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관 - 프라하 : 케플러 박물관 케플러, 우주의 중심에서 지구를 밀어내다
hanjy9713
2024.01.22. 08:00조회 1
프라하 : 케플러 박물관
케플러, 우주의 중심에서 지구를 밀어내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해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충격에 빠진 주인공을 다룬 『변신』의 작가 카프카가 ‘어머니’라 여겼던 도시. ‘로봇(robot)’이라는 용어가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또 연극으로 공연됨으로써 일찍부터 인공지능 로봇 시대를 예측한 상상력의 도시.1) 여관 겸 푸줏간 아들이었던 음악가 드보르자크가 그 재주를 발견하고 개발했으며 성공하고 또 죽어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도시.
너무나 아름다워 ‘작은 프랑스(Little France)’라 불리며 아기자기한 건축물과 풍광을 자랑하는 이 도시의 구시청 광장에서는 매시간마다 거대한 천문시계(Staromestaromestsky Orloj)가 울린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시계가 울리는 순간이나마 허영과 돈 그리고 음악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삶의 중요한 교훈에 귀 기울인다.2)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
도시 ‘프라하’를 기억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이곳이 인류의 사고 체계를 획기적으로 대변혁시켰던 천문학 혁명의 도시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인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우주는 이제 그 중심에서 인간을 내몰았으며,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었다. 또 행성들이 따라 회전하는 궤도는 완전한 원이 아니라 타원이었으며, 행성들이 동일한 시간에 움직이는 면적의 총량은 항상 동일했다.
대단히 혁신적이면서 근본적인 이 혁명의 중심에 바로 요하네스 케플러가 있다. 도시 프라하는 1600년 눈보라치던 어느 추운 날, 힘들고 절망적이었던 케플러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그리고 지칠 대로 지친 그가 숨겨진 열정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격려했으며, 그로 인해 인류 역사에 그의 이름이 길이 남도록 하였다.
구시가지와 고풍스런 프라하 성을 연결하는 블타바(Vltava) 강의 가장 오래된 다리인 카를 교 끝에는 아주 오래된 거리인 카를로바 거리가 있다. 강을 건너기 직전인 이 거리의 끝자락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소박한 규모의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바로 400년 전에 케플러가 살았던 집이다. 프라하 시 당국이 2009년에 유엔이 지정한 ‘세계 천문학의 해’를 기념하고, 또 그가 출간한 저서 『새로운 천문학(New Astronomy)』의 출간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 집을 케플러 박물관으로 새롭게 개조했다.
케플러가 프라하에서 보낸 12년의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이곳의 특징은 박물관의 상징 로고를 보면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빨간색과 파란색 그리고 노란색의 점점 커지는 3개의 원으로 구성된 로고는 각각 화성, 지구 그리고 태양을 상징한다. 이는 화성에 관한 자료를 토대로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꾸는 천문학 혁명을 완성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작은 규모의 공간에 그리 많지 않은 전시물과 가재도구들이 전시된 이곳에서는 케플러가 겪은 좌절과 성공 그리고 행복과 쇠퇴의 상반되는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케플러 박물관 입구
소설가 아서 퀘슬러(Arthur Keosler)가 ‘몽유병자들(sleepwalkers)’3)로 불렀던 17세기 천문학자들 중에서 가장 공헌이 큰 케플러는 독일의 루터주의 가정에서 나고 성장했다. 구교의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 북유럽에서 시작되었던 종교개혁은 루터주의와 캘빈주의를 탄생시켰고, 루터주의에 속했던 케플러는 신교라는 이유로 중심 사회로 진출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탓에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그는 다행히 뷔템베르크 공작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고 튜빙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는 성직자의 길을 걷는 대신 천문학과 수학에 관심을 두었고, 대학을 졸업하자 수학 강사로 취직해 버렸다. 23세의 젊은이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 있는 한 신학교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취직은 조건부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월급의 4분의 3만을 받기로 했다. 때문에 그는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별점 치는 일, 즉 점성술을 행했다. 그런데 이는 그에게 그라츠 지역사회의 신망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는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4) 이런 점에서 그는 평생 동안 천문학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점성술사였다.
