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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다녀와 하루종일 정리 했습니다...아래 목차 참조...
종치는 의미로 글 하나 소개합니다.. 아마 내년초 쯤 이 글집이 나올것입니다.... 훌륭한 조상님을 두신 여러분들... 부럽기도 합니다... 혹 간단하게 최부선생님에 대해 후손으로서 쓰고 싶은 말이 잇으면 제 메일로 송부하시기 바랍니다.. 체택이 되면 글 집에 실을 예정입니다....
참 광고 같은데요.... 2주전에 나온 제 책 ' 조선의 곷 열하일기'가 곧잘 나가고 있다고 출판사가 알려주네요...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저는 출판사가 돈을 내 많이 팔려도 별 볼일은 없습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
4.동방불패 영화는 허구만은 아니다.
1992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동방불패(東方不敗)’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표해록을 말하다 뜬금없이 웬 동방불패, 이 한 작품으로 완전 스타반열에 합류했던 그녀, 린칭샤(임청하). 나는 당시 그녀한테 홀딱 반했었다. 그녀가 벌써 나이 60이 넘었다고 하니.... 하지만 인걸은 떠나도 역사는 남는 법, 나는 영화를 배경 삼은 역사를 들추어 보려 한다.
이 영화는 한족의 명(明)나라에 대항해 먀오족의 나라를 세우려는 동방불패를 주인공으로 한 홍콩 무협영화다. 먀오족의 새로운 리더 동방불패는 ‘일월신교(日月神敎)’라는 종교집단을 장악하고 외세인 일본 낭인들까지 끌어들여 한족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먀오족끼리 내분을 거듭하다 결국 몰락한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영화 속에서 동방불패는 “너희 한족은 금(만주), 요(거란), 묘(묘족), 장(티베트), 몽(몽골), 회(회족) 6족 가운데 수가 가장 적은 먀오족(묘족)을 제일 괴롭혔다”고 일성을 내뱉는다. 허구적 사실에 근거한 영화라지만 나는 묘한 느낌이 든다.
왜일까. 1,300년 디아스포라 , 고구려 유민' 이란 책을 쓴 김인희 선생의 글에 따르면 “역사상 최초의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가 먀오족”이라고 주장한다.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 흔히 국가 소멸 뒤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을 뜻하는데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재일교포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카레이스키 등을 지칭한다. 그의 주장은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 측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장수 이적은 평양성을 함락한 뒤 668년 보장왕과 함께 20만 명의 유민들을 끌고 귀국했고, 이듬해인 669년 이들을 남쪽 공한지(空閑地)에 배치했다고 했다. 고구려 핵심 지배층을 고구려 본토와 머나먼 곳에 살게 해서 재기 의욕을 끊고, 포로들을 투입해 변경지역을 개발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중국 문헌에 먀오족에 대한 기록이 일절 없다가 10세기 이후 송나라 시대 때부터 갑자기 “고구려와 풍속이 닮았다.”면서 언급되는 까닭은 무엇을 의미할까. 저자는 먀오족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증거로 우선 전통 바지 ‘궁고’를 든다. 고대 복식을 보면 중국 남방지역은 무덥고 습하기 때문에 대개 엉덩이와 허벅다리 뒤쪽을 그대로 노출하는 개방형 바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먀오족만 유일하게 바지 위에다 또 한 번 큰 천을 덧대는 방식의 바지, 궁고를 입고 있다. 이는 고대 흉노족 복식이나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되는 복식과 비슷하다. 종아리 부근은 바짝 조이고,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은 통을 크게 넓힌 뒤 그 위에다 바지 천 하나를 덧씌워 두르다 보니 엉덩이 부분은 뾰족하게 솟아나도록 한 모양새다.
