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인가 싶더니 한 겨울만큼이나 시리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성질 급한 동장군이 서둘러 옷깃을 여미게 한다. 무얼 이리 급히 찾아오는지.
또 다시 파주다. 고향과 같은 곳이다. 선수 시절 우리는 미사리 훈련장을 쓰다 2002월드컵을 앞두고 세워진 이곳 파주트레이닝센터를 둥지로 꿈을 키웠다. 2002월드컵 4강의 밑거름이기도 했던 이곳은 때문에 우리 모든 축구선수들의 제2 고향이자 꿈의 요람이다. 지도자가 되어서도 달라질 건 없다.
파주 NFC를 거니는 홍명보 감독-사진 : 강명호 (줌인스포츠) |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다시 찾은 이곳에서 난 또 다른 꿈을 꾼다. 오랜 세월 이루지 못한 아시아 챔피언의 자리다. 한국축구가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한 마지막 해는 1986년이다. 서울 대회가 마지막이다. 이후 20여 년 동안 4년을 주기로 정상을 다시 밟기 위해 도전했지만 결승에 오르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86년 대회 이후 한국축구의 아시안게임 최고 성적은 4강이다. 선수 시절 나섰던 90년 베이징 대회와 94년 히로시마 대회, 코치로 다시금 도전한 2006년 도하 대회 모두 4강에 머문 아쉬움을 품고 있다.
팀을 책임지는 감독으로 또 한 번의 아시안게임에 도전하는 내 머릿속 고민 중 하나는 “한국축구가 왜 이리 오랫동안 아시아 챔피언 자리에 오르지 못했는가?”라는 스스로를 향한 물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아시아 국가 중에는 월드컵 무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자취를 남겼지만 유독 아시아 대회서는 그 힘을 다하지 못한 한국축구다. 아시안게임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대륙 대회인 아시안컵의 도전사가 다르지 않다. 한국축구가 아시안컵 정상 고지에 오른 것은 반세기 전인 1960년이 마지막이다. 참으로 오랫동안 먼 길을 돌았다.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한국축구가 왜 이리 오랜 세월 아시아 챔피언에 오르지 못했는지를 짚는 작업은 역으로 한국축구가 어떻게 하면 아시아 정상에 오를 수 있는지 그 길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병역혜택의 절실함 이면의 자기 통제
아시아 축구의 평준화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다. 이변이 더 이상 이변이 아닌, 이변의 일상화가 반복적으로 목격되는 세계축구의 판도 변화와 무관치 않은 아시아 축구의 평준화다. 축구의 상대성과 토너먼트 대회의 사다리식 대진에 따른 변수의 확대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단판 승부로 희비가 갈리는 토너먼트 대회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또한 일반론이며 모든 팀에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동일 변수다.
초점을 맞춰 주목한 건 우리 선수들의 <심적 요인과 그에 따른 경기 운영 경쟁력>, 그리고 <대회 일정과 관련한 체력 변수>다. 아시안게임엔 병역 혜택이란 부상이 걸려 있다.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이 주어진다. 부상이라지만 선수들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목표 중 하나다.
홍명보 감독은 병역혜택은 독이 될수도 있다고 이야기 한다-사진 : 강명호(줌인스포츠) |
때문에 아시안게임에 나서는 선수들에겐 따로 동기부여를 강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목적의식이 뚜렷하게 투영돼 있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또 문제가 되기도 한다. 최종 도착지만을 향해 무턱대고 덤벼들다 무너지곤 했다. 한 경기 한 경기 과정을 밟고 집중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상대에게 골을 먼저 내주거나 우리 팀의 득점이 좀처럼 나오지 않을 때일수록 더 차분하고 냉정해야 했지만 급하게 나서고 전진하다 경기를 놓치는 일이 잦았다. 준비한, 약속된 우리의 플레이를 풀거나 유지하지 못한 결과다. 우승의 기대와 바람을 경기 내용에 녹아내지 못하고 마음만 앞서간, 일종의 부작용이자 경험 미숙의 혼란이다.
