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 밀라노공대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김은상'이 이탈리아 밀라노 국립병원 '바씨디 종합병원'응급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다. 난 얼른 달려갔다. 아니 튕겨갔다. “별 큰 이상은 없답니다!” “!!!...”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렇게 우리의 서유럽여행은 무지개 언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드디어 2006년 8월 7일 아내와 난, 잠을 설치며 준비하고 또 준비한 큰 여행가방을 훈련하는 싸움소 타이어 끌 듯 하나씩 끌고 포항 공항으로 향했다. 오전 7시가 약속시간이지만 제철직원의 출근상황을 고려해 몇 십분 일찍 택시를 타자는 나의 성화 덕분에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다른 일행이 와 있을 리가 없다. 다른 날과는 달리 아내의 핀잔도 없다. 얼마 후 시간차를 두고 일행들이 모여들었다. 두 번째로는 아이 둘(민정이 민수)을 데리고 떠들썩하게 지달일 선생님 가족이 도착했고, 박원복 선생님 내외, 류윤성 선생님 내외, 회장님 배상갑 선생님 내외, 헐레벌떡 택시에서 내린 총무 엄기복 선생님 내외를 마지막으로 모두 다 모인 셈이다. 모두들 서부유럽 여행에 대한 행복한 기대가 얼굴에서 묻어나왔고, 박원복 선생님과 지달일 선생님은 담배연기도 함께 흘러 나왔다. 한없이... 인천국제공항 지하에서 한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모두들 맛있게 할 때가 아랫배가 보기 좋게(?)나온 가이드와 인사를 하고, 같이 포항을 떠나 온지 약 두 시간 반 후다. 그가 ‘가이드 홍선준’이다. 포항에서 로마로 바로 짐을 부치고 인천국제공항에서 로마행 비행기 표를 받으니 유럽여행 시작이 실감났다. 타는 게이트 24번 게이트, 탑승이 끝나자 자연스레 물이 흐르듯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어 이상적(?)인 자리 배치가 이루어졌다. 술 마시는 일을 염두에 둔 배치다. 12시간의 긴 비행, 기내식과 맥주 등으로 12시간의 지루함을 메웠지만 앞으로 펼쳐질 여행에 대한 기대 하나 만으로도 지루함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로마 '다빈치 국제공항'에 도착!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현지 가이드와 형식적인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그를 따라 식당을 거쳐 호텔로 향했다. 홍 가이드의 일사불란한 일 처리로 방배정이 끝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우리 모두는 총무 방에 모였다. 한국에서 가져온 술안주를 모두들 주섬 주섬 꺼낸다. 꼭 시골 할머니 저잣거리 보자기에 펼쳐놓는 모습들이다. 아니 그 종류들이다. 깻잎, 멸치볶음, 고추장, 골뱅이... 가져간 팩 소주를 따는 손이 모두들 파르르 떨리고 있다. 건배하는 잔에 앞으로 여행에 대한 희망과 기대 모두가 담겨있었고 그 잔을 앞 다투어 들이켰다. “위하여!!!” “위하여!!” 또 “위하여!” 무엇을 위하는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냥 위하고 싶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로마에서 우리 일행의 정과 사랑은 하루 저녁에 이루고 싶었다. 얼큰히 취해 살짝 비틀거리는 나와 그런 나를 부축해서 방으로 들어가는 아내를 가물거리는 복도 등불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포로로마노 속의 황제 8월 8일 로마의 아침은 호텔 모닝콜로 밝았다. 어제 저녁 로마 입성 자축 파티를 너무 무리하게 한 탓에 머리가 어지럽다. 하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유럽사냥에 들어간다. 왜 여행을 떠나는가? 라고 물으면 여행은 떠남이며,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고들 통속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분명한 하나의 진실이 담겨 있다. 모든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그것이 바로 여행이라는 진실인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은 아슬아슬하기에 더욱 짜릿한 것이다. 고갈된 내면을 자극하고 채워줄 새로운 것들에 대한 욕망, 그 길 떠남에 대한 갈구는 인간의 본능이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라고 시인 류시화가 말했다. 그리고 김훈은 그의 <자전거여행>에서 그 막막하고 끝없는 빈 들녘의 바람과 대면할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라고 말했다. 정말 시인이고 여행가다운 말이다. 로마! 로마! 약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는 테베레 강의 하류에 위치하는 이탈리아의 수도로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우며 로마시대에는 일찍이 고대 세계의 중심지였고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를 통해서 긴 시간 동안 유럽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여러 왕국과 공화국의 수도였으며 정치적, 군사적으로 고대 서구사회를 지배했던 로마 그 거대한 제국의 수도이다. 