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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8]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요한 15,26-16,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5,26-16,4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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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주제] : 파라클리토 성령 <독서 : 사도 16,11-15 / 복음 : 요한 15,26-16,4ㄱ>
예수님께서는 박해 중에 있는 제자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보호자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호자’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단어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성령 청원 기도 때 자주 이 단어가 쓰였기 때문인데, 이 용어는 많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움을 위해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라는 기본적인 뜻에서 출발해 법률 용어로 변호자·옹호자·중재자·간청자라는 뜻을 지니며, 안전과 도움과 보호를 제공하는 이로서 도우미·위로자·격려자·의논 상대라는 뜻도 지닙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기에 중앙아프리카에서는 ‘우리 곁에 엎드린 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곧 어떤 사람이 가다가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곁에 같이 엎드려 그의 필요를 살펴 돌보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참으로 성령의 역할을 잘 표현한 단어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이시지만 명령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수준으로 내려와 우리의 필요를 살피며 나란히 걸어가는 분입니다. 박해와 시련으로 힘겨워 하는 제자들은 그분의 어머니 같은 자상한 도움에 힘입어 내적으로 새 힘을 얻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도움은 어려움을 외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변화시켜 제자들의 짐을 편한 멍에가 되게 합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시키고 예수님과 일치해서 어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느님은 자신보다 예수님을 내세우시면서, 보조자처럼 겸손하게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활동을 우리의 활동으로 오해할 만큼(마태 10,`20 참조) 우리를 내세우십니다. 이렇게 그분은 ‘곁에 계시는’ 겸손하고 자상한 분이시고 또한 ‘부름 받은’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과 함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좋으신 그분을 늘 내 곁에 모시도록 그분을 간절히 찾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말씀자료 : 김태훈 신부(성바오로수도회)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
[나해] 부활 제6주간 월요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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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우리가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느냐, 어렵고 힘들게 사느냐 하는 것은 온전히 저희에게 달렸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사랑하는 이의 기도 中 - |
오늘의 기도지향 : 병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치유자이신 하느님, 고통 속에 있는 많은 이들과 함께 하시어 아픈 곳을 낫게 하시고, 그들을 돌보는 의료진들에게도 지혜와 사랑으로 함께 하소서.
오늘의 복음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요한 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26-16,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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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독서 : 사랑의 기쁨
예수께서는 수난을 통해 당신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우리의 사랑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완덕은 하느님이며 최고의 선이고 구속주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께서 사랑하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한 16,27)
어떤 사람들은 금욕적인 삶으로 완덕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기도 안에서 완덕을 찾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성체를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선 행위를 통해서 완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완덕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비ㆍ겸손ㆍ용서와 다른 덕에 대해 말하고 나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콜로 3,14)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바라는 것을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랑을 배워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릴 일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고 성인은 설명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절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우리에게 당신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모상대로 창조된 영혼을 주셨습니다. 감각을 가진 육체뿐 아니라 기억력과 이해력,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로운 모든 것, 곧 창공과 별과 행성, 바다와 강, 산과 들, 이 땅의 온갖 과일과 동물을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그토록 놀라운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아름다운 것을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내주시는 것조차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었다. (요한 3,16)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서 비롯한 그 아드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모두 내어주셨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갈라 2,20)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죽음과 고통 없이도 우리를 충분히 구원하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그렇다면 왜 죽음을 선택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크신 사랑의 보답으로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신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으리라는 희망, 유혹을 이겨내는 용기,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 '사랑의 기쁨'에서>
마침성가 : 주께 드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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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부활 제6주간 월요일(2009-05-18) I 복음묵상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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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와 티모테오는 ‘필리피’에서 선교한다. 그곳은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들은 강가에서 여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다. 자색 옷감을 팔고 있던 ‘리디아’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 그녀는 바오로 일행을 돕고자 한다(제1독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알려 주신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기에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증언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누구나 변화된다. 주님의 능력을 받아 새로운 사람으로 바뀐다. 어떤 박해 앞에서도 용감하게 자신의 믿음을 드러낸다(복음).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성령 하느님 ; 진리이며 보호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1차 고별사(13-14장) 전체를 주도하는 가르침은 ①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계명 선포, ② 아들의 자기계시적 정체성과 아버지와의 일치성 공개, ③ 성령의 약속과 오시는 성령의 정체성 공개로 요약되며, 이 주제들은 2차 고별사에서 더욱 심화된다고 했다.
