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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3:1-11절) 그리스도의 다른 점
입시(入試) 때가 되면, 신문에 나란히 실리는 두 개의 사진이 있습니다. 염주(念珠)를 쥐고, 기도하는 불교신자 사진과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기독교인 사진입니다.
입시철이 되면, 사람들은 없던 신앙심이 생기기라도 하듯 간절한 마음을 종교적 행위로 승화(承化)시키곤 합니다. 이 사진들은 평범하게 넘기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종교(宗敎)간의 화해(和解)와 대화(對話)를 시도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면, 그냥 보아 넘길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표현 방식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같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치기 때문에 세상은 기독교를 독단적인 종교라고 비난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참된 진리(眞理)가 무엇인가? 를 바르게 정립해야 하고,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알고, 정체성을 확립해야 합니다.
Ⅰ.예수님과의 관계
원래 착하고 종교적인 성향이 강하다 해서 쉽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체험들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3:1절)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여러 문제들을 싸안고, 고민하다가 술독에 빠지거나, 다른 것들을 탐닉(耽溺)하다가 최악의 경우, 자살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뭇 박혀 죽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세 례
롬6:3절)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3:11절)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인간들이 세상의 음탕(淫湯)하고, 더러운 것과 추잡한 욕망(慾望)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노력해도 그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겉모양은 같은 계란이라도 부화될 수 있는 유정란이 있고, 아무리 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는 무정란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보이지만, 분명히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①아직 이 세상의 좌와 정욕의 감옥에 있는 사람*이 있고
②거기서 풀려나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즉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직장에 다니고,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같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모든 죄와 더러운 욕망과 타락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고, 또 죽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쉽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에 내가 죽은 것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죄와 더러움과 음란을 좋아하던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우리는 죄에서 해방됩니다. 우리는 이제 새 사람으로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Ⅱ.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
아기들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엄마 젖을 찾아서 빨기 시작합니다. 또 오리 새끼들은 태어나고 얼마되지 않아서 엄마 오리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듭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3:1절)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면, 우리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무궁무진한 것들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십니다.
즉 *위의 것*은*땅의 것*과 비교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드 좋은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위에 있는 복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여기 *찾으라.*는 말은 미리 금광이나 유전을 찾아서 탐색하라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일까? 이 땅의 복(福)이 진짜 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복(福)은 진짜가 아니라,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진자 복(福)은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우리 속사람을 하나님의 복덩어리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복(福)은 먼저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 나가는 것은 금광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들어갈수록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전혀 이 세상의 것으로 오염되지 않은 하나님의 복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십니다.
최고의 복(福)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좋은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복(福)된 삶은 그리스도안의 친밀한 연합(聯合)상태에 있는 삶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전혀 틈 없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심령의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또 기도가 응답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 속한 줄로만 알았던 돈과 명예와 학식이 모두 하나님의 복(福)으로 변화됩니다.
전에는 이것들이 하나님을 대항하고, 죄짓기 위해 사용되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道具)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福)입니다.
2절)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아예 이 세상일은 생각하지도 말고, 오직 신앙에만 몰두하라는 말씀으로 충분히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세상일은 완전히 내팽개치고, 말씀보고 기도만 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치로 완전히 무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리 신령한 복을 부어주셔도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불평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자기도 모르게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적인 비교 기준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세워야 할 새로운 기준이 무엇일까? 그것은 곧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행복과 성공이라는 복(福)이 무엇일까?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위의 것을 찾는 것일까?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이다*라며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며, 믿음에 있어서 참된 부요(富饒)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령한 지식에서 믿음이 더욱 풍성히 자라는 것이 참된 복(福)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데도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시를 당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이것입니다. 즉 가치관 자체를 완전히 바꾸고, 자기만의 기준을 깨트리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절대로 위의 것을 따르는 가치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뭐라고 해도 영향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3절)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이 말씀은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죄에 대하여 죽었고, 이 세상의 더러운 정욕에 대하여 이미 죽었습니다.
죄가 아무리 우리를 붙잡아 가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죄나 유혹이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곳, 즉 하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보물(寶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즐거움들이나, 자랑에 대해서도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 좋은 것들을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것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자랑이나, 돈은 다 육체(肉體)를 위한 것들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함께 썩어질 것들입니다. 우리의 육체(肉體)는 후패(朽敗)해도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롭기 때문에 우리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히 소멸(消滅)되지 않습니다.
Ⅲ.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
성경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더 죽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5절)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죄의 감옥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의 감옥에서 뭔가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죄를 사랑하고, 더럽고, 음탕한 것들을 좋아하며, 이 세상의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땅의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땅의 지체를 죽이라*는 건 육체 자체를 죽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 짓고 싶어 하는 욕망을 죽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문제가 믿는 자들에겐 가장 심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짓고 싶어 하는 욕망과 본성을 말끔히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즉 예수를 믿고 난후에도 마음으로는 거룩하게 살고 싶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더러운 육체의 욕망과 죄짓고자 하는 죄의 충동이 살아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 믿기 전,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죄의 지배를 벗어나 죄를 거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자체를 죽이는 중요한 방법은 죄의 유혹이 찾아왔을 때, 담대하게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는데 전과는 달리 죄를 짖는 게 더 이상 기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죄를 지으면서 느끼는 쾌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죄를 지으면, 마음이 답답하고, 뭔가 꽉 막힌 것처럼 찝찝합니다. 이때, 우리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 가는 과정입니다. 이전에 행하던 육체의 욕망이나, 습관은 결코 한 순간에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계속 그 행위를 죽여 나가야 합니다.
