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고독의 자유인, 전주에 귀의歸依한 시인 박봉우
문신(시인, 문학평론가)
▲ 고독한 실존주의자 박봉우
박봉우는 1934년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전남 승주군 군수를 지낸 아버지 박병모와 어머니 김효정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했다.① 23살이 되던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등단한 후,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42살 되던 1975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전주에 정착, 1990년 3월 1일 57세의 나이로 별세할 때까지 전주에서 살았고, 전주시립효자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영원한 전주의 시인으로 남게 되었다.② 시집으로 ?휴전선?(1957),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1959), ?사월의 화요일?(1962), ?황지의 풀잎?(1976), ?서울 하야식?(1986), ?딸의 손을 잡고?(1987)와 시선집 ?나비와 철조망?(1991)이 있으며, 산문집 ?사랑의 시인상?(1969)을 발간했다. 전라남도 도문화상, 현대문학상, 현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러한 삶의 내력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생활은 철저히 3등분 되어 있다. 광주에서의 유소년기(1~23세), 서울에서의 청년기(23세~42세), 전주에서의 장년기(42세~57세)가 그렇다. 결과론적으로 광주에서의 삶은 생활인으로서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봉우는 광주 서석초등학교 시절 전학년에 걸쳐 급장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어린이었다. 특히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미 초등학교 재학 중에 동요가 입선되고, 중학생 시절에 <진달래> 동인을 결성해 활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학적 기반은 그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꽃을 피우게 된다. 그는 청소년 잡지인 ?학원(學園)? 단골 투고생이었다. 당시 ?학원?은 청소년들의 문예적 감수성과 문학적 역량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장이었다. 소설가 황석영도 고등학교 재학 중 「팔자령」이라는 단편소설이 당선된 적 있다.
그의 문학적 재기는 그의 나이 18살(1952년)에 시 「石像의 노래」가 ?주간 문학예술?에 당선되면서 명백해졌다.③ 고등학생 신분으로 기성시인이 된 박봉우는 윤삼하, 주명영, 강태열 등과 4인 시집 ?상록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러한 덕분으로 그는 광주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여고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져갔다. 이무렵 시인 박봉우의 행적은 광주에 국한하지 않고 서울까지 이어졌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동년배 시인 박성룡과 더불어 시인 조병화의 단골 다방이었던 명동의 문예살롱을 출입하기도 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봉우는 전남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거의 모든 과목이 D학점이거나 F학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2학년 1학기(1955년)에 학교를 휴학하게 되지만, 1956년 6월 14일자로 제적되고 만다. 이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는 본격적인 문단 생활을 꾸려나가게 되는데, 이해부터 약 2년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전신) 서울 주재 기자로 재직하면서 ‘명동’이라는 당대의 문화에 스며들어 간다. 이 무렵 명동거리에는 ‘은성’, ‘돌체’, ‘르네상스’ 등의 다방이 있었는데, 박봉우는 이들 다방을 순례하면서 천상병, 김관식, 신동문, 신동엽 등의 시인과 교류를 하게 된다. 조병화 시인의 기억에 따르면, 박봉우 시인이 명동에 나타나면 어김없이 그의 주변에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따라다니곤 했다. 박봉우 시인은 언제나 취해 있었으며 어느 정도 흥분해 있었는데, 마치 그 모습이 명동 거리에 나타난 아르뛰르 랭보 같았다고 기억한다.④
▲ 서울, 존재론적 위기
명동 시절 박봉우 시인은 기인으로 알려졌으나 그는 한 번도 그가 나아가야 할 시적 지향점을 잃지 않았다. 「휴전선」에서부터 줄곧 분단의 아픔을 떠올리며⑤ 조국통일을 염원했던 그는 엄혹한 군사독재의 그늘에서 늘 폭발 직전의 삶을 살았다.
아마도 1960년대의 어느 성탄절 전야였을 것이다. 그날 밤의 명동은 먹고 마시고 노래하는 환락의 아수라였다. 뼈를 저미는 냉한의 거리에서 “불로대야 불로대야”를 외쳐대며 말코이 가면 하나를 팔고자 안간힘하는 신음소리 속에서도, 예수의 탄생을 빌미삼은 광란은 이어져 갔다.