로마에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전설이 있다. 이것은 BC 753년 로마의 건설자 로물루스와 쌍둥이 형제 레무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레아 실비아와 전쟁신 마르스 사이에서 태어나 티베르강에 버려졌는데 이들을 늑대가 데려다 길렀다고 한다. 이들은 암 늑대의 젓을 먹고 자라났으며 그 후에 누가 이 도시를 통치할지를 두고 싸우다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물르스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의 왕이 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그 후 역사속에서 로마인은 궁지에 몰리면 야수처럼 저항하는 습성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암늑대의 이야기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그 후 BC 6세기 말 에트루리아계 왕을 추방하고 귀족에 의한 공화제를 실시함으로써 로마는 여러 라틴 도시의 맹주가 되어 고대 로마 국가의 중심이 될 기초를 닦았다. 로마인의 도시건설은 우선 광장을 만들고, 그 주위를 벽돌로 벽을 쌓고 교회당과 하수도를 둘러싼다. 또한 로마 유적의 특징은 완벽한 복원이라든가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과 자연미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의 콜로세움 옆에 있는 포로로마노로 들어가는 문인데 이문이 바로 그 유명한 프랑스의 개선문의 모델이기도 하다
로마는 가톨릭의 정신적, 물질적 중심지로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발자취를 남겼으며, 인류의 예술 및 지성사에 커다란 금자탑을 쌓아올린 도시이다. 현재는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도인 로마는 1,000년 이상 유럽의 모든 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제국의 영토 축소, 경제의 마비, 정치적, 군사적 무력 등으로 인해 세계를 지배하는 초 강대 세력으로서의 힘을 잃었지만 입법, 교육, 건축 도시로서 전 유럽에 계속 빛을 발했다. 6-15세기에 교황들의 입지는 때로 위태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전 세계에 그리스도교를 확산시킨 도시로서 영광을 누렸고, 궁극적으로는 부와 힘을 되찾았으며 또다시 미, 지혜, 예술의 도시가 되었다. 영원의 도시, 로마! 신화 속의 신들이 살던 도시, 또한 그 신과 대립했던 르네상스의 도시, 로마는 나에게 정말 아름답고 매혹적인 도시라고 자기감정에 도취하여 현지가이드는 열을 올리며 설명하고 있었다. 하나의 낱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얼굴이 교차하는 로마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신비로운 도시였다.
첫날 현지 가이드는 엄살이 심했다 바티칸 박물관과, 성베드로 대성당에 가려면 2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하므로 서둘러야 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하지만 진작 출발하는 오늘 아침에는 버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오는 도중 교통사고로 인해 늦었다고 했다. 믿을 수밖에. 아니 믿어 줄 수밖에... 약 30분을 지체하고 8시 30분에 바티칸 박물관에 도착했다. 도착하는 순간 입이 벌어졌다. 박물관에 입장하기위해 서 있는 줄이 끝이 없었다. 우리나라 설이나 추석명절 때 고향행 차를 타기위해 끝없이 서있는 줄은 줄도 아니다. 그야말로 끝이 없을 뿐 아니라 세계 인종 전시장 같았다. 저 줄에 우리도 끼어 또 다른 인종전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소매치기 조심의 이야기는 강조 차원을 넘어 거의 공갈 협박 수준이다.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꾸만 아내의 팔짱에 손이 갔다. 밀고 밀리어 드디어 도시속의 작은 나라 바티칸 공화국에 들어갔다. 더 자세히 말하면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갔다.
차츰 차츰 느낄 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난 압도당하고 있었다. 역사에 규모에 예술성에 섬세함에 웅장함에... 어느 것 하난들 날 감동시키지 않는 것이 없었다. 바티칸 박물관은 바티칸의 산 피에트르 대성당에 인접한 교황궁 내에 있는 미술관이다.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 고문서 등의 자료를 수장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 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단다. 창설은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1773년부터란다.
