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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역사보기 9. 임진왜란과 黨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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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당시 서인(西人)들은 대부분 유배를 가 있었다. 조정의 실권(實權)은 동인(東人)이 쥐고 있었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유성룡(柳成龍),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이 3정승이었는데 동인 중에서 뒤에 북인(北人)이 되는 이산해, 남인(南人)이 되는 유성룡이 주축이었다. 이양원도 이황(李滉)의 문인이니 유성룡과 가까웠다.
일본군이 보름도 안 돼 한양까지 밀고 올라오자 선조는 궁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蒙塵)에 나섰다. 같은 해 5월 2일 개경에 도착했을 때 백성들이 길을 막고서 ‘정철(鄭澈)을 불러들이라’고 소리 질렀고, 신하들은 ‘이산해가 나라를 망쳤다’고 지목했다. 이에 신하들과의 격론 끝에 이산해는 유배형에 처하고, 유성룡은 그나마 좌의정에서 내쫓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다시 서인의 시대가 열렸다. 바로 다음 날 최홍원이 좌의정, 귀양 갔던 윤두수(尹斗壽)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두 사람은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 제수된다. 더불어 함경도 강계로 유배 갔던 정철도 불러올린다. 임진왜란이 서인의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전쟁 발발 가능성을 두고서 동인과 서인이 각기 다른 입장을 보였는데, 결과적으로 서인 황윤길의 진단이 옳았다는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실록에는 그가 정승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591년에 일본이 우리나라에 명(明)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윤두수가 가장 먼저 중국에 그것을 고할 것을 청했다. 이 때문에 임진년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중국이 끝내 우리나라를 의심하지 않았다. 상(上)이 이 일로 그를 인재로 여겨 드디어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다.”
南人-西人 공동정권
같은 서인이지만 윤두수는 정철처럼 날이 서 있지 않았고 성품도 온화해 남인과도 크게 대립하지 않았다. 또 큰일에 임해서는 직언을 아끼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복귀해, 남인 영의정에 서인 좌의정의 공동정권이 만들어졌다.
전쟁 발발 1년 반이 지난 1593년 10월 1일 선조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때는 명나라가 일본과 추진하는 강화(講和)협상이 조정의 뜨거운 감자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한 한 유성룡과 윤두수는 같은 입장이었다. 즉 두 사람은 중국의 경우 언제나 주변 국가들에 대해 직접 통제보다는 간접 통제를 선호한다며 ‘기미론(羈縻論)’, 즉 강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선조는 초지일관 강화를 반대하며 일본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내세웠다.
기미론은 특히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선조의 미움 대상이 되면서 정권의 축(軸)이 서인과 남인 모두를 떠나 의병(義兵) 참여가 많았던 북인 쪽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전쟁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1594년에 이르면 권세를 회복한 남인들이 다시 ‘정여립(鄭汝立)의 난’ 때 죽은 최영경(崔永慶) 문제를 들고나온다. 사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전쟁 중에도 당쟁(黨爭)이라니! 이건창(李建昌)은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이렇게 통탄한다.
〈이때는 종묘나 사직의 터에 풀만 나고 여러 가지 일들이 처음 시작하는 것과 같아 어수선한데 대사헌 김우옹(金宇顒)의 무리가 제일 먼저 정철의 죄를 논의하며 말했다.
“최영경이 원통하게 죽은 것이 병화(兵禍)를 부른 것이다.”
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는 정엽(鄭曄)과 신흠(申欽)이 (같은 서인인) 정철을 두둔하고 김우옹을 배척했는데 선조는 이에 정엽의 무리를 파면시켰다. 김우옹은 비록 정인홍(鄭仁弘)과 정여립을 좋아했으나 유성룡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마침내 남인이 됐다.〉
윤두수 탄핵
군주의 필수 덕목인 강명(剛明) 중에서 한결같음[剛]은 모자라고 눈 밝음[明]은 뛰어난 편인 선조는 마음이 점점 서인을 떠나 남인 쪽으로, 그리고 다시 북인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같은 해인 1594년 10월 20일 마침내 사헌부에서는 좌의정 윤두수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좌의정 윤두수는 본래 성품이 음흉한데다가 탐욕스럽고 교활하여 간신(奸臣)이 국사를 담당하고 있을 때에 그의 사주를 받아 선사(善士)를 해쳐 (정여립의 난 당시 두수는 대사헌으로 최영경을 논핵했다) 옥중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죽게 하였고, 죽은 뒤에는 자진(自盡)하였다는 말을 지어내 무고한 사람으로 하여금 구천(九泉)에서 원통함을 품게 하였으니, 그의 마음씀이 매우 음흉하고 참혹합니다.