마침내 봉우의 활화산은 터지고 말았다. 그는 불뚝 일어나, 터질 것만 같은 술집의 잡음들을 한마디 노래로 잠재워버리는 것이었다. 빨치산의 노래였다. 이내 경찰관이 달려오고, 그는 끌려가면서 천지와 백록담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⑥
짐작할 수 있듯 박봉우의 서울 생활은 썩 유쾌하지도 않았고 제법 찬란하지도 않았다. 지방 신문의 주재 기자로 재직하던 중에 취재차 목포에 갔다가 집단폭행을 당한 후로 발작적인 정신이상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박봉우의 제3시집 ?4월의 화요일? 후반부에 수록된 기록들을 보면 박봉우는 4월 혁명 직후인 6월경부터 정신 질환 증세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⑦ “나는 오늘도 잠을 못 자는/약보다도 술이 없으면 더욱/잠을 못 자는 지성을 잃고 있는/정신병자.”(「지성을 앓고 있는 공동묘지」), “가을은 나의 입으로 들어와/건강한 병을 앓게 한다”(「가을 주점」), “‘경무대’가 폭풍이 친 날……젊은 시인은/고향에 고향에 돌아와, 지금은/너무나 아름다운 화요일./알면서도 미쳐가는”(「참으로 오랜만에」), “고독은/나의 병원의/음악에 젖는/실내악”(「소묘42」) 등을 통해 박봉우는 병적 징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고독”이라는 존재론적 위기의식을 뚜렷이 표출함으로써 그 스스로 하나의 질환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그의 정신 상태는 정상과 비정상을 반복하였고, 급기야 정신병동에 감금되는 사태를 맞았다. 그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조국과 민족의 비운에 분노하면서 "머리를 앓고 사는 사람들"(「정신병원」)의 병후를 걱정하는 한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무덤 같은 잠"(「죽은 듯 눈 감고 싶다」)을 청하며 인생무상을 탓하기도 했다. 더욱이 마땅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부인과의 사별은 그의 내면에 심한 죄책감을 각인시켰고, 그는 스스로 "蒼白한 病室의 美學者"(「겨울에도 꽃피는 나무」)로 자처하면서 무능한 가장으로서의 고독과 시대와 화합하지 못하는 시인의 고독을 동시에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남긴 후기시편에서 공통적으로 검출되는 정서는 삶의 공허감이다.⑧
이와 같은 정신의 분열, 생활의 불능, 다른 사람들과의 불감 등이 반복되는 동안 박봉우의 서울살이는 점점 고달픈 방향으로 미끄러져갔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65년 초여름, 박정희 정권이 비밀스럽게 추진하고 있던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여론이 번져나가던 무렵이었다. 재경 문인들이 한일회담 반대 성명을 내자 신문마다 이 사건을 큼직하게 보도하고, 기사의 끝에는 서명 문인들의 이름이 실렸다. 이때 서명한 많은 문인이 정권으로부터 크고 작은 불이익을 당하고 박해를 박는데, 박봉우도 이 사건을 빌미로 서울신문사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⑨
그리고 바로 이 해에 박봉우는 김현승 시인의 주례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이정례와 결혼을 한다. 당시 박봉우 시인이 결혼식은 제법 화제에 올랐다. ?선데이 서울?( 69년 11/23 제2권 47호 통권 제 61호)에는 “시인 박봉우(朴鳳宇)(36) 씨가 부인 이영미(李英美)씨와 6년 동안 미루어 온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하늘 아래 처음 있는 이색적인 결혼식 광경이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일개 시인의 결혼식이 주간지에 실린다는 것은 지금도 웬만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박봉우 시인의 청첩장은 이러한 내용이었다.
박봉우: (박봉두(朴鳳斗)씨 동생)
이영미(李英美)양 (이운학(李雲鶴)씨 큰딸)
딸 「하나」를 낳고 아들 「나라」를 얻은 우리의 시인(詩人) 박봉우(朴鳳宇)가 그 동안 미루었던 혼례(婚禮)를 뜻있는 「파고다」공원(公園)에서 갖게 되었읍니다. 오셔서 이 자리를 보람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곳: 「파고다」공원(公園) (서울 종로(鐘路))
때: 1969년 11월 15일 토(土)요일 <오후 3시>
분단을 괴로워하고 통일을 염원했던 시인답게 박봉우는 이미 ‘하나’ ‘나라’를 품안에 거두어두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결혼식에 입장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문인이었는데,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두들 10원의 입장료를 내야만 했다. 10원은 파고다공원 입장료였던 것이다. 「선데이 서울」에는 당시 박봉우 시인의 살림 규모를 짐작케하는 기사도 실려 있다. “서울시의 수색(水色) 밖인 성암동에 있는 초가에 보증금 1만원, 월세 2천원의 방을 빌어 4식구가 살고 있다. 부인의 말에 의하면 월 생활비는 약 1만원. 그것은 시인이 원고료로 마련해 온다. 이들이 함께 살게 된 것은 6년 전. 박봉우(朴鳳宇)씨가 30세, 부인이 26세 때였다. 선을 보고, 함께 살았다. 그 이후로도 박봉우(朴鳳宇)씨는 일정한 직장을 가지지 않고 시와 술 속에 파묻힌 생활을 계속해왔다.”는 것이다. 결혼 후 박봉우는 서울에서의 삶을 좀 더 이어가다가 1975년 남행을 결심한다. 물론 그의 목적지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광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전주에 머물게 되는데, 그를 아끼던 고교 동창 이효계가 전주시장으로 있으면서 그에게 전주 도서관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서울을 떠나면서 그는 이 시를 남겼다.
