 사막이다. 이들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면
풍요로운 가능성을 지닌 영역이 있다.
세속적인 보기를 들자면,
혁명가는 역적과 총신의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이다.
즉,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냘픈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의 행동이 창조행위인가,
아니면 방종한 무질서인가, 경직화된 불모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기로와 같다.
카오스가 가장자리에 진입했을 때 하나의 계기가 양상을
크게 바꿔 놓을 수 있다. 이러한 계기의 역할을 하는
트릭스타(Trickster, 문화영웅)는 우리에게는 도깨비와도 같은 존재이며,
혼돈의 대변자로서 신화에 나타난다.
이들은 상식을 파괴하면서 혼돈을 일으키는데,
한편으로 새로운 질서를 유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혼돈의 신(핵심)과 교감하며 때때로 사회적인 규범을 무시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다.
교활하게 기존의 권력체제를 무너뜨리는 선도적 역할을 하는 혁명가이자
새로운 문화의 창조자이기도 한 것이다. 혼돈에 나타나는
트릭스타는 혁명가일 수도 있으며 문화영웅으로서
새 질서를 자기조직화 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프리고진은 처음에는 카오스의 가장자리를 물질적인 대상에서 관찰했다.
에너지 또는 물질의 출입이 일정하지 않은 비평형 상태는 불안정하며
작은 흔들림(요동)에도 전체구조가 크게 변화한다.
특히 카오스에 있어서는 정상궤도를 벗어난 개(個-낱개, 개인)의
역할이 중요시된다. 세계는 변화의 와중에 특히 충격이 격심할 때
진화의 계기가 주어지며, 여러 가능성을 지닌 분기점에 도달하고
‘새로운 세계질서의 자기조직화’가 진행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불안정한 상황, 즉 카오스 시대에는
개인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청되고 한 사람의 선의지(善意志)가
이 사회를 바꿀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모두가 도깨비가 될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 오늘날 IT산업의
영웅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프리고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계는 자동기계도 아니며, 무의미한 혼돈도 아니다.
그것은 불확정적인 세계이기는 하지만 개개인의 활동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코 개인의 수동적인 태도가 창조적인 세계를 열어갈 수는 없다.”』
서양정신을 설명할 때 우리는 합리주의, 절대성, 완전성,
종교적 결정론 등을 떠올린다.
반면 동양정신이라면 모호함, 여백, 불완전성 등의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두 세계는 서로 융합할 수 없는 것인가.
서양정신은 선진이고 동양정신은 후진인가.
최근 30년 사이 서양철학과 과학계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움직임은
그러나 불가능한 것 같았던 동ㆍ서양 정신의 융합과정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오히려 동양적 철학의 틀 속에서 세계와 우주를 설명하는 답을 얻는 형국이다.
위의 책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과 문명의 역사를 살펴보며,
수 천 년 전 동양의 노장사상과 불교의 공사상(空思想)이,
카오스 이론과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 최근 들어
뉴턴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결정론을 극복한 현대서구 과학의
중요한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다.
석가모니, 탈레스, 피타고라스, 뉴턴, 데카르트, 스피노자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사유를 소개하며, 동ㆍ서양의 철학과 과학,
수학, 종교를 넘나드는, 이 책이 지향하는 것은
기계론적 인간관과 세계관의 극복이며, 인간과 정신,
자연을 하나의 눈으로 보는 생명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고,
불교와 과학을 접합하는 독특한 시도 속에서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관한 성찰을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전혀 이질적일 것 같은 현대과학의 최신이론인
카오스 이론과 불교사상을 하나로 꿰뚫으며
거기서 22세기 문명의 지적인 핵심원리로 ‘생명 패러다임’을 가늠하고 있다.
※복잡계(complex system)란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창발(創發, emergence)’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나타나는 질서적인 현상을 ‘창발현상(emergent behavior)’이라고 한다.
많은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거시적인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뒤엉킨 시스템에 불과하다.
창발이 일어날 때 비로소 ‘복잡계(complex system)'라고 할 수 있다.
복잡계란 무수한 요소가 상호 간섭해서 어떤 패턴을 형성하거나,
예상외의 성질을 나타내거나, 각 패턴이 각 요소 자체에
되먹임 되는 시스템을 말한다.
복잡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펼쳐지는 과정에 있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복잡계는 구성요소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히 설명이 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복잡계는 상호작용을 하며 얽혀있는 많은 부분, 개체,
행위자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잡계란 많은 구성요소들이 그들 사이에 비교적
많은 연관관계를 가져서, 각 구성요소의 행동이
다른 요소들의 행동에 좌우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복잡계란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행위자를 가지고 있어
그들의 행동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종합적인 행동은 비선형적이어서 개별요소들의
행동을 단순히 합해서는 유도해낼 수 없다.
이와 같이 복잡계란, 무수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한 덩어리의 집단으로서, 각 요소가 다른 요소와 끊임없이
상호 작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각 부분의 움직임의 총화 이상으로
무엇인가 독자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립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아주 많은 구성요소를 지니고 있거나,
다양한 진화 경로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시스템이다.
즉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카오스 이론이나 복잡계 이론이 2600년 전 불교에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울 뿐이다.
다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단 하나 모든 장애를 떨쳐버린
절대순수의 상황, 즉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상황에서의
공적영지(空寂靈知)의 통찰을 통해 여실지견(如實知見)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확연히 말할 수 있다. 거듭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열반적정(涅槃寂靜)---삼법인(三法印)의 하나. 탐(貪)ㆍ진(瞋)ㆍ치(癡)가
소멸된 안온한 마음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평온한 마음 상태를 말한다.
생사가 윤회하는 고통에서 벗어난 열반정적을 강조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의 원래 상태인 고요함, 즉 적정(寂靜)이 인간이 추구할
최고 행복으로서의 열반이고, 바로 중도(中道)를 일컫는다.
※공적영지(空寂靈知)---불교적 진리를 표현하는 말로서,
진공묘유(眞空妙有)와 함께 불교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텅 비우고 알아차릴 때 지혜가 드러난다.
텅 비움은 공적(空寂)이요 알아차림은 영지(靈知)라고 할 수 있다.
신령스런 알아차림 그것을 곧 영지라고 표현하고,
텅 비우고 알아차리는 것은 곧 지혜요 전지전능(全知全能)이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밝게 알게 된다 -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여실지견이란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본다.
실상(實相)을 본다, 중도적(中道的)으로 본다는 뜻이다.
여실한 인식, 즉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식하기 위해서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은, 주관적 편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올바른 객관적인 관찰이 돼야 한다.
[출처] Amisan |작성자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