이는 추운 곳에서 말을 타야 하는 북방 유목민의 전형적인 복장이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형사취수(兄死娶嫂) 문화, 장례 전에 집안에 시신을 모셔 두는 풍습, 동명왕 신화처럼 아시아 동북부의 대표적 설화인 난생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 다양한 근거를 든다. 결정적으로 먀오족은 옷에다 조상에 대한 옛 기억을 그려 뒀다는 것이다. 이들은 여자들의 주름치마에 두 개의 강을, 웃옷 뒤편에는 큰 성을 그려 뒀다. 구전설화에 따르면 이들은 추운 곳에서 적에게 패배해 노란 물과 맑은 물을 건너 남쪽으로 왔다. 이게 바로 황하와 장강을 뜻한다는 것이다.
또 조상들이 머물렀던 곳을 잊지 않기 위해 고향에 두고 온 옛 성을 그려뒀다. 이 성의 문양은 장방형인데, 고대 성곽에서 장방형으로 지었던 성은 고구려 성이 가장 대표적이다. 재미있는 점은 서부 먀오족과 달리 동부 먀오족에게서는 ‘큰 강’에 대한 얘기 대신 ‘동쪽의 해 뜨는 바닷가’ 얘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를 고구려 패망 뒤 만주 일대에서 남쪽으로 끌려온 이들은 서부 먀오족, 고구려 평양성에서 바다 건너 끌려왔던 이들은 동부 먀오족이라고 해석한다.
동부 먀오족이 서부 먀오족보다 더 반항적이고 남방문화와 비교적 덜 섞여 든 이유와도 연결된다. 한마디로 평양성에 거주했던 고구려의 핵심 지배층이었던 까닭에 서부 먀오족에 비해 문화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다는 것이다. 먀오족은 쌀을 쌀이라 하며 고구려처럼 10월에 축제를 열며 다른 민족은 북을 맞이하는 축제가 없는데 둥둥둥 그들은 북을 치며 축제를 벌인다. 새 날개 형 관식을 꽂으며 고구려인같이 절풍 모자를 쓴다.
실제 명나라 말기에 먀오족은 줄곧 한족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먀오족은 명나라 말기까지만 해도 지방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토사(土司)’가 전권을 쥐는 반(半)독립 상태에 놓여 있었다. 구이저우성 일대에는 과거 먀오족이 한족에 저항했던 성터 등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이후에도 먀오족은 청나라 말기 구이저우, 윈난 등지에서 재차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만주 정권을 무너뜨리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중국 명나라(1368∼1644)를 세운 주원장은 왕조 수립 4년 뒤인 1371년 해상활동을 막는 해금(海禁)정책을 발표했다. 바로 중국의 동남쪽 골치 아픈 해상세력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폈던 것이다. 동방불패 영화가 근거 없다고 말 할 수 없으며 고구려 후손으로 보이는 먀오족의 호기 찬 자존심이 단순한 추정으로 나는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송·원나라 때 ‘바다의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중국의 해상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송·원나라가 대외교역으로 실리를 중시하며 개방정책을 폈다면 명나라는 농업 위주의 폐쇄적 정책을 썼다. 명나라는 조공무역만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이는 조선이 바다를 금하는 해금정책을 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해금정책이 강화되던 15세기 초 세계 항해사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3대 황제였던 영락제가 환관 출신의 원정대장 정화(鄭和·1371~1433)에게 대규모 해상원정을 감행토록 한 것이다. 그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회에 걸쳐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케냐에 이르는 30여 개국을 원정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도자기를 주고 열대지방의 보석, 동물, 광물 등을 교환해 이익을 얻었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이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섰다. 함대 규모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큰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이뿐이었다.
