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끝, 덩벙대며 들어 선 이 길이 피레네 산맥으로 가는 길
부딪치며 가는거야
우체국이 열리는 내일까지 이곳에서 하루 더 묵을까?
따듯한 침낭 속에서 온기를 즐기며 일어나기가 싫다. 룸메이트 스페인 아저씨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준비하는 소리조차 스페인 사람답게 에너지틱하다. 비옷에 비옷바지까지 챙겨 입고 그는 떠났다. 침낭 속에서 다시
한번 일정을 짜본다. 오늘 더 묵으며 생쟝을 돌아보고, 내일 우체국 열리는 시간에 산티아고로 당장 필요 없는 짐을
부치고 떠난다? (왜냐하면 오늘은 노동절이라 모든 관공서는 휴일이라고 한다.)
그래도 난 배낭을 메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고, 어차피 메고 갈 수 없는 것이라면 당장 조금 힘들더라도 일정까지 늦추며
기다릴 필요야 없잖아. 맞아 그러면 그냥 까미노 사무실로 올라가 짐은 다음 알베르게로 보내는 거야. 더 이상 꼼질
거리지 말고 일어나. 계획 없이, 자세한 정보 없이 떠나온 것에 대한 책임은 내 몫이고, 부딪치며 가는 거야.
이제 나는 진정한 순례자
까미노 사무실 도착 8시30분, 배낭을 받아 쥔 직원 왈, 택배 택시가 방금 떠났단다. 난감해 하는 나를 보더니 다른 방법이
있으니 놓고 가란다. 택배요금을 지불하고, 오늘 일정의 약도를 받았다. 피레네 산맥, 나포레옹 코스, 26K를 걷겠나 아니면
산 허리를 도는 14K를 걷겠나 묻는다. 두 거리를 걷는 것에 대한 감각이 없으므로 우선 오늘은 14K만 걷기로 했다. 나도
얼마까지를 걸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이 앞으로 내가 얼마를 걸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테스트의 첫날이다. 마을
끝자락 갈림길에서 산으로 가는 길과 산 허리를 돌아 가는 길이 갈리니 이정표 확인을 하며 가란 말을 뒤로 듣고 나왔다.
작은 배낭에 물과 간식과 우의와 작은 카메라를 넣고. 마을 등산 가게에서 스틱도 두 개, 순례자 표시라는 하얀 조가비도
하나 구입했다. 배낭에 매달린 하얀 조가비는 내가 순례자임을 표시해 줄 것이고,
어제의 비 예보와는 다르게 날씨는 맑고 화창하다.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조가비) 모양을 따라 걷는다. 가리비도 하나
배낭에 매달았겠다, 민박집과 등산용 상점에서 크리덴셜카드에 도장도 받았겠다, 이제 나는 진정 이 길의 주인공, 순례자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피레네 산이여
5월 초하루, 신록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 온갖 꽃들이 앞 다투며 피어나는 계절, 5월 생각만으로도 황홀한 이 계절에 그토록
원하던 이 길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이름 모를 새들의 맑고 청아한 지저귐조차 나를 반기며
건네는 환영의 인사로 들린다.
마을을 벗어나며 완만하게 오르막 산길로 이어지던 길에는 갓 돋기 시작한 유록의 나뭇잎이 햇빛에 반짝이고, 오늘 새벽까지
내린 비로 대지는 촉촉이 젖어 있다. 먼 산 능선위로 구름이 흐르는가하면 산허리를 감아 돌며 물결처럼 흘러가기도 한다,
높은 산 계곡 아래로 그림처럼 한 두 채의 농가집이 있기도 하고,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산길은 점점 가팔아지고, 산
아래 계곡은 깊어진다. 색색의 이름 모를 들꽃들이 산을 덮듯이 피어있다. 얼마를 걸었을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먼 능선길을
바라보던 곳, 첫 번째 알베르게 표시가 나온다. 피레네 산, 나포레옹길의 유일한 알베르게라는 오리손 이다.
너는 까미노 길에서 만난 첫 번째 천사야.