특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은 2차 고별사의 시작부분에서 단순히 제자들 상호간의 사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확충되었다. 이는 지난 부활 제5주간 중반부터 봉독된 복음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와 이 비유의 실제적인 의미를 통하여 입증되었다.(15,1-17) 농부이신 아버지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그 가지들인 제자들은 모두 같은 하나의 사랑으로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유(比喩)는 어디까지나 비유로 머문다. 그것은 비유(比喩)가 어떤 논리적 귀결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 간에 원하시는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하셨고, 그 비유를 '아버지-아들-제자들'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로 정립하셨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문제는 이론(理論)이 아니라 실제(實際)와 현실(現實)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아주 출중한 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과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현실적으로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이론처럼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는 이론에 바탕을 둔다. 그렇지만 실제에는 항상 변수(變數)가 있기 마련이다. 제자들이 우선은 서로 간의 사랑을 통하여 스승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름을 방해하는 변수는 바로 세상 그 자체이다. 세상은 열매를 맺으려는 제자들에게 박해와 고통을, 심지어는 죽음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은 늘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불신(不信)을 내포하는 양면성의 변수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닥쳐올 변수(變數), 즉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예고하는 한편(15,18-25), 변수의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해 주신다. 그 방책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發)하시는 성령이시다.(26절)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맞이할 고난(苦難)의 시간들에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당하게 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협조자'이시며, 예수님에 관하여 세상에 무엇을 증언하여야 할지를 알려주실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靈)으로서 아들이 오셨던 바로 그곳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곧 제자들의 믿음(신앙)을 굳건하게 해 주실 분이다. 여기서 '믿음'(fides)이란 그 '내용'(fides quae; contents)과 그 '행위'(fides qua; act)를 함께 뜻한다. 예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가' 하는 내용(內容)뿐만 아니라, '어떻게 믿는가' 하는 행위(行爲)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다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며, 어려움이 들이닥칠 때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예를 들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장담(요한 13,36-38)과 실제로 스승을 거듭 배반하는 베드로의 모습(요한 18,15-18.25-27)을 보라. 또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메시아고백이 메시아의 수난을 거부하는 장면(마태 16,13-23)을 보라.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는 하나(27절) 세상을 향해 '무엇을' 증언(證言)해야 할지를, 지금까지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진리의 성령'께서 일러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고 급기야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어야 할 때(2절) '협조자' 성령께서 그들을 도와 끝까지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이는 비단 제자들이 당하는 박해의 시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이시고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사도들을 기둥으로 삼아 건설된 교회가 현존하는 세상 끝날까지 활동하실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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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진리의 영, 성령의 하느님
부활 제5주간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 곁을 곧 떠나야 함을 마음에 두시고, '사랑의 계명'을 더욱더 강조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말씀으로 권고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대하셨으며,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실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림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선택받아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주님의 공생활 기간 중 함께하면서 영적 열매를 맺는 방법을 배워 왔습니다. 그 질좋은 열매를 맺는 방법은 주님의 계명이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그들에게 기도 응답의 약속을 해주셨으며, 또한 부활 제6주간 복음에서 묵상하게 될 '보호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할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어둠의 영을 따르는 세상은 이러한 제자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주님을 미워했던 세상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박해를 받을 때에 실망하지 말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것을 감사하며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묵상은 여기서 부터 진행하겠습니다.
I. 세상의 거부와 하느님(성령)의 증거
1.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의 죄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그들은 너희가 내 제자라 해서 이렇게 대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고 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요한 15,19ㄴ~23) .... 오늘복음에는 없는 성구입니다만 묵상의 연결을 위해 앞부분을 먼저 묵상해 봅니다.
이 복음에서 보듯이, 주님께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을 인해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세상이 주님과 주님의 제자를 미워하는 것은 주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이단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주님처럼 역시 미워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하느님 앞에 큰 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제자를 박해한 일에 대해서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분명히 유다인들에게 자신을 보내신 분이 하느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말씀과 기적을 통해서 신적인 권위를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솔직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지켜보았다면, 그들은 주님의 권위를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듣고 보고도 주님을 거부하고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과 제자들을 배척한 일에 대해서 변명할 수 없으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엄히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의 아버지까지도 미워한다.
