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6년 전, 우리나라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던 1948년...
또는 1960년대나 1970년대, 또는 1980년대의 한국의 경제력 수준을 기억하시는지요?
2013년 말 현재 24,000 달러 정도 되니...아마도???
아니면 우리 부모님 세대의 소싯적 우리나라 경제력 수준은 세계에서 몇 위쯤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4~50대 분들이라면 검정고무신과 나일론 바지 입었던 기억은 나겠지만 수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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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하신 분들은 한 가지 기억하는 수치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모든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외우라고 강요하던 수치가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 국가경제 목표 중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 수출 100억불 달성"이 국가적인 어젠다였기 때문이다.
실재로 우리나라는 1977년에 국민소득 1,034달러를 달성하였고 수출도 1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 문제는 학교 시험이었는지 예비고사인지 하여튼 당시에 시험문제로 출제되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우리나라의 왠만한 중견기업 1개회사의 1년 수출고는 대다수 100억달러 정도는 가볍게 넘는다. ㅎ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948년경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 수준(120위 권, 당시 독립국가 수와 비슷)이었고
그나마 북한의 GDP는 우리보다 3배쯤 더 높은 세계 중간 순위(50위 권)였다.
물론 필리핀이나 태국 같은 대다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우리보다 한참 높았다.
1960년대 이후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 특히 필리핀같은 나라는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한국에선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를 통해 군인(박정희)이 권력을 장악한 뒤 18년간 정권을 유지했고,
필리핀 역시 마르코스 대통령이 1965년부터 21년 동안 집권했다. 비상계엄 조치도 닮았다.
하지만 두 나라의 운명은 극적으로 엇갈렸다.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의 성공으로 아시아 최빈국의 굴레를 벗어났고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77년 1,000달러, 1989년 5,000달러를 넘어 1995년 1만 달러 달성 이후,
외환위기를 겪은 1998년 7,355달러까지 떨어졌지만 이후 2007년에는 2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에 반해 필리핀은 여전히 저개발 국가의 낙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소수의 명문가문이 독점하는 토지경제 기반위에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1970년 1인당 국민소득은 그 이전 10년 전보다 후퇴한 192달러였고
1995년에 1,000달러, 2006년에 1,484달러를 기록하였다.
2~30년 전 한국의 세 배였던 국민소득이 지금은 한국의 13~4분의 1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과 필리핀의 발전 속도를 비교하면 한국은 필리핀에 비해 40배 정도 빠른 속도이다.
물론 한국의 GDP 수준도 부침을 겪었다.
2004년에 세계 11위였다가 2005년에 브라질, 2006년엔 러시아에 밀렸고, 이어 2008년에는 멕시코, 2009년에는 호주에 뒤쳐져 지금은 통계가 잡히는 세계 200여 개 국가 중에서 15위(*최근 잠정 집계에 따르면 14위를 회복했다는 소식도 있다)로 밀렸다.
오늘은 ODA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ODA(Offical Development Assistance)는 '공적개발원조'를 일컽는 말인데, DAC가 정한 수원국 리스트에 있는 국가 및 지역, 또는 다자간 개발협력기구에 제공되는 자금 또는 기술협력을 말한다.
OECD/DAC 기준에 의하면, 중앙 및 지방정부, 그 집행기관 등 공적기관이 제공하며
발전도상국의 경제발전과 복지향상에 기여함을 주된 목적으로 해야하고
공여조건이 완화된 원조, 즉 Grant Element가 25% 이상인 양허성 조건의 자금이어야 한다.
이러한 공적개발원조(ODA)의 주된 목적은 수원국의 경제사회발전과 복지증진에 있지만
개발원조를 지원하는 동기는 공여국의 국가목표와 국익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즉, 공적개발원조(ODA)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정치, 외교적인 관점, 경제적 관점, 사회 문화적인 관점 등 다양한 목적과 차원에서 시행되는 국제 협력 프로그램이다.
