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ㆍ환기생멸(幻起生滅) 변화는 수많은 이름으로 그 존재를 각인시키고 있다. 모든 변화 상태마다 수많은 이름을 가지게 되니 이는 그 시간과 공간을 지켜내려는 안간힘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삶은 지금이라는 이 찰나의 순간에서만 자신의 변화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의미를 살펴본다면 결국 시간은 스스로 일으킨 생각 하나로 생겨난 환상이 생멸의 모습으로 연출시키는 찰나의 관찰이리라. 시간은 늘 공간에서 그 존재의 환기성(幻起性)이 드러날 뿐이다. 거짓된 환영이 일어남으로 존재한다는 착각 속에서 또다시 펼쳐지는 생각들의 영상들이 에너지화되어 여섯 갈래 창문에 비치는 것이건만 모든 것은 늘 변화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멈춰야 함을 게을리하여 요동치는 흔들림 속 머무르는 탓에 윤회는 지속된다. 생멸 즉 또다시 멸즉생 하는 수레바퀴로 환생 또는 윤회라는 길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수행은 환생도 윤회도 아닌 무상함을 알고 관찰자 본 바탕에 머무르는 것이니. 여기에는 환기생멸(幻起生滅)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환생의 의미와 윤회에 대하여 살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이 주어졌다면 이는 환기생멸(幻起生滅)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음을 늘 일깨워야 한다. 그것은 달리는 차 안에서 밖을 쫓아 움직이면 그는 이미 차 안에 있지 않음과 같음이라. 스스로 지어낸 환술에서 벗어나지 못함과 같다. 축복과 찬탄은 스스로 짓는 세상을 장엄하는 것이요. 그 장엄은 기쁨으로 나타나니 이는 법화의 공덕이 됨이로다. 과거는 쌓아짐이요. 퇴적층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고 현재는 관찰자의 지위에서 과거를 바라봄이니 과거와 현재는 둘이 아니며 미래는 과거 현재를 운용하여 이끌어감이니, 이 셋은 하나로 흐름이 없다. 흐름이 없음으로 이는 공간 장엄이 되어 자신을 드러내니 장엄은 시간으로 그 지위를 드러낸다. 수행자여 만상은 하나가 드러남이나 천만 시선에서 천만 이름이 생겨남과 같다. 한 찰나 잡아내어 지극함으로 머무르라. 이것이 주지가 됨이니 무상계로 길을 삼아 환기생멸(幻起生滅)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상대 되어짐이 있다면 이는 무상함에 머무름이요 모든 상대됨이 상대 됨이 아님을 알아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