긴 겨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모두 발버둥치는 벌판에
풀잎은 돋아나고
오직 자유만을 그리워했다
꽃을 꺾으며
꽃송이를 꺾으며 덤벼드는
난군(亂軍) 앞에
이빨을 악물며 견디었다
나는 떠나련다
서울을 떠나련다
고향을 가려고
농토를 찾으려고 가는 것은
아니겠지
이 못된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옥토를 지키는 것
봄은 오는데
긴 겨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랜 역사의 악몽 속에서
어서 깨어나
어서 깨어나
보리밭에 녹두밭에
석유냄새 토하며 쓰러질
서울 하야식
외진 남산 기슭 진달래야
찬 북녘
바람은 알겠지
소금장수
쌀장수
갈 곳도 없는
고향도 없는
어서 서울을 떠나야지
서울을 떠나야지
―「서울 하야식」 전문(1975년)
▲ 절대 고독의 경지, 정신병원
서울에서 전주로 내려온 박봉우에게 집을 옮기는 것은 정착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에게 생명 있는 것들은 언제나 떠도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무등산으로 피난 갔던 경험의 극단적 형태의 심리적 반응일 수도 있다. 생애 최초로 삶의 터전을 떠나게 된 계기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전쟁이었던 셈. 그의 등단작이 「休戰線」인 것도, 그 시에서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을 목격하면서 그는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를 추적하게 된 것도 전쟁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전쟁을 통해 그는 신의 부재와 고아 의식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그가 유복자로 태어났다는 생애사적 사실만으로도 그의 정신에 점착해있는 고아 의식은 각별하게 여겨진다. 바로 그러한 고아 의식이 그를 정착할 수 없는 존재, 부유하는 영혼으로 살게 했는지 모른다.
그의 시는 “일관되게 분단 현실을 인식하면서 남북통일 또는 항구적인 평화의 조건을 탐색”⑩ 해간다. 그가 “전쟁은 너무 아름답게 슬프구나 별보담도 많은 인류의 수많은 목숨들을 비웃는 하나의 너불거리는 기폭을 보아라 아우성치는 소리를 어서 들어보아라 문명이란 얼마나 눈물나게 퇴폐한 어설픔인가 이 거친 도시를 모두 다 휩쓸고 찬란한 종언을 어서 어서 알려다오.”(「바다의 사상과 미소」)라며 신을 향해 호소할 때, 신은 한 번도 그의 물음에 응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신은 4‧19혁명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전쟁으로 그 앞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월의 피바람도 지나간/수난의 都心은/아무렇지도 않은/표정을 짓고 있구나//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갈라진 가슴팍엔/살고 싶은 武器도 빼앗겨버렸구나”(「진달래도 피면 무엇하리」).
1975년 전주로 거처를 옮긴 이듬해 그는 세 번째 시집 ?황지의 풀잎?(창작과비평사, 1976)을 내놓는다. 다른 의미에서 이 시집은 박봉우가 전주에서 펴낸 첫 번째 시집이었다. 이 시집은 그의 시적 행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 시집이 그의 시적 세계에서 전반부(서울 시기)를 마감하고 후반부(전주 시기)를 준비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울 시인에서 전주 시인으로 월경(越境)해가는 도상에 놓여 있으면서, 그 스스로를 분단 조국의 ‘황지’에 핀 힘없는 ‘풀잎’ 시인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조태일 시인은 ?황지의 풀잎? 편집후기에서 이 시집의 특징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 시집은 3부로 편집되었다. 제1부와 제2부는 1962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15년 남짓 사이에 발표한 것들을 모을 수 있는 데까지 거의 빠짐없이 모아서 발표연대와 역순으로 꾸몄으며 [……] 이로써 우리들은 박봉우 시인의 시들을 힘 안들이고 한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얻었음과 동시에 이 시집을 통하여 전쟁과 폐허의 50년대를, 독재와 혁명과 좌절의 60년대를, 긴장의 풍요와 정신적 빈곤의 70년대 전반을 한 시인이 어떻게 몸부림하며 부딪쳐왔는가를 역력히 엿볼 수 있게 되었다.⑪
제1시집 [휴전선], 제2시집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제3시집 [사월의 화요일] 등에 실렸던 시들을 추려 재수록한 3부를 제외하면 [황지의 풀잎]에 실린 작품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작품은 제2부의 마지막 작품인 「外人部隊」이다. 이 시의 시작과 끝은 이렇다. “나의 앞에는/壁밖에 없습니다.//……//지금, 나의 앞에는/지구마저 버리고 싶은/무덤이 休日이/노을 속에 울음으로 젖어가고 있습니다.”. 1962년 ?思想界?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 우리는 박봉우의 시대‧현실‧세계 인식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 “벽”이라는 단단한 세계에 가로막혀버린 인간 삶이란 “무덤”과 다르지 않다는 것. 이러한 실존적 고뇌는 전쟁과 혁명을 겪는 과정에서 나타난 인간적 좌절의 한 모습일 것이다. 이 시집 맨 앞에 실린 시이면서 시기적으로 가장 나중에 발표된 시는 「大法院 앞에서」(「創作과批評」, 1975)이다.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박봉우는 서울을 떠나 전주로 내려온다. “언제나 나 혼자만이 산책합니다/김병로 대법원장님을 생각합니다/리승만 대통령이 제일 무서워하는/그 길을 걸어갑니다 외로울 때나/슬플 때나 걸어가면서/휴지를 줍습니다/또 책을 읽습니다”로 시작한 시는 “지금 나는 모르겠습니다/어떻게 해야 할는지/어떻게 해야 할는지”로 끝맺는다. 그 사이에 “나는 절대로 문을 열지 않습니다”가 중심처럼 앉아 있다. 박봉우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무덤’ 같은 세계의 부조리함을 “법”에 호소한다. 