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정
투어일자: 2016.7.25.
참석자: 통통한 토끼
투어목적지(경로): 대전> 옥천> 보은> 괴산> 충주> 제천> 원주> 평창> 영월> 단양> 영주> 문경> 상주>
보은> 대전
2. 감상 및 투어 포인트: 오늘은 그간 못가보고 궁금했던 곳을 랜덤하게 아무 계획없이 달려 봅니다. 풍수원 성당과
법흥사, 그리고 법흥 계곡이 궁금했던차에 그것들을 구경하겠노라 맘 먹고 나머지 코스는
오가는 길에 들러 봅니다. 폭염이 지속되는 날이었지만 오늘 제가 다릴땐 잔뜩 흐리기만하고
안개비가 살랑살랑 뿌려줘서 시원하게 달렸습니다. 적당히 젖고 달리고 하니 시원하기가
에어컨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가끔은 이런 변칙적인 라이딩도 활력소가 되는거 같습니다.
이번 투어에느서는 역시 계곡은 강원도!!! 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고 옵니다. 피서는
강원도의 계곡 아니면 피서가 아닌듯 합니다.
3. 견문 및 사진 기타 기록:
< 아침 일찍 출발해서 아무도 없는 대청호반길을 달리고 다시 보은땅을 밟고 괴산으로 향합니다. 575 지방도에서~~>
<대전에서 한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충주 엄정면 추평리에 도착합니다.>
< 추평리 3층 석탑 옆에 핀 무궁화~~>
한국에서 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동진(東晉)의 문인 곽복(郭璞:276~324)이 쓴 지리서(地理書) 《산해경(山海經)》에
‘군자의 나라에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더라(君子之國有薰華草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다. 또 중국의 고전인
《고금기(古今記)》에는 ‘군자의 나라에는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피었더라(君子之國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기록도 있다. 한국에서 자생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상에서 보면 4세기 중엽의
한국에는 가는 곳마다 무궁화가 만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궁화가 한국 자생(自生)인 것으로 믿을 만도
하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신라를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뜻함)이라 하였고, 《구당서》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 중국에서 한국을 근역(槿域)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예종(睿宗)은 고려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하였다. 무궁화는 주로 자가불화합성 식물(自家不和合性植物)이므로 오랫동안 수많은 잡종이 생겼을
것이고 또 변이(變異)에 의한 품종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나 오늘날 재래종으로서 볼만한 것이 드물다.
이러한 현상이 된 것은 외환(外患)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과 한국인들이 정원 꾸미는 것을 전통적으로 지나친 사치로 생각해
왔던 까닭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일제강점기에 무궁화가 한국 민족의 상징적인 꽃이라는 것을 알고 전국적으로 뽑아 없애버림으로써 큰
수난을 겪은 때문이다. 꽃나무가 한 민족의 이름으로 이처럼 가혹한 시련을 겪은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 애국지사 남궁억은
무궁화 묘목을 전국적으로 보급해오다가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동아일보 제호의 무궁화 도안도 삭제되었다. 1950년대부터
서울대학 농과대학 화훼연구실에서 학문적인 연구와 육종(育種), 세계적인 원예품종의 도입과 일반재배법의 개발 등이
시작되었다. 산림청 임목육종연구소와 농진청 원예연구소에서도 무궁화 육종에 착수했다. 1972년 역사상 처음으로 약 100품종의
무궁화를 전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무궁화 (두산백과)
< 구옥과 애마>
< 옛날 시골집에는 마당한 켠에 세면대가 있고 그 세면대 시멘트 구석에 이 채송화가 잘 피곤했었는데.....>
[채송화]
채송화는 남아메리카 원산이며 관상용으로 심는다. 마당의 한켠이나 담벼락 아래 주로 심었으며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란다.
줄기는 붉은 빛을 띠고 가지가 많이 갈라져서 퍼지며 높이 20cm 내외이다. 잎은 육질로 어긋나고 가늘고 긴 원기둥 모양이고
잎겨드랑이에 흰색 털이 있다. 꽃은 가지 끝에 1~2송이씩 달리고 지름 2.5cm 정도로 2개의 꽃받침조각과 5개의 꽃잎이 있다.