주요 작품은 고대조각에서부터 많은 그림 작품이 있었지만 르네상스 회화에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등 몇 작품 설명 외는 더 들을 수가 없었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바로 가슴으로 전해져 엄청난 감동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 감동은 성베드로 성당으로 이어졌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두고 한 말인가? 한마디로 엄청났다. 이 성당은 4C 목조 건물에서 6C 석조 건물로 재건할 때까지 세 번에 걸쳐 330년의 세월 동안 만들어졌단다. 중앙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계획, 설계하고, 다시 마테르노에 의해 성당의 정면이 완성하고, 베르니니가 광장을 마무리 할 때까지 르네상스 이후의 기라성 같은 거장들이 수세기에 걸쳐 참여하여 만들어낸 걸작이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지금의 성당 건물만도 150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20년의 긴 세월이 걸렸고 광장까지는 176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된 걸작이다. 교황이 직접 나와 30만 광장의 신도를 향하여 강복을 비는 '강복의 발코니' 아래에 중앙 현관이 있고 이를 통해 현관에 들어서면 5개의 문이 있다.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2년에 걸쳐 대리석 한 덩이로 조각하여 만들었다는 피에타는 어느 정신병자가 뛰어들어 망치로 손상을 입혀 지금은 유리 속에 보호되고 있었고. 직경이 50m에 꼭대기까지는 153m나 된다는 찬란한 돔, 395개의 미술 조각과 모자이크 그림, 135개를 넘는다는 찬란한 예술 조각들 이 모두가 나로 하여금 말을 잃게 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동서 211m에 중앙 통로 길이가 187m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로마의 최대 자랑거리며, 인류문화의 금자탑 앞에서 놀라면서 비교될 수 없는 우리나라의 유산들에 가슴이 씁쓸했다. 류 선생님과 형수님 그리고 나와 아내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최대 최고의 규모와 역사의 감동에 취해 비틀거리며 성당을 빠져나왔다. 중국요리로 점심을 먹었지만 바티칸 박물관과 성베드로 대성당의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없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오후 일정에 들어갔다. 첫날 저녁 그러니까 어제저녁일이다. 첫 대면의 가이드는 우리에게 다른 설명보다는 로마의 날씨 등을 핑계로 또 다른 여행상품을 팔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중 하나가 로마시내 리무진 택시 관광이다. 살인적인 더운 날씨니 귀족이 되어 최고급 리무진으로 관광을 하라는 이야기다. 설왕설래 끝에 하지 않기로 했지만 처음에 동의한 난 조금은 미안했고 쑥스러웠다. 오후는 트래비 분수와 스페인광장 그리고 콜로세움이다. 도중에 사랑의 가족팀은 리무진 택시를 타고 관광하기 위해 별도로 떠났다. 그 가족이 타고 갈, 침이 마르게 자랑하던 리무진 택시는 그냥 외재 밴츠 승용차 일 뿐이었다. “우리 안하기로 잘 했제?”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친다. 트래비 분수로 가는 길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날씨마저 우리를 축복하는 것 같았다. 리무진 택시를 타지 않기를 잘했다고 또 누가 말한다. 난 또 쑥스러웠다. 아주 조금. 이제 그만 좀 했으면... 트레비 분수는 니콜라 살비에 의해 1732년에서 1762년 까지 30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완성 되었단다. 트레비 분수는 로마 에서 볼 수 있는 바로크 양식의 마지막 걸작품으로서 트리톤 신들과 두 해마가 끌어 올린 커다란 조개 위에서 넵툰신이 위엄있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대리석 조각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는 물은 "처녀의 샘"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전쟁에서 돌아온 목이마른 로마 병정들에게 한 처녀가 샘을 알려 주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그 샘을 수원지로 한 물이 트레비 분수에 공급되기 때문이었다. 이곳 분수에 동전을 던짐으로써 다시 로마에 올 수 있다는 전설 때문에 로마를 다시 방문하기를 기원하는 많은 관광객들이 등을 돌리고 분수에 동전들을 던진단다.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 되고,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세 번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설명을 듣고 우리는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냈다. 우리 부부도 나란히 분수를 뒤로하고 앉았다. 우리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동전을 조심스레 던졌다. 동전은 우리 부부의 소망을 담고 분수 아래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가장 좋은 곳으로...