물론 이 때에도 그는 “혼자”다. 혼자 “산책”을 하면서 존경하는 “김병로 대법원장”을 생각하고, 그의 삶을 추종하고자 한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 떨어진 가장 쓸모없는 “휴지”를 줍는 육체적 겸허함을 품고 “책”이라는 고매한 정신의 세계를 탐색해간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삶의 진실과 역사적 정의 앞에서 박봉우는 길을 잃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가는 “문”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문’을 막아서고 있는가? 위 시에 따르면 “문을 열지 않”는 주체는 “나”이고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때의 ‘문’은 시인 박봉우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생활 세계 사이에 놓인 문이다. 이를테면 그는 내면과 외면의, 자기와 타자의, 시적 삶과 생활적 삶을 철저히 차단한 채 의도적으로 ‘문’을 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폐쇄적 자의식은 그의 정신병력과 무관하지 않게 보인다. 그의 정신병력은 세계(외부)에서 주어진 충격―이 충격은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형성시켜준 한국전쟁, 4‧19혁명과 좌절, 서울살이의 폭력성 등이다―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숨 쉬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박봉우는 스스로 ‘벽’을 쌓고 그 벽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글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병원에 피는 창백한 지성의 분노는 흰머리가 나도록 아껴 두고 싶은 것들”(「정신병원에 피는 창백」)이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문’은 이른 바, “창백한 지성의 분노”같은 것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그는 평생에 걸쳐 그 ‘분노’를 지켜내느라 자신의 영혼을 조금씩 소모시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창백한 지성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곳은 도서관 밖에 없었다. 전주에서 박봉우는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물론 “출근하자마자 그는 아침부터 벌써 ‘자유’에로의 탈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엔 취기가 돌고 그의 휴전선의 하늘을 태양이 빛을 잃어갔다. 다른 사람들의 직장 사정으로는 결코 박시인과 마주할 수 없었으므로 낮에는 오로지 혼자 주막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감내해야 했고, 그의 절대의 고독으로 인하여 그의 자유는 차라리 궁상 맞는(?) 것”⑫ 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쳤다. 그렇더라도 이 무렵 박봉우의 삶은 그의 시적 세계를 변모시켰다. 분단현실, 남북통일, 군부독재 등 사회참여에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전주에 정착하면서 인간 실존의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의 정신질환이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것은 “정신병원이 있는/그 곁에/이사가고 싶다.//조용한/한 폭의 그림.//그/병원을 바라보면서//나는 언제나/나를/더욱 나를/생각해보고 싶다.”(「정신병원 풍경」 전문)는 새로운 도피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원으로의 도피는 좌절이나 실패에 따른 도피가 아니라 그곳에서 “나를/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생활 속에서, 현실 속에서, 인간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그 자신의 내면과 본질이 정신병원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러한 시도는 분열된 자신의 본질적 내면을 탐구하겠다는 시인 박봉우의 최초이자 최후의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새삼 ‘고독’이라는 자신의 뒷면을 마주하게 된다.
고독할 뿐이다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고독할 뿐이다
오늘은
완산칠봉
내일은
풍남문 근처에서
아직
전주를 알기는 이르다
당분간
시가 되지 않은
이 밤
울고만
울고만 싶어라
―「전주에 와서」 전문
“고독”이라는 시어만큼 박봉우를 말해주는 것은 없다. 알다시피 그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자체가 이미 ‘半-孤’에서 출발한 것이다. 고(孤)란 이 세상에 부모 없이 살아가는 존재를 말하지 않던가! 또한 고란 타자와의 소통이 막혀버린 실존 그 자체가 아니던가! 운명처럼 고의 절반을 영혼에 새긴 채 태어난 박봉우 시인은 평생 고독의 올가미에 목을 걸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고의 절반을 어머니에게서 또 유산처럼 물려받게 된다. 그의 산문 「가난한 코리아의 어느 호텔에서」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 막내의 결혼식도 보지 못하고 영 가신 나의 어머니의 영혼 앞에 두고 ‘시와 우정과 영혼의 대화’를 읽어 드리며 선사하오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박봉우의 어머니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반고아에서 온전한 고아가 된 것이다. 이러한 고아 의식은 그의 삶 전체를 고독으로 물들였는데, 실존적인 고독은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를 외롭게 했다. 오랫동안 “가난이 그의 집을 완전히 고립무원의 지경으로 포위하고 있”⑬ 었던 것이다.
