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동백 / 임채성
바람에 목을 꺾은 뭇 생령이 나뒹군다
해마다 기억상실증 도지는 봄 앞에서
상기된 얼굴을 묻고
투신하는 붉은 꽃들
죽어서 할 참회라면 살아서 진혼하라
산과 들 다 태우던 불놀이를 멈춘 섬이
지노귀 축문을 외며
꽃상여를 메고 간다
올레를 걷다 / 임채성
걸음발이 무직하다
순례인 듯 답사인 듯
무너진 산담 앞의 풀꽃들과 눈 맞추며
4․3조, 때론 3․4조로 돞아가는 제주 올레
총탄 맞은 자국일까
창칼에 찔린 상처일까
온몸에 흉터를 새긴 현무암 검은 돌담
섬 휩쓴 거센 불길에 숯검정이 됐나보다
오름을 감아 돌다
바다로 틀어진 길
바람이 봄을 밀고 골목 안을 배회할 때
팽나무 굽은 가지가 살풀이춤 추고 있다
고사리장마 . 2
육순 칠순 다 지나도록
긋지 않는 눈물이 있네
산밭뙈기 일구려다 산사람이 되어버린
울 아방 목쉰 울음이 피에 젖던 곡우 무렵
올레 안 울담마저 재가 된 그날 이후
화산섬 산과 들이 꽃밭 밀밭 일구어도
까맣게 타버린 돌엔 화색 다신 돌지 않고
이제 그만 잊으라고
관 뚜껑을 덮으라고
죽창같이 여문 햇살 중산간을 돌아올 때
고사리 어린 손들도 손사래를 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산으로 갔다 / 임채성
바람을 탄 들불이
섬을 온통 휩쓸었다
낮에는 뭍을 향해 해풍이 휘몰아쳤고
밤에는 산풍이 불어 불길을 더 키웠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초집은 태워지고
매캐한 목소리엔 그을음이 묻어났다
마을엔 불길을 피할 언덕조차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다시 세운 환해장성
집을 잃은 삼촌들은 다시금 길을 잃고
설문대 할망을 찾아 산으로 올라갔다
몇 차례 해를 바꿔 산신당에 봄이 와도
산에든 사람들은 그대로 산이 됐는지
그 봄날 꽃불만 같은 진달래만 붉었다
그해 겨울의 눈 / 임채성
눈 덮인 한라산은
소복 입은 여인 같다
노루도 발이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길을
허기로 감발을 한 채 숨 가삐 뛰던 이들
허공 찢는 총성 앞에
메아리도 비명을 지르고
언 가슴을 후려치던 혹한의 바람 소리
점점이 붉은 피꽃이 눈꽃 속에 피어났다
산으로 간 사람들은
돌아올 줄 모르는데
먼 봄을 되새김하듯 겨울은 다시 와서
곱다시 뼛가루 같은 하얀 눈이 내린다
가시리* / 임채성
그대 빈 들녘에도 사월의 산담이 있어
가시밭 한뎃길에 나를 두고 가시나이까
곶자왈, 곶자왈 같은
뙈기밭도 못 일군 채
조랑말 뒷발질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행기머체 찾아가는 갑마장길 오십 리에
따라비 따라비오름
바람만 우~ 따라오네
막으려고 쌓으셨나, 가두려고 두르셨나
긴 잣성 허물어도 해제 못한 옛 소개령
억세게 머린 센 억새
기다림은 끝이 없네
하늘빛이 깊을수록 그리움도 살찐다는
태우리 눈빛 뜨거운 가시리 가을 앞에
사려도 사리지 못해
타래치는 내 사랑아
*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너븐숭이 애기무덤* / 임채성
꽃 피는 봄이 아닌 꽃이 지는 봄이라니!
동백 숲 어름에서 스러져간 꽃잎, 꽃잎
궂은비 내리는 바다
젖은 가슴 또 젖는다
씨방 한껏 부풀리던 지난 계절 뒤꼍에서
봉오리도 벌기 전에 꺾여버린 여린 꽃대
바람이 바람을 끌고
서우봉을 넘는다
오늘도 저 하늘엔 달과 별 뜨고 지고
기억 잃은 들녘에도 벌 나비 날아든다
여전히 말문을 닫고
쳇바퀴만 도는 해
바닷물도 멍이 드는 그 사월 다시 오면
살 에는 눈보라도 끄느름한 빙점을 뚫고
아이야, 꽃으로 피어라
천년토록 붉은 꽃
*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 앞에 돌 몇 개로 표
시해놓은 애기무덤이 있다
- 『메께라』(2024. 고요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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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아가 읽은 시조집
시조집 『메께라』_임채성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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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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