케플러 박물관 내부 전시물
1596년에 케플러는 20대의 젊은이가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게다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당돌한 책을 집필했다. 그것은 바로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매우 조심스럽게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대변하는 『우주 구조의 신비(Mysterium Cosmographicum)』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플라톤의 수학을 신봉하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원론을 주창하여 우주를 본질의 세계인 ‘이데아의 세계’와 항상 변화하는 불완전한 ‘현상의 세계’로 구분했다. 그는 참다운 지식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인데, 이데아의 세계에는 직접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현상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창하면서 ‘수학’과 ‘이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물질인 물 · 불 · 흙 · 공기의 4원소를 각각 정다면체에 비유하여 설명하곤 했다.5)
이러한 플라톤의 수학 중심 사상은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다시 부활했는데, 학자들은 이러한 수학 중심 사조를 ‘신플라톤주의’라고 불렀다. 신플라톤주의는 수학을 중시하는 플라톤주의에다가 마술주의의 신비함을 더한 것으로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음을 강하게 믿었다. 동시에 자연에서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단순함과 조화로움을 꼽았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이 신플라톤주의는 천문학 혁명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코페르니쿠스가 우주의 중심을 지구가 아닌 태양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6)
케플러의 첫 주요 천문학 연구 『우주 구조의 신비』는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옹호한 최초의 출판물이다. 케플러는 그라츠에서 교직을 맡고 있을 때인 1595년 7월 19일에 토성과 목성의 궁도대에서의 주기적인 합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다각형들이 서로 안에 갇혀 우주의 기하학적 기반을 이룬다고 여겼고, 각 다각형들이 확실한 비율로 원에 내접하고 외접한다고 생각했다.
케플러의 다면체와 ‘코스모스의 신비’를 구현한 모형
케플러는 천문 관측 결과와 들어맞는 다각형들의 배열을 찾는 데 실패하자 입체 다면체를 주목했고, 플라톤의 다면체들이 구형의 천구에 각각 내접하거나 외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입체들은 다른 입체 안에 속함으로써 6개의 포개진 겹을 형성하는데 이 6개의 겹은 곧 당시까지 알려진 여섯 행성(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과 상응한다. 이들을 천구의 안쪽(중심부)에서 바깥쪽으로 순서대로 나열하면 정팔면체, 정이십면체, 정십이면체, 정사면체, 정육면체 순이다.
신플라톤주의의 강한 전통 안에 있었던 케플러 역시 수학을 중시 했으며, 특히 자연에 존재하는 정다각형이 모두 5개라는 사실을 강하게 믿었다. 때문에 그는 “우주에는 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이라는 6개의 행성만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언뜻 매우 우스꽝스러운 답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정다면체가 5개이기 때문에 그와 내접, 외접하는 행성이 6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5개의 정다면체를 확실한 비율로 행성들이 운동하는 구에 내접하거나 외접하도록 배치했다.
수성과 금성 사이에는 정팔면체를, 금성과 지구 사이에는 정이십면체를, 지구와 화성 사이에는 정십이면체를,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정사면체를 그리고 목성과 토성 사이에는 정육면체를 배열했다. 그는 이 그림 체계를 ‘코스모스의 신비’라고 불렀으며, 각각의 정다면체와 행성 간 거리의 관계는 ‘신의 손’을 의미한다고 굳게 믿었다. 나아가 그는 우주에서 행성들이 회전할 때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를 음표로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우주의 음악이라고 불렀다.
