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湖里
淸湖里는 일로읍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7㎞ 가량 떨어져 있으며 지역의 주변에 물이 맑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산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 건너에는 영암군 학산면과 서호면을 마주하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남해안고속도로로 연결되는 국도2호선 대체우회도로가 무영대교로 연결되고 있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청호 또는 청호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주룡동, 용연동, 용동, 서룡정, 망해동, 비로촌 일부를 병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청호리로 고쳐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주룡, 청호, 우비 등 세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주룡마을의 소포사와 경모재 그리고 충신정려각, 청호마을의 남평문씨 재각과 청망분교 그리고 청호교회가 있다. 우비마을에는 상사바위와 생기미 나루가 있다.
소포 나덕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나주 나씨 집성촌의 마을
청호1리 주룡 마을
용이 살고 있는 마을
住龍은 청호1리에 속하는 마을로 옛 이름은 주변의 산세가 용과 같고 영산강의 맑은 물을 상징하여 ‘龍湖’라 하였다. 문헌에도 1789년에 조선왕조에서 펴낸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용호리로 나온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일로면 龍湖洞, 1917년에 조선면리동일람에는 일로면 청호리 注龍洞으로 나오다 이후에는 청호리 住龍이라 나온다. 실지로 무안지망집과 입향시조 그리고 성씨자료에도 注龍이라 나오지만 마을 탐방시 확인했던 소포공의 묘비에서는 住龍이라 나온다. 또한 대동여지도에 망모산을 住龍山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住龍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마을회관 건립비에는 ‘임금이 행차하여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했고 내고장전통가꾸기는 ‘소포공이 적벽정 아래 못에서 용을 길렀다하여 용소라 이름 하였는데 용소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주룡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어느 학자는 ‘고려 창업자 왕건이 서남부 지역을 공략하면서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해서 주룡’이라 주장 했다. 하지만 주민 중 나종철옹(92세)은 ‘마을의 조산이라 여기고 있는 간룡산이 굽이치는 용처럼 마을을 향하고 있고 마을의 지형이 용이 깃들어 있다 해서 주룡’이라 했다고 밝혔다.
마을의 형성은 소포 나덕명(1551-1611, 자-극지, 호-소포)에 의해서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기상이 늠름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후일 곤재 정개청의 제자로 수학하다가 기축옥사(1589)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는데 국난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공을 세우니 그 공을 인정 받아 유배길에서 풀려 고향인 나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친의 별세로 부친의 시신을 이곳 망모산 기슭에 옮긴 뒤 시묘를 하면서 못다 한 효도를 하였다. 그는 주룡강 적벽암 위에 적벽정을 짓고 영산강의 풍취를 사랑하며 비둘기를 기르니 그곳을 鳩岩이라 부르기도 한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사재를 털어 인의산 앞 바다를 막아 수백정보의 옥답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하였다. 지금도 이 들을 소포들이라 한다. 또한 적벽정에서 영암으로 귀양 왔던 곽재우(1552∼1617, 본관-현풍, 호-망우당,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홍의장군이라 부르기도 함)와 더불어 회포를 나누며 바둑을 두고 시를 읊기도 하였다.
전형적인 반촌의 마을
마을은 한눈에 보아도 좋은 위치에 있었다. 큰 망모산과 작은 망모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앞에는 안산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주룡나루로 통하는 일로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뒤에는 이 마을의 입향조인 소포공 묘를 비롯한 나주 나씨 집안의 묘들이 있다. 망모산과 마주보고 있는 길 건너에는 간룡산이 있다. 그곳에는 최초의 무안현감이었던 나자강과 그의 선조와 후손의 묘가 있으며 이를 제사 지내기 위해서 경모재라는 재각이 있다.
마을에서 조금만 나가면 볼 수 있는 주룡나루는 교통망이 발달하기 전 영암 해남 등에서 무안으로 올 때 사용하는 주된 나루였다. 현재 이 나루 아래인 주룡협곡이라 부르는 곳에 서해안과 남해안 고속도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있다. 무안과 영암의 한 글자씩 따 ‘무영대교’라 명명된 이름인데 ‘주룡대교’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다리 이름이다. 맞은편 영암에도 주룡이라는 지명이 있다.
