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 장원급제 인정받은 치원
- 완고한 골품제로 쇠하던 고국서
- 과거제로 쇄신하려 노력했으나
- 귀족 견제에 좌절되자 외직 자청
- 지리산 자락 천령군 태수로 부임
- 고을 가로지르는 위천 범람 잦자
- 외곽으로 물길 돌리는 제방 축조
- 수목 수십 종 옮겨 ‘대관림’ 조성
- 홍수로부터 백성의 터전 지키며
- 마음도 평화롭고 넉넉하게 한 숲
- 큰 홍수 만나 둘로 갈라졌지만
- 애민의 역사 살려 ‘下林’도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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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은 빛을 품는 땅이다. 그 땅에 조성한 대관림은 최치원의 위민과 애민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으니 하늘과 사람의 빛이 하나 됨을 의미한다. 드론 촬영. 함양군 제공 |
■외직 자청 최치원, 천령태수 부임
진성왕 6년(892년) 최치원은 천령군(天領郡) 태수로 부임한다. 당시 신라는 9주 5소경을 두었는데 천령은 지금의 함양군으로 강주(康州·진주)에 속했다.
12살에 고향을 떠나 17년간 당에서 배우고 익힌 후 29살에 귀국했다. 유학을 공부해 빈공과에 장원급제한 것은 개인으로서 큰 영광이지만 마음에 품은 것은 과거라는 제도였다. 당나라 인구는 신라(600만여 명)와는 비교할 수 없는 8000만여 명을 헤아렸고, 황제를 정점으로 한 신분의 나눔은 조밀하고 엄격했다. 저마다 아래를 짓눌러 위에 복종하는 신분제는 절대 권력의 통치에 가장 효과적인 체제였기에 오래전부터 거의 모든 나라가 따르고 유지했다. 그럼에도 당에서는 누구라도 과거를 통해 능력을 입증하면 관리가 될 수 있고, 공에 따라 황제의 바로 아래까지도 오를 수 있었다. 신분제의 위기가 될 것 같지만 오히려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여지는 숨통이 되고 희망이 되어 체제를 공고하게 했다. 더군다나 능력에 따른 발탁은 인재의 화수분으로, 고여서 썩어가는 물을 바꿀 수 있으니 받아들여야 할 제도였다.
신라는 이전 진한(辰韓)시대를 제외하고도 혁거세거서간 이후 어언 900년 가까운 왕국이니 진(秦)의 통일 이후 서국(중국)에서도 없는 역사였다. 비록 지금 완고한 골품제로 왕실의 기운이 쇠하고 도처에서 반란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다지만 한 번 크게 쇄신하면 다시 천년을 이어갈 저력은 있었다. 치원은 그런 개혁의 핵심을 과거제라 여겼다.
치원이 돌아왔을 때 헌강왕은 참으로 반기고 중히 여겼다. 그러나 귀국 1년 4개월 만에 승하하고, 이은 정강왕 또한 재위 1년 만에 그리 되었다. 뒤를 이은 진성왕 역시 치원을 믿고 아껴주었으나 성골·진골 귀족들은 치원을 견제했다. 선진학문을 익힌 출중한 능력과 쇄신의지가 자신들에게 위험이 된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더구나 진성왕마저 사모하고 의지하던 각간 위홍이 죽은 뒤 중심을 잃자 귀족들의 발호는 더해졌고, 결국 개혁은 시도마저 좌절되자 치원은 외직을 자청했다.
■물 다스려 복된 땅 지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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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림 내 위치한 최치원 추모비. |
치원은 태산군(지금의 정읍시) 태수를 거쳤다. 그곳에서도 선정을 베풀었으나 북쪽의 궁예에 이어 견훤이 완산주(지금의 전주시)를 거점으로 후백제의 기치를 내세우니 순식간에 동남지역 대부분이 그에 호응했다.
이에 왕실은 치원을 천령군 태수로 옮기게 하고 방로태감(防虜太監)의 직을 더했다. 방로태감은 방어의 뜻을 가진 군정(軍政)직이니 견훤의 동진에 대한 방어임무까지 맡긴 것이었다.