본젤라또 아이스크림의 본고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고 지나칠 우리가 아니다. 트래비 분수 바로 옆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손짓 발짓으로 아이스크림을 시키니 엄청난 크기의 아이스크림이 나온다. 아이스크림으로 배가 불러본 적은 처음이다. 부른 배를 안고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스페인의 교황청 대사관이 이 부근에 있었던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스페인 광장은 콜로세움, 트레비 분수와 함께 로마의 3대 명소라고 하지만 나에겐 조금은 실망스런 곳이기도 했다. 1726년 프랑스 대사의 기부로 만들어졌으며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햅번이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앉아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여 관광객들로 하루 종일 붐비는 유명한 노천 광장이 되었단다. ‘진실의 입’은 공사 관계로 가지 못하고 바로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콜로세움! 로마에 있는 거대한 원형경기장이다. 콜로세움은 플라비아누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라고 불렸다.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단다.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약간의 거만한 모습 때문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가이드 이지만 일사천리로 설명하는 모습에서 할 수 없이 우리도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반달족에 의해 더욱 심하게 파손되었단다. 한마로 대단했다. 쇠 장식으로 돌과 돌을 이었었는데 그 장식이 빠져나간 흔적이 이곳저곳에 수없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사진을 찍었다. 콜로세움을 통째로 다가져갈 작정이다. 아내도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다. 앞으로 어떤 어마어마한 일이 닥쳐 올 것을 아무것도 예상 못한 채... 진실의 입을 관람을 하지 못하자 가이드는 대신에 다른 곳을 안내했다. 공화정이 탄생한 장소 바로 <포로로마노>인 것이다. 베니치아광장과 콜로세움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로"라는 뜻은 공공 장이라는 의미로 또한 "포럼"이라는 말의 어원이 여기에서 생겼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상업, 정치, 종교 등의 시민생활에 필요한 기관의 모든 것들이 밀집해 있던 지역이다.
포로로마노의 내부 모습 중 일부. 세계대전 때 폭격을 당해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기에 지금도 발굴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중심지로써 로마제국의 발전과 번영 그리고 쇠퇴와 멸망이라고 말하는 로마 2500년의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중심이 되는 곳이다. 바실리카 에밀리아와 시저신전, 원로원, 개선문 등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있단다. 포로로마노를 마지막으로 로마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주위에는 옛날 로마 병사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심어졌다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특이한 형태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었다. 이탈리아에 와서 피자를 먹지 않고 갈 우리가 아니다. 하루 일정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피자집으로 곧장 향했다. 맥주와 포도주 그리고 피자를 먹으며 이탈리아의 밤을 정복하고 있었다. 얼큰히 취해 방으로 향해 먼저 들어간 아내 곁에 누우니 로마의 하루가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날 밤 난 포로로마노 속에서 고뇌하는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픈 아내(1)
8월 9일 야속한 로마의 태양은 어김없이 뜨고 있었다. 여행은, 여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겐 여행의 장소가, 때가, 어김없이 다시 돌아온다. 이번에도 벌써 왔다. 물샐 틈 없는 대규모 관료조직으로 엮인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여행조차도 하나의 통제된 사이클을 부여한다. 생각해보면 떠남과 만남은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의 경험일 터. 하지만 촘촘한 조직의 그물망 속에서 그 떠남과 만남의 때조차 이미 극도로 사회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마음 내킬 때 훌쩍 떠나는 여행이란 나에겐 얼마나 많은 한낱 공상일 뿐이었던가. 대신, 여름휴가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는 한꺼번에 수많은 떠남과 만남을 풀어놓는 거기에 동참했었다. 