케플러는 1595년에 23세의 바바라 뮐러와 결혼했다. 지극히 가난했던 케플러는 두 번이나 이혼한 경력에 딸까지 데리고 있었지만 전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은 데다가 유복한 방앗간 주인의 딸이었던 바바라를 선택했다. 어렵사리 결혼한 케플러는 이제 막 행복한 가정을 꾸릴 참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엄청난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그라츠를 지배하던 대공은 가톨릭교를 매우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연이은 마녀재판과 핍박 속에서 신교도였던 케플러는 그라츠에 계속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곳으로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 어떤 곳에서도 미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절망에 빠져 있던 케플러는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천문학 장비와 인력을 보유했고, 가장 정확한 관측 자료를 수집하던 덴마크 황실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7)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티코는 괴팍한 성격 탓에 많은 사람에게 회피의 대상이었다. 케플러 역시 티코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코를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 탓에 케플러는 서둘러 티코를 찾았다. 케플러는 아직 티코가 자리를 주겠다는 허락을 내리지도 않았는데도 1600년 1월 프라하를 향해 발길을 내딛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티코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실 수학자인 우르수스(Reimarus Ursus)와 추한 싸움을 벌이던 중이라 우르수스를 공격하는 데 이용할 목적으로 케플러를 초청할까 생각하던 중이었다.8) 케플러가 수학적 계산에 뛰어났기 때문에 티코는 그의 이용 가치를 깨달았다. 또 때마침 케플러의 저작에 감명을 받았던 황제 루돌프 2세의 고문인 바론 호프만(Baron Hoffman)이 프라하로 가는 길에 티코를 케플러에게 소개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마침내 1600년 2월 4일에 케플러와 티코는 베나트키 성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때 티코의 나이는 53세였고, 케플러는 28세였다. 천문학의 두 거장이 만난 것이다. 티코는 가장 방대하고 정확한 천문 자료를 보유했고, 케플러는 수학적 능력과 우주의 신비를 풀어내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었다. 하지만 케플러의 삶은 고단하고 어려웠다. 쫓겨나다시피 이주해 온 루터파의 가난한 천문학자에게 도시 프라하는 처음에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에는 항상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는 법이라고 했던가! 도망치듯 찾아간 프라하에서, 결코 살아내기가 쉽지 않았던 프라하에서 케플러는 그야말로 인생 최고의 보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케플러와 티코는 가깝지만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어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싸우기를 반복했다. 티코는 덴마크 귀족 출신인 데다가 왕으로부터 섬을 기증받기도 하고 왕실 천문대장이었던 탓에 거만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늘 아첨꾼이 북적댔다. 반면에 신경질적이었던 케플러는 아버지뻘이나 되는 티코에게 사사건건 대들기 일쑤였다.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의 동상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탓에 케플러는 심한 마음고생을 해야 했으며, 특히 아첨꾼들로부터 시골에서 온 촌뜨기라는 놀림과 왕따를 당해야 했다. 또 일찍부터 케플러의 능력을 알아보고, 언젠가 케플러가 자신의 경쟁자가 될 것임을 알아챈 티코는 케플러에게 화성 관측 자료를 매우 조금씩만 제공했다. 심지어는 케플러가 우르수스의 끄나풀이 아닌지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케플러가 온갖 어려움을 참아 가며 정규직으로 정착하기까지는 티코와의 몇 차례 심한 싸움을 더 거쳐야 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은 1601년 10월 24일에 티코가 돌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9) 이 갑작스런 죽음으로 케플러는 티코가 평생 동안 관측했던 엄청나고 방대한 관측 자료들을 고스란히 넘겨받게 되었다. 특히 티코의 화성 관측 자료는 그 당시로써는 가장 정확한 것으로, 티코가 살아 있었다면 결코 케플러가 접근할 수 없는 자료였다. 케플러는 바로 이 화성의 관측 자료를 두고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가 ‘화성과의 전투’라고 불렀던 이 계산 작업에는 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티코의 데이터로 얻은 결론은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약간 찌그러진 원, 즉 타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케플러는 자신의 계산을 의심했다. 하지만 다시금 계산을 시도하여 종국에는 행성들이 운행하는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획기적인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10)
오늘날 도시 프라하에는 크고 작은 박물관이 20여 개가 넘는다. 케플러 박물관 이외에도 케플러의 흔적을 보여 주는 곳으로 국립 테크니컬 박물관(National Technical Museum)이 있다. 이곳 역시 천문학자이자 점성술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케플러의 과학적 면모를 잘 보여 주는데, 특히 2009년에 기획되었던 ‘프라하에서의 케플러(Kepler in Prague)’ 특별 전시회는 1600년부터 1612년까지 케플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집중적으로 조망했다.
케플러는 프라하에 머물면서 행성 운동의 두 가지 중요한 법칙을 발견했으며, 5년 동안 매일 찰스브리지를 건너 프라하 성을 오고가며 천문학 자료를 수학적으로 계산했다. 그리고 1604년에는 초신성을 관측했다.