그리고 변란이 일어난 초기에 파천(播遷)할 적에는 조정에 들어와 법을 한 손에 쥐고 전권(專權)을 자행하면서 국가의 위급함은 생각지 않고 오직 재물을 모아 자신을 살찌우는 것만 일삼아 아첨하는 무리를 열읍(列邑)에다 배치시켜 놓음으로써 뇌물이 모여들고 채단(彩段)이 무더기로 쌓여 사방에서 못된 짓을 본받아 탐욕스러움이 풍습을 이루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만이 침 뱉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장수도 비루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뛰어난 이를 질투하고 공 있는 이를 시기하며 언로(言路)를 막음으로써 인심이 흩어지고 국사가 날로 잘못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조야(朝野)의 모든 사람이 누군들 분통스럽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3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됨에 있어서는 맡은 책임이 매우 중한데도 탐욕스럽고 비루한 습관을 고치지 못하여 뇌물이 문전에 운집(雲集)하고 짐바리가 도로에 끊이질 않았습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최영경 죽음에 관련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막연히 권세를 휘두르며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선조의 반응이 미지근하다.
“좌의정이 어찌 그러했겠는가? 이러한 때에 중임을 맡은 대신을 어찌 논하겠는가?”
이는 사실상 상소의 내용은 인정하되,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반응이다. 그냥 있는 남인들이 아니다. 이때부터 사헌부와 사간원이 경쟁이라도 하듯 매일 한 건씩 윤두수의 체직(遞職)을 청하는 소(疏)를 올렸고, 결국 11월 1일 윤두수는 중추부 판사로 물러나게 된다. 일단 2선으로 물린 것이다. 전란 초기 2년 동안 국난 수습에 큰 공을 세운 정승에 대한 예우라 할 수 없다. 당쟁의 시대였다. 윤두수가 물러난 좌의정 자리는 유성룡, 김응남(金應南), 정탁(鄭琢)이 번갈아 맡게 된다.
이순신
이순신(李舜臣)은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던 1545년 을사년 3월 8일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살림이 어려워 어머니 변씨의 친정이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갔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을 아산에서 보냈다. 어려서는 두 형을 따라 학문을 익히며 문신(文臣)의 길을 꿈꿨으나 어느 시점에 무인(武人)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의 장인 방진(方震)이다. 이순신은 20세 무렵 방진의 딸과 결혼했다. 이순신이 무신의 길을 택한 데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권유와 지도가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아산 현충사 경내에 있는 방진의 비문에는 이순신의 결혼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기록돼 있다. 당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방진에게 이순신과 딸을 결혼시킬 것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22세 때 이순신은 본격적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해 28세 때 처음으로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지만 말을 타다가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낙방했다. 그러고 나서 4년 후인 선조 9년(1576년) 무과에 급제해 함경도 최전방의 권관(權官·임시관리)으로 나간다. 오늘날의 초급장교인 셈이었다.
이후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 충청도절도사 군관, 함경도절도사 군관 등을 지내며 사복시 주부에 올랐다. 이후 이순신은 선조 19년(1586년) 북방의 오랑캐들이 난리를 일으키자 조산보 병마만호가 되어 최전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8월에는 두만강 내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되는데 사정을 돌아본 병마만호 이순신은 이 섬의 위치가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군사를 증원해줄 것을 함경도절도사 이일(李鎰)에게 요청하지만 거절당했다. 이후 실제로 오랑캐가 급습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고 절도사 이일은 그 책임을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덮어씌웠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파직(罷職)당하고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 받았다. 이일은 그 후에도 계속 이순신의 앞길을 견제했다.