우리가 목표하는 우승은 마지막 경기의 종료 휘슬이 울린 뒤라야 알 수 있는 일이다. 객관의 전력 수치나 자신감, 급한 마음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연히 이길 경기도, 당연히 패할 경기도 없다. 승패는 나눠져 있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승리를 위핸 먼저 한 경기 한 경기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와일드카드는 성공의 패인가, 실패의 패인가
핵심은 선수 개인이 아닌 팀으로서의 강한 목적의식과 경쟁력이다. 강팀의 자리는 선수 개개인의 뛰어난 능력이 받침 돼야 가능하지만 선수들마다의 시선과 움직임이 제각각이라면 다다를 수 없는 영예기도 하다. 팀으로 뭉쳐 싸우기 위해선 개인의 욕심과 간절함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결과에 대한 지나친 부담 역시 마찬가지다. 실패하더라도 모든 책임은 감독인 내 자신에게 있다. 선수들은 그간 땀 흘린 대로, 맞춰온 대로 모든 걸 쏟아 부을 수 있으면 된다. 안 풀린다고 서둘러선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경기 90분간 우리의 플레이를 유지하고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강해지고 또 승리할 수 있다. 팀 목표와 전술의 공유가 전제다.
아시안게임 와일드 카드로 선발된 박주영과 김정우-사진 : 연합뉴스 |
아시안게임 대표 제한 연령에 관계없이 선발할 수 있는 와일드카드를 선택하면서 중점적으로 고려한 부분과 닿아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허용된 와일드카드 3장 모두를 쓰지 않았다. 박주영과 김정우 2명만을 와일드카드로 선발했다. 이들 외에도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 하지만 선수 개인 기량과 더불어 중요했던 건 전술적 조화와 팀 워크였다. 와일드카드로 선발된 선수들이 나이 어린 대표팀에 얼마만큼 잘 녹아들 수 있을지를 와일드카드 선수 개인 기량만큼이나 중요하게 살폈다.
와일드카드는 기대만큼이나 부담감이 큰 자리이다. 때문에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욕구가 강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지나침이 와일드카드 스스로에게나 대표팀 전체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그간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무대에서 와일드카드가 실패에 가까운 결과를 낳은 기억의 연장이다. 와일드카드건 누구건 대표팀의 일원일 뿐이다.
#춘추제와 추춘제, 6일 동안 3경기 강행군
한국축구가 그간 아시안게임에서 고전한 이유 중 또 하나는 체력 다툼에 있다. 공수의 간격이 좁혀지고 빠르게 공격과 수비가 전환되는 현대축구에서 체력 요소는 해당 선수와 팀의 경쟁력을 짚는 주요한 지표 중 하나다. 문제는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시기다. 월드컵이 열리는 해에 치러지는 아시안게임은 10월 전후로 치러진다. 월드컵과의 일정 조정 영향이다. 이번 광저우 대회도 11월에 펼쳐진다.
봄에 시작해 가을에 끝나는 춘추제의 K리그 소속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는 한국대표팀에 유리하지 않은 일정이다. 시즌 막바지의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이다. 춘추제로 시즌을 소화하는 한중일 등 동북아시아 대표팀들의 동일한 고민이기도 하다. 반대로 유럽처럼 추춘제로 시즌을 치르는 중동 선수에겐 불리할 게 없는 일정이다. 86년 대회 한국 우승 이후 94년 대회 우즈베키스탄을 제외하면 모든 대회 정상을 중동 국가가 차지한 흐름과 연결 지어 짚을 문제다.
2009 FIFA U-20 월드컵 대표팀의 코치진들. 홍명보 감독은 당시 함께했던 서정원 코치, 김태영 코치. 이케다 세이코 피지컬 트레이너를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중용했다-사진 : 연합뉴스 |
특히나 이번 광저우 대회의 경우 이틀 간격으로 조별리그 3경기를 치러야 한다. 6일 동안 3경기를 소화하는 강행군이다. 11월8일 북한전, 10일 요르단전, 13일 팔레스타인전을 치른다. 선수 시절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빡빡한 일정이다.
일정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도리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마저도 싸워 이겨내야 할 일이다. 체력에 대한 대비가 철저해야 한다. 운동과 휴식의 치밀한 계획을 요한다. 지난해 이집트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 당시 호흡을 맞췄던 생리학 전문가인 일본 출신의 이케다 세이고 피지컬 트레이너를 재차 중용한 이유 중 하나다.