공적개발원조(ODA)는 두가지로 나눠서 볼 수 있는데,
첫번째는 개도국에 직접적인 지원하는 '양자간 원조'와 간접지원인 '다자간 원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양자간 원조'는 World Bank, UNDP 등이 대표적이다.
세부적으로 '양자간 원조'는 유 무상 지원으로 나눠지는데 무상지원에는 기술협력, 프로젝트 원조, 식량원조, 긴급재난구호, 그리고 NGO에 대한 지원 등이 있고, '양자간 원조'의 유상지원에는 양허성 공공차관이 있다. '다자간 원조'는 국제기구 분담금 및 출자금이 대표적인 형태이다.
한국의 한국의 ODA 담당 기관은 총괄 및 조정기구, 주관기관, 시행기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국제개발협력위원회는 총괄 및 조정기구로서, ODA에 관한 정책들이 종합적·체계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주요 사항을 심의·조정한다. 국무조정실에 개발협력정책관실을 신설(2010년 1월)하여, 국제개발협력위원회의 사무국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고 있다.
한편, 기획재정부와 외교부는 각각 유상원조와 무상원조의 주관기관으로, 이들은 각 분야별 5개년 기본계획과 연간 시행계획안을 작성하고 이행을 점검한다.
KOICA와 한국수출입은행은 각각 무상원조와 유상원조를 집행하는 시행기관의 역할을 하며, KOICA 이외의 30여개 정부부처 및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무상원조를 수행하고 있다.
무상원조는 개도국 빈곤퇴치에 필요한 다양한 형태의 무상지원으로 법적 채무를 동반하지 않는 현금 또는 현물이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도국은 무상원조로 공여된 자금에 대해서는 상환의무를 지지 않는다. 무상원조의 사례는 기술협력, 식량원조, 재난구호 등이 있다. 이번에 태풍 볼라벤(하이옌)으로 큰 재단을 당한 필리핀에 한국군과 민간 구호대가 지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무상원조 프로그램이다.
유상원조는 민간자금에 비해 유리한 조건으로 공여되는 양허적 성격의 공공차관으로 법적 채무를 동반하는 현금 또는 현물이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도 한 때 세계 각국으로부터 이러한 유상원조를 얻어서 국가 개발에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 반대이지만...
이러한 ODA 사업 중 문화부문에서 시행하는 원조 프로그램을 문화 ODA 사업이라고 하는데,
문화재청의 문화유산분야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은 2007년부터 시작되었고, 그 동안 세계유산 디지털 복원, 문화재 보존처리 장비 지원, 무형유산 보호제도 구축 지원 등의 사업을 베트남, 스리랑카, 캄보디아, 몽골 등을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2011년부터는 문화유산 보존복원 사업에 대한 지원도 시작하였다.
문화유산 보존복원 지원은 다른 국가의 문화유산의 보존 및 복원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사업으로
장기적인 계획과 보존복원 역량이 필요한 사업이므로
우리나라의 문화재 보존, 복원 기술력과 자금 지원력을 바탕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다.
한편 이와같은 특정 국가 단위의 문화재를 대상으로 복원, 보수, 기록을 지원하는 사업이 아니라
문화행정 전반, 즉, 문화예술, 관광, 체육 분야에 폭넓게 시행되는 사업이 바로 문화동반자 사업이다.
문화동반자사업은 아시아와 동유럽·아프리카·남미 각국의 문화분야에 종사하는 젊고 유망한 전문가를 초청하여 공동창작과 연수 및 교류를 실시하는 문화연수사업으로 문화체육관광부가 주도하는 사업이다.
2005년부터 매년 진행하고 있는 문화동반자사업은 문화관광예술체육분야의 대표적인 지식공유프로그램으로 초청된 전문가들이 약 6개월 동안 한국에 체류하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유관단체 및 민간기관 등에서 한국어 연수를 포함한 분야별 실무 연수를 받는 장기 레지던시 사업이다.