▲ 전주, 자유를 허락하다
박봉우는 자신이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고독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다. 그가 고독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고요’해지는 것이다. “이런 고요함 속에서/내가 서 있고 싶다.// 바람만 부는/풀잎들의/음성도 없는/그러한 고요함 속에서 서 있고 싶다.//담배연기 내뿜는/그런 고요 속.”(「고요할 뿐」 전문)이 되는 방법은 딱 하나. 세상으로부터, 일상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는 것. 그렇게 본다면 그의 정신질환은 이제 병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그의 정신이, 내면이, 영혼이 분열되는 순간은 그가 고독을 넘어 자유를 얻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얻는 순간의 희열을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 스스로의 징역도
이내 끝나는 시간.
자유의 공기란
하루 양식보다도
더 중한 것.
오늘 아니 잊고
내일 다시 잊으리……
끝나는 시간이
바다와 같이 밀려온다.
나는
영원토록 싸우고
고독해야 할 이름.
내 스스로의 징역도
이내 끝나는 시간.
―「끝나는 시간」 전문
생전 그가 마지막으로 출간했던 시집 ?딸의 손을 잡고?(1987)에 실린 이 시는 그에게 정신질환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세상으로부터 ‘고독’했던 “스스로의 징역”이 “끝나는 시간”이란 “고독” 속에 있으며, ‘고독’해지기 위해서는 그 스스로 단절과 유폐의 세계로 침잠해가야 한다. 박봉우에게 그 세계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정신병원’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마침내 “자유의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수영의 말처럼 ‘자유에는 언제나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법. 전주에서 자유를 얻은 시인 박봉우는 혹독한 피로 자신의 영혼을 물들이고 만다. 이를테면 그는 전주에서 세 가지를 상실한 것이다.
첫째는 분단현실과 통일조국, 군부독재를 향한 반전, 반독재의 윤리가 무참하게 유린된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들려왔던 참상은 그가 간직하고 신념을 철저하게 파괴해버렸다. 더구나 광주는 그가 유소년기를 보내며 문학적 감수성으로 충만했던 곳. 그는 정신적 공황에 빠진다. 그래서 그는 “나는 당분간/광주에 가지 않으련다/피바다가 되어도/피바다가 되어도/나는 바보처럼/웃고만 있었다/내가 가는/꼭/오월 어느 날 있을 것이/시인이 마땅히 죽어야 했는데”(「광주」)라고 자책한다. 부모 상실에 이어 그는 고향마저 그렇게 잃어버린 것이다. “당분간/광주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그는 ‘영원히’ 그곳에 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두 번째는 아내이다. 박봉우를 대신해 전주천변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생계를 책임지던 그의 아내는 1985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뜬다. 이때 박봉우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아내의 사망 소식에 정신병원에서 나온 그가 아내의 영정을 가슴에 끼고 흐느끼다가 “아름다운 꿈을 꾸어라”라고 독백하듯 말했다고 전한다. 박봉우는 아내를 사별한 슬픔을 특별히 섬세한 시어와 정서로 다듬어냈는데, 이러한 시작(詩作)의 이면에는 삶을 놓쳐버린 자신을 대신해 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깔려 있다. 그래서 그는 “울고만 싶었다.//여백을/저만치 남겨놓고/울고만 싶었다.//너를/너를 보내놓고는”(「너를 보내놓고」 전문)이라고 절절한 마음을 읊었다. 이 시만으로는 아무래도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다 표현할 수 없었던 모양인지, 그는 또 이런 시도 남겼다.
괴로운 나날이었다
아내 손은
우리 역사와 같이 망가지고
입술을 다물었다
찾아오는 손님
가는 나그네
뜨거운 소주를 마시고
눈물을 글썽이며 가버렸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사람
한 잔의 술도 나누지 못하고
가버린 그 사람
그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며
나는 술을 들었다
고통은 커다란 기쁨
언제고 간에 만나야 할 사람
겨울이면 나는 울었다
쫓겨가며
간절한 사연도 토하지 못하고
간 그 사람을……
―「겨울 포장집의 아내」 전문
“찾아오는” 이는 “손님”이지만, “가는” 이는 “나그네”이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아닐까? 만남의 순간은 반갑고 기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맞이하는 이별은 서로 각자의 길을 외롭게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일 뿐이다. 그래서 오는 이에게는 ‘님’이라는 존칭을 특별하게 넣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와 같이 망가”진 “아내 손”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나그네와 헤어질 때면 “뜨거운 소주를 마시고/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지는데, 그는 아내와의 이별에 “한 잔의 술도 나누지 못”했다. 이별의 순간에 못다 한 의식(儀式)이 있어서일까? 그는 “술을 들”며 헤어진 “고통은 커다란 기쁨”이라고 말한다. 술을 나누는 의식 없는 이별은 이별이 아니므로, 쫓기듯 “간절한 사연도 토하지 못하고” 가버린 것은 이별이 아니므로, 제대로 이별하기 위해서라도 아내는 “언제라도 만나야 할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겨울이면 나는 울”수 밖에 없다. 그 울음 끝에 끝내 말하지 못하고 남겨둔 마지막 말줄임표(……)에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박봉우 시인과 술좌석에서 어울렸던 소재호 시인의 기억 속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으로 짐작만 하기로 할 뿐, 뭐라고 말하지는 말자. 박봉우 시인이 끝내 말하지 못했던 그 심정을 우리도 같이 헤아려야하기 때문이다. 소재호 시인은 박봉우 시인과 그의 부인을 이렇게 기억한다.