정화의 대 항해는 영락제와 홍희제에 이어 선덕제가 즉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명나라는 본격적인 쇄국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1567년 명나라는 민간무역을 인정해 해금정책을 완화하는 듯 보였으나 1644년 청나라가 들어서며 또다시 바다를 막았다. ‘해금(海禁)은 바다로 나아가 외국과 통교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의 약칭이다. 해상무역·해상교통뿐 아니라 어업까지도 규제하는 해양 통제정책이다. 조선 초기 태종은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를 금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도 1426년 ‘사사로이 국경 근처에서 무역하거나 바다로 나간 자는 장(杖·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했다. 태종 때는 바다에 나가 무역하는 것을 규제했지만, 세종 때는 아예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신라 시대에는 사신과 상인이 주로 해로를 통해 중국에 건너갔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신과 상인은 육로를 고집했다. 신라 시대에 장보고는 바다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했고 동북아시아의 국제무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 500년간 한반도에 ‘바다’는 없었다. 조선은 고려 말 삼별초 세력에 호되게 당했던 탓도 있지만 이웃한 명나라의 영향으로 해금정책을 썼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많다. 명 태조가 정권 위협 요인으로 간주한 강남의 해상 세력을 견제·탄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편 것처럼 조선도 고려 말부터 기승을 부렸던 왜구 등을 물리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위해 고려 말의 ‘공도정책(空島政策)’을 계승하고 명의 해금정책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섬을 비워둔다는 뜻의 ‘공도’는 섬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정부 규제다. 도적들이 섬에 숨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조선은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각 섬에 파견해 섬에 사는 주민이 있으면 육지로 데려왔다. 이 때문에 조선의 통상은 중국과 일본에 한정돼 있었다. 반면 당시 일본은 북해도와 네덜란드, 중국은 동남아시아와 서양 각국과도 접촉하고 있었다. 신라 시대에 장보고가 동남아뿐 아니라 이슬람 상인과 거래한 것과 비교하면 해양무역 측면에서 커다란 후퇴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의 이 해금정책은 약간의 기복이 있었지만 19세기 말 서구 열강과 근대적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500년간 지속됐다. 안정을 원한 조선은 통제하기 어려운 해양 세력의 불안정성을 싫어했다. 해양 세력은 다국적 성향과 자율성·독자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잃었다.
그런 탓에 조선 초기의 지도에서는 섬을 거의 볼 수 없다. ‘조선방역지도’에 표기된 섬은 제주도·대마도·진도뿐이다. 또 ‘동람도’에 나온 섬은 제주도·군산도·흑산도·남해·거제도·대마도에 불과했다. 조선 시대에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바다를 꺼리게 되고 바다를 장애 물로 여기게 됐다. 바다를 막은 조선은 경제·문화적 자폐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신라 시대엔 ‘개방’이 코드였다면, 조선 시대는 ‘폐쇄’가 코드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에 해양 문제를 일깨웠다. 일방적인 열세에서 벗어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의 승리 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이후에도 해양 문화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흑산도 홍어. 홍어 하면 단연 삭힌 맛이다. 하지만 원래 흑산도에서는 홍어를 싱싱한 회로 먹었다. 산지니까 항상 싱싱한 홍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구 침입이 잦자 아예 섬을 비우는 때가 많았다. 그 바람에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는 영산강을 따라 나주에 오르며 어느 새 삭혀지고 말았다. 그런데 소금에 절이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물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해 한번 맛을 보았더니 오히려 살점은 더욱 차지고 톡 쏘는 삭힌 맛이 오묘했다. 그 뒤 삭힌 홍어의 맛은 전라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흑산도에서도 점차 홍어를 삭혀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
홍어 장수는 매년 11월말이나 12월 쯤 흑산도로 향했다. 참 홍어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또 한사람의 표류자 문순득, 그는 1801년 12월 조선조 유배의 섬 흑산도에 홍어를 사러 출항했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 남방 유구국(오키나와)을 거쳐 여송국(呂宋國, 필립핀)에 다시 표류 기착했다가 마카오, 베이징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귀국한 사람이다. 다음은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한 사람들 이야기를 해야할까보다.
