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스카 함에 정박한 북양함대 군함 진원
청나라는 서양의 해군 무기와 전함, 순양함, 어뢰정 등을 구매하였으며 서양인 전문가를 초빙하여 훈련시켰다.
1880년대 들어서 북양함대를 중심으로 전력이 급성장하여 일본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에서 한반도에서 군사 간섭을 시도했을때
청은 북양함대의 함대로 포함외교를 실현하여 일본에 대한 강경책을 구사했다.
1885년 10월 청나라는 북경에 총리해군사무아문을 만들어 순친왕을 총리로 해군을 주관하게 하였다.
북양함대는 아시아 최대의 해군력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연안 방어를 벗어나 원양작전 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런 북양함대는 일본을 세차례 방문하였다.
1886년 8월, 1891년 6~8월, 1892년 6~7월로 총 3차례 방문이 이어졌다.
첫번째 방문인 1886년 정원, 진원, 제원, 위원이 4척이 나가사키를 방문했을때 나가사키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청일간의 외교적 위기를 고조시켰다.
1886년 7월 북양대신 이홍장은 함대 사령관 정여창과 부제독 윌리엄 랑 W.Rang에게 함대 출동을 명령하였다.
거문도 사건으로 조선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조선에 대한 열강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북양함대의 위용을 뽐내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길림성의 동쪽 국경 문제를 놓고 러시아 제국과 협상하고 있었는데 이때 러시아와 담판한 오대징 일행을 귀국시키는 목적도 있었다.
7월 23일 기함 정원과 진원, 제원, 위원, 초용, 양위 등 6척의 전함은 원산에 도착해 영흥까지 순항하여 군사력을 과시하고 오대징 일행을 맞이했다.
그 후 초용과 양위를 제외한 4척은 석탄 보충과 함선 수리를 위해 8월 10일 나가사키로 입항하였다.
기함 정원호가 선체 수리가 필요한데 당시 이정도 거함은 나가사키의 도크에서만 수용이 가능하였다.
12일 정원호는 미쓰비시 조선소의 도크에 들어갔다.
이때 정박한 함대에서 상륙한 수병들과 나가사키 순사간의 충돌이 발생하였다.
8월 13일 휴가를 얻어 상륙한 청국 수병과 나가사키 지방의 순사들간에 충돌이 일어나 수병과 순사 각 1명이 부상을 입었다.
14일 긴장이 고조되다가 15일 다시 수병과 순사간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져
청국은 장교 1명과 수병 7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의 부상사자가 발생하였고
일본측은 경부 순사 1명과 사망하고 31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것이 이른바 나가사키 사건이었다.
당시 주일공사 서승조는 8월 16일 일본의 통지를 받았고 17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사건을 보고하였다.
참찬을 나가사키에 파견하고 일본 외무성과의 교섭에 들어갔다.
도쿄에서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대신과 서승조 청국 공사간 교섭에서 일본의 과실을 인정하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ㄱ다.
이에 서승조 공사는 이홍장에게 무력으로 압박을 가할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이홍장은 외교적 해법을 선호하여 외교 고문이었던 오정방을 보내서 원만하게 일을 끌고 갓다.
이런 협상은 다음 해 2월에 완료되었는데 사건을 오해에 비롯된 것으로 확인하고 책임과 시비를 따지지 않을 것을 합의했다.
일본은 52,500원, 중국은 15,500원을 내서 사상자에게 보상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하였다.
중국은 나가사키 사건을 1945년 이전 중국이 일본에 외교적으로 승리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했으나
이 사건은 이후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일본 국민은 나가사키 사건에서 확인한 중국 해군력에 충격을 받았다.
청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면서 국력을 집중하여 해군력 증강에 나섰다.
메이지 천황이 스스로 30만원 기부하자 전국적인 모금이 이어져 반년 만에 203만원이라는 해군력 건설 자금이 모였다.
1883년 10월 3일 청조는 북양해군장정을 비준하여 북양수사를 넘어서 북양해군으로 확대를 선언하였다.
1891년 6월 북양함대는 2차로 일본은 방문하였다.
정여창이 이끄는 6척의 주력함은 정원, 진원 치원, 경원, 내원등과 2천명의 수병들이었다.
6월 27일 시모노세키, 6월 30일 고배, 7월 5일 요코하마, 7월 19일 다시 고베, 7월 25일 나가사키를 돌았다.
친선방문이라 선전했으나 북양 함대는 일본에 대한 일종의 시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고배에서 수병 상륙을 금지하고 요코하마에서는 장교가 인솔하게하여 충돌을 피하였다.
7월 14일 요코하마 항에서는 황족 ,대신, 일본 고위관리, 일본 육해군 장군들을 포함한
100여명의 내빈을 기함 정원호에 초대하였다.
이때 정원호를 개방하여 함내를 둘러보게 하였다.
이러한 북양함대의 위용에 일본은 적지않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당시 청조의 정원호와 진원호는 일본함대의 최대함보다 2배 이상 배수량이 컸었던 것이다.
이때 일본군 장교들은 북양함대의 군기가 이완되어 있음을 확인했고
청나라 장교들은 일본해군의 발전이 빠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1892년 북양함대는 6척의 전함으로 3차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은 2차 군비 확충 계획에 따라 1889년부터 46척의 군함을 건조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요시노 , 순마, 용전 등 3척의 군함이 건조되었는데
이중 방호 순양함 요시노는 영국에서 1893년 9월 완성되었는데 당시 가장 빠른 군함이었다.
청일 전쟁 직전 일본 해군은 군함 31척 어뢰정 24척을 보유한 총배수량 61,373톤의 전력이엇다.
그리고 건조 중인 6척과 어뢰정 1척도 있는 상태였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1894년 7월 19일에 이뤄졌다.
이에 반해서 북양함대는 일본 방문 이후 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청조는 자국 해군 능력을 과신하고 동시에 이홍장에 대한 견제책으로 해군력을 위한 경비 지원을 줄였다.
1891년 호부로부터 안정적인 재정지원이 끊기자 북양함대의 전력 증강은 정지되었다.
이후 전력이 급상승하여 전력이 엇비슷해진 일본 함대와 청일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방호순양함 요시노 (吉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