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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억과 새로운 존재
출애굽기 12장 1-14절
2017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8년 송구영신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는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시점에 서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이 시간에 2018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먼저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면서 송년회를 망년회(忘年會)라고 하면서 가집니다. 망년회는 말 그대로 지난 한 해를 잊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한 해를 다 잊는다는 명목으로 마시고 즐깁니다. 한 해를 정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한 해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서로 “잊어버립시다, 없었던 일로 해 둡시다.”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합니다. 마치 그러한 일이 실제로 없었던 것처럼 꾸미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난날을 잊어버린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지 않고 잊어버림으로 그 기억은 마침내 우리의 내면에서 독립된 힘이 되고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리를 괴롭히고 무서운 힘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은폐함으로 우리도 모르게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과거를 잊고 사는 사람은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금년을 잘 매듭지으려고 하면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의 죄, 실패, 비참했던 삶, 병들었던 우리의 몸, 실수, 교만, 불순종의 사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들을 잊어버리면 다시 죄를 짓는 것 보다 더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잊어버린 것은 치유될 수 없고, 치유될 수 없는 것은 더 쉽게, 더 큰 악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약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말은 '기억하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특히 신명기를 보면 이 두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5절, 7장 19절, 8장 2절, 9장 6절 그리고 15장 15절에 '너는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였음을 기억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고 할 때, 그 기억은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기억입니다. 있었던 일을 있던 그대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구구단을 기억하듯이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의 내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야말로 단순한 기억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파괴적 기억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기억할수록 나를 괴롭히고 온통 과거 속에 나를 가둬놓는 그런 기억입니다. 과거의 일들이 내 안에 상처로 남아서 기억할수록 오늘의 삶을 온통 어둡게 만들고, 내일을 향해 달려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창조적 기억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기억할수록 내게 교훈을 주고 내게 용기와 격려를 줍니다. 이런 기억은 오늘의 삶을 밝게 만들고 나아가 밝은 내일을 약속해 줍니다. 또한 이런 기억은 기억할수록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기억할수록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기억할수록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2011년을 돌아보며 파괴적 기억보다는 이런 창조적 기억을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 해의 기억 속에 가슴 아픈 일이고 수치스러운 일이면 창조적 기억을 통해서 그 아픔을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일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새해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또 올 해에 있었던 일들이 자랑스러운 일이면 창조적 기억은 우리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 주고, 더욱 자랑스러운 일들을 만들어 가도록 자신감과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신자는 과거의 기억들이 창조적 기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행여나 그것이 단순한 기억으로 남아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파괴적 기억이 되어서 내게 고통만 더하고 좌절하게 만들어서는 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영화평론가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1998년에 개봉되었던 일본 영화 “원더풀 라이프”입니다. 이 영화의 상황 설정이 독특한데, 사람이 죽으면 우선 림보라는 역에 가서 한 주간을 머물게 됩니다. 이 역에 도착하면 면접관이 나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일생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 하나만을 선택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 순간을 다시 영상에 담아서 보여드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 행복한 순간의 기억을 가지고 저 영원한 세계로 떠나시게 될 것입니다. 그 행복한 순간의 기억이 나머지 어둡고 괴로웠던 기억들을 다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 속의 림보 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머물게 해 주는 역인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한 기억 속에 잠기게 해 주는 역입니다. 내세에도 행복하기 위한 재미있는 착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가장 행복한 기억은 무엇입니까? 그 기억이 오늘의 여러분을 변화시켜줄 것이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기억이 바로 창조적 기억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신자는 창조적 기억을 통해서 희망찬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아홉 가지 재앙을 내린 후 이제 마지막 재앙인 장자 죽음 재앙을 내리기 전의 상황으로 하나님은 유월절을 제정하시고 이 유월절을 대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12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하나님께서 유월절 규례를 지키라고 하신 것은 유월절 사건을 바로 창조적 기억으로 만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의 의미를 제대로 찾아서 오늘 우리 삶에 교훈이 되고 하시고, 내일의 우리 삶의 좋은 밑거름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적 기억으로서의 유월절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새해를 맞이하면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하나님은 애굽 땅에 무시무시한 아홉 가지 재앙을 내리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달을 너희에게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달력은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달력과는 다른데, 그 성서적 근거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달을 새 해의 첫 달이 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노예로 살던 치욕스러운 과거, 자신의 판단과 주권 없이 주인의 의지대로만 움직였던 시절은 이제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곧 노예 생활이 끝날 것이고 그 날로부터 역사의 시작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창조적 기억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2절 말씀은 지금까지의 삶은 끝났고,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에게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아무리 떵떵거리고 살았어도, 아무리 바닥을 헤매며 살았어도 여태까지의 삶이 앞으로의 새 시대를 간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이제 '새로운 시간,' 곧 하나님의 시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탈출해나온 그 때를 기점으로 새로운 달력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400년의 기나긴 세월을 억압과 고통과 아픔의 역사에서 해방하시던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으로 삼아 주시면서 지난날의 뼈아픈 과거를 잊지 말고 창조적으로 기억하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어떠한 자리에서 구원하셨는가를 후대가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지침서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00년 동안 온갖 억압과 고통과 서러움을 받아오던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게 되던 날 밤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 가족대로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5절에 "너희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양을 취하되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6-1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어린 양을 3일간 집에 두었다고 4일째 되는 날에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를 먹되 딱딱하고 맛이 없는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고 하십니다. 거기다가 내장까지 반드시 구워먹는데 절대로 다음날 아침까지 남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다가 먹을 때에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십니다.