꽃잎은 끝이 파지고 붉은색 ·노란색 ·흰색과 더불어 겹꽃도 있다.
꽃은 7∼10월에 피고 맑은날 낮에 피며 오후 2시경에 시든다. 꽃받침은 2개로 넓은 달걀 모양이고 막질이며, 꽃잎은 5개로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고 끝이 파진다. 수술은 많으며 암술대에 5~9개의 암술머리가 있다. 열매는 삭과(蒴果)로 막질이고 9월에
성숙하며 중앙부에서 수평으로 갈라져 많은 종자가 나온다. 분이나 뜰에서 가꾸고 1번 심으면 종자가 떨어져서 매년 자란다.
전초를 반지련(半支蓮)이라고 하며, 주로 외용약으로 사용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채송화 [rose moss, 菜松花] (두산백과)
< 충주, 제천, 원주의 경계가 되는 화당고개 삼거리에서 531번지방도>
<화당3거리에서 제천방향으로 올라가면 이곳이 나온다. 올 3월에 통제되어 못 내간 곳... 저곳에서 내려가면 다시
화당3거리이다. 통제될만한게 도로가 북향에 계속되는 커브와 급경사라서 겨울에는 위험하다>
< 용소막 성당에 잠시 경유>
<여기는 용소막 성당이 아니라~~~ 풍수원성당이다.......배경이나 건축양식이 너무 흡사해서....착각이 들 정도다>
< 미사중이어서 밖에서만 잠시 사진기를 들어 본다. >
<퀴즈~~~ 여긴 아딜까요???>
<퀴즈~~~ 여긴 아딜까요???2>
<퀴즈~~~ 여긴 아딜까요???3>
<풍수원 성당 정문>
[성당]
우리 나라에서는 천주교회·천주교회 건물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신자들을 지체로 한
그리스도 신비체로서의 성역이라는 정신적 기능을 구체화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특정시대의 성당건물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교세를 반영하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를 일정부문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785년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신교의 자유가 획득된 1882년까지는 박해시기로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성당은 건립되지 못하고 교인들의 사가나 서당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종교의 자유가 획득되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은 박해시대 때 교회와 인연이 깊었던 곳이나 그 인근지역을 구입하여 성당을 건축하였다.
이 때 건축된 성당의 특이한 점은 서울·대구·인천 지역의 성당들이 고딕식이나 로마네스크식인 데 비해 지방의 성당들은 대부분
한옥을 개조하거나 한옥형태의 건물이었다는 점이다. 약현성당(지금의 중림동성당, 1892년)은 로마네스크식으로 건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성당으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며, 명동성당(1898)·인천답동성당(1899)·평양관후리성당(1900)·
대구계산동성당(1902)·전라북도 화산성당(1906) 등이 이 당시 건립된 대표적인 성당들이다.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목조 한옥성당들은 벽돌로 종탑을 증축하거나 벽체를 벽돌로 바꾸는 등 한양절충식(韓洋折衷式)으로
개조되고, 신축되는 성당건물들도 모두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구포동성당(1922)·신의주성당(1926)·서포성당(1931)·진남포성당(1933) 등이 이와 같은 형태에 속한다. 평양교구는 유럽
선교사들에 비하여 다소 진취적이었던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이 선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만주에 진출했을 때, 건물의 토착화로 민심을 사는 데 성공한 경험을 살려 한양절충식 건물을 신축하였다.
반면,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던 서울 및 대구지역은 명동성당이나 약현성당을 모방한 고딕식 내지 로마네스크식의 변형이
대부분이었다. 전동성당(1914)·인천답동성당(1937)·공세리성당(1921)·왜관성당(1928)·합덕성당(1929)이 그 예이다.
광복과 함께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야기된 사회불안 등으로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천주교의 교세는 급격히 팽창하였다.
