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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제자와 애제자: 대중적 교회와 영성적 교회”
본문: 요13:21- 28; 18:1-11; 20:1-9
설교일: 2024. 4. 28.
장소: 행이사이교회 주일예배
설교: 주의검을보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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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네 권의 복음서가 초대교회에 존재하던 네 개의 공동체를 드러낸다는 학설 말입니다. 이를테면 마태 공동체, 마가 공동체, 누가 공동체, 요한 공동체가 있다는 얘기죠. 각 공동체가 예수 신앙을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서 경험하고 이해한 대로 고유한 복음서를 기술했다는 이 학설은 현재 학계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복음서마다 기록연대가 다르고 공통된 자료를 사용하면서도 강조하는 초점에 맞춰 자유롭게 첨삭한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복음서들의 기록이 상호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실은 초대 공동체들이 어떤 중앙집권식 상위기구의 통제 아래 기록물을 만든 게 아니라는 유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문들을 살펴볼 텐데요, 오늘 살펴보실 요한복음 본문들은 공관복음에 없는 요한복음만의 특수자료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익명 뒤에 감춰두고, 자타공인 수제자 베드로와 자신을 여러 중요한 사건마다 함께 등장시킬 뿐 아니라, 두 유형의 제자 모델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의 차이와 비교를 통해 요한공동체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어요. 이제부터 저의 이러한 주장과 해석이 타당한지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본문 1
요한 특수자료 중 애제자와 수제자가 대조되는 첫 본문은 13장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공관복음서에도 다 언급되지만, 요한만의 특수자료가 있습니다. 21절부터 볼게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괴로워하시며 증언하여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넘겨줄 것이다.” 청천벽력같은 이 말씀에 제자들이 놀라 서로를 보며 두리번거릴 때, 요한복음의 저자가 23절에 나타납니다.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애제자가 지금 자기의 위치를 어디에 두고 있나요? 예수님의 품입니다. 이어 24절, 수제자 베드로가 애제자에게 고갯짓으로 배신자가 누구인지 캐내라고 촉구합니다. 애제자는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기댄 채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빵 조각을 적셔 건네주는 자가 그 자다 라고 하시고, 빵 조각을 적셔 가롯 유다에게 건네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러분,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셨습니까? 요한복음의 저자인 애제자는 지금 자기를 다른 제자들과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없는 이 요한복음 특수자료에서 애제자는 자신을 수제자인 베드로와 주님의 사이, 즉 이 두 사람을 중개하는 중앙에 위치시켜놓고 베드로의 질문을 받아다가 주님께 대신 묻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애제자가 자기는 주님의 품에 누워서 수제자와 다른 제자들이 듣지 못한 말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입니다. 내가 빵 조각을 적셔서 건네주는 자가 나를 팔 것이다라는 주님의 이 속삭임은, 그분의 품에 밀착해있는 애제자에게만 알려주는 은밀한 계시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수제자가 여전히 웅성거리는 와중에, 애제자의 눈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빵 조각이 누구에게로 옮겨지는지 클로즈업했고, 그 조각이 가롯 유다에게 넘어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는 겁니다. 다른 제자들도 유다가 빵 조각을 받은 것과, 예수께서 유다에게 네 할 일을 속히 하라 하신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 모든 은밀한 신호와 의미의 맥락를 아는 사람은 애제자뿐입니다. 따라서 28절은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표면상 빵조각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기는 보았으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제자들과 달리, 품속에서 혼자 은밀한 말씀을 듣고 주님과 유다의 날카로운 신경전을 낱낱이 주목한 목격자. 놀랍게도 애제자는 오직 그 자신만이, 오직 애제자만이 그 일들의 숨은 뜻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또 애제자는 여러 제자 중 자신만 ‘예수님의 품‘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예수가 누구십니까?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애제자는 예수님을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애제자는 지금 예수께서 아버지의 품에 있듯, 자신 역시 예수님의 품에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품이란 아주 친근한 관계가 아니면 허용될 수 없는 개인적이고 은밀한 공간이죠. 따라서 애제자는 저 유명한 수제자 베드로보다 자신이 더 주님의 품과 계시에 밀착해있다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외형적으로 두드러지는 수제자와는 다른 유형의 제자로서, 보다 내향적이고 은밀한 것들을 통찰하는 계시의 담지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요한공동체의 자의식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를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본문 2