피레네 산맥의 유일한 알베르게 '오리손'의 bar
알베르게 임을 알 수 있는 빨래 줄에 널려 있는 빨래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부부를 나란히 세워놓고 내가 한 컷을 찍어줬다. 고맙다고 하는 부부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어디에서
왔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오늘 숙소는 어디로 할 것이냐는 건 이 길에서 묻는 일차적인 질문, 런던에서 왔다는 부부, 내가
가야하는 알베르게 이름을 듣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도를 펴든다. “네가 아마 길을 잘 못 든 것 같아. 이 길은 나포레옹
길로 가는 산길이란다.” 맙시사, 생쟝 마을을 벗어날 때 그 갈림길에서 나는 산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어쩐지, 산길이
환상이었어. 지금까지 걸었던 길은 천국이었는데, 이젠 난 어쩌지? 영국인 부부, 얼굴을 맞대고 의논한다. 방법은 택시를
불러, 내가 가려고 하는 장소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란다. 20분후에 도착한다는 콜택시를 부르고, 맥주 한잔씩을
들고 얘기를 나눈다. 금빛으로 부서져 내리는 피레네 산속 햇빛을 즐기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길을 잘못 들었었다는
당혹감 같은 것은 까맣게 잊었다. 젊고 예쁜 케이트는 웃으며 말한다. 너, 참 용감하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온다.
“용감?” 그 용감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와 그의 남편이 동시에 터져 나온 웃음에 케이트도 웃는다. 세 사람, 웃음의 의미는
제 각 각 무엇이었을까?
“너는 이 까미노 길에서 만난 첫 번째 천사야. 고마웠어요.” 그들도 안녕이라며 손을 흔든다.
도착한 택시를 타고 내 짐이 와 있을 첫 번째 마을 Valcarlos를 향해 떠난다. 강원도 산길이 무색할 만큼 경사도 심하고
길도 좁다. 차 두 대가 지나게 된다면 곡예를 해야 할 판, 다행이 내려오는 길에 다른 차와 만나지는 않았다. 창밖으로
지나는 5월의 피레네 산은 차를 타고 지나기엔 너무 아쉽다. 피레네 산과 이렇게 이별을 해야 하다니. 어쩌랴. 우리
인생에서 이렇게 놓치는 그 수많던 기회를 너도 알고 있잖아. 미련은 두지 말기.
걸으면야 3-4시간이겠지만, 30분 만에 나를 내려놓는다. 갑자기 ‘허망’하다는 생각, 걷고 또 걷겠다고 시작한 순례길 첫날,
7Km를 나는 택시를 타다니.
숲 속의 쉼터 - 알베르게 Benta
Varcalos, 아름다운 산골마을.
Volcarlos는 피레네 산자락의 아름다운 산 속 마을이었다. 물론 나는 국경을 넘었고, 이 곳은 스페인이다. 숙소인 Benta
알베르게는 계곡가에 지어진 깨끗하고 예쁜 곳이었다. 이층 침대의 윗 칸으로 배정을 받자 먼저 와 있던 브라질 아가씨가
불편 할 테니 침대 아래 칸을 쓰라며 양보해준다. 스페인 말 밖에는 못하는 아가씨와 약간의 영어만이 가능한 나와, 이
정도는 소통이 손짓 눈짓 발짓으로 가능하다. 호주에서 왔다는 영리하게 생긴 알리가 극진히 챙겨준다. 짐이 도착한다는
바(bar까지 대, 여섯 번은 오르내렸다. 택시 타며 아쉬워했던 거리만큼은 오르내리며 걸었던 것 같다. 산 속의 작은
마을이지만 오래된 석조의 성당이 있다. 하지만 평일엔 미사가 없는 것 같았다. 성당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생쟝의
까미노 협회사무소로 전화를 하자 직원 왈 ‘케롤라인’이 갖고 가는 것을 잊어 버렸다나. 누가 캐롤라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난감한 밤을 보낼 수밖에. 샤워 도구, 침낭, 갈아입을 옷, 등. 첫날부터 앞으로 만날 난관에 대한 예비 훈련을 충분히
했던 것 같다. 덕분에 호주, 네델란드, 영국, 브라질,등 다국적 국민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알베르게 첫날밤을 맞았다.
늦은 밤, 베르린에서 왔다는 젊은 독일인 부부, 4-5세된 어린 딸을 데리고 들어왔다. 10Km를 그 꼬마가 걸어 왔단다. 꼬마가
어떻게 그 길을 걸어 올 수 있느냐며 놀라워하자 애 아빠 “Why not?" 독일?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거의 밤새워 그 꼬마는
내 침대 위에서 기침을 했다. 준비 없이 떠난 나나, 자신감 하나로 떠난 철없는 애 아빠나 저울에 올0려놓으면 같은 눈금에
올라올 것 같다.
