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둥성, 천년 전 장보고의 성공신화 |
![]() 대부분 장보고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 기계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지금의 완도에 설치한 청해진이라는 지명이다. 1만여명의 병력을 청해진에 배치해, 골칫거리였던 해적의 출몰을 근절시키고 노예매매를 막는 등 신라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가 신라에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이삼십여 간 그의 출세길을 열어준 주무대는 다름아닌 당조(唐朝)였다. 때문에 신라에 돌아오기 전까지 그의 성공 스토리를 가늠해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역시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년 전 장보고의 성공신화 -동북아 3국 교역·종교 중심지 -신라·고구려·백제 정신적 거점 산둥성 롱청시 석도진 적산기슭에 있는 법화원(法華院)은 불교에 귀의한 장보고가 창건한 고찰이다. 당시로서는 산둥성 내의 가장 큰 사찰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동북아 3국의 교역 중심지로, 또한 당시 신라 거류민들을 규합하는 종교적·정신적 중심지라는 점으로 인해 한국 사람들(특히 학생)의 발길이 잦다. 이 때문인지 법화원 경내도 잘 정돈돼 있고, 주변 시설의 규모를 늘리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법화원의 주변 시설은 물론 사찰과 마주한 동산에는 기념공원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다. 법화원의 의미를 다시 조명해 본다. 법화원이 있는 산둥반도 연해지방은 일찍부터 한반도와의 왕래가 긴밀하였으며, 장보고가 활약한 8∼9세기에는 더욱 밀접한 관계가 되어 신라인이 이들 여러 지역에 진출하여 거주하게 되었다. 불교에 귀의한 장보고는 적산에 법화원을 건립한 것도 이러한 배경 하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사찰은 중국에 자리해 있고, 모양새도 우리네의 그것과는 먼 생김새이지만 이 곳에서 열린 법회는 신라의 언어와 방식, 승려, 신라 거류민에 의해 진행됐다. 서주 무령군 소장이라는 위풍당당한 세(勢)를 반영하듯 법화원에서 열린 법회는 모두 재당 신라인 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 유민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붉은 산’이라는 뜻의 옛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법화원 뒷산은 푸른 수풀이 무성한데 다른 의미로도 중국 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 지역 설화에 따르면 이 곳의 적산신이 산둥반도를 오가는 배의 안전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을 가져 왔다고 한다. 때문에 입출항하는 선박과 선원들의 안녕과 해상 무역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사찰이 창건된 것은 무관치 않을 터다. 법화원과 마주보고 있는 곳에 자리잡은 장보고 해상무역 기념탑은 기실 과거의 업적을 기념하기 보다는 현재 그리고 향후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1994년 세워진 이 장보고의 해상무역 제패 기념탑은 두개로 뻗어 있는 모양인데 이는 한·중 양국간의 화합과 발전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기념탑의 뒷면에는 전직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져 있고, 이 일을 전후해 한국 유력 단체들의 기념 식수가 탑 주변을 즐비하게 에워싸는 모습은 반가움 이전에 씁쓸함이 남는다. 이 밖에도 기이한 모양을 한 수석을 전시해 놓은 기석관도 주변 볼거리로 등재해볼만하다. 산둥성 글·사진=임송희 기자 saesongi@traveltimes.co.kr 취재협조=대룡해운 02-511-9061 칭다오 대표적 관광지 잔교 -해변가 서양식 건축물…‘동방의 스위스’ 칭다오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잔교는 휴일이면 지역 주민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온 것처럼 북적거린다. 청조(淸朝) 말 해군의 부두로 처음 건설된 잔교는 바다로 향한 목교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총 길이 약 500 미터 정도로 10여분이면 팔각정인 회란각에 도착한다. 잔교 아래로 펼쳐진 해변에서 낚시 삼매경에 빠진 이들을 쉽게 볼 수 있고, 목 좋은 곳에 자리잡고 호객하는 사진사들의 모습에서 우리네 유원지와 별반 틀리지 않는 비슷한 정서를 목격할 수 있다. 