일부 학자는 주룡나루 주변을 우리나라 장시의 출발지로 보기도 한다. 실지로 이 마을에 ‘장골’이라는 지명이 있어 일각에서는 장시가 있었던 곳이라 보기도 했으나 주민들은 장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긴 골짜기[長谷]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도장포에 ‘초장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곳이 처음으로 시장이 형성된 곳이라 한다. 주민들은 인근 탄골에서 숯을 구워 초장골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고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마을의 주산인 望母山은 나덕명이 이곳에 모시지 못한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날마다 나주를 향하여 拜哭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에는 하나의 기암이 있는데 그 바위를 望父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간룡산을 어머니 산이라 하여 어머니산을 바라보는 산이라 하여 망모산이라 부른다는 異見도 있다.
마을에는 주민들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常盛契가 있었다. 해년마다 봄철에 열리는데 이때는 어린아이에서 노인까지 청호리의 전 주민이 모여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했던 밭이 광복 전까지 있었다. 마을의 지형적인 이점 때문인지 몰라도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나판수씨를 비롯하여 정관계 및 학계에 많은 인물이 진출해 활동하고 있다.
이 마을은 전형적인 반촌이었다. 주민들은 바닷가에 살면서도 갯것을 잡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위세를 부렸으며 마을에 힘든 일이 있으면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을 불러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일반 주민들이 마을 앞을 지나갈 때면 옷을 단정히 하는 것은 물론 발소리도 죽이면서 지나가야 했을 정도다. 특히 나씨문중은 우비 청호 마을 등 주민들이 나씨 문중 땅을 밟지 않고는 나들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 현재도 이 마을 주민들은 문중 땅을 경작하고 있다. 개인별 사유지가 별로 없고 대부분 문중 땅이어서 주민들은 경작권만 갖고 생활하고 있다.
망모산 아래 나주나씨 묘 아래에 있었던 소포사는 1803년에 건립하여 소포 나덕명을 배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 때 없어진 사당이다. 이후 아래쪽에다 소포사 강당으로 중건하였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주변에서는 드물게 보는 독특한 방위를 접하고 있다. 즉 두 개의 방 사이에 마루가 있는 역ㄷ자형으로 무덤을 바라보고 있으며 안에는 소포사강당중수기와 중수헌성기 편액이 있다. 또한 두 개의 방 앞에는 각각 누마루가 있다.
마을에 통샘 들샘 등 두 개의 샘이 있다. 통샘은 여자의 성기를 닮은 샘으로 소포사 아래 바위틈에서 나는 물의 질량이 무거운 물이다. 들샘은 들 가운데 있는 샘으로 비로촌 사양동 등 12마을이 이 마을 물로 생활했다고 한다. 특히 가뭄이 들 때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 배급을 하기도 했다.
충열각이 있어
한국 전쟁 때 이 마을 주민들은 좌 우로 나누어 극심한 분열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당시 청년단장으로 일로에 들어왔던 이 마을 주민인 나판수씨의 역할로 좌익에 있던 많은 일로 사람들을 살리기도 하였다.
마을 앞 길 건너에는 충신정려각과 유허비가 있는 나덕명의 유적이 있다. 충열각 안에는 편액이 있으며 충열각의 문살에는 독특한 문양의 음각 판화가 한 점 걸려있다. 나덕명이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1803년에 세운 것으로 1996년에 후손들이 다시 건립한 것이다. 간룡산 밑의 경모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시멘트 구조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는 입향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5미터 90이 넘는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마치 방풍림처럼 배열해 있다.
남아있는 지명들이 많다. 당재는 당을 모시는 터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람들이 오가면서 솔가지를 놓고 간 것이 쌓여 산봉우리가 되어 형성된 것이다. 주룡마을에서 죽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금은 길이 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장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 가는골이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산을 안산이라 하며 장골 위에 절골이 있다. 예전에 절이 있었다는 골짜기다. 그 골짜기 아래에 저수지인 주룡제가 있다. 음산골, 태자골, 배다골, 서당골, 서당골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무화과의 원산지로 영산강 맑은 물을 바라봤던 마을
일로읍 청호2리 청호 마을
영산강 맑은 물을 바라봤던 마을
청호는 청호2리에 속하는 마을로 영산강 가에 위치하고 있다. 영산강 주변에는 호수를 나타내는 ‘湖’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대불공단의 三湖, 영암군의 西湖, 그리고 일로의 淸湖 龍湖다. 예전에는 영산강 물이 맑고 깨끗해 마치 호수와 같다 해서 즐겨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靑湖리로 나오나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일로면 淸湖리,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청호리 淸湖동으로 나온다. 즉 한자의 표기가 靑에서 淸으로 바뀐 것이다. 참고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목포에도 청호의 지명이 많다. 예를 들면 靑湖로타리클럽 靑湖중학교와 靑湖시장 등이 그것이다.