따라서, 단시간에 많은 수의 성당이 필요하게 되었으나 건축을 주도한 성직자나 신자들이 건축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성당건물들은 이전보다 휠씬 단순하고 일률적이었으며 다소 조야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시기에 건축된 것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는 성당들은 청주내덕동성당(1960)·돈암동성당(1955)·혜화동성당(1960)
등이다. 1962년은 한국천주교회가 131년 만에 정식교구와 자립교구로 승격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었던 해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과 건축기술의 발달, 전문건축가의 활동 등으로 한국천주교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성당의 건축물도
보다 세련되고 그 수도 증가하게 된 해였다.
이 당시 건립된 성당들은 고딕·로마네스크식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건축가 자신의 신앙체험과 교회관에 따라 창조적인 형태를
띠게 되고, 경제성장과 교세에의 팽창으로 성당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평면구성에 있어서도 기존의 장방형에서 다각형으로 변모하였는데 이는 성직자 중심에서 신자중심으로 전례개념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순교지인 절두산에 세워진 복자기념성당인 양화진성당(1967)은 외양이 포물선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성당
제단에서의 성찬이나 복음이 외부세계로 퍼져나가 전파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마산성당(1980)은 부정형 평면형태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화해·축제·다원성 등을 지닌 교회의 기능과, 여기서 추출되는 동적인
측면을 수용하고 또한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당은 교구를 중심으로 한 거점적이며 등간격으로 분포되고 도시집중률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전례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토착화가 진행되었으나 건축에 있어서는 다양한 토착화의 과제를 가지지 못하고 대부분 형태에 집착하고 있다.
토착화의 진정한 의미가 복음이 한국문화 속으로 들어가 성장하는 것이라면, 이 시대 이 땅에 합당한 성당이 되기 위해서는
고건축 복고형이나 모방형이 아닌 현대건축이어야 하고, 거대화를 지양해야 하며, 수의 증가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지역의
자연적·인문적 여건에 적합한 건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86년 8월 현재 한국천주교회의 성당수는 692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당 [聖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뇌운계곡을 지나 법흥 계곡으로 향합니다. 평창강을 끼고~~>
< 법흥사에서 적멸보궁으로 가능길에>
<법흥사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부도 수령이 오래된 나무>
[법흥사]
무릉리 마애여래좌상에서 북쪽으로 달리며 보는 강과 계곡.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일대를 “치악산 동쪽에 있는 사자산은
수석이 30리에 뻗쳐 있으며, 법천강의 근원이 여기이다. 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무릉동도 아울러 계곡의 경치가 아주 훌륭하다.
복지(福地)라고도 하는데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그 경치 뛰어난 사자산(獅子山)의 남쪽 기슭에
‘법흥사’(法興寺)가 자리 잡고 있다.
사자산은 횡성과 평창, 영월의 세 경계가 만난 지점에 있다. 사자산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백덕산(1,350m)이 감싸주고, 서쪽으로는
삿갓봉, 남쪽으로는 연화봉이 둘러서서 웅장한 산악 맛을 내고 있다. 언제부터 사자산이라 불렸는지는 잘 알 수 없으며,
‘네 가지 재물이 있는 산’이기에 사재산(四財山)이라고도 부른다. 그 네 가지 재물은 산삼과 옻나무, 가물었을 때 훌륭한 대용
식량이 된다는 흰 진흙과 꿀이다.
