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구지’라고 했다. 왕피천의 하류에서 가장 깊숙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 찻길이 닿는 마지막 마을. 아홉개의 고개를 구불구불 굽이돌아 닿는다고 해서 ‘굴구지’란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울진 성류굴을 거슬러 왕피천을 따라 난 가늘게 난 시멘트 포장도로는 예서 뚝 끊기고 만다.
굴구지 마을을 들머리로 삼은 것은 왕피천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이른바 ‘원점 회귀’의 트레킹 코스이
기 때문이다. 대개 산악회 등에서 단체 트레킹을 나서면 차로 상류 왕피리 속사마을까지 가서 물길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는 편도 코스로 마무리하게 된다. 반면 하류인 굴구지 마을에서 출발하면 속사마을까지 올랐다
가 다시 마을로 돌아오는 코스를 밟게 된다. 어떤 길이든 그렇지만 특히 계곡을 따라 가는 길은 ‘오를 때’와 ‘내릴 때’의 풍경은 전혀 다르다. 똑같은 장소도 진행 방향에 따라 풍경의 구도와 스케일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라진다. 굴구지 마을에서 출발하면 왕피천의 풍광을 오르면서 또 내리면서 두 번을 대할 수 있으니,
어찌 이 길을 마다할까.
굴구지 마을에 도착하면 트레킹을 시작하기도 전에 곳곳에 빼어난 절경이 펼쳐진다. 이쪽 바위 위에서 내려다
보면 물 건너쪽 흰색을 띠는 화강암 바위가 우뚝 솟아있다. 학이 살았다고 해서 ‘학바위’다. 그 아래 물은
초록빛이다. 가만히 물 속을 들여다보면 물고기들이 지천이다.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경쾌하게 유영한다.
굴구지 마을에는 또 높이는 낮지만 제법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삼단 폭포를 내려다보는 정자 ‘청암정’이 있다. 청암정은 파평 윤씨 가문에서 지은 3칸짜리 정자. 이 정자는 ‘귀(耳)’를 위한 곳이다. 근래 보수한 정자는
그리 특이하달 것이 없고, 막상 정자 마루에 앉으면 나무에 가려 폭포가 내려다보이지 않지만, 대신 폭포의
물소리가 이보다 청아할 수 없다.
굴구지 마을에서 길을 버리고 계곡으로 내려선다. 좁은 시멘트포장 도로를 따라 1㎞쯤 더 올라가 길이 끊기는
상천동에서 트레킹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학바위를 끼고 있는 천변의 풍광을 만끽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바위를 타고 넘기도 하고 물의 흐림에 몸을 맡기고 부드럽고 천천히 걷는다. 물로 들어 우람하게 흐르던 물이
협곡의 바위벽에 부딛혀 순해지는 길목을 찾는다. 겁도 없는 물고기들이 툭툭 정강이를 치고 지나간다.
상천동 마을을 지나면 걷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왕피천의 숨은 모습을 대한다. 물길이 휘어지는 곳마다
울울창창한 금강송들이 위태롭게 수직절벽에 뿌리를 내리고는 힘차게 가지를 뻗고 서있다. 자갈밭과 물길을 지나고 작은 폭포를 지나고, 너른 모래밭도 지난다. 물길을 걷는 게 제법 힘겹긴 하지만 갈수록 빼어난 풍광이 펼쳐지니 몸이 자꾸 앞으로 나간다.
굴구지마을을 출발한 지 1시간 남짓. 왕피천 물길이 내려오다가 협곡 사이로 소를 이룬 절경을 만났다.
왕피천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용소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수심이 허벅지까지 올라왔지만, 이곳은 허리를 넘어 어깨를 넘실거린다. 양쪽 바위가 바짝 붙은 협곡의 가운데는 시커먼 물색이 수심이 키를 넘어 보였다. 산 사면을 치고 올라가 나무와 바위를 붙잡고 넘어갈 수 있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동행이 없이는 무리였다.