치원은 당에서 과거에 급제한 2년 뒤 20살 나이로 양주(揚州) 율수현(溧水縣·강소성 남경시 동남부 소재) 현위(縣尉)에 봉해졌다. 현위는 수장인 현령 바로 아래 직으로 2명이 있었는데 치원은 치안과 사정(司正), 백성 위무의 일을 맡았다. 대략 1만 호에 5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율수현에서의 경험은 그보다 작은 규모인 태산이나 천령을 보살피고 다스리기에 유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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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을 추모하며 건립된 정자 사운정(思雲亭). |
천령은 사방이 지리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고을이다. 아침에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돌아가며 두루 빛을 내리고, 빛을 품는 태양의 땅이다. 그 복된 땅에 위천이 흐르는데 여름철 홍수로 범람하는 일이 잦아 백성의 삶을 고단하게 했다. 율수를 비롯한 양주는 거대한 장강(長江)을 끼고 수많은 호수가 산재해 물에 익숙한 땅이었다. 굳이 전설시대 우(禹)왕의 고사를 더듬지 않더라도 수(隨)나라 양제가 운하를 열었던 것처럼 물은 막아서가 아니라 길을 열어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체험한 터였다.
위천은 고을 서북쪽 백운산에서 발원해 천령 고을 한가운데를 질러 동남으로 흐른다. 치원은 상류와 하류를 두루 돌아보고 높은 곳에 올라 고을 전체를 조감한다. 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장마로 유량이 많아지면 노도처럼 사나워진다. 물길을 고을 외곽으로 돌려 여러 갈래로 나누며 하천의 폭을 넓혀 제방을 튼튼히 쌓는다면 홍수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하천 주변에 큰 원림(園林)을 조성하면 수목의 뿌리가 하천의 뒤를 받치는 격이 되고, 제방을 넘은 거친 물길은 한숨을 돌려 느리게 할 수 있다.
■백성이 배불러야 나라 힘 강해져
‘대관림(大館林)’. 치원은 그렇게 이름을 정한다. 제방을 지키는 호안림(護岸林)이지만 고을 사람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 풍치림도 될 테니 부역이 고되어도 보람은 자손대대로 이어질 것이다.
공사가 크다. 그만큼 부역은 고될 것이다. 치원이 서쪽 견훤 무리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이런 큰 역사를 벌이는 것은 나라의 힘은 백성의 풍요로움에 있고 배부름이 그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된 부역일수록 먹는 것이 뒷받침돼야 한다. 치원은 공역(工役)에 나서지 못하는 나이든 부녀자나 여자아이들에게는 산나물을 뜯게 하고, 젊은 부녀자와 남자아이들에게는 염소와 하천에서 고기를 잡아 탕과 죽을 넉넉히 끓이게 한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으니 염소 기르기에 좋았고 맑은 하천에는 다양한 민물고기가 지천이지 않은가.
장정들은 두 팔을 걷어붙이고 구슬처럼 흐르는 땀방울을 기쁘게 훔친다. 배도 든든했지만 홍수로부터 터전을 지킬 수 있다면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음이니 어찌 잠시의 고단함에 몸을 아끼랴. 돌을 다듬고 나르는 단내 나는 숨결에도 콧소리가 흥얼거려지고, 사방 먼 산으로부터 소나무를 비롯하여 박달·감·밤·상수리·물푸레·은백양 등의 나무를 옮겨오는 수레 곁에서도 노랫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치원도 종일 공사장에 머무르며 백성의 상처를 보살피고 물통을 끌고 다니며 갈증을 달래주니 진척이 눈에 띄게 빠르다.
■마음까지 배려한 목민관 최치원
대관림은 오늘날 ‘상림(上林)’으로 불린다. 상림에 가면 최치원의 ‘애민(愛民)’이 저절로 느껴진다. 수십 종 수목이 빼곡히 우거진 숲 아래에는 또 여러 꽃이 계절마다 색깔을 바꾸며 마음을 평화롭고 기쁘게 한다. 천년이나 넘은 이전에 방재(防災)라는 실용에 더해 이처럼 아름다운 원림을 조성하여 백성의 정서까지 배려한 것은 참으로 진실하고 따뜻한 목민의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사람들은 오늘까지 최치원을 기억하며 그의 뜻을 이을 여러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차례 큰 홍수가 있어 대관림은 둘로 갈라졌고 아래쪽은 옛 풍치를 잃었다. 그러나 이를 다시 복원해 ‘하림(下林)’으로 부르고 위천도 생태하천으로 되살렸다. 최치원이 고단한 백성들의 배를 채워준 흑염소와 위천 물고기 탕과 죽은 오늘도 여전하고, 이제는 흑돼지까지 풍성하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은 시대와 동서가 다르지 않은 생명의 근본이다. 종일 빛이 가득한 땅에서 산과 내(川)와 애민의 역사가 전해준 풍요로 하루쯤 느긋하면 삶의 기운이 가득 채워지리라.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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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운선생님 글~ 가야산 홍류동 소리길에 680년대 그 글이 ~ 1,400여년? 지나도 ~ 고대로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