법흥사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주차장 오른쪽으로 새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왼쪽 숲으로 약간 가려진 곳에
보물로 지정된 징효대사 부도비와 부도가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전수받아 선덕여왕 12년(643) 귀국한 뒤
오대산 상원사와 태백산 정암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영월에 법흥사를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이때의 절 이름은 흥녕사(興寧寺)였다. 그 뒤 징효대사 절중은 신라 말에 쌍봉사를 창건하여 선문을 크게
일으킨 철감선사 도윤에게 가르침을 받아 이 절을 사자산문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혜종 1년(944) 중건되고 이후 큰 화재를
만나 1,000년 가까이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이 다시 중건되면서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쭉쭉 뻗은 키 큰 전나무가 상쾌함을 주는 오솔길을 약 300m 걸어 올라가면 선원이 있고, 거기서 다시 오른쪽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적멸보궁이 나선다.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산속의 오솔길도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선원 뒤쪽에 보이는 사자산의
봉우리들이 서기를 머금고 법흥사 도량을 듬직하게 둘러싸며 웅장한 산악의 맛을 내고 있어 한껏 그 위를 올려다보고만
싶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법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초판 1994., 21쇄 2011., 돌베개)
<적멸보궁 오르는 마지막 계단....흐린 날인데도 비오듯 땀이 쏟아진다.>
<사자산과 법흥사 전각>
[적멸보궁]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보궁 안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은 것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사리탑이 건물 뒤쪽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사리탑을 넓은 방형 지대석 위에 팔각 하대석을 올려놓고 그 위에 중대석을 놓았는데,
상하 대석에 각각 앙련과 복련을 장식했다. 몸돌은 팔각이며, 전후 양면에 문비를 모각하고 나머지 여섯 면에 각각
신장상을 양각하였다. 지붕돌은 팔각으로 낙수면이 급하고 각 모서리마다 귀꽃을 장식하였으며, 상륜부는 보개와 보주를 갖추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법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초판 1994., 21쇄 2011., 돌베개)
[적멸보궁]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는 이 사리탑은 기실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스님의 부도일 뿐이다. 이것이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으로
둔갑한 연유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만 진신사리의 영원한 보전을 위해 자장율사가 사자산 어딘가에 사리를 숨겨둔 채
적멸보궁을 지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지금도 간혹 사자산 주변에 무지개가 서리는 것은 바로 그 사리가 발하는 광채 때문이라고
한다.
사리탑 옆에 있는 토굴은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토굴은 낮은 언덕에서 내려오는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흙으로 위를 덮었으며, 봉토를 올리기 위해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렸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이 작게 보이지만
내부는 높이 160㎝, 깊이 150㎝, 너비 190㎝ 정도 되는 비교적 넉넉한 공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법흥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3 - 동해ㆍ설악, 초판 1994., 21쇄 2011., 돌베개)
<법흥사의 주차장과 소나무>
<법흥계곡의 물안개>
[법흥계곡]
사자산(1,120m)에서 발원해 법흥사 앞을 거쳐 주천강으로 흘러드는 계곡이다. 사암봉·사자산·백덕산(1,350m)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모인 탓에 옆새우·열목어 등 1급수에서만 볼 수 있는 물고기들이 자란다. 상류는 경사가 급해
물살이 빠르다. 법흥리는 신라 후기 오교구산 가운데 하나인 흥녕선원지 (강원기념물 6)를 비롯하여 징효국사탑비(보물 612),
징효국사부도(강원유형문화재 72), 법흥사부도(강원유형문화재 73), 법흥사석분(강원유형문화재 109) 등 신라의 불교 문화가
많은 곳으로 계곡 상류 쪽에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여래 진신사리와 가사를 모시기 위해
세운 법흥사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법흥계곡 [法興溪谷] (두산백과)
<요선정으로 오르는 길>
[요선정]
자연을 담는 장소
법흥사에 부속된 작은 암자가 자리하였던 요선정에 오르면 서만이강과 법흥계곡의 푸른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펼쳐진 모습은 강물과 바위, 숲이 어우러져 만드는 최고의 절경으로 동강으로 흘러가는 계곡의 아름다움을
가장 멋지게 바라볼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필가이자 학자인 양사언이 이곳의 경관에 반하여 신선이
유람하는 암자라는 글귀를 바위에 새긴 것이 요선정의 유래가 되었다.