주님을 미워하는 자는 또한 하느님을 미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하느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배척하면서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거부하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은 하나이시며,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보내신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미워하는 자는 결국 하느님도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당시 유다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죽인 일이 하느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보내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몰랐으며, 주님이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을 처형하는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동안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유다인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신적 권능을 가진 분이 아니라면 행할 수 없는 수많은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셨으며, 바다 위를 걸으셨고, 죽은 지 4일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라자로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주님 안에 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만일 유다인들이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지 못했다면 그들의 죄는 조금 더 가벼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적들을 직접 보고도,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도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는 더욱 무겁고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목격했지만, 끝까지 주님을 미워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그들은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였다"고 한 구약성서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5절에서 주님께서 언급하신 구절은 (시편 35,19)이나 (시편 69,4), 또는 (시편 109,3)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적대자들이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고, 옳은 사람(의인)을 미워하는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주님을 통해 나타내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과 뜻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주님을 박해하고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3. 성령의 증거
그러나 하느님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두 증인을 준비하셨습니다. 첫 번째 증인은 하느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보호자 성령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해도 성령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주님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보호자 성령을 "아버지께로 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보호자 성령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영이며, 진리로 인도하고 진리를 가르쳐 주실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진리로 인도하고 진리만을 증거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증거는 세상의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이길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는 두 번째 증인은 주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을 들었으며,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하느님께 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장차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증인이 될 능력을 주실 것이며, 그들은 능력을 받고 세상을 행해 자신들이 보고 들은 주님을 증거할 것입니다. 성령은 그들과 함께 역사하실 것이며,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해도,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두 증인, 즉 성령과 제자들로 인해 주님의 말씀과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은 세상 끝까지 증거될 것입니다.
II. 장차 다가올 박해에 대한 예고
주님은 주님의 이름을 인해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그 제자들을 박해한 것은, 그들이 주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신적인 권위를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일을 유다인들 앞에서 행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시고,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서 신적인 권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주님의 말을 듣고,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고도 주님을 믿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과 그 제자들을 배척한 일에 대해서 변명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들이 아무런 까닭없이 나를 미워했다"고 예언한 시편 기자의 말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이 주님을 거부해도, 주님을 증거할 두 증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주님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협조자 성령과 주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은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증인들은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땅끝까지 전할 주역이 될 것입니다.
1. 제자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박해를 예고해 주심
주님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되,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인도하고 주님을 증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어려움을 만날 때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오늘복음에 '흔들리다'고 번역된 말(스칸달리조)은 '넘어뜨린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성구에서는 이 말이 '시험에 들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의 경우 이 말은 '배교'(마태 11,6; 26,31)와 '죄를 범하는 것'(마태 5,29)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체포될 때에 제자들이 흩어지고 부인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될 때에 심각한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후에 닥쳐올 큰 박해를 그들 힘으로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유다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출교시키고, 매질을 할 것이며, 심지어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이 이러한 극심한 고난에 직면할 때에 아주 넘어지지 않도록 그들이 미래에 당하게 될 박해에 대해서 미리 예고하여 마음을 단단히 먹도록 조치하셨던 것입니다.
2. 맹신적인 박해가 있을 것임
그때에 유다종교 지도자들은 제자들을 쫒아낼 것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출교'는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 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출교는 최악의 징계였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출교자'는 '하느님의 백성'에서 제외되고, 유다인들과 교제의 빵(식사)을 먹을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예수님으로 인해 유다교와의 교제가 단절되고, 문화, 교육, 경제, 또는 정보에 대해서도 완전히 분리될 것입니다.