뭐가 이렇게 번거롭고 복잡한 것일까요? 하나님은 점점 모를 일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라고 하신 이유가 뒤따라 나옵니다. 13절입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을 앞두고 있는데, 현관문 기둥과 인방에 바른 피가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새 달이 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그 일이 결코 하찮지 않고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세하게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홉 가지 재앙이 애굽 땅에 임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무조건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열 번째 마지막 심판을 앞두고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이냐 아니냐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 명령에 순종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라고 했을 때 그대로 그 말을 믿고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바른 사람만 죽지 않고 산 것입니다. “아니 피를 바른다고 살아? 무슨 미신 같은 짓이야?”라고 말하며 믿지 못하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구원이 이제는 신분의 문제를 떠나 믿음과 순종의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의 천사는 애굽에 내려와서 오직 문설주와 인방에 칠해진 피만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피가 칠해져 있으면, 설령 그 집에 애굽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해도 심판을 면했고, 피가 칠해져 있지 않는 집은 이스라엘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해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왜 순종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순종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430년 동안 지속되었던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번거로운 것같이 보이고 손해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살았다는 감격, 자신들이 해방되었다는 감격을 가지면 이것은 결코 번거로운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의무감에서 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감격하고 눈물 흘리고 감사하는 절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인생을 살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비록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행하는 것이 새 인생, 새 시간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계적인 시간을 크로노스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때에 의미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의 시간, 즉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유월절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시간, 곧 하나님의 시간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고 순종할 때 우리의 시간에도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그 순간부터 신자는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 되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존재입니다. 신자는 새로운 생각,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는 동물이 살아가는 모습과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생존과 실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생존이란 주어진 현실에 단순히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묻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주어진 상황에서 생명을 보존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실존이란 현실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가는 삶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를 깊이 따져 묻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살아야 할 이유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프레이리는 안타깝게도 많은 브라질의 농민들이 실존하지 못하고 생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는 데만 급급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의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노예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이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세상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깊이 되새겼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선민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은 제사장 민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의식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와 출애굽한 이후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고 난 후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왜 살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남다른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의식을 놓치고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고 떠밀려 살아가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의 신분을 깨닫고 살아야 할 이유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이것이 유월절의 의미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사건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상태가 변화되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문화가 생겼습니다. 새로운 존재들에게 새로운 시간관이 생겼습니다. 이 유월절으로 인하여 달력이 바뀐 것입니다. 출애굽하는 유월절 사건이 첫 달이 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시각 환산법을 초월하여 새로운 월력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 의미는 이제 구원받은 사람들은 바로의 통치권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합니다. 떠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의 삶은 정착의 삶이 아니라 나그네의 삶입니다. 새로운 존재들은 세상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이 목표이듯이 우리 신자의 목표 또한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 천국을 향해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신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라고 했을 때 그대로 그 말을 믿고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바른 사람만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니 피를 바른다고 살아? 무슨 미신 같은 짓이야?"라고 말하며 믿지 못하고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 보혈의 능력을 믿으면 살아납니다."라고 말하면 뭐 미신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믿지 않으면 마지막 심판이 임할 때 살 수 없고 영원한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앎이 없이 믿음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엇을 듣습니까?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듣는다고 다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정했으면 그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을 맡겨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앎과 승인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유월절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창조적 기억을 통해 오늘에 교훈을 삼으며 내일의 밑거름으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유월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새로운 존재로 감사하며,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2012년을 시작하는 여러분 모두는 창조적 기억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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