글 제목: 대덕에서 다시 쓴 최부 표해록
글을 펼치며
처음부터 최부의 표해록을 쓰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의 행적을 보고 다음 중국여행 때 어디를 갈지 참고나 해보자하는 딱 그 정도였다. 심심풀이 눈요기라 할까. 이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여파가 크다. 나는 이번 글 바로 전에 "조선의 꽃 열하일기"라는 책을 냈다. 연암도 열하를 다녀온 후 청나라 풍이 들었다고 한때 곤욕을 치루는 데 나 역시 글이 끝났는데도 여진이 남아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라마승을 만나보라는 황제 말을 거역하여 연행 사절이 자칫하다가는 본국으로의 귀환은커녕 객지에서 바로 귀양을 가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를 나을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연암은 이왕이면 운남이나 귀주로의 귀양살이 아니면 서촉과 강남 땅을 밟는 것이라면 하는 달콤한 상상을 하는 데 나 역시도 그런 달보드레한 꿈결을 헤매고 싶었을 뿐이다. 최부가 강남을 돌았다는 정보는 익히 입수한 터라 혹여 연암이 소망하던 귀주가 껴 있는가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다.
나로서는 어찌 표류를 하다가 어찌 구출된 것인지에 대해서보다는 '어디를 거쳐서 돌아 온거야.'가 더 궁금했다. 그런데 그것은 정녕 아니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어느새 나는 그의 표해의 바다 속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사실 그의 글은 성종의 전지를 받고 급히 쓴 글이라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참에 근거하여 짧게 쓴 글이라 느끼기에 따라서는 재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표류를 한 과정은 뭉뚱그려 쉬이 책 페이지를 넘기게도 된다. 그렇지만 그는 짧지만 명확하게 사실을 표현했고 처한 상황의 한 끄트머리도 놓치지 않았다.
절제된 글로서 격을 갖추면서도 표현 정확하고 분명하기 때문 사태를 파악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글 한자에도 음미의 가치는 수북했다. 험난한 최부와 42인 그들의 여정, 어느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았다. 그 시대 이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표류가 되면 겁에 질려서도 억울해서도 사람은 누구나 달라진다. 죽는 게 더 쉬운 상황이다. 극단으로 치닫던 마구잡이 식 중구난방인 42인은 그로써 일치단결 하여 꿈에 그리던 조선 땅을 다시 밟았다.
글의 표해, 모음과 자음 그리고 받침이 마구 흩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도 같이 그들 42인도 아전, 곁군, 호송군으로 나뉘어 표류를 거듭한다. 그런 그들은 모음과 자음 그리고 받침을 채워 낱말의 의미를 찾듯 종래에는 오합지졸에서 '우리는 하나다.'하는 의미를 얻으며 소생한다. 최부는 그런 과정을 짧은 단어 연결하듯 찬찬히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나타내었다. 진실이기 때문 과정은 눈에 바로 보이듯 선명하였고 결국은 모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내가 얻은 것은 인간 삶의 소중한 가치 그리고 삶의 신뢰에 대한 것이었다.
굳센 절의, 밝은 예절, 높은 인격은 어디서부터 발원하는 것인지 이에 대해 스스로 자득할 좋은 기회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싶다. 최부가 돌아와서 청파역 근처에 머물며 단 8일 만에 쓴 글이라는데 나는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다. 그는 조선 문화뿐만이 아니라 중국문화에도 매우 박식하였다. 관료로서 뿐 아니라 조선 선비로서 과거 급제자가 이 정도라면 하며 다시 또 놀랬다. 독후감으로 걸맞지 않을지 모르겠는데 조선의 사색당파도 똑똑하니 가능한 것이었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도 된다. 이 글 집에 나오는 조선 관료들의 애국애족을 보면 다들 일가견이 있으며 맞닿는 그들 의식에 모두 놀랄 것이다.
그는 중국 남북의 문화적 차이, 즉 남방은 번창하고 문명적이고 북방은 가난하고 거친 시대상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마치 1488년 조선과 중국의 정 중앙을 관통한 화살처럼 시대를 확연하게 드러내어 실 모습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으며, 때가 또 명 황제가 바뀐 시기 인지라 섭렵이 가능했던 많은 것들, 특히 관료들과 중국의 실상에 대한 이해는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이었다.