후에 유다 지도자들은 이 말씀대로 제자들과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들은 급속히 성장하는 그리스도교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신도들인 사람들을 회당에서 파문해 버렸습니다. 특히 주후 90년경에는 라삐 가말리엘 2세가 그리스도를 공식으로 이단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은 '출교'라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더욱 더 견고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새로운 그리스도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사람들이 제자들을 죽이면서 하느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역사를 보면 하느님을 섬긴다는 열광적인 자들로 의해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회심하기 전에는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사도 26,9-12). 후에 영국에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투옥하고 처형했고, 로마 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을 크게 박해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맹신이 빚은 어리석음의 극치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장차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며, 그때에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미리 준비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신적인 박해자들의 열심은 영적 무지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무지는 세상 지식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서 일어난 영적 무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입장에서 독선과 아집, 또는 편견에 사로잡혀서 의로운 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게 될 것입니다(사도 3,17; 1고린 2,8). 어느 때든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광신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이 빠졌던 종교적 독선과 편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3. 미리 박해를 예고하는 이유
주님은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박해를 미리 예고하심으로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때에 흔들리지 않도록 조치해 주셨습니다. 후에 제자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 말을 기억하고 주님을 받는 고난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생활 초기에는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께서 유다종교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의인이 박해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박해의 대상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굳이 제자들에게 박해에 대해 예고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극심한 박해를 당하게 될 제자들에게 미리 그들이 당할 어려움을 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릇된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박해에 대해서 말해주어도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는 '성령체험과 분별'이라는 주제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자기나름 대로의 신령한 영적 체험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신령한 영적체험이라고 해서 모두 성령의 도우심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협조나, 천사들의 도움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마귀들도 끊임없이 신자들의 나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악령의 주입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그리스도 신자들은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를 분별할 줄 알라야 하는데, 가장 확실한 길은 하느님께로부터 영분별의 은사를 받는 것이지만, 모두가 이 은사를 받는 것도 아니므로 신자들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영 분별의 기준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 열매를 보아 분별 할 수 있습니다. 마태 7,15-20에 보면 아무리 놀라운 영적체험을 했다 해도 그 열매가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열매에 어긋난다면 그 체험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 성령의 역사를 빙자하여 사소한 일을 간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을 팔라, 팔지마라. 이 버스를 타라. 저 차를 타지말라. 오늘 상점매상은 얼마가 될 것이다."등 이러한 경우 거의 틀림없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이사 8,19을 보면 이것을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자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숨겨진 비밀을 들어내거나, 교회나 신자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소한 일을 예언하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신접한 자로 보아 틀림없습니다.
(나) 영적인 체험을 했어도, 마음에 평안이 없고 불안과 고통의 중압감으로 고통스럽다면 이는 악령에 억압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 영적체험을 한 후에 더러운 생각이나 교만이 마음을 사로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성령 받은 사람에게도 때로는 유혹이 엄습할 때도 있으나, 악령에 사로잡힌 자는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고 추한 생각과 참소나 교만이 심령을 사로잡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더러운 영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0,1 ; 마르 1,28)
둘째로, 그 사람의 언어생활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모든 말은 하느님을 높이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분에 관한 것을 알려주시는 데 사용됩니다.(사도 10,45,46) 그런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를 높이며 신자들을 향하여 협박과 공갈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스스로 나에게 안수를 받으라고 강권하며 교회를 비판하고 직접간접으로 금품을 강요하거나 말이나 행동이 방자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통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악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셋째로, 그 사람의 그리스도관을 통해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하여 잘못된 주장을 하거나 자칭 예수라 하여 하느님을 높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 또한 악령의 역사입니다. (1요한 4,3)... 그러므로 신자들은 모름지기 영적체험도 중요하지만 영분별을 잘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아멘).................◆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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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대답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한이 다시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32-34).
이와같이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면서,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기억하며, 죄를 사면 받는 감격을 누린 것처럼 성령님을 보내셔서 능력 있는 거룩한 사람으로 인도하시는 것 또한 우리가 누려야 할 혜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를 마음 속에 모시는 만큼 성령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속량)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1-23).
창세기에서 창조주 하느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은 후 사람의 코에 숨(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처럼 주님은 부활하시어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목적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죄를 용서함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십자가의 속량을 기록한 복음서와 성령님의 활동이 기록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신약성서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절름발이 신앙인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보기 흉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성령님은 하느님께서 구약으로부터 보내시기로 예언된 분입니다. “이 일은 요엘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며 너희 노인들은 꿈을 꾸리라. 그날에 나의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사도 2,16-18).