잔교 주변에는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축물이 눈길을 끈다. 바다를 뒤로 하고 있는 건물들과의 조화, 시 전체가 첩첩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모습은 ‘동방의 스위스’라는 별칭을 얻게 했다. 가장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영빈관도 자리하고 있다. 독일 조차 지 시절의 독일총독부로 쓰이는 이 곳은 영빈관으로 다시 탈바꿈했다. 작은 어촌이었던 칭다오의 성장 배경에는 역설적이게도 외침의 역사가 있었다. 서양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던 19세기 말, 독일이 칭다오에 조차지를 설치하면서 칭다오는 중국의 주요무역항으로 부상하였다. 이후 세계1차대전 시는 일본군의 침입을 받은 후 1922년 이후에야 중국에 반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술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한두번 쯤 들어봄직한 칭다오 맥주는 이 지역 특산품이다. 10억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이 맥주는 독일 조차지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독일식 맥주의 명성을 잇고 있는 칭다오 맥주 공장은 여전히 이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매년 칭다오 맥주 축제를 여는 등 애주가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중국 해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해군박물관도 필수 볼거리로 등재해볼만하다. 군복 선물 전시장, 무기 장비 전시장, 해상 함대 전시장 등 3개 전시장 가운데 소청도 제방의 해안 내에 설치된 해상 함대 전시장에는 잠수함과 미사일 적재 구축함이 있다. 이 밖에도 ‘신선의 집’으로 불리는 노산과 용담폭포, 중국의 8대 요새로 꼽히는 팔대관, 청도 해안에 위치한 소청도는 칭다오의 관광거리를 풍부하게 한다. |
중국 산동성 下- 곡부, 지성선사 공자의 고향 ‘곡부’ | |||
![]() 철인은 시들어 버리려는 구나” 기원전 479년 봄, 공자는 병석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마치고 공자는 의식을 잃었고 일주일 후 조용히 운명했다. 4월11일, 그의 나이 73세였다. 공자의 유해는 노나라 수도 곡부의 북쪽에 모셔졌고 주위에는 송백을 심었으니 이것이 오늘의 공림이다. 산동성 중남부에 위치한 곡부는 중국고대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공자의 고향이다. 공자에게 삶의 보람은 도에서 비롯되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논어편의 말을 통해 그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최고의 경지를 추구했다. 공자의 가정환경은 유복하지 못했다. 공자가 세살 때 부친이 타계했고 가난한 가정환경 탓에 공자는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다. 모친과 모친 부의 가르침이 공자가 어린 시절 가진 배움의 전부였다. 그러나 공자는 끊임없는 정진 끝에 결국 나이 7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 대 인격을 이룰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공자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옛 도시인 곡부의 삼공(공묘, 공부, 공림)은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곡부시도 중국 정부에서 최초로 명명한 24개의 역사문화 도시 중의 하나이다. ● 중국의 3대 고대 건축물 공묘 북경의 자금성, 태안의 대묘와 함께 중국의 3대 고대 건축물로 꼽히고 있는 공묘는 공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측백나무에 둘러싸인 공묘의 묘는 무덤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큰 건물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공자의 묘는 공묘에 서 1.5km정도 떨어진 공림에 있다. 공자가 타계한 1년 후 노나라의 애공이 최초로 사당을 만들었고 이후 역대 황제들이 지속적으로 사당을 추가 건립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공묘의 중로를 따라 가면 조그만 정자가 있고 행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행단은 일종의 학당이라 할 수 있는데 주변에 살구나무가 많아 행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공자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2500년 전 공자의 가르침이 현재까지 명목을 이어 올 수 있는 것도 공자가 설법할 당시 이곳에 모여 들었던 3천여 명의 제자들 때문이다. 