이 마을에 제일 먼저 들어온 성씨는 박씨로 알려져 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현재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남평문씨 문중에서 입향조를 찾았다. 마을유래지에는 ‘경상도 창원에서 세거하던 남평문씨 문칠성이 청계면으로 왔으며 그의 손자인 문옥선(자 - 미보, 1638 - ?)이 1668년 이곳으로 분가하여 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옆 마을인 주룡마을이 나주나씨 집성촌이고 그 마을의 입향조인 나덕명이 임진왜란 무렵에 마을을 형성한 것을 보면 이 마을도 나주나씨와 관련된 성씨가 입향조일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이 마을은 망모산을 주산으로 하여 앞에는 안산이 있으며 西龍亭 새모실 청호 등 세 마을로 이루어졌다. 西龍亭 마을은 청호 마을 남쪽에 있는데 왜 서용정이라 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새모실은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란 의미이다. 청호에는 윗첨 아래첨 큰잔등 뒷등 동쪽으로 불리는 지역이 있었다.
망모산은 주룡마을의 입향조인 나덕명이 어머니를 그리워 했다는 데서 연유한 효자산으로 청호리와 망월리의 6개 마을이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남해안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한반도 서남부의 L자형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또한 마을 주변으로는 철로 건설이 계획되고 있어 주민들은 개발에 대한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서남부 지역 무화과의 원산지
이 마을은 예전엔 목화를 주로 재배하였으나 현재는 서남부 지역 무화과의 원산지이다. 마을 곳곳에 심어진 무화과는 해방되던 해에 목포 갓바위에서 재배되던 것을 인분을 실어 나르던 한 주민이 가지를 꺾어 마을에 삽목하여 번식한 것이 현재의 단지로 발전하였다. 이런 무화과 단지는 아랫 마을인 우비마을에도 많이 있는데 유독 청호리에서 재배되는 무화과는 맛있기로 소문이 났었다. 왜냐하면 해풍의 영향과 따뜻한 기후로 당도가 높고 빛깔이 선명해 상품으로서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산강이 막히고 해풍이 차단되면서 예전의 당도가 높은 무화과는 생산이 어렵게 되었다. 현재 마을의 주된 소득 작목은 무화과를 포함하여 시금치 갓 옥수수이다.
주민들과 마을 이장의 노력으로 친환경 마을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마을환경이 깨끗해졌으며 마을 입구의 꽃길 조성은 주민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또한 부녀회가 중심이 되어 매년 여름철엔 삼복(초복 중복 말복)을 기해 마을 잔치를 벌였으며 경로잔치를 하기도 했다. 마을에는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는 앞샘 또는 통샘이라고 부르는 들샘이 있다. 윗샘도 있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 왔을 때 영산강 주변에서는 각종 어류들이 많이 잡혔다. 몽탄 명산의 장어와 실뱀장어, 몽탄 갈산의 농게, 그리고 멍수바우 주변의 굴이 있다. 일로의 돈도리에서는 서리기, 짱뚱어, 맛, 게 등이 잡혔고, 아랫마을 망월리 비로촌에서는 서대, 낙지 등이 잡혔다. 뿐만 아니라 소댕이 나루와 주룡나루터 사이에는 상깽이(돌고래)가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일로 인의산 주변에는 맛, 게, 대가이, 짱뚱어가 나왔고 두껍바우 일대는 낚시보다 손으로 운저리를 더 많이 잡을 정도로 어종이 풍부했다. 청호 마을에서도 낙지 뿐 아니라 서대 숭어 등이 많이 나와 농산물을 재배하기 어려웠던 시절 주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한국전쟁 때 주민 중 두 명이 피해를 봤다. 그중 한명은 빨치산 투쟁을 하던 사람이었다. 마을에는 1994년에 설립된 청망분교인데 청호리와 망월리의 첫 자를 따서 만든 교명이다. 현재 이 청망분교는 남악리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다시 부활할 기대에 부풀어 있기도 하다.