이러한 성령님의 주요한 특성과 활동 중에 몇 가지를 요한복음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어떤 분일까요?
1. 내 안에 계시는 인격적인 성령님
1) 인격적인 분
성령은 “기(에너지)”와 같은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철저히 완벽한 인격이신 분입니다. 사랑하시고(로마 15,30),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시고(요한 16,8), 근심으로 슬퍼하시고(에페 4,30),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로마 8,26)입니다.
‘스타워즈’에 나오는 루크는 “힘이 너와 함께 하기를”과 같은 말로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 또는 우주에 충만한 어떤 힘을 인간이 조절하고 이용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우주선을 기를 이용해 움직이게 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이것은 조지 루카스가 서구인들에게 상상력의 세계를 자극하는 놀라운 작품이면서 동시에 뉴에이지적인 가치관을 온 세상에 확고히 심어놓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많은 영화와 만화들이 이런 류의 비인격적인 힘을 이용하는 것을 주요 소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심각하게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영적인 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영적인 힘에 인격성을 배제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잠재력으로 그 우주의 힘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격적이신 성령님을 극히 배제하는 사탄의 전술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님이신데, 세상의 철학과 종교와 문화는 그 예수와 상관없이 인간이 우주의 힘을 부여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요한 사가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실상을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그 실상의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떠나가지 아니하시면 보호자가 우리에게 오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마음대로 이용하고 불러오는 우주의 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소위 말하는 “기”라는 것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한 분인 성령님을 배제하게 만듭니다. 인격성이 배제된 영성의 위험성은 사탄에게 얼마든지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의 심각성은 영들의 개념에 인격성을 배제함으로 자신의 운명은 자신들이 책임을 지길 원하며, 과학과 기술과 이제는 영적 영역까지 확대하여 하느님을 배제하려 합니다. 이제는 물질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고 착각하여, 하느님이 전혀 필요없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영성을 찾는 현대인들의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하느님과 상관없이 자신이 가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뉴에이지적 발상의 문제입니다. 내 의지를 바꿀 필요가 없이 이용만 할 수 있으면 되는 그런 우주의 힘이라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비성경적인 가치관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인 실체가 인격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그릇됨을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특히 세상을 그릇됨을 심판하신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 16,8절). 여기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신다'는 의미는 인격적인 의지를 가지고 관철시키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기”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생각보다 더 고결한 목표 즉 교육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인간을 대하시는 분입니다.
스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의 교사가 단순히 아이들의 의도대로 간식이나 제공하고, 그들의 기분이나 좋게 만드는 자판기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인격적인 존재로 그들을 지도하며 늘 그들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2) 내 안에 계시는 분
주님은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고 하실 만큼 성령을 신뢰하셨습니다. 그 분을 높이셨습니다. 그분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보다 더 이로운 분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은 우리 속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늘 성령님 즉 거룩한 영이 머무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은총의 위대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우리 안에 거룩한 하느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 머무르고 계십니다. 최고의 위대한 완전한 영이신 성령님이 나와 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약에서 처럼 사람을 사로잡아 일정한 시간 내에 기적을 일으키시고 떠나시는 그런 차원의 관계가 아니라, 영영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분이 내 생명이 되십니다.
마치 햇볕 아래서 촛불이나 전등이 무의미하듯 성령의 함께 하심은 다른 잡스런 영들의 활동을 무력하게 합니다. 거룩한 성령이 함께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러운 영들이 감히 접근도 못합니다. 성령인 내 안에 계시는 것은 모든 악한 영들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음을 듯합니다. 이것이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 대신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이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놀라운 특성은 내 안에 영원히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는 그의 성령으로 늘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루아흐”로 표현되실 만큼 독특한 바람처럼 활동하십니다. 즉 그분은 바람의 흐름보다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공기보다 더 미세하십니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속에 한 인격으로 영원히 거주하십니다. 그래서 내 생명이 되십니다. 단순히 내 능력의 일부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3).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단순히 도덕적인 삶이나 득도나, 기적의 체험 정도가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영이 내 생명이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구원입니다.