우리나라는 이 사업을 통하여 상호 호혜적 협력을 통해 동반자·공존 관계를 형성하고 그 축적된 경험과 지식 및 기술을 다양한 국가의 전문가들과 공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문화동반자사업의 참가인원은 총 75개국, 704명으로, 문화동반자들은 체류 기간 동안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키고 한국과의 문화교류에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하여 자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 문화동반자 사업을 통하여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매년 세계 각국의 문화예술체육관광분야의 젊은 인재들이 문화동반자사업에 참여 하고 있으며,
사업 추진 8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그들이 자국의 문화정책 결정자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일례로, 몽골 연수자가 귀국 후 한국과 합작해 만든 TV 프로그램 '몽골보다 가까워진 한국(Mongol near to Korea)'은 몽골 국립방송 방영 후 몽골 10대 인기 프로그램으로 선정됐고,
게임산업개발원에서 연수한 말레이시아 동반자의 노력으로 쿠알라룸프르 대학에서는 게임학과가 개설되었으며, 한국어교재의 몽골현지화 작업 또한 진행 중에 있다.
멕시코ㆍ튀니지ㆍ베트남ㆍ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온 많은 연수자들도 한국영화주간 개최, 국립도서관에 한국실 개관, 한국 문학작품 번역출판 등 다양한 활동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또한, 문화동반자 사업 추진 전후의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의 문화적 활동에 대한 이미지(49.5%→90.5%), 문화협력 대상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40.0%→89.5%), 동반자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기대 88.4%→만족도 97.9%) 등이 상당히 높게 평가 되었다.
이러한 사업은 문화교류의 일반적 원칙에 입각하여 호혜의 원칙을 바탕으로 상호 교류가 전제되어야 한다.
문화동반자 프로그램은 우리로 하여금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매개자 역할을 함으로써 국제화 시대에 우리 문화의 포용력을 한층 증대시키고 있다.
2008년부터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동반자들이 문화교류 행사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동반자들과 한국인에게 소개하는 기회도 마련하여 쌍방향 문화교류 증진을 꾀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직접적으로는 우리 문화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넓게는 글로벌 시대에 한국에서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는 장을 제공함으로써 국제 문화교류 증진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 때 우리도 세계 각국의 원조에 힘입어 오늘날 세계의 선진 시민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만큼
이러한 사업을 확대하는 일은 우리 대한민국의 책무이다.
그래서 이번에 필리핀에 다녀왔다.
오늘은 한국의 대 필리핀 문화 ODA 관련 사진 몇 장 구경시켜 드린다.
필리핀 문화 기관의 책임자들을 초치해서 한국의 문화 ODA 설명회를 개최하고...
국영 텔레비전의 인터뷰에도 응했다.
이미 지난 8년간 시행된 문화동반자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 수혜자들의 모임에도 참여하고...
축하연설도 했다.
행사 시작전...
이들은 한국에 최소 6개월에서 1년간 체류한 적이 있어 한국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참석자들과 기념촬영도 하고...
각 기수별(참가년도별) 대표자도 선출하였다.
힘차게 구호도 외치고...
밤에 있었던 일은 다 밝힐 수 없다.
속옷 잘 벗어던지는 어떤 대변인 같은 못난 짓을 한 적은 없지만...
이 사람은 필리핀의 법조인(변호사)이고... 그렇다고 법률가가 무서웠던건 아니고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이다. ㅎㅎ
첫댓글 19960년 국제미작연구소·미국 록펠러포드재단이 1960년 필리핀에 설립)의 667번째 교배종,
바로 ‘통일벼’다. 박정희 대통령이 보릿고개를 없애기 위해 개발한, 수확량이 많은 쌀품종으로
실제 보릿고개를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0~70년대 박 전 대통령에 의해 공업입국(工業立國), 교육입국(敎育立國)이 강력하게 추진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공업입국으로 한국은 선진 산업국가가 되었고, 교육입국으로 국민의 의식수준이
올라가지 않았을가?. 이 덕분에 우리 국민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난 지금도 고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
오늘은 한국의 대 필리핀 문화 ODA 관련 사진 잘 보았네요~~
금호님의 넥타이 문양이 인상적입니다.
나도 하나 구해줘이잉~~~~~~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