행단 북쪽에 있는 웅장한 건물이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이다. 대성전의 높이는 24.8m로 북경 태화전에 이은 제2의 대건축이다. 대성전 정면에 있는 10개의 석주에는 구슬로 휘감은 용이 부조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 용은 하늘과 황제를 상징했다. 대성전에 황색기와 용의 부조를 사용한 것은 학문의 황제로서 공자가 얼마나 숭상 받았는가를 보여준다. 심지어 제사를 위해 공묘에 들린 황제의 자존심을 위해 용이 부조되어 있는 석주를 붉은 색 천으로 감싸 감추어 놓았다는 이야기는 공자에 대한 후대의 경외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또 공묘 안에는 13채의 비정, 즉 비석을 눈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정자가 있고 전국시대부터 역대황제들이 세운 53개의 거대한 비석을 비롯해 800여개의 비석이 있다. 역대황제가 내린 장서를 보관하고 있다는 3층 목조건물의 규문각은 단 하나의 쇠못도 사용하지 않고 건축되었다. 대문 장식품인 원형의 민딩 수를 세어 보아도 황제의 것과 같은 9개임을 찾아 볼 수 있다. ● 문화혁명, 파헤쳐진 공자의 묘 그러나 공자에게도 몇 차례의 수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진시황과의 불화로 분서갱유를 겪었으며 문화혁명의 흔적은 파손된 공묘의 비석들에 아직까지도 진하게 남아 있다. 심지어 공림의 공자묘는 파헤쳐지는 참혹함을 겪기도 했다. 공자의 후손들이 살았던 저택이자 관청이었던 공부는 전체면적 3만평, 463개의 홀과 방, 건물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봉건시대 관청의 전형적인 건축물이자 역사상 가장 큰 장원을 가진 천하제일의 가옥으로 불리었다. 성인지문이라 쓰여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서로에는 객실, 동로에는 공씨 가문의 묘지가 있고 중로는 전반부의 관청과 후반부의 주택으로 구분되어 있다. 공부 안에 정원만 7개가 있다 하니 당시 공자 후손들의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황제를 위해 만들었다는 남문 부근에 있는 의례문은 1949년 해방 후 강택민 주석과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을 위해 단 두 차례만 열렸다고 하는데 강택민 주석은 자신이 황제가 아니라며 그 문을 통과하기를 사양했다고 한다. 공림은 지성림이라고도 불리며 면적은 10만여평, 성벽의 길이만 7km에 이른다. 공림 안에는 공자의 묘뿐만 아니라 공자의 아들 손자 등 10만 여개의 자손들 무덤이 있다. 공자의 묘 앞에는 금색의 전서로 대성지성문선왕묘라는 글귀가 씌어져 있다. 이 비석은 송나라의 진종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곡부에서는 9월26일 공자 탄생일을 즈음해서 ‘공자문화절’이라는 대규모 행사가 열린다. ♣ 평택-일조 간 정기 여객·화물선A ‘황해 훼리’ (주)황해훼리는 평택항과 중국 산동성 최남단에 위치한 일조항 사이를 작년 6월부터 취항하고 있다. 항조거리는 312마일(약 5,000km)로 18시간이 소요된다. 선박명은 ‘모닝 글로리’로 최대탑승인원은 600명/승무원 39명, 최고속도는 27놋트(시속 50km), 운항속도는 23놋트(시속 43km)이다. 매주 일요일 오후 7시, 수요일 오후 4시, 금요일 오후 6시 평택항에서 출항한다. 장시간 선박여행이 주는 첫 번째 걱정거리는 단연 배 멀미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모닝글로리는 전장 165.58m, 전폭 21.50m, 총톤수 1만6,340톤의 대형 여객, 화물선으로 선내에 미세한 진동은 있지만 배 흔들림으로 인해 승객이 느끼는 롤링 정도는 낮다. 또한 선내시설로 레스토랑, 면세점, 노래방, 게임룸, 사우나, 카페 등 다양한 위락 시설을 가지고 있어 장시간 여행이 지루하지 않다. 사우나는 출항 후 24시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모닝 글로리는 4가지 룸 타입을 가지고 있다. 로얄 스위트는 35만원으로 침대, TV, 냉장고, 회의실, 테이블을 갖추고 있으며 로얄룸은 16만원, 퍼스트 클라스는 13만원, 세컨드 클라스는 11만원이다. 위의 요금은 모두 편도 요금. |
중국-산둥성Ⅰ 롱청 하이뤼다오·성산두 |