다른 종교의 훌륭한 가르침이나, 득도나, 고행으로 사람이 해탈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내 속을 비워서 구원을 받는 것과 천지차이가 납니다. 그 비운 속에 하느님의 거룩한 성령이 항상 머물면서 내 생명이 되셔야 더러운 영들이 내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영생이며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이스라엘의 율법교사이고 산헤드린의 의원인 니코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참조 : 요한 3,3-5)...이와같이 니코데모는 이스라엘의 랍비이며 한 민족의 신앙과 정치와 법의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하느님의 나라와는 상관없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머물고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코린토1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삶으로 시인하면 그것이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내 안에 함께하심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계시지만, 그분의 영이 내 속에서 세력을 얻지 못하시고 변두리에 천대받으며 마치 없는 분처럼 멸시를 당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그분을 인정치 않고 인격으로 대하지도 않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고통을 당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성령은 멸시를 당하시면서도 지금도 인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4,30). 더욱이 그분을 소멸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분은 인격적인 타격을 받기도 하십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바오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의사를 존중히 여기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성령으로 사로잡혔다, 그분이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순종으로 자아를 비운만큼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존재를 인정하십니까? 내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랑해서 한 연인과 결혼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늘 곁에 따라 다니는 남편과 아내 사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면 자식과 함께 사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집에 살면서, 옆에 있으면서도, 무시하고, 의견을 묻지도 않고, 말도 못 꺼내게 하고, 나의 의향은 들을 생각도 없이 자기 맘대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차라리 따로 살면은 모르겠거니와 한집에 살면서 이러는 것은 너무합니다. 우리 안에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결코 이런 식으로 대우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죄악에 탐닉하여 내 안에 살아 숨쉬고 계시는 성령님을 슬프게 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회개해야 합니다.
2. 진리의 교사인 성령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고대 노르웨이 뱃사람들은 지혜와 용맹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작은 배로 북대서양의 먼 바다까지 항해하곤 하였다. 콜럼버스 시대보다 몇 세기나 앞서서 그들은 미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려고 생각하였었다. 그들이 이처럼 놀라운 해양활동을 하였지만 어떤 과학적인 항해 도구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바다에서 나갈 방향을 찾는데 무엇을 사용했는지 현대인들이 안다면 신기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항해할 때마다 커다란 새장에 여러 마리의 갈가마귀를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방향을 잃거나 항로를 이탈했을 때는 갈가마귀 한 마리를 날려 보낸다. 그러고는 갈가마귀가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 방향을 잡아 날아가는 쪽으로 배를 몰아간다. 그들은 갈가귀가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어 자신들을 육지에 안내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이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나갈 방향을 지시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내 의지와 죄악으로 가두어 놓지 말고, 높이 인정하고 그분에게 주목할 때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십니다.
다시 말해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계시는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활동의 하나는 인생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이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예수님께서 본인이 친히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친히 성령님이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그 진리의 내용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에 중요한 특성이 있습니다. “곧”이라는 강조로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철저히 타의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듣는 것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 들은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15).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성령님은 실제로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입니다.
코린토1서에 보면 이것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1코린 2,10). 그런데도 성령께서 자기의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듣는 것만 말씀하신다고 하시니 얼마나 철저히 하느님께 의존적입니까? 하느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신 분인 성령님도 듣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우리같은 무지한 인간들이야 얼마나 더욱 절실하게 듣는 것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하심과 말씀하심을 감사하지 못하고 적당히 성당에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심지어 운전하면서 겨우 공과책을 읽은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선생님은 아예 공부를 해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베테랑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시간에 자기의 생각을 전하고 적당히 때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아이들에게는 불행한 일입니다. 교회에 와서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어디에서나 듣는 도덕과 교리와 철학적인 이야기 또는 신문지상의 이야기만 듣고 갑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느님의 성전에 왔으니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것으로 양육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진리로 무장되어야 할 우리들의 미래의 꿈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분명히 시간을 내고, 생명의 귀중한 순간을 교회에서 보냈는데도, 도무지 하느님 나라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아이들도 공허하고 선생님들도 허탈합니다. 세상은 어두기만 합니다. 하늘의 진리가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진리의 교사들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지혜"에 관한 매우 놀라운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1코린 2,6).