#우리 선수들이 나의 베스트다
아시아 정상을 향한 도전, 홍명보 감독은 고민 또 고민한다-사진 : 강명호(줌인스포츠) |
주위에선 우리 대표팀이 어린 선수들 위주로 짜여 전력과 경험의 부족이 걱정된다고 한다. 우려는 이해가지만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운 시선이다. 현 대표팀은 강하고 또 더 강해질 팀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번 대표팀은 와일드카드를 제외하면 21세 이하 선수들 주축으로 이뤄져 있다. 지난해 20세 이하 월드컵 8강 멤버들이 주축이다. 아시안게임 연령 제한인 23세보다 2살 어린 선수들로 대표팀의 골격이 세워진 셈이다. 때문에 주위에선 우려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물리적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 이번 대표팀을 23세 선수들로 꾸린다면 2007년 20세 이하 월드컵에 출전했던 멤버들이 중심인데 소집 가능한 인재풀을 놓고 본다면 프로 팀에서의 활약 등이 이번에 발탁한 선수들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는 선수들은 많지 않다. 나이를 떠나 실력적으로 살펴도 현 대표팀이 소집 가능한 베스트라고 생각한다.
홍명보호의 목표는 우승 뿐만이 아닌 더 강해진 팀이 되는 것이다-사진 : 강명호(줌인스포츠) |
소집 훈련 기간 등에 대한 현실적 여건을 고려한 대표팀 발탁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소집 훈련 시간이 열흘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감독이 모든 걸 파악 못한 선수를 선발하는 건 무리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지난해 이집트 대회 전후로 오랫동안 지켜봤고 손발을 맞춘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꾸려 주어진 시간 내에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고자 한 선수 선발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또 한 가지는 미래를 향한 준비이자 선택이란 점이다. 이번 광저우 대회에 나서는 선수들은 멀리 보면 2012년 런던 올림픽, 더 멀리 보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뛸 수 있는 인재들이다. 국제 대회의 경험은 선수 개인과 팀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중 하나다. 당장의 성적 못지않게 미래에 대한 준비와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목표는 우승과 함께 더 강한 선수와 팀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 길이 빠른 길이며 또 옳은 길이라 믿는다.
그 또 한 번의 도전을 이제 곧 광저우에서 시작한다.
◎ 홍명보호 기본 포메이션 및 전술
홍명보 감독이 설정한 기본 시스템은 4-3-3 혹은 4-2-3-1 포메이션이다. 지난해 이집트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 멤버에, 기성용 대신 합류한 윤빛가람, 와일드카드 박주영과 김정우, 무서운 신예 지동원 등이 가세한 전형이다.
이탈리아식 압박과 공수 밸런스에 주목하는 홍명보 감독은 중원을 두텁게 세우는 동시에 위치와 역할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 포지셔닝 풋볼을 강조한다. 중원 압박의 컨트롤 역할과 전방 피딩을 담당할 중앙 미드필더에는 윤빛가람과 구자철, 김정우 등이 경합 중인데 컨디션이 떨어져 있는 김정우의 몸 상태에 따라 주전 여부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중앙 미드필드진 조합의 또 하나의 변수는 김민우의 자리 이동이다. 김민우는 지난해 이집트 대회에서 <김민우 시프트>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공격과 수비를 가리지 않는 포진과 빼어난 활약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김민우의 기본 포지션은 왼쪽 풀백이지만 홍철의 가세로 홍명보 감독은 김민우를 중앙 미드필더로 활용할 구상을 세워두고 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의 역할 변화다. 김민우가 공격형 미드필더에 포진하면 4-2-3-1 포메이션의 활용이 가능하다.
홍명보 감독은 최전방 라인에도 다양한 카드를 준비 중이다. 기본은 원톱 시스템을 구상 중이지만 상황에 따라 박주영과 지동원, 박희성의 카드를 복수로 투입하는 더블 스트라이커 라인의 그림을 그려놓고 있다. 박주영을 전방에 두고 지동원 혹은 박희성을 타킷형으로 배치해 세컨드 볼을 노리는 형태나, 박주영을 측면으로 돌리고 지동원과 박희성을 전방에 포진시키는 등의 변화다. 홍명보호의 주요 공격 루트 중의 하나인 측면은 김보경과 조영철, 서정진 등의 선발 투입이 유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