「서울 하야식」이 쓰여지던 같은 해쯤 되던 봄날, 전주 완산동 샛골목 대포집에서 나는 박시인의 호출에 영광스럽게 응하고 있었다. 박시인은 성긴 수염이 숭숭한 아래턱을 연신 앞으로 내밀며 씰룩거렸다. 턱을 자주 내미는 버릇은 그가 무엇인가의 문제에 집착하려는 즈음에, 아니면 낯선 공간을 제압해버리려는 직전의 예비 음모 같은 단계로 나타나는 당연한 버릇이었다. 그는 그때 부인과 동행이었다. 우리는 판자 두 쪽으로 기워 만든 조잡한 벤치에 나란히 걸터앉은 모습이었는데 그는 나를 그들 내외의 가운데 앉도록 강압했다. 그가 부인에게 명령하기를 “젊은 놈 따뜻한 손 좀 잡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틉틉한 막걸리 술잔만 거듭 비우고 있었다. 그 시절 부인은 유방암으로 병고가 짙어 있었다. 부인은 계면쩍은 웃음을 설핏 흘렸지만, 이미 시드는 서글픈 꽃으로 보였다. “내 처는 병고에 시달리고 있어” “정말 불쌍해” 혼잣말 같은 넋두리였다.⑭
박봉우 시인이 고독한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의 질환을 앓고 있었다면, 그의 아내 이영미 씨는 생활의 궁핍으로 고달픈 심신의 상태였다. 소재호 시인의 표현처럼, 박봉우 시인의 부인은 “서글픈 꽃”이었던 것이다. 이 역설적 표현이 당시 그들 부부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늦가을 서리에 늘어진 가냘픈 한 송이 꽃이라니. 사실 박봉우도 그의 부인도 ‘서글픈 꽃’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잠깐 스친 그 꽃향에 영혼까지 감전되듯 먹먹해지는 삶과 시, 그것이 그들 부부의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 부인 이영미 씨의 꽃이 먼저 툭, 꺼지듯 세상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마지막으로 그가 잃어버리게 된 것은 시인 박봉우 자신이다. 그는 1990년 3월 1일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실종해버렸다. 호사가들은 그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외쳤던 삼일절에 사망한 사실을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는 전쟁과 독재의 참혹함으로부터, 그리고 인간을 구원할 줄 모르는 신으로부터, 또 자신의 전 생애를 지탱시켜준 시로부터 마침내 독립한 것이라고. 그러나 어쩌면 그는 먼저 떠난 아내가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는 “눈을 감으면/말해주지요/님은/사랑하는 님은/꿈에 오지요”(「눈을 감으면」)라고 노래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을 것이다. 캄캄하게 감은 그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면서 꽃이, 무더기도 아니고 딱 한 송이 꽃이 서서히 피어났을 것이다. 생전에 그토록 처연하게 불쌍했던 아내 이영미가 그의 눈속 가득 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꽃 앞으로 오래 고독했으나 자유롭고자 했던 꽃, 박봉우가 한 송이 서글픈 꽃으로 툭, 꺾였을 것이다.
그가 죽고 난 후 발표된 작품 가운데 「해 저무는 벌판에서」(「창작과비평」 여름호, 1990)는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 시는 생전에 발표지면을 찾지 못하다가 그가 소멸된 후에야 세상에 나온 것이다. 마치 오래 전에 써 놓은 유서처럼.
나는
갈 길을
잊었다
양 한 마리 없는
밤길을 걸었다
어데선가
총 한 방울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기
별꽃 같은 것이
날아가고 있었다
저
총소리는
누구 것인가
나는 고개를 숙이며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다
―「해 저무는 벌판에서」 전문
그렇게 박봉우는 “총 한 방울”로 “고개를 숙이며” 밤하늘의 “별꽃”처럼 저편으로 날아갔다. 그가 전주시립효자공원묘지에 묻히던 날, 전주의 문인들 모두 그가 고독의 굴레를 벗고 마침내 자유를 얻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전주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다가 잠깐 멈추어서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 발악처럼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시론 개 씹할 놈의 소리들/나의 조국은 두 동강인데/나의 조국은 두 동강인데/똥개 같은 놈들이/정치가/교수/시인이라고/세상 똥냄새만 나는군/갈비나 잘 씹고 잘 살아라”(「니가 나의 동족인가」). 그렇게 시인 박봉우는 전주에 묻혔다. 그날 전주는 최초이자 최후의 명령처럼 그에게 자유를 허락했다.
▲ 박봉우 시인 연보
1934년(1세) 7월 14일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전남 승주군 군수를 지낸 바 있는 아버지 박병모와 어머니 김효정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이자 유복자로 태어나다. 본관은 밀양(密陽), 아호는 추봉령(秋鳳嶺)이다.
1941(7세) 4월 1일 광주 서석공립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다.