不次採用
실록을 보면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지기 몇 해 전부터 왜란의 조짐을 경계하고 있었다. 선조가 1589년(선조 22년) 1월 21일 비변사(備邊司)에 ‘불차채용(不次採用)’의 특명(特命)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은 서열에 관계없이 능력이 있는 장수들을 뽑아 올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비변사의 3정승과 병조판서 등이 각자 대여섯명씩 후보를 써냈다. 이때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이 각각 이순신을 추천했다. 중복 추천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정언신의 추천이다. 정언신은 이미 이순신을 직접 겪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언신은 명종 21년(1566년) 유성룡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고 사헌부 장령, 동부승지 등을 거쳐 함경도 병사로 나가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이 무렵 이순신과 첫 만남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와 대사헌, 부제학 등을 지냈고 선조 16년(1582년) 오랑캐 니탕개가 침입하자 함경도순찰사로 임명되어 이순신·신립·김시민·이억기 등을 거느리고 격퇴하였다. 이후 함경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변경의 방비를 강화해 그 공으로 병조판서에 올랐고, 이때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이순신을 천거한 것이었다.
선조의 불차채용 덕에 이순신은 복직하여 전라도순찰사 이광의 아래에 있다가 정읍현감을 지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광은 전라도관찰사로 충청도관찰사 윤선각, 경상도관찰사 김수 등과 함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한양수복 계획을 추진했다. 이때 막료인 권율 등이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할 것을 건의했으나, 이광은 용인에 진치고 있는 왜적을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가 기습을 받아 참패했다. 이때의 문제로 이광은 결국 많은 전공이 있었음에도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해군 이순신’ 만든 주역은 선조
한편 선조 24년(1591년) 2월 이순신은 진도군수로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전라좌수사로 특진한다.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해의 요충지로 보내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특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육군 이순신을 해군 이순신으로 변모시킨 주역은 선조다. 물론 거기에는 유성룡의 천거가 있었다.
이순신을 특진(特進)시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자 대간에서는 반발했다. 아무리 인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지나친 인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순신이라는 인물 자체를 선조가 당시에 알았을 리 없지만 서둘러 인재들을 뽑아 전면배치하라고 한 것은 선조였다. 선조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주변 정세의 움직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이어진 대간들의 이순신 반대 상소에 대한 선조의 답변에서 그 같은 절박감을 읽어낼 수 있다.
“지금은 상규(常規)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高下)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마라.”
적어도 이순신을 있게 하는 데 선조의 이 같은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선조가 이때 내린 결정의 진가는 1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극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1597년 1월 22일 전라도병마사 원균(元均)은 글을 올려 자신에게 바다를 맡겨줄 것을 청했다. 이에 선조는 닷새 후에 원균을 경상도우수사로 발령을 내렸다. 바로 이날 수군 강화와 관련해 전란 내내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영의정 유성룡과 중추부판사 윤두수가 이순신 문제로 충돌한다. 먼저 윤두수가 말했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 한산도에 물러나 지키고 있어서 이번 대계(大計)를 시행하지 못했으니, 대소 인신(人臣)이 누군들 통분해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마치 이순신이 유성룡의 기미론을 뒷받침하려고 의도적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뉘앙스다. 이에 선조는 적극적으로 화답한다.
“이순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계미년(癸未年·1583년) 이래 사람들이 모두 거짓되다고 하였다. 이번에 비변사가 ‘제장(諸將)과 수령들이 호령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비변사가 그들을 옹호해주기 때문이다. 중국 장수들이 못 하는 짓이 없이 조정을 속이고 있는데, 이런 습성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두 답습하고 있다. 이순신이 부산 왜영(倭營)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는데, 영상(領相·유성룡)이 이 자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랬을 이치가 없다.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줄 수 없다.”
이에 놀라기도 하고 이미 선조의 마음이 원균을 향하고 있음을 간파한 유성룡은 차츰 말을 바꿔간다. 이날 선조와 유성룡의 대화를 보자.
이순신을 버린 선조와 유성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