마을 앞에 배닿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배가 닿는 골이라는 의미인데 나주나씨 족보에는 ‘舟橋吐乙’이라 표기되었다. 또한 장짓등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장자등에서 변한 이름이다. 대체로 장짓등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샘이 두 개 있다 해서 쌍정(雙井)이란 지명도 있으며 장짓등 옆에는 조금에 건널 수 있는 조금나루도 있다. 또한 조금나루 옆에는 노랑샛금이란 지명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손버버리(산버버리라고도 함)라는 지명도 있다. 손씨 버버리 형제 셋이 묻혀 있다는 이름이다.
새모실에 남평문씨 제각이 있다. 제각의 현판은 없지만 삼문이 있으며 팔작지붕에 정면4칸의 기와집이다. 초가로 기울어져 가던 것을 1996년에 중건하였다. 1932년에 설립한 대한예수교회 장로회 소속 청호교회(정의건 목사 시무)가 있다.
상사바위의 전설을 안고 있는 소코 마을
일로읍 청호3리 우비(牛鼻) 마을
우비는 용골, 각골, 생기미, 우비, 대밭골을 포함하는 마을로 청호3리에 해당하며 ‘소코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마을을 에워싼 지형이 소의 코와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 집터를 잘 잡으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나 1912년의 지방행정지명일람이나 1914년을 거쳐 1917년에 작성된 朝鮮面里洞일람에는 우비라는 마을명은 나오지 않고 용동으로 나온다.
생기미[生金] 주변의 대밭골에 정착
마을유래지에는 ‘나주 정씨 정용옥이 나주에서 1626년경에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해 어업을 주로 하였으며 그 후 차츰 황씨 김씨 등이 이주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오래 전에 황씨들이 생기미[生金] 주변의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80여 호가 넘게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대밭골 남자들이 서해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대부분이 죽고 난 후에는 남아있는 가족들도 뿔뿔히 흩어져 현재는 황씨들이 한 가구도 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들어온 사람들이 나주 정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의 사람들이 이주해왔다고 한다.
지도를 놓고 보면 우비 마을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적 지세다. 영산강가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뻘이 있어서 직접 영산강과 접해 있지는 않는데 이 마을은 바로 영산강과 접해 있다. 해서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농지가 없어 대부분이 어업을 주생활로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후 1980년대에 영산강이 막히면서 많은 농토가 형성되어 나름대로 부를 형성하여 살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우비 마을을 포함한 주룡 마을 아래의 경작할 수 있는 땅들은 대부분 나주 정씨와 연안차씨 소유였다고 한다. 나주정씨는 주룡마을 입향조인 소포 나덕명의 수행원이었다. 소포공이 나주 정씨의 성실함과 열성에 고마워 주룡 마을 아래의 토지들을 정씨에게 물려준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연안차씨 소유의 땅이 많은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다. 일제말 일본인 회사의 서사로 일하던 차남진씨의 아버지는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허겁지겁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자신의 명의로 돌려놓았다. 해서 청호리 일대만이 아니라 무안 곳곳에 차씨 소유의 땅이 많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러한 토지 소유에 대한 재판이 많이 벌어져 상당부분 원소유자들이 차씨로부터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청호리에는 두 개의 나루터가 있다. 주룡나루와 생기미[生金]나루가 그것인데 이곳은 영암과 연결되는 길목이며 영산포로 오고가는 각종 배들의 중간 기착지였다. 주룡나루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나루이지만 생기미 나루는 온갖 배들이 드나들던 황금나루였다. 특히 이 나루는 영산강 뱃길에서 썰물과 밀물이 마주치는 중간지점에 해당되어 수송배나 고깃배들은 대부분 이 나루에서 일박을 한 다음 물때를 보아 오고갔던 것이다. 장날에는 영암 독천장에서 소를 사서 이 나루를 건너 일로장에 팔면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고도 한다. 해서 이 나루는 돈이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렇게 생기미가 흥했던 것은 주민들의 말처럼 ‘생기미라는 말 자체가 돈을 뜻하는 것이어서 이곳에 들어가면 돈을 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풍수적으로도 이 나루는 소코에 해당된다.