이쯤에서 돌아선다. 마을 주민들이 “용소를 넘어가면 물굽이 한가운데 바위섬이 떠있는 절경이 있다”고 했지만 트레킹이란 ‘길이 곧 목적지’인 것이니 예서 돌아나간다 해도 그다지 아쉬울 것도 없다. 내려서는 길의
풍광은 오를 때와 사뭇 달랐다. 물살을 거슬러 오를 때는 거칠어 보였던 물길도 하류를 따라 걷자니 유순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렇게 용소까지 갔다가 굴구지 마을로 되돌아온 데 걸린 시간은 2시간30분 남짓.
청정한 자연 속에 온몸을 담그고 온 기분. 몸과 정신을 다 말갛게 씻어낸 느낌이다.
울진에는 왕피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왕피천 못지않은 트레킹 코스로는 불영계곡을 들 수 있겠다. 협곡의
깊이로 보자면 불영계곡이 오히려 왕피천보다 한 수 위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1984년 봉화
현동과 울진을 잇는 36번 도로가 개설되면서 오지 협곡의 비밀스러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깊은 계곡을 끼고
험한 산자락에 길을 놓는 일은 난공사 중의 난공사였다. 2년이 넘는 공사기간동안 연인원 50만4107명이
동원됐고, 도로를 닦는 데 동원됐던 적잖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일까. 불영계곡이 시작되는 도로변
에 수통을 차고 바위를 옮기는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도로준공기념탑이 자못 비장해 보인다.
도로가 나면서 불영계곡으로의 접근은 쉬워졌지만 여전히 계곡 안쪽에는 사람들의 인적이 드물다. 다들 흘낏 차창 너머로 계곡을 내려다보거나 도로 옆에 세워진 정자에 올라 계곡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지나치고 만다. 그러나 불영계곡은 계곡 안으로 들어서야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트레킹은 불영사계곡 휴게소에서 시작해
불영사 입구에서 마치는 것이 보통이다.
불영계곡에 들어섰다면 계곡 안쪽에 금강소나무 숲을 두르고 있는 절집 불영사도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다. 불영사 주차장에서부터 절집으로 드는 진입로의 굴참나무와 금강소나무 숲길이 빼어나다. 고즈넉한 절집
앞의 큰 연못에는 지금 노랑어리연꽃이 한창 꽃망울을 틔우고 있다. 연못을 가득 채운 선명한 노란색의 연꽃
봉오리가 그득하다.
울진에는 두 곳의 매혹적인 길이 있다. 하나는 죽변 등대부근의 ‘용의 꿈길’이고 다른 하나는 평해에서 백암
온천으로 이어지는 ‘명품 백일홍 꽃길’이다. 해장죽 숲사이로 터널처럼 이어진 ‘용의 꿈길’은 짧지만 비밀스럽
고, 유혹처럼 붉은꽃을 가득 피워낸 목백일홍(배롱나무)이 늘어선 ‘명품 길’은 길고 농염하다.
죽변(竹邊). 이름을 풀어보자면 ‘대나무가 많은 변방’쯤이 될까.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 죽변 등대 부근에 ‘죽변’이란 지명에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해장죽이 구불구불 터널을 이룬 대나무 숲길이 있다. 이곳이 죽변등대의 절벽을 끼고 해장죽 숲속으로 이어진 ‘용의 꿈길’이다. 이 숲길은 1960년대 지역주민들이 사용하던 오솔길로, ‘용의 꿈길’이란 이름은 해안절벽 아래 바다에서 승천을 꿈꾸던 용이 하늘로 올랐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해장죽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속으로 이어진 길은 대낮에도 한 줌의 볕이 들지 않을 정도. 해장죽 숲 사이로 한 명이 드나들 만한 공간이 터널처럼 뚫린 길은 마치 용이 구불구불 지나간 듯하다.
평해에서 백암온천이 있는 온정까지 이어지는 88번 국도의 12㎞ 구간은 이른바 ‘백일홍 명품꽃길’이다.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배롱나무 가로수가 끝없이 이어진다. 배롱나무 꽃뿐만 아니다. 나무 아래는 화단을 조성해 페츄니아, 토레니아, 칸나, 부용, 금계국, 루드베키아 등 원색의 여름 꽃들이 꽃 융단처럼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이 길은 차로 달리는 것만으로도 탄성이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