1948(14세) 6월 25일 광주서석공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9월 28일 광주서공립중학교에 입학하다. 서중학교 재학시절 문예반에 들어가 시동인 ‘진달래’를 결성하고 작품 활동을 하다. 이때 가곡 ‘바위고개’를 잘 불렀다고 한다.
1951(17세) 7월 25일 광주서중 졸업하고 9월 28일 광주고등학교 입학하다. 광주고 재학시 후일 문인이 된 강태열, 윤삼하, 주명영 등과 더불어 문예반에서 활동하면서 시동인지 성격의 4인 시집 『상록집』 을 간행하다. 교지(校誌) ‘광고(光高)’를 만드는데 열성을 보이며, 1학년 때인 1952년 단편소설 형식의 산문 「푸른 별과 같이」를 발표하다. 이후 여기에 그의 시 「촛불의 노래」(1952), 「마리아像」(1953)을 차례로 발표하다.
1952(18세) 주간지 『문학예술』에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石像의 노래」가 당선되다. 전남일보 주최 제1회 학생문예 경작대회서 박성룡, 윤삼하, 주명영, 박상식 등과 함께 입상하다. 전남일보 주최 제1회 신춘문예에 박성룡, 정현웅 등과 함께 당선되다.
1953(19세) 서울 희망사 주최 제1회 전국 남고생 문예현상릴레이에서 당선. 서울 수험사 주최 전국 고등학교 문예현상대회서 윤삼하, 지명수 등과 입상. 전남일보주최 제2회 학생문예경작대회서 또 다시 당선하다.
1954(20세) 3월 31일 광주고등학교 3년 과정을 졸업하다. 4월 8일 전남대 문리대 정치학과 입학하다. 입학 후 학과 공부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듯 대부분의 학점이 D 또는 F학점. 그런 관계로 2학년 1학기 때(1955) 휴학했으나 1956년 6월 14일 제적 처리되다.
1955(22세) 2월 강태열, 김정옥, 박성룡, 이일, 정현웅, 주명영 등과 함께 시동인 ‘영도’를 결성. ‘영도’ 동인지 1집, 2집에 참여하다.
1956(23세) 1월 1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다. 이후 약 2년간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전신) 서울주재기자로 재직하다. 이 무렵 명동거리의 ‘은성’ ‘돌체’ ‘르네상스’ 등을 누비며 천상병, 김관식, 신동문, 신동엽 등 다수의 문인들과 친교를 나눴으며 많은 일화를 남기다.
1957(24세) 첫 시집 『휴전선』(정음사) 간행하다.
1958(25세)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하다.
1959(26세) 제2시집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백자사) 간행하다.
1962(29세) 4월 1일, 제3시집 『四月의 火曜日』(성문각) 간행하다. ‘현대문학상’ 수상하다.
1963(30세) 1950년부터 1960년까지의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자를 중심으로 한 시동인 ‘신춘시’에 참여하다. 강인섭, 강인한, 김광협, 신세훈, 조태일, 윤삼하, 정진규, 김종해, 황명, 이근배, 장윤우, 이탄, 홍윤기, 김종철, 김원호 등과 함께 1969년까지 활동하다.
1965(32세) 김현승 시인의 주례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이정례 씨와 결혼하다.
1966(33세) 1월, 동인지 <영도> 제3집에 참여. 이때 ‘영도’ 동인으로 이성부, 임보, 손광은, 김규화, 윤삼하 등이 가세하다. 5월, 동인지 <영도> 4집에 참여. 10월 르포집 『肝이 큰 女人들』(한국정경사)을 간행하다.
1969(36세) 10월 10일, 김소월, 김영랑 등 작고시인들의 생애와 문학을 다룬 산문집 『사랑의 詩人像』(백문사) 간행하다.
1974(41세)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다.
1975(42세)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시 「서울 下野式」 등을 발표한 이후, 서울 생활을 마치고 전주에 정착. 당시 전주시장이었던 고등학교 동창생의 주선으로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다. 전주에 거주하는 동안 최승범, 이운룡, 정양, 소재호, 진동규, 박만기, 주봉구, 백학기 시인과 소설가 이병천 등과 교류하다.
1976(43세) 7월 1일 제4시집 『荒地의 풀잎』(창작과 비평사)을 간행하다.
1985(52세) 8월 30일, 제5시집 『서울 下野式』(전예원)을 간행하다. 이해 겨울 부인과 사별하다. ‘현산문학상’ 수상하다.
1986(53세) 11월 15일, 기존의 산문집 『사랑의 詩人像』을 『詩人의 사랑』(일선출판사)으로 제목을 바꿔 재발간하다.
1987(54세) 제6시집 『딸의 손을 잡고』(사사연)를 간행하다.
1990(57세) 3월 1일, 전주시립도서관 촉탁사원으로 재직 중 지병으로 별세하다. 전주문인장(장례위원장 허소라)으로 전주시립효자공원묘지에 안장되다. 유족으로는 하나, 나라, 겨레 등 1남 2녀.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유고시 「해 저무는 벌판에서」 외 13편 발표되다. 광주일보사 주관 <무등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하다.