그러므로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1코린 2,11)....다시말하면 인간의 철학도 과학도 이성적인 능력도 심령술도 ‘기’도 결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영접하고 내 안에 함께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순종해야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슨이 쓴 「성령님에 대한 묵상」중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평소에 국회 도서관의 귀중한 가치에 대해 역설해온 한 유력한 하원 의원이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의원님같이 바쁘신 분이 연구와 조사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도서관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계시며, 주어진 논의 주제가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 있는지를 그렇게 잘 찾으십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아주 훌륭한 우리의 사서 덕분이지요. 그는 모든 책과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어서 완벽하게 그 일을 해냅니다. 우리는 다만 필요한 주제와 관련된 권위 있는 책을 찾아달라는 메모를 써서 사무실의 어린 사환을 시켜 그에게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환은 얼마 안 있어 우리가 원하는 정보가 담긴 책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서 가지고 돌아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사서가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성경을 훨씬 더 잘 이해하시며, 우리의 관찰자며 안내자로서 성경의 의미를 알려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삶의 모든 필요 가운데서 실제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시각과 이해할 수 있는 기관을 주시는 것은 성령님의 특별한 활동입니다. 그 활동으로 우리 영혼은 거룩한 것들과 그 실체들을 직접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 속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의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 생각나는 것과 세상에서 들은 지식들로 하느님을 연구하여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그렇게 자기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리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로서 교사는 진실해야 합니다.
바오로는 이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1코린 2,13). 교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은 세속적인 능력으로 인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마저 듣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인간인 교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읽지 않고, 배우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은 치명적인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교사가 될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 즉 성령님이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사람, 즉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 교사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6). 교사인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성령님
성령님의 활동의 특징의 하나는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14)... 이 본문에서 보듯이, 성령 활동의 목적은 여기에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이 있는 곳에서는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봉사하고 섬기는지 그렇지 않는지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면 성령의 활동이고 그렇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높이면 성령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일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늘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똑같이 물질과 지식과 지혜와 땀으로 교회에서 국가에서 봉사하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이 요한 16,15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즉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것을 받지 못한 노력과 가르침과 섬김이 문제입니다. 자기의 것으로 봉사한다고 생각하니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이 인정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활동이 아닙니다.
성령은 반드시 주 예수님의 것으로 활동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면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온통 예수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온 것임을 느껴서 자신의 전 존재의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용권만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도 물질도 지혜도 모두 주님의 것이 되는 새로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의 공급하시는 은총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들의 섬김 속에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활동이 그렇게 초라하게 나타나는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것을 충만히 받지 못했기에 그런 것은 아닙니까?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풍성한 것에서 은총을 받지 못해서 그렇게 초라하게 나누어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성령의 충만을 위해, 나의 자아가 죽기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영광은 커녕 시험과 유혹에 들어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디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이야기입니다. 그 때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여자 육상선수를 우리는 압니다. 그리피스 조이너스라는 육상선수 아닙니까? 그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미국의 N.B.C. 방송기자가 달려와서 인터뷰합니다. "이제 당신은 세계에서 가장 발 빠른 여자입니다. 당신보다 더 발 빠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습니까? 당신은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하면서 달립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조이너스는 주저없이 대답합니다. "나는 하느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달릴 때에 힘이 솟고 고통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발 빠른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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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성령의 증인이 되는 삶으로...