수제자와 애제자가 다시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요한복음 18장입니다. 가룟유다가 대제사장의 부하들을 몰고 와서 배반의 입맞춤을 한 바로 그 장면입니다. 4절과 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나사렛 사람 예수라하자, 예수께서 ’내가 곧 그다‘ 라고 자신을 시인합니다. 그런데 6절, 예수께서 내가 그다라고 하신 순간, 그들이 뒤로 물러나 땅에 엎드러졌다는 이상한 기록이 나와요. 이곳도 역시 요한 특수자료입니다. NIV 성경을 보면, they drew back and fell to the ground라고 돼 있습니다. 드루백을 단순히 뒤로 물러나다라고 번역하면 이 장면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드러우는 당기다, 잡아끌다, 잡아채다와 같은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아이엠히, 내가 그다라고 시인한 순간, 체포하려던 남자들이 원인 모를 강력한 힘에 잡아채어 뒷걸음치다가 땅에 나뒹굴었다고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장면을 누가 목격하고 있는 거죠? 애제자입니다.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이 놀라운 광경을 애제자가 자신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수제자인 베드로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실까요? 10절, ’시몬 베드로가 지니고 있던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베어 버렸는데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여러분, 주님의 수난을 대하는 두 제자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애제자는 베드로처럼 상황을 따라 즉흥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요한복음 특수자료인 18장 6절의 목격자로서 그리스도가 체포되시던 그 비극의 밤에 한줄기 영적 빛을 비춥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향해 가시는 과정을 말리거나 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애제자는 숨죽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을 밀착하여 주목합니다. 애제자의 눈에 주님은 지금 자신이 완수해야 할 과업의 정점을 향해 거침없이 가시는 중이거든요. “내가 곧 그다”라는 말씀이야말로 모세 앞에 불꽃으로 나타난 야웨 하나님의 자기 선언, “I am Who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나. 바로 그 선언입니다. 그 한마디에 대적자들이 나뒹구는 광경을 통해 애제자는 극도의 공포와 슬픔 속에서도 위대한 계시를 드러냅니다. 어떤 계시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체포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분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흑암의 세력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는 근거를 밝혀놓습니다.
반면, 이런 애제자와 대조되는 베드로는 권력의 심장도 아닌, 일개 졸병의 귀를 찌르면서 주님을 구해내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베드로가 상징하는 유형은 어떤 제자일까요. 감각적이고 행동지향적인 이들은 상당히 피상적이고 감상적입니다. 십자가를 순교와 선교 중심으로만 이해합니다. 내면의 힘보다 표면적 힘에 쉽게 사로잡힙니다. 개인의 내밀한 골방에서 깊어지는 영적 통찰력보다 광장의 흥분과 대중적 열광에서 기독교 신앙의 위력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종종 진지한 헌신을 보이기도 하지만 익명의 애제자가 되기보다 유명한 수제자로서 성공 간증의 날을 꿈꾸는 오늘날의 대중적 교회, 그 세속적 감성을 보여줍니다.
본문 3
이제, 마지막으로 부활 장면에서 드러나는 두 제자의 차이를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제자가 도망쳤지만, 애제자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유언대로 어머니 마리아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적막에 잠겨 있던 안식 후 첫날 아침, 요한복음 20장 1,2 절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애제자에게 뛰어 들어와, 주의 무덤이 열려있고, 주님의 몸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두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애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애제자가 특이한 반응을 보입니다. 무덤에 이르자, 몸을 구부려 무덤 안쪽을 살폈고, 세마포가 놓인 것을 봤어요. 하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애제자가 이러고 있는 사이, 숨이 턱에 찬 베드로가 애제자를 지나쳐 곧장 무덤으로 뛰어듭니다. 베드로는 세마포와 머리 싼 수건이 각각 다른 위치에 놓여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애제자도 무덤 안으로 들어갔고 8절, “보고 믿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을 대하는 두 제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빈 무덤과 부활의 기록 중 4복음서 통틀어 ’믿었다‘라는 표현이 여기 요한복음 20장 8절에만 있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나누어드린 인쇄물에 제가 관주를 준비해놨으니 읽어보시고 성경을 펴서 직접 확인해보시면 됩니다만 분명한 점은 요한복음만 유일하게 빈 무덤을 목격한 애제자를 향해서 ‘믿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부활과 관련해서 믿었다는 표현이 오직 요한복음의 이곳에만 있다는 말입니다.
20장 9절에 뭐라고 돼 있나요. 그들이 아직 성경에서 부활을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앞 절에서는 애제자가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인즉, 아직 구약성경을 통해 부활을 깨닫지 못했더라도 신약시대가 열리는 빈 무덤의 현장에서 애제자의 영혼에 섬광처럼 지나가는 영적 직관, 또는 예언적 믿음이 주님의 부활을 직감하는 믿음을 주었다는 말 아닐까요?