1611년에 그는 눈송이가 육각형임을 설명하는 다소 생소한 소규모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가 「육각형 눈송이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을 집필한 것은 영국의 토머스 해리엇이 상사의 요청으로 포탄 무더기가 쌓인 모양을 보고 포탄의 개수를 알아낼 수 있는 공식을 만들다가 당시 최고의 수학자로 명성을 날리던 케플러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케플러는 가장 밀도가 높게 구를 쌓는 방법은 시장 상인들이 과일을 쌓을 때처럼 육방 밀집 쌓기를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프라하에서의 케플러’ 특별전은 케플러뿐만 아니라 근대 세계를 열었던 5명의 과학자인 코페르니쿠스, 티코 브라헤, 갈릴레오, 뉴턴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는가도 보여 주었다. 여러 과학박물관이 공동으로 기획하고 전시물들을 모아 준비했는데 스웨덴 히븐 섬에 위치한 티코 브라헤 박물관에서는 티코가 사용했던 각종 천문학 기구들과 자료를 전시하였고, 프라하 예술 아카데미도 역시 소장하던 천체 관련 전시품들을 선보였다.
이 특별전에서 흥미로운 전시물 중 하나는 케플러가 프라하에 머무는 12년 동안 내내 혼자서 고민하고 공부했던 달에 관한 여행을 다룬 책 『꿈(The Dream: Somnium)』이다. 이 책은 1608년에 출간되어 달에 관한 세계 최초의 SF 과학소설11)이라고 칭할 수 있다. 케플러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서 꿈속에서 벌어진 내용을 엮은 것으로 티코의 제자가 초자연적인 힘을 얻어 달을 여행하게 되는 내용이다. 소설에서는 인간이 달에 가기 위해서 험난한 과정을 겪는데, 지독한 추위나 공기가 주는 저항 등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를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국립 테크니컬 박물관 내부 모습
또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는 악마들과 어울려 지내다가 우주여행의 의미를 알게 되는데, 이러한 내용 때문에 케플러의 어머니 카타리나 케플러는 마녀로 의심받아 재판장에 끌려가기도 했다. 다행히도 나중에 무죄임이 밝혀져 그의 어머니는 풀려났다. 케플러는 꿈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무려 223개의 주석을 달았는데, 주석이 본문보다 분량이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국립 테크니컬 박물관은 특별전 이외에도 체코 공화국에서 전개된 과학기술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 주는 제법 규모가 큰 과학박물관이다. 1908년에 설립되었고 1941년 이후 지금까지 현재의 레나 공원 근처에 자리하였으며 모두 5개의 상설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 주는 건축과 공학 및 디자인관이 가장 대표적이고 자동차 · 헬리콥터 · 비행기 · 오토바이 등 탈것에 관해 전시하는 교통의 역사관도 있다. 또 사진의 역사와 현재를 보여 주는 사진 전시관이 있으며, 인류 역사 진보에 필수적이었던 인쇄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관도 있다.
특히 천체천문학관에는 지난 2005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발견된 운석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 운석은 약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운석과 함께 티코와 케플러가 사용했던 각종 천체 관측 기구들도 전시되었다.
쫓겨나다시피 그라츠를 떠나 도시 프라하에 정착한 지 11년 만에 케플러는 세계 천문학계를 이끄는 정상급 과학자로 성장했다. 갖은 음모와 불편한 싸움을 견뎌내며 티코가 남긴 엄청난 자료에서 행성 운동의 3가지 법칙을 발견한 그는 이제 티코의 당당한 후계자가 되었다. 남은 인생은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강력한 후원자였던 루돌프 황제가 편집증과 정신착란으로 왕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었으며, 아내 바바라는 홍반열에 걸려 발작을 일으켰다. 아이들 셋은 모두 천연두에 걸렸고 결국 아들 하나를 잃고 말았다.
정치적 대변동과 종교적 불안 그리고 가정의 비극 등으로 더 이상 프라하에 머물 수 없게 된 케플러는 린츠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정착하지 못하였고 이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종교적 박해에 대항하다가 빈곤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케플러가 가장 화려했던 인생을 보냈던 도시 프라하를 방문하는 여행객들도 그 도시에서 인생의 가장 화려한 꿈을 꾸어 보면 어떨까 싶다.
[네이버 지식백과] 프라하 : 케플러 박물관 - 케플러, 우주의 중심에서 지구를 밀어내다 (세계의 과학관, 2015. 10. 25., 조숙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