생기미 나루에는 샘이 있는데 특이한 구조이다. 샘 위에는 가옥이 들어서 있으며 물은 방 구들 아래에 있는 바위 틈에서 난다. 예전에 이 물은 먼 바다로 고기잡이 하러 나가는 어부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샘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물은 가져가면 뜨거운 햇볕 아래서 3일을 넘기기 어려운데 이 샘물은 보름이 지나도 물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생기미 물은 통에 받아 놓은 지 두 달이 넘어도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생기미라는 이름은 한자 ‘生金’에서 변화된 지명으로 볼 수도 있으나 어학적으로는 해안선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의 지명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생기미 샘 위는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주막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어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다가 현재는 일반인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영산강 건너 마주 보이는 영암군 학산면에도 생기미 나루가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비 마을 주변에는 장골 또는 장재라 부르는 지명이 남아있다. 현재 죽산 분교와 주룡 저수지 주변으로 절골 밑 지역을 말하는데 예전에 장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우리나라 장시의 출발을 나주와 무안으로 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산강 주변 특히 일로에서 찾고 있는데 ‘장골’ ‘장재’라는 지명으로 인하여 이 지역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형성된 장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승화된 사랑 - 상사바위 전설
이 마을에는 남녀간의 승화된 사랑이 얽혀있는 상사바위 전설이 있다. 상사바위는 마을 옆 영산강변에 있는 바위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마주 보고 있는 바위가 있으면 대체로 형성된 설화가 이루지 못하는 남녀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상사바위 전설이다. 그런데 우비 마을의 황씨 처녀와 각골 마을의 추씨 총각이 엮어가는 이 마을의 상사바위 전설은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사랑이다. 이는 다른 지역의 전설과는 다른 발전된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없는 자의 설움을 각설이 타령으로 승화시킨 품바와 함께 일로만이 갖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이 바위는 어업을 주로 하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터이기도 했다. 영산강의 지리적인 여건이 상사바위가 있는 이곳을 지나면 바로 큰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해서 예전에는 이곳에 서해바다로 어업을 나가는 어민들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하는 사당이 있었으며 생기미 나루에서 식량과 식수를 가득 실은 배들이 큰 바다로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가는 바위이기도 하다.
각골 위에 있는 상사바위 벽에 김삿갓 김병연의 시가 음각되어 있다는 구전을 듣고 배를 빌려 상사바위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음각된 글씨는 찾지 못했다. 예전에는 이 상사바위 정상이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쉼터였다. 풍광이 좋아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떨어진 바위라고 부르는 곳에 바둑판이 그려진 큰 돌이 있었는데 50여년 전에 주변 마을 주민이 힘자랑을 하다 영산강 빠뜨렸다고 한다. 바둑판은 주룡마을 입향조 나덕명과 영암으로 귀양왔던 홍의장군 곽재우가 바둑을 둘 때 사용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요즘 들어서는 아이들의 소풍지는 물론 농사가 끝나고 주민들이 마을 행사를 할 때도 찾아와 즐기는 곳이다.
한국전쟁 때는 주민들이 상사바위 위에다 수숫대로 초소를 만들어 만약을 대비했다. 당시 영암에는 좌익들이 많아 저녁이면 영산강을 건너와 마을의 식량을 털어가곤 했다. 그때 주민들이 상사바위 이 초소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좌익들이 넘어오면 싸이렌을 울려 주민들을 피난가게 하였던 것이다.
이 마을 주민들의 단합심은 다른 마을이 부러워할 정도이다. 한 집에서 궂은 일을 당하면 주민 모두가 나서서 내일처럼 거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러한 풍경은 변화가 없다고 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한 주민은 가난해서 그런다고 한다. 가난했기 때문에 배고픔을 줄이기 위해서 모두 모여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다보니까 자기주장 대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먼생기미와 싸짓끝이라 부르는 밀물곶이 지명과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을 봉두막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