맨뒤의 머리하얀 아줌마는 네델란드인-뭔가 한자락 했을 것 같은 카리스마 넘치던
양반, 헤어진후 20여일 만에 레옹 어느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었던 4개국어가 능통했던
여장부, 앞의 젊은 영국인 여자. 까미노협회와의 소통시 스페인과 불어 통역을 맡아줬었음.
모두가 감사했던 사람들.
첫댓글 어차피 삶에는 예행 연습이 없는것,
혼자하는 긴 여행을 해 보지 않았지만 준비를 많이 했어도
현지에서 부딪힘은 예정과 달랐을거에요
금련화님 제 눈이 연둣빛으로 물들더니 마음도 물이 들었어요
길을 물으며 저도 떠나 봅니다 ^*^
룸메이트 스페인 아저씨의 부스럭 거리는 소리....
전 신경쓰여 잠도 못 잤을 것 같은데요...
집 떠나면 잠도 설치는데...
하여튼 용감하신 것 맞아요
"인생에서 이렇게 놓치는 그 수많던 기회를 너도 알고 있잖아. 미련은 두지 말기."
흥미가 진진하군요 .... 다음 스토리 기대됩니다!!! ^^ 앞으로 한달은 카페에 엄청자주 들락거리겠네요 ㅋㅋ. 금련화님 후기를 읽으니 남편이 같이 가자고 했을때 거절한게 쪼금 후회가 되려고 하는군요 !!
산티아고 가는 길, 첫번째 올려주신 여행기 몇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어요.._()_
제가 더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참으로 아름다우신 금련화 선생님.
천천히 다 들려주셔요. 처음부터 끝까지요.
언젠가..그 언젠가 저도 이 길을 따라서 걷고 싶습니다.
늘 꿈을 꾸는 길이네요
동행자처럼 따라갑니다
다시 오월의 그 봄으로 저도 따라갑니다
금련화님 ~
얼마나 불안하셨을 까 하는 맘보다
저 들꽃과 하늘은 정말 아름답고요
그 언제가는 가고자 하는 곳,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길을 떠나고 싶습니다.
터키여행에서 금련환님의 여행 소식을 들었지요.
역시나~
멋지십니다.
그리고 그 여행길 순례를 두 손 모아 감사합니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순례길이 넘 좋습니다.
즐감입니다.
다음엔 저도 그 길따라 걷고 있겠지요.
좋은 날입니다.
연재해주시는 여행길을 잘 따라가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렸을때 아버지께서 사놓으셨던 "김찬삼의 세계 무전여행기"
그 책을 여행의 멋도 몰랐을때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금련화님의 여행길에서 뜻하지 않은 시행착오로 발생한 일들도
다국적의 여행지기들의 도움과 배려로 이겨내셨던 상황들을 같이 겪는것 같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내가 만약 저 상황이었다면...
앞으로의 여행기가 기다려집니다.^*^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올려주시는 순례길.. 감동이구요 기대 하겠습니다^^
오월의 신록에 눈이 씻기는 듯합니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네요.
저도 나설 수 있을까, 고민해 보게 만드는군요.
꿈의 여정...산티아고 가는 길...
죽기전에 해야할 것에 들어있는 산티아고 가는 일..바람이 데려다주면 좋으련만..못가니 아프다
금련화님은 멋지신 분이다
그 곳으로 바람처럼 흘러 가셨으니 말이다
사람 사는것이 무에란 말인가...바람처럼 흐르면 될것을... 흐르지 못하고 고여만 있다
갈테다! 언제가 되던... 노래처럼 먼지가 되서라도 갈테다
백련화님이 넘 부러워요~~~
제갸
죽기 전에 가고싶은 곳이
1. 쿠바
2. 프라하
3. 인도
입니다...
그런데
산타아고를 4번으로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감칠한듯 새파란하늘과 흰구름 또 초록마을~
얼마나 행복하셨을까
저도같이 행복합니다 ~
풍경도 글도 하나되어 다가오는 시간
아름다운 길.....
진정한 순례자가 되시던 순간이 진하게 전해옵니다.....
한분 한분 댓글 올려 주신 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격려와 위로의 글들, 일일이 답을 드리지 못함에 용서를 구하며, 피엘님, 무소유님, veronique님, 자히르님, 구절초2님, 비바우님,
산마루님, 준희님, 그린티님, 뜰에봄님, 백단림님, 쉼표님, 이삐님, 커피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