![]() 오랜기간 바닷물의 침식을 받아 이뤄졌을 이 돌섬에는 군데군데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갈매기떼가 눈에 띈다. 고기잡이배에 어장을 알려주는 고마운 놈들인 탓에 어구를 다듬는 어부에게는 갈매기떼를 귀찮아하는 표정은 없다. 사실 무인도인 이 곳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과, 지금도 이 섬을 온전히 자기 섬으로 하는 것은 이들 갈매기떼일테니 사람들이 되려 손님 같다. ■하이뤼다오(海陸島) 사람들은 갑판에 나와 있다. 신경질적인 배 엔진 소리에 익숙해진 다음엔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휘발유 냄새가 바닷바람에 실려 코끝을 자극할 법도 한데, 새침한 아가씨들조차 섬 여행의 들뜬 기분 탓인지 아랑곳하지 않는다. 롱청에서 출발, 20여분 정도면 하이뤼다오에 도착한다. 물빛은 한려수도의 짙푸른 색감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 곳의 기암괴석을 옮겨놓은 듯 친숙하다. 하이뤼다오 전체 면적은 0.07㎢로 작은 편이어서 가뿐하게 돌아보기 좋다. 섬 정상에는 8채의 방갈로가 있는데 밤낚시꾼을 위한 쉼터로써도 깨끗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편. 이 곳에서 머리 뒤를 시원하게 하는 바람을 맞으며 섬 전체를 조망하면, 바다를 마주한 하늘이 여느 때보다 가까워보인다. 일행들은 본격적인 낚시할 채비에 나섰다. 하이뤼다오는 놀래기, 광어, 우럭, 바다장어, 황어, 석반어 등의 어종이 풍부하다. 한 선원이 출발하기 전에 냉동 새우로 가득 찬 박스를 던져준다. 잡다한 낚시도구를 챙기지 않아도 미끼와 릴낚싯대를 현장에서 대여할 수 있다. 하루 10위엔 내외로 저렴하다. 일찌감치 낚시대를 거머쥔 한 일행은 마뜩찮은 표정으로 “우럭 낚싯밥엔 살오른 미꾸라지가 제격인데…”며 말끝을 흐린다. 이분의 아쉬움을 제대로 들었는지 다른 일행들은 얼른 낚시 포인트 찾기에 나섰다. 정신일도하는 조인(釣人)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왁자지껄한 ‘입질’이 벌어진다. 낚싯대의 담금질이 얼마나 지났을까. 임시로 마련한 물통이 우럭과 광어 등으로 채워진다. 아마추어 낚시꾼에 걸려드는 눈먼 고기는 없지만 조황은 썩 괜찮은 편. 어린아이 팔뚝만한 대어가 출몰하는 포인트는 아니어도 감질난 입질 끝의 성과는 생각보다 꽤나 풍성했다. 일전에 낚은 물고기를 들고, 찍는 사진을 두고 진정한 조인이 아니라는 요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수긍이 간다. 하지만 조금 우아하지 않은들 어떠랴? 20cm 채 못 미칠 것 같은 우럭, 광어를 들고 포즈를 취하는 소박한 잔재미에 더욱 끌리는 것을. 세월을 낚는 강태공의 엄숙함은 없지만 입질만 하고 무심히 사라져버린 고기를 함께 꾸밈 없이 아쉬워하고, 재잘대기를 그치지 않는 모습은 그들만의 낚시에 대한 본령이 아니었을까. 중국 산둥성 글·사진=임송희 기자 saesongi@traveltimes.co.kr 취재협조=대룡훼리 02-511-9061 가장 먼저 태양이 뜨는 신성의 땅 ■성산두여유풍경구 성산두는 예로부터 중국인의 신성(神性)이 부여된 곳이라고 전해진다. 중국 바다의 가장 동쪽에 맞닿은 이 곳은 가장 먼저 해상 일출을 볼 수 있어 ‘태양이 떠오른 곳’이라고 불리웠다고. 이러한 성산두의 다른 이름은 ‘하늘이 끝나는 곳’ ‘육지의 끝’이라는 뜻을 가진 ‘천진두(天津頭)’로, 시황제는 이 곳을 2번이나 방문해 태양신에게 제를 지냈는가하면, 불멸의 선약을 구하기 위해 수천명의 동자, 동녀를 이 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진시황과 그의 애첩, 그리고 애첩을 사랑하는 호위병의 엇갈린 사랑을 큰 줄거리로 깔고 있는 영화 ‘진용’이 떠오른다. 동자·녀들의 신비로운 행렬에 얼른 생각이 미치지만 빈약한 지식과 상상력은 고작 여기에 그친다. 시황제뿐만 아니라 중국 역대 황제들도 하늘 아래 유일한 존재인 천자와 태양을 동일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이 곳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등 남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산두는 군사요충지로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중국의 가장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우리네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13만 대군이 출발한 항구가 이 곳이라고 한다. ■ 진시황 사당 성산두여유풍경구 안에는 진시황제의 사당이 자리해 눈길을 끈다. 시황제의 궁궐터로 이 곳 사람들은 진시황제의 사당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시안의 진시황릉에서 느껴지는 그의 쩌렁쩌렁한 위용을 느낄 수는 없다. 내세에서까지 진시황을 호위하고 있는 병마용이 사당 앞을 가로막을 뿐 더 이상 닮은꼴을 찾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진시황 사당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성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며, 중국 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의 사당이라고 한다. 한갓진 사당 내에는 청조 시대에 혁혁한 전과를 올린 덩샤오창 장군의 사당도 잇으니 빼놓지 않고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