주님은 부활 제6주일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협조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복음에서 그 성령을 보내주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안쓰러웠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난 이후 그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똑같은 '영이신 성령'을 보내 주심을 확고하게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이 말씀에서 증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증인이란 사실을 확증하는 근거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성령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증인의 자격이 된 제자들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용기를 회복하여 주님깨서 사명을 주신 복음전파를 더욱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한 보호자, 성령은 장차 제자들이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서 보호를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완전무결의 보호(사랑)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로 부터 나오는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26절). 그리고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당할 고난(苦難)의 시간들에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성령께서는 제자들이 장차 주님을 대신하여 당하게 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실 '보호자'이시며, 예수님에 관하여 세상에 무엇을 증언하여야 할지를 알려주실 '진리의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靈)으로서 아들이 오셨던 바로 그곳으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 주실 분이십니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은 온 세상을 주님의 복음나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임하게 될 성령은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즉, 제자들과 똑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제자들과 똑같은 사명감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들이라면 반드시 성령께서 임하실 것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당시의 제자들에게 한해서만 임하시는 한정적 특권이 아닙니다. 성령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이 땅을 그리스도 공동체화하는 어느 곳에서든, 우리를 위한 협조자로서 그리스도와 똑같은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도와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의 은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주님의 계명대로 실천하는 삶만 산다면, 뜨거운 성령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용기있게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무엇일까요? 봉헌금과 교무금을 많이 내는 걸까요? 성전건립기금을 많이 내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는 곳은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시공간입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아시다시피 사랑과 용서는 그분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는 사랑과 용서의 생활이 성령체험의 전제 조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용서라는 매우 평범한 사실에 대한 실천이며 영적 깨우침입니다. 주님은 공생활 기간 중 율법보다는 진정한 사랑 실천에 더 큰 비중을 두셨습니다. 계율을 따르기보다 사랑의 실천을 중히 여기셨습니다. 지키는 신앙에서 베푸는 신앙으로 우리들을 지금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적 변화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적 생활의 변화란 '나눔의 생활'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짐의 생활' '비움의 생활'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우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습니다. 내 것만 가득 안고 있다면 어찌 하느님의 것이 자리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도 역시 비우는 실천행위입니다. 미움을 비운 결과가 용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변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 곁에서 맴도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실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성령이시여, 어서 오소서...라고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하늘을 향하여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적 삶의 실상을 보면, 비움의 생활, 나눔의 생활에 너무 인색합니다. 비우지 않으면서 어찌 오시라고 하는지, 버리고 바치면서 오시라 한다면 어찌 아니 오시겠습니까? 다시말하지만 비우는 마음이 성령께 나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 끊으십시오. 때가 되면 포기할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포기하십시오, 언젠가는 용서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있으면 지금 용서하십시오. 그것이 비우는 행위이며, 그런 당신에게 성령은 봄바람같이 당신의 가슴에 안기며 사랑을 곳각여 줄 것입니다. 풍요를 주실 것입니다. 복을 풍족히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주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께서는 변화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조용한 변화입니다. 자연의 변화처럼 소리없이 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낮이 길어지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새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변화는 우리 곁을 감싸면서 많은 것을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목적은 기쁨에 있습니다. 기쁨이 신앙의 본질임을 깨닫게 합니다. 기쁨 없는 신앙은 인생의 멍에가 됩니다. 여차하면 신앙적 삶을 짐으로 고통으로 바꾸게 합니다. 그러기에 냉담하고 돌아서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신앙이 기쁨보다 짐이 되는가요? 그 이유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 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신앙이 나를 지키고 내 곁에 보초처럼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언제까지나 기쁨은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기쁨의 신앙을 만나려면 부모님께 효도하듯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효도하면 자신 안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섬기면 신앙생활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는 첫 길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의 기도생활입니다. 또 아침기도 저녁기도에 행하는 묵주의 기도생활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길은 성체조배, 성사생활이고 특히 영성체는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선행의 실천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실천입니다.
이러한 생활이 우리의 삶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질적 변화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조용하게 자연스럽게 우리를 그리스도인등로 변화시켜 갈 것입니다. 그로한 변화의 체험을 느끼는 사람은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활동하시는 일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한 성령께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오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런 날이 되도록 기도하고, 성사생활을 하고, 영성체를 하고, 그리고 선행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은 바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의 말씀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최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들은 복음 말씀의 핵심은 "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계명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 성령의 열매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면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안수를 받을 때 잘 쓰러지면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건 지친 영혼을 잠시 잠 재우는 은사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지쳐서 쉬지 않습니다. 그냥 누워있지 않습니다. 힘이 철철 넘쳐서 복음을 전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러 다닙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사로 용서하면 우리 안에 사랑이신 영, 부활하신 영, 진리의 성령이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힘차게 그리고 기쁘게 사십시오. 그 힘참과 기쁨 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으로 살아 계십니다. 이웃에게 선행을 베푸십시오. 그 선행 안에 주님의 영께서 함께 기뻐하십니다. 온유한 마음을 지니십시오. 그 마음 안에 주님 영의 평화가 머물 것입니다. 여러분들 안에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를 보고 사람들이 주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십시오, 성령의 증인이 되십시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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