이제 난 그런 만남과 떠남은 싫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의 여행은 조직된 사회의 일탈이어야 한다. [정재서 칼럼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쯤, 아내가 잠을 잘못 자서 그렇다며 옆구리에 근육통이 있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따뜻한 물수건으로 찜질을 해주니 조금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칫솔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더니만 그만 엄청난 구토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주저앉았다. 아니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시퍼렇게 떠있는 내 눈앞에서…. 겁이 덜컹 났다. 난 부랴부랴 형수를 찾았다. 류윤성 선생님 사모님을 그냥 형수라고 불렀다. 너무나 부담 없고 편안한 분이라 쉽게 그런 호칭이 나왔다. 그냥 마음씨 좋은 형수 같았다.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로마 다빈치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이번여행에 같이 동행한 지달일 선생님의 아들 민수가 멀미증세를 심하게 보였다. 민수는 일찍이 나와는 깊은 인연이 있는 아이였다. 십사오년 전에 대학동창모임이 자주 있었다. 각자 돌아가며 동문 집에서 회식도 하곤 했었는데 어느 해 포항 대흥동 어느 동문 집에서 모여 놀던 중 아파트 베란다에서 아이들의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 달려 가보니 한 남자 아이가 소독 겸 말릴 작정으로 뚜껑을 열어둔 고추장독에 빠진게 아닌가. 아이의 두 다리는 고추장 칠갑이 되어 꼭 통째로 담근 오이고추장장아치 같았다. 그 아이가 민수다. 그 민수가 이번에 심하게 멀미를 했다. 약을 먹이고 해도 듣지 않았는데 형수님이 손끝을 살짝 따니 검은 피를 흘리고는 씻은 듯 나았다. 그 생각에 형수를 모시고 와서 손도 따고 온갖 응급처치를 다하였다. 덕분에 좀 나은 듯 하였지만 얼마 후 아내는 점점 더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냥 체했거나 식중독이나 멀미 따위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닌 것 같다. 덜컹 겁이 났다. 마른땀이 흐른다. 그렇다고 여행일정을 포기 할 수 없는 일이다. 포기할래야 할 수도 없다. 있을 곳도 없고 아는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오늘은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 섬, 나폴리 일정이다. 그래도 일행을 따라 나섰다. 아내는 버스 맨 뒷좌석에 누워서 계속 토하기만 한다. 저렇게 핏기 없는 아내 얼굴을 결혼해서 처음 본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미칠 지경이다. 이미 사실은 우리일행들 모두에게 알려졌다. 모두들 여행은 뒷전이고 걱정해준다. 사모님들은 가져온 온갖 약들을 다 들고 와서 아내에게 먹인다. 어디에 처방하는 약인지 따위는 소용없다. 아내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무조건 먹어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용해서 살며시 쳐다보니 아내가 잠이 들었다. 마음이 한결 나았다. 푹 자고 일어나면 좋아질 것이다. 아니 좋아져야한다. 다행히 로마에서 폼페이 까지가 멀다. 두 세 시간의 거리다. 그 시간동안이나마 푹 쉬면 나을 것 같았다. 폼페이 거의 다갈 무렵 아내는 부스스 일어난다. “좀 어때?”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좋아졌어요!” “이제 나은 것 같아요” 얼마나 반가운 말인가. 너무 좋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프지 않았던 것 보다 오히려 더 좋았다. 고마웠다. 얼굴도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내도 내 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준다. 눈물이 핑 돌았다. 폼페이에는 추적추적 비가내리고 있었다. 폼페이는 한때 인구가 2만 명에 이르렀던 로마귀족들의 휴양도시다. 완벽한 수도 시설과 잘 포장된 도로 그리고 벽화, 조각, 모자이크 등이 완벽하게 꾸며져 있다. 그러던 어느 날 (AD 79)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이 도시는 하루아침에 사라진 잊혀진 비운의 도시가 되었다. 1784년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으면 아직까지 전설속의 도시로 땅속에 남아있으리라. 한 개의 우산 속에서 깨끗이 나은 아내와 난 웃으며 폼페이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행복했다. 참으로 행복했다. 로마를 보게 되어서 행복했고 2000년 전의 이야기속의 도시를 보게 되어서 행복했지만 무엇보다 그렇게 아팠던 아내가 말끔히 나아서 더욱더 행복했다. 바둑판처럼 짜여진 도시구조, 길 곳곳에 설치된 수도시설, 지금보다 더 실용적으로 설계된 목욕탕과 사우나 시설, 길 곳곳에 마차를 끄는 말을 묶을 수 있도록 돌에 구멍을 파놓은 흔적, 그리고 밤에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흰 돌을 규칙적으로 배치한 점, 지금도 생생히 보존되어있는 수도관, 군데군데 모자이크그림들….