거기에 때 마침 열하일기를 독파한 터라 강남과 강북, 명과 청, 조선 전기와 후기에 대한 대비 또한 순조로웠다. 열하일기에 나오는 피서산장에서 썼다는 ‘피서록’ 과 장성 밖에서 들었다는 신기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구외이문’, 동란재에서 썼다는 ‘동란섭필’의 일부 내용은 달필의 그답게 풍속이나 인물, 역사 가릴 것 없이 무진장이라 최부의 말을 뒷받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유효 적절 했다. 나로선 채광의 기쁨에 본 글 집 또한 도드라지고 다복하여 글 가치나 신뢰적인 측면도 한껏 발휘되어 출중해졌다.
그의 글을 읽다가 보니 사실 항주도 소주도 다 다녀온 곳인데 내가 본 것은 본 것이 아니라는 아득한 생각도 들었다. 왕에게 올리는 글인데다가 그가 상중이라 최대한 감정을 참고 기술한 것이라 사실 글이 딱딱하고 수필가가 접근 하기는 용이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껴들 소지가 있다는 역발상이 생겨났다. 어디까지나 상상은 자유니까 그의 빈 공간을 내가 대신 채운다는 그런, 아무튼 매끄럽지는 않지만 올 곧고 정확한 그의 기술 덕분에 여정의 주제가 되는 키를 바로 찾고 그의 남겨 놓은 여지를 찾고 쫓아 나름 재미도 본 셈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참 세상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일일이 독수리 타법으로 좌판을 구타하듯 하면서 쓰려니 갈증이 꽤 일었었다, 떠오르는 착상이 순식간에 망가지기도 하고 손도 아프고 짜증도 나고 그러다 보니 훼방꾼이 수시로 마중을 나오곤 했다. 이문이 안 남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요즘 세상 이 늙수그레한 글을 누가 읽겠나 싶은 생각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 포기의 유혹이 만만하지 않았으며 나의 아주 고질적인 병폐, 하나에 빠져 들면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는 조급증내지 자폐증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이것저것 다 챙겨하려니 글 내용이 어떠하든 역사를 다루는 글은 이래저래 힘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던 차에 이글을 모처에 잘 번역해 놓은 기관(한국 콘텐츠 진흥원)이 있어서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서 내가 이 글을 가져다 역사수필로 엮어 책을 만드는 데 이용을 하고 싶은데 복사가 안 되어 그러니 도와줄 수 없겠냐고 했더니 자기네들도 그 파일을 만든 업체가 도산을 해서 없는데 뜻이 그러하다니 이번만은 타이프를 쳐서 무료로 제공을 해주겠다고 했다.
원 세상에나. 처음에는 비싼 값을 달라고 할까 봐 '그냥 보기만 되어 있는 거군요.'하면서 끊으려 했던 것인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2`3일내 해 준다니.와우! 그들은 타이프가 밥 먹는 것보다 쉬운가보다 했다. 그런데 단 이용을 한 결과물을 내야 한다고 하기에 그런다고 했다. 그 바람에 어쩔 수없이 '1488년 명과 조선을 관통한 최부의 표해' 란 의미를 담은 책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족쇄가 채워지고 말았다.
결국 일이 커졌다. 아무튼 독수리 타법이 그때부터선 한 숨 돌려 2016년 2월4일부터 시작한 글이 두 달도 채 안되어 초안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최부 선생이 내게 마술을 부린 것만 같다. 우연히 들여다보다 우여곡절 끝 어느 참 필연이 되었고 이제는 운명처럼 그의 글에 매달려 미소를 짓고 있다. 왜 이렇게 좋은 글을 여직 몰랐을까 하는 미안함도 곁에 있다. 여러분도 어느 날 우연히 이 책을 마주하기 바란다. 그러다보면 삶은 왜 성실하여야 하고 공자의 인과 예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어찌 진득하니 살아서 번성하며 삶의 신뢰는 어디서 발원하여 또 어떻게 꽃을 피우는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와우! 고전 책이 밥 먹는 것보다 훨씬 쉽네 하면서 말이다.
**최부의 표해록 번역본은 한국 콘텐츠 진흥원이 제공한 파일을 이용하였지만 글의 바탕은 어디까지나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원호 교수가 발간한 책을 활용한 것임을 밝혀둔다. 나는 간곡히 청하여 박원호 교수의 번역본 사용을 득하였다. **
대덕연구단지에서 조 성원 씀
목차
*권 1 (금남이라는 그의 호가 선명하다.)