만약 요한복음만 유일하게 애제자가 ‘믿었다’라고 쓴 의도를 놓치면, 성경에 부활이 예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에라도 얼마든지 번뜩이는 영적 직관 혹은 예언적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요한복음의 독특한 메시지를 소멸하게 되고 맙니다. 이 가정이 중요한 이유는, 성령이 주시는 번뜩이는 어떤 직관이 문자적 성경을 앞설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입니다. 그 직관, 그 계시가 있어야 그때까지 읽고 듣고 했어도 꽉 막혀있던 성경이 활짝 열리면서, 표면적 그리스도인을 이면적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제자가 참 제자요, 참 공동체라고 강조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이 매우 직관적 영성이 탁월한 애제자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수제자와 애제자, 두 사람이 마리아의 보고를 듣고 무덤까지 달렸습니다. 애제자는 베드로보다 앞서 달렸죠. 드디어 저만큼 앞에 돌이 치워져 휑하게 열린 무덤이 애제자의 시야에 들어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기분이실까요? 예민한 영성을 가진 애제자는 무언가를 직감한 듯 긴장한 모습으로 뜀박질을 멈추고 걸어서 무덤 입구로 다가섰을 겁니다. 불쑥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세마포가 놓인 안쪽을 밖에서 살핍니다. 애제자는 육신의 눈이 보는 그 이상을 느끼면서, 돌이 치워진 무덤 입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애제자를 지나쳐 무덤 안으로 뛰어들었고, 세마포와는 다른 위치에 머리를 쌌던 수건이 단정히 접혀 있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가 이 놀라운 광경을 해석하지 못하고 멍하니 섰을 때 무덤 안으로 애제자가 들어섭니다. 그리고 애제자는 자신이 무덤 입구에서 느낀 섬광처럼 번뜩인 “부활의 인상”(The impression of resurrection)이 무덤 안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고, “보고 믿었습니다”(and He saw and believed). 저의 이 플롯을 따라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애제자가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밖에서 주춤대는 모습은 이런 해설이 아니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명한 성서신학자 브루스 교수는 이 대목의 주석을 이렇게 썼습니다. “애제자는 믿음의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보았다. 섬광같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마음에 떠오르게 되었다.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어 무덤을 떠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본 것으로 그저 어안이 벙벙해 있기만 하였고, 그 일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도 부르스 교수와 같은 생각입니다. 애제자는 열린 무덤 앞에서 숨을 죽이고 이 놀라운 광경에 대한 영의 직관을 따르고자 하나, 베드로는 무덤이 열려있기에 뛰어들어 육체의 감각으로 경험하고자 합니다. 빈 무덤을 본 베드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지만, 애제자는 주의 부활을 직감하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부활과 관련해서 4복음서를 통틀어 ‘보고 믿었다’는 유일한 표현이 있는 애제자의 영성, 요한공동체의 영성입니다.
나가기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 흔히 나오는 열두 사도의 명단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배경 때문일까요? 요한복음이 기록된 주후 100년경쯤 되면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등 유명 사도를 자기가 승계했다고 주장하는 권위적 인물들이 많아집니다. 또 교회가 점점 제도화되고 조직화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낳은 요한공동체가 그런 분위기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케제만 교수는 “요한이 이처럼 사도의 전통이나 교회의 직제 및 조직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는 이유는 요한복음이 그 당시에 나타나고 있던 고도로 조직화 된 교회의 제도주의 운동에 대해 괄목할만한 반발 운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카톨릭교회가 수제자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내세운 근거가 마태복음 16:18-19 때문인데요, 베드로에게 주어진 땅에서 매고 푸는 천국열쇠가 요한복음 20:23에서는 모든 익명의 제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요한공동체는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20:22)고 하시는 예수님과 인격적이고 내면적으로 연합한 모든 제자에게 성령의 권세가 주어졌다고 선언하고, 그 안에서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교회가 참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행이사이교회도 요한공동체와 유사한 정신을 가진 교회입니다. 성령은 특정 인물군 중심의 제도화된 교회 조직으로는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경직되고 권위적인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제자의 모델은 수제자보다는 애제자가 아닐까요?
애제자와 같은 영성공동체는 첫째, 주님의 품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은밀한 계시를 깨닫습니다. 교회의 멤버쉽만으로는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깊은 지혜와 섭리를 알아채며, 주님의 심령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둘째, 배반과 폭력이 날뛰는 순간에도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의 권능을 주목하며 잠시 악을 허락하시는 섭리를 말없이 따릅니다. 셋째, 어떤 믿기 힘든 상황에서도 성령의 내적 직관이 던지는 빛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영으로 본 것을 믿고 따릅니다. 그 경험과 지식은 마침내 성경에서 옳다고 확인됩니다.
이러한 제자 공동체는 특정 인물과 계급, 특정 이념의 신학과 전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수제자와 같이 민첩하게 행동하시되 애제자와 같이 영의 말씀에 민감한 행이사이교회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주님. 우리가 세상을 흥분시키는 것들로 주님과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놓아버리게 도와주옵소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의 능력에 거하게 하시고, 애쓰고 힘써야만 사랑받는 제자가 될 줄 아는 두려움과 착각에서 자유롭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