숙종이 하사한 어제시가 편액되어 걸려 있고 암자의 흔적을 알리는 작은 오층석탑과 바위에 암각되어 있는 마애불상이 단정한
정자와 잘 어울린다. 정자에서 소나무 숲으로 연결되는 계곡의 얕지 않은 자리는 초파일을 맞아 자연으로 물고기를 돌려보내는
방생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뜨거운 여름날의 법흥계곡 물놀이도 좋고 한가로운 정자에 몸을 기대고 노송 사이로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는 여유 또한 더위를 날리는 방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선정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마로니에북스)
<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이 있는 평창강>
< 지금보면 아름답지만 550여년전에는 처참한 유배지 청령포>
< 수양은 단종을 저곳에 가두는것만으로 불안해서 동서남북으로도 이동거리에 제한을 두고 결국에는 17세에 생을 마감케 한다.>
< 마구령에서......>
[마구령]
산은 나누고 막는 장벽으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산이 높고 험할수록 산을 경계로 풍습과 말투도 사뭇 다른 독특한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지만, 산기슭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 넘나들며 동질성을 지키려 애썼다. 산의 이쪽과 저쪽을
잇는 그 중심 은 으레 고갯길이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양백지간’에 위치한 경북 영주 마구령(馬驅嶺·820m)과 고치령(古峙嶺)
골짝에는 단종의 전설뿐 아니라 <정감록>을 믿는 후예들이 더러 남아 있다.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온 백두대간은 태백산을 지나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국토의 중앙부에 명산 소백산(1,440m)을
펼쳐 놓았다. 소백산의 주봉은 비로봉으로, 국망봉(1,421m), 제1연화봉(1,394m), 제2연화봉(1,357m), 죽령 남쪽의
도솔봉(1,314m)에 이르도록 웅대한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이었고, 오늘날 충북과 경북을
나누고 강원을 아우르며 3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소백산맥을 넘는 3대 고개는 죽령·문경새재·추풍령이다. 예부터 백두대간 소백산 아래 경북 영주에서 충북 단양으로
넘어가는 고개로는 죽령, 죽령 동쪽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고치령과 마구령이 있다. 죽령이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향하던 관문이라면 고치령은 소백과 태백을 나누는 고개요, 마구령은 단양 영춘면 의풍계곡에서 민초들이 부석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다. 마구령과 고치령은 길이 좁고 험해 백두대간을 따라 걷는 등산객들이 찾기 전까지만 해도 인적이 드물었다.
마구령과 고치령 사이에 위치한 의풍계곡은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十勝地)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의풍계곡은
비결서인 <정감록>과 <유산결(遊山訣)>에 언급되는 ‘양백지간(兩白之間)’, 곧 소백과 태백의 사이에 자리 잡은 까닭에 피란처
중 으뜸으로 꼽혔다.
예부터 의풍계곡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영남에서는 마구령과 고치령이 있어 접근하기 쉽지 않았고, 단양과 강원
영월에선 남한강을 따라 소백산과 태백산 험산준령을 넘어야 했다. 숲이 빽빽해 대낮에도 어두워 길을 잃기 쉬웠으니 임란이나 병
란도 비켜간 천혜의 은둔지였다. 한때 <정감록>을 믿는 후예들이 몰려와 좁은 계곡을 따라 200여가구 남짓 살았다는데 지금은
곳곳에 빈집들과 집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하지만 신통하게 효험을 봤다는 사람들은 약초꾼이나 산장지기를 일삼아 이곳을 떠
나질 못한다.
백두대간 마구령은 부석사 인근 임곡리에서 남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을 마주한다.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고개라 마구령(馬驅嶺)이라 하고, 경사가 심해 논을 매는 것처럼 힘들다 하여 ‘매기재’라고도 불린다.
그 이름만큼 고갯길은 험하다. 길은 좁고 발밑으로 깎아지른 벼랑이 아슬하게 서 있다. 돌고 도는 굽이마다 하늘이고, 돌고
돌아서면 좌우가 벼랑이다. 한고비를 넘으면 하늘에 성큼 다가서고, 한굽이를 돌면 하늘 끝에 닿는다.
마구령은 하늘로 오르는 고개다. 어느덧 하늘에서 내려가는 풍경은 오르는 것보다 훨씬 수려하다. 남대리에 내려서면
주막거리를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이 발걸음을 세운다. 마구령을 넘어다니던 행상과 선비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꽤 번창했음을
넌지시 알려주는 지명이다. 산 너머 마을에 장이 서는 날이면 이웃의 단양과 영월 사람들이 나무와 약초 등을 지게에 지고
주막거리를 지나 고치령을 넘어 순흥장과 단산장을, 마구령을 넘어 부석장을 다녔다.