1.표해록을 알알이 챙겨서 읽는다.
2.군신의 예 이전 부자간의 의리
3.표류하다 도착한 곳이 어딜까.
4.동방불패 영화는 허구만은 아니다.
5.제주도 해역 표류자들
6.추쇄 경차관이라는 관직의 직무
7.추쇄 경차관이라는 직함은
8.당시 조선과 명과의 관계
*쉬는 여백1 (배가 출발한다. 이곳이 바로 그 시대 별도포)
9.배타기 전 그가 한 일
10.위기에 봉착한 최부 일행
11.윤1월 4일, 큰 바다로 거침없이 빠져든다.
12.바다 한 가운데서
13.표류 5일 째
14.처음 섬에 닿았다.
15. 삶의 진실은
16.대당 영파부 하산에서 만난 해적
17.선비는 표리부동하지 않는다.
18.승선자에 대한 인사고과
19.올바르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
20.후추를 달라는 말에 최부는
*쉬는 여백 2 (뭍을 향하는 사람들.)
21.43인의 대 탈주
22.도저소라는 곳까지 강제로 끌려 간 43인
23.도저소라는 곳에서 심문을 받다.
24.도저소에서 5일
25.장보와 최부의 인연
26.현재는 닝보, 명나라 때는 영파부, 송나라때는 명주라 불린 곳
27.왕희지의 고향 소흥에서
28. 항주의 전당강과 진주태감
29.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1
30.‘당토행정기 담론’이라는 잡설에 대하여
*권 2 (경항대운하 중국인의 한 획)
31.항주 소주 그리고 경항대운하
32.수나라 이야기
33.소주에서 태평스런 운하를 보며
34.남송의 수도 항주 그리고 금나라
35.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2(항주의 오산과 용정차)
36 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3( 서호의 백제와 소제)
37. 소동파가 고려를 싫어한 이유
38.항주에서 머무는 동안 4 ( 서호 십경)
39.항주에서 가흥(嘉興)으로
40.태호석과 수호지
*쉬는 여백 3 닝보와 항저우를 연결한 사람들
41.소주의 아름다운 풍광
42.소주[蘇州]에서 소주[燒酒]에 취하듯
43. 진강 지나 장강을 건너서며
44. 진강에 금산사에서 고려 왕 충선왕은 잡혀갔다.
45.과주에 배를 대고 왕안석은 세상을 둘로 갈랐다.
46.자금성에 한규란이라는 여인
47.샹그릴라 꿈의 도시, 양주에서
48.회수의 회와 황하의 하가 합쳐져 회하라 하는 물길
49.서주는 빛 좋은 개살구
50.환관학교가 있었던 명나라
51.임청에 서문경과 반금련
52.橘化爲枳(귤화위지)라는 사자 성어
53.절강성 사람을 달리 보는 연암의 눈
54.명 9대 황제 홍치제의 서정쇄신
55.통주에서 조선 문인 이주(李胄)를 생각하며
*권 3 (명나라는 환관의 나라)
56.빨리 좀 보내주오.
57.성종실록과 최부 표해록 대조필
58.기다림의 나날
59.조선의 선비는 남다르다
60.어양역에서 사은사신을 만나다.
61.최부가 天使(황제가 파견한 사신)를 만난 날
62.산해관을 지나며
*쉬는 여백 4 (운하의 번영을 말한다.)
63.고죽국 그리고 백이숙제
64.성절사신 채수 이야기
65.요동은 우리 땅이다.
66. 조선시대 사신 영접 그리고 글 겨루기
67.드디어 압록강이다.
68.성종실록에 나오는 최부의 역사적 사실 모음
69.최부를 닮은 외손자 나덕헌과 유희춘
70.글에서 많이 나오는 그래서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하여
71.누에라는 벌레 하나가
72.애국 애족
부록1: 최부의 노정에 대한 총평.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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