요일1:9절)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육체의 욕망을 죽이면 죽일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강하게 역사합니다. 이 고비를 넘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 넘칩니다.
본문은 땅의 지체인 대표적인 것들을 예로 들고 있는데, 먼저 음란을 지적합니다. 물론 인간에게 이성에 대한 호감과 사랑하는 감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감정을 더러운 것으로 변질시켜서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올바른 것보다는 뒤틀어진 것을 더 좋아합니다. 즉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면, 거부반응부터 일으킵니다.
뭔가 비틀고, 꼬이고, 유별난 것에 마음이 끌립니다. 이런 세상 풍조를 분별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恩惠)만이 우리의 가치관)과 생각들을 바르게 합니다.
다음으로 사욕(邪慾)은 바르지 못한 욕심을 말합니다. 자기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탐이 나 자기 배를 불리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즉 무기력한 것보다는 의욕적인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나쁜 정욕이 문제인데, 이는 바르지 못한 목표를 두고 질주하는 것입니다. 즉 토지공사처럼 남을 망하게 한다든지, 반드시 죄를 짓고야 말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탐심(貪心)입니다.
탐심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감사 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숨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합니다. 게데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서 이 땅에서 좀 더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이 마음은 탐심이라기보다는 선(善)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탐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입으로 만들어낸 신(神)들을 보면, 돈이나 인기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 등 이것들을 신(神)처럼 숭배한 결과는 무엇일까? 철저한 파멸(破滅)입니다.
6절)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정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게 됩니다.
미국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는 전 세계적인 여성들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부(富)와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이 어땠습니까? 부족한 것 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영혼(靈魂)의 곤고함을 극복할 수 없어서 마약(痲藥)에 빠져 약물쇼크로 비참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이클 잭슨도 엘바스 프레슬리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습니다. 이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의 조건이 충족될지라도 영혼(靈魂)의 허전함과 공허(空虛)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은 끊임없이 인간의 탐심을 채워줘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을 해소 할 수 없는 소금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 채워지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혼(靈魂)은 이제 방황을 끝내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安息)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자들에게는 넘치는 만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우리는 다시 세상 욕심을 따라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정욕과 습관(習慣)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7-8절)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전에 우리는 분함과 노여움과 비방과 부끄러운 말들을 좋아했습니다. 즉 이런 것들에 길들어져 있었습니다. 단번의 결심만으로는 일정한 습관이 형성 될 수는 없습니다. 죄의 습관이 생긴다는 건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죄를 향해 달려가는 고속도로가 생긴 것이기에 일단 그 고속도로에 올라가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게 끝까지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길은 유턴도 불가능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 길을 부숴야 합니다. 즉 정욕과 탐욕으로 가는 길을 부숴버리고, 막아야 합니다.
9-10절)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더러운 습관(習慣)을 버렸으면, 이제 새 습관(習慣)으로 길들여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習慣)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 옷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사람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크리스천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지 못하면, 마음속에 더러운 감정이 쌓이고, 영적 침체가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않으면, 세상의 더러운 죄악(罪惡)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깨닫는 것이 없이는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창자에까지 채워져야만, 우리 자신의 영적(靈的)상태를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마귀에게 속고 있었으며, 엉뚱한 데서 헤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하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에 굶주렸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말씀의 각성과 함께 눈물이 흐르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우리의 심령(心靈)에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용광로에 불이 붙으면, 이제 웬만한 시험이 와도 넘어지지 않고, 이길 수 있게 됩니다.
11절)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 파나, 무 할례 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하나님은 정말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즉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헬라인의 지식이나, 유대교의 율법이나, 스구디아인의 강력한 힘도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십니다. 이 말은 온 천하에 예수 외에는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겉보기에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즉 죄의 감옥에서 해방 되었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과 연합(聯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하늘의 복(福)을 이 세상에 쏟아 부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철저하게 세상의 성공 기준을 부수고, 말씀으로 새 인생을 열어갈 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세상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전진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말리고, 여리고 성도 무너뜨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복(福)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와 함께 죽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땅의 지체를 죽이고, 가나안의 축복을 모두 차지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세상에 대해 죽고,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아-멘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알 림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하신 분은 건전한 가까운 교회를 정하여 목사님과 상담하고 세례를 받으시기 바랍니다.(세례식은 일생에 단 한번뿐으로 물에 수장되고 사는 예식입니다)
동탄에 선교센타가 설립되기까지는 아직 성례(세례와 성찬)식과 예배가 불가합니다.
자세한 문의는 010-8772-0191
신앙의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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