이곳 남대리는 영주 순흥면에 유배와 있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단종이 잠시 머물렀다는 빗적거리에 단종쉼터와 단종대왕비가 조성돼 있다. 단종쉼터는 집 안에서 말하는 소리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아 ‘생방터’로 불리며, 단종의 수하와 금성대군 사이에 밀지가 오간 곳이라는 말이 전해 온다.
마구령 지척에 고치령(古峙嶺)이 있다. 고치령은 말 그대로 옛 고갯길로, 단산면 좌석리에서 마락리를 넘어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연결된다. 고개를 넘는 운치는 마구령보다 고치령이 한결 낫다. 연화교를 지나 고치령 정상까지 4㎞에 걸친 숲과 계곡, 차량도 뜸한
한적한 길, 11월 중순이면 누렇게 물들다 지쳐 떨어지는 낙엽송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고치령 마루에는 산령각(山靈閣)이라 쓰인 편액이 눈에 띈다. 역사 속 비운의 두 인물,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과 소백산
산신령이 된 금성대군을 함께 모신 곳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 영월 청령포에 유배됐다 관풍헌에서 사사된
단종을 민초들은 태백산의 산신령으로 받들어 모셨다. 어린 조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친형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으로 모셨다. 혈육조차 버린 단종과 금성대군의 혼령을 민초들은 이곳 산령각에 함께 모셨으니 소백산 신령
금성대군과 태백산 신령 단종이 산령각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고치령을 넘어 마락리로 내려가면 차가운 바람에 낙엽송이 서둘러 누런 잎을 떨어뜨린다. 말이 떨어질 정도로 비탈이 심하고
위험한 길이라 마락리란 이름을 얻은 깊은 골을 따라 돌아가는 길바닥에는 낙엽송이 만든 황금빛 카펫이 깔려 있다. 만추를
수놓는 낙엽송의 풍경도 올해가 마지막일 듯하다. 경제적 가치가 없는 낙엽송을 베어 굽은 길목에 쌓아 놓았다.
경치는 마락리로 내려가는 길이 좋고, 운치는 좌석리에서 오르는 길이 빼어나다. 마락리를 벗어나면 영춘면 의풍리다. 의
풍리는 삼도접경마을로, 십승지에 꼽힐 만큼 오지다.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 경북 영주시 단산면
남대리가 접해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은 달라도 생활권이 같은 한지붕 세가족이다.
[출처: 농민신문 김윤석 기자]
<지난 투어때 넘어간 고치령>
<고치령 정상에 있는 산령각.....태백산신인 단종과 소백산신인 금성대군을 모신 산령각....>
< 돌아가는 길, 향상 고향길을 밟고 지나간다. 향수의 고장 옥천과 대청호>
향 수(鄕愁)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고향을 뒤로 하고 오늘 투어를 마무리 하면서 집으로~~ 집으로~~>
오늘은 맘가는대로 정처없이 달려봤다. 하루 이렇게 자유로운 시간을 부여받았다는데 행복을 느낀다. 비록 중간중간에
힘든 고비도 있고 도움을 요청하기도하고 거절당하기도 하는 알수없는 세상사, 인간사에 내몰리기도 하지만 이것또한
또다른 여행이 아닐까 싶다. 땀으로 한번 샤워하고 내리는 안개비로 한번 샤워하고......달려오는 주행풍에 샤워하고..
땀냄새가 나지만 행복한 샤워를 몇번이나 한걸까.... ^^
첫댓글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투어도 투어지만 이글을 써 내려가는 열정또한 대단합니다
머릿속에 다 담지못해 미안할뿐입니다 ㅎㅎ
잘 보고갑니다^^
열정까지는 아니고 그냥 붙여넣기 하는 수준입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멋집니다.(대리만족)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