1991년 11월 25일, 시선집 『나비와 철조망』(미래사) 간행하다.
1993년 6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로 ‘박봉우 시비 건립추진위원회’ 발족. 시비에 새길 작품은 그의 대표작인 「휴전선」으로 정하다.
1994년 12월, 광주사직공원에 그의 시 「조선의 창호지」를 수록한 시비(글씨 : 이돈흥, 제작 : 정윤태)가 세워지다.
2001년 8월 22일, ‘시인 박봉우 시비건립위원회’를 구성, 위원장에 현기영(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김윤수(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사장), 김중배(MBC 문화방송 사장)씨를 추대하다. 11월 25일, <휴전선> 발표 45주년을 기념하여 경의선 임진강역 구내에 그의 시 「휴전선」을 새긴 시비(글씨 : 쇠귀 신영복, 제작 : 김운성)가 세워지다.
2009년 1월 박봉우 시전집 (현대문학)이 간행되다.
▲ 각주
1) 이 부분에 있어서도 다른 견해가 있다. 임동확은 ?박봉우 시전집?에서 박봉우 시인의 출생지를 전남 순천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전동진은 「시인 대통령, 대통령 시인의 ‘홀로 한 하야(下野)’ - ‘황지의 풀잎’ 박봉우 시인」(<무등일보> 2016.10. 16)에서 광주시 학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임진강역에 세워진 박봉우 시비에도 광주 출생으로 되어 있고, ?시와시학?(1993년 겨울호)에도 광주 출생이라고 연보를 밝힌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시전집에서 밝힌 연보에 따라 전남 순천군 외서면 금성리 679번지에서 박봉우 시인이 태어난 것으로 정리한다.
2) [시와 시학] 1993년 가을호에 정리된 박봉우 시인 연보와 김중배의 글 「‘직업이 조국’이었던 시인 박봉우」에는 1990년 3월 2일 작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박봉우 시전집?(현대문학, 2009) 연보에는 1990년 3월 1일 작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권영민 교수의 ?한국현대문학대사전?(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에는 1990년 3월 2일로 나온다. 위키백과, 나무위키 등 각종 포털사이트에 박봉우 시인의 작고일은 3월 2일로 나온다. 2002년 임진강역에 세워진 박봉우 시비에는 1990년 3월 1일로 작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박봉우 시 전집?에 수록된 연보에 따르기로 한다.
3) [주간 문학예술] 은 오영진, 박남수, 원응서 등 월남 문인들이 원고료를 모으고 호주머니를 털어 피난지 부산에서 1952년 창간한 문학잡지다. 1954년 4월 서울에서 ?문학과 예술?로 고쳐 2호까지 발행한 후 휴간에 들어갔다가 1955년 6월 다시 [문학예술]로 속간하게 된다. ?문학예술?은 여러 부문에 걸쳐 재능 있는 신예들을 대거 발탁하는데, 평론 부문의 유종호, 이어령, 소설 부문의 이호철, 선우휘, 송병수, 김성한, 시 부문의 성찬경, 신경림, 민재식 등이다. 이후 1958년 통권 33호로 종간된다.
4) 조병화, 「박봉우 시인을 생각하며」, ?시와시학? 1993 가을호, 73쪽.
5) 이러한 까닭에 박봉우 시인을 분단시인으로 일컫기도 한다.(정한용, 「휴전선에 피어난 진달래꽃」, ?서정시학? 1993 가을호, 105쪽.
6) 김중배, 「‘직업의 조국’이었던 시인 박봉우」, ?시와시학? 1993 가을호, 76쪽.
7) 권오만, 「박봉우 시의 열림과 닫힘」, ?시와시학? 1993년 가을호, 95쪽.
한편 「선데이 서울」(1969년 11월 23일자)에는 이렇게 그의 정신병의 발병을 말하고 있다. “맨 먼저는 4·19 직후. 전남(全南)일보기자로 있을 때였다. 목포(木浦)시에 취재차 갔다가 깡패에게 얻어 맞아 「넋」을 잃었다. 전남(全南)대학 의대부속병원 정신병과에 약 1개월간 입원. 이 때 병원에서 쓴 시들을 묶어 『4월(四月의) 화요일(火曜日)』이하는 시집을 냈다. 그 뒤로는 1년에 한번 약1개월씩 서울 청량(淸凉)리 뇌병원(腦病原) 최거해(崔巨海)박사의 신세를 져왔다.”
8) 최명표, 「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30)-「휴전선」의 시인, 박봉우」, 전북일보 2011. 9. 26
9) 장석주,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3?, 시공사, 2000, 344쪽.
10) 임동확 엮음, 「황지의 풀잎과 광기의 시학: 박봉우론」, ?박봉우 시전집?, 현대문학, 2009, 423쪽.
11) 박봉우, ?황지의 풀잎?, 창작과비평사, 1993, 143쪽,
12) 소재호, 「박봉우 시인의 전주에서의 삶, 그 흐린 하늘」, ?시와시학? 1993 가을호, 81쪽.
13) 같은 글, 79쪽.
14) 같은 글, 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