밤길을 잘 찾을 수 있도록 만든 돌
말 고삐를 묶을 수 있는 홈 어찌 2천년 전의 문명이 이렇게 발달되었는지 의문이 간다. 마차가 다녔다는 길은 모두 돌로 포장이 되어 있는데 마차 바퀴 자욱이 깊이 패여 있어 이 도시도 엄청나게 오랜 세월 영화를 누렸다는 증명을 해준다. 이러한 화려함이 베수비오 산의 대화산 폭발로 뒤덮여 모든 영화가 한순간에 없어진 것이다. 화산 폭발 당시 무서워 방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기도를 하고 있는 한 소년의 화석이 가슴 아프게 했고 폼페이 관광 내내 그 소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을까? 여유가 있으면 다른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베티의 집이 그것을 말해준다. 가이드는 암늑대와 수늑대로 비유해서 설명했다. 그곳 벽에는 온갖 선정적인 그림이 눈길을 끈다. 길 위까지 나온 테라스 같은 것도 눈길을 끈다. 이것은 길가는 사람을 호객하기위해 나온 것이란다. 길모퉁이를 몇 번 돌아서 상가들이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길 에 남자의 성기가 양각되어 있다. 그 끝이 가리키는 방향이 베티의 집이다. “컴퓨터가 없어서 그렇지 지금보다 못할게 뭐있노?” 서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는 2000년 전 과거의 폼페이에서 현재로 빠져나오면서 하는 류윤성 형님의 한 마디다. 점심은 스파게티다. 이탈리아 대표적 음식인 것이다. 총무는 재빠르게 포도주를 시킨다. 아내는 스파게티 요리를 연신 카메라에 담는다. 아프지 않다는 증거다. 마음이 놓였다. 소렌토로 가려면 기차를 타야한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엔 비가 내렸다 그쳤다 한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가곡에서 많이 듣던 소렌토는 그리 크지 않은 항구도시다. 절벽에 지은 많은 집들이 난공불락의 요새를 방불케 했다. 노래로 생각했던 것보다 인상 깊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돌아오라 소렌토로’ 노래비에서 다시는 못 올 기념사진도 찍었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기념비
말끔히 나은 아내가 노래비 옆에서 다시 배는 카프리 섬으로 향한다. 카프리 섬은 로마시대이전부터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유명한 여배우등의 별장도 많다. 바닷물 빛이 우리나라 해안의 그것과는 달랐다. 푸른 청동 빛 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물빛은 마치 꿈속에서 보는 듯 한 광경이다. 곤돌라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 본 모습은 과히 환상적이다. 이를 지중해 바다라고 부르는가? 역시 사진도 찍었고 아내는 나의 영원한 모델이 되어주었다. 정상에서 그 동안 아내를 위해 애써준 일행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맥주를 5병 샀다. 20유로다.
정상에서 본 카프리 섬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면서 본 카프리 카프리 섬을 보낸다. 나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 카프리를 놓아 준다. 나폴리도 가는 배는 나에게 생각을 가져다준다. 여행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일상의 지옥에서 벗어나려했던 뭇 사람의 시도가, 여행의 끝에선 결국 피로로 점철된 허탈스런 결말로 반복되는 까닭은. 너도나도 똑같은 스케줄과 여정으로 무장한 인파에, 깃발부대에, 차량 물결에 치여, 그토록 꿈꿨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남는 것은 바닥난 농협통장 잔고와 스트레스다. 쳇바퀴는 결코 일상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씁쓸한 각성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여전히 떠나고 싶어 한다. 지금 떠나지 않는다면, 언제 또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일상의 빠듯한 그물은 기약 없는 걱정 속에 사람들을 가둔다. 속절없는 기다림은 더 큰 후회를 낳을 뿐이다. 돌아가 다시 맞아야 할 팍팍한 일상은, 기회가 될 때 어디든, 어떻게든 떠나라고 거센 압력으로 우리의 등을 떠민다. 그래서 밀려서 떠나 온지도 모른다. 밀려서 계를 만들었고, 매월 10만원씩 갹출하여 여행비를 만들고 그것도 자동이체라는 편리한 도구를 이용하여 모으고 모아 여행의 기회가 떠밀어 이렇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른다. 몇 십 분을 달려온 항구 나폴리에도 어김없이 고대 유적이 널려있다. 웬만하면 돌로 지은 건물들이다.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중에 하나라는데 실망이다.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는 않는다. 나폴리는 밝은 태양과 아름다운 항구의 풍경으로 세계 3대 미항으로 손꼽히는 도시이다. 또한 이태리에선 3대 대도시로 남부에선 가장 큰 도시라고 한다. 그 나폴리시내에 있는 카스텔누오보성은 13세기 프랑스 영주에 의해서 지어졌다고 하는데 뒤 해변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며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베수비오 산의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는 폼페이로 용암은 나폴리로 흘렀는데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이 S자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올리브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를 따라 로마로 들어왔다. 로마의 마지막 밤이다. 저녁을 먹고 류윤성 선생님 방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져온 몇 남지 않은 소주를 들이켰다. 출렁이는 소주잔에 화산재에 휩싸여 공포에 떨며 기도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자꾸만 일렁거렸다. 로마의 마지막 밤 차가운 밤공기는 말없이 나를 감싸고돈다. ![]()
★배낭길잡이★ 유럽 배낭여행(http://cafe.daum.net/bpguide) 유럽! 가슴 설레는 곳으로 함께 떠나보아요~^^
|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
첫댓글 아.. 멋진 여행기입니다.. 잘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