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2열왕기 22,8-13; 23,1-3 마태오 7,15-20
제1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쇄신하고자 한 요시야 임금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분열된 유다 왕국의 16대 임금이 된 요시야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의 내용을 듣고서,
그들의 조상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기에
주님의 진노가 내렸음을 선언합니다.
이어서 모든 백성을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주고,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습니다.
온 백성도 이 계약에 동의합니다.
이후 요시야 임금은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이스라엘의 종교 개혁을 이룹니다.
이렇게 하느님 생명의 말씀은 언제나 그것을 새로이 듣고 실천하도록 우리를 다그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하시며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은 좋은 열매를 맺으며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지만, 악하고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하는 말과 행동은
나쁜 열매를 맺고 사람들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런데 우리 삶은 과연 주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하느님의 좋은 열매를 풍성히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4.5).
하느님과 나누는 친밀한 기도 안에, 말씀과 성체 안에 깊이 머물 때,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분을 닮아 형제들을 더 사랑하여 좋은 열매를 더욱 풍성히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갈라티아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5,22-23).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
최성우 신부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2열왕기 22,8-13; 23,1-3 마태오 7,15-20
‘열매’란 말이나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구체적 품행을 드러내고 활동의 진실성 여부를
식별하게 해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내 삶에 크고 작은 흔적을 남겨놓은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삶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사는가를 나에게 알려주었다.
교통사고로 다친 불편한 다리로는 일상조차 살기가 어려울 주 선배는 절망에서 빠져 나오려고
몇 년 동안 애쓰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다른 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자존감을 지키는 모습은 아름답다.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선 날마다 시간을 내어 걷거나 앉아서 명상하며 경험하는 모든 것을
아주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선택이란 사실 얼마나 단순한가.
‘깨달음에 도움이 될 일들을 하고 그렇지 않은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또 하고 있는 그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영적 성장을 위한 첫번째 단계임에 틀림이 없다.
대구대교구 최성우 신부
************************************************************************************************************
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마태오 7,15-20
먼저 자신의 열매를 보라
어제 복음에서 산상설교의 결론이자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황금률이 선포되었다.
사실 황금률은 행동함에 있어서 최소한의 규범이다. 사실상 요구되는 것은 그 이상이다.
그래서 의인(義人)의 길은 외롭다고 했던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옳게 산다는 것,
나아가 남보다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의인의 길은 좁고 외롭다.
그러나 이 길을 걷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바로 이 생명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소중한 삶의 지침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행동의 지침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행동이란 경우에 따라 많은 변수를 가져오기 때문에 행동지침에 대한 늘 새로운 해석과 응용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을 참 예언자들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속에는 사나운 이리를 품은 거짓 예언자가 겉으로는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겉포장이 화려하고 요란할수록 내용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겉모양이 양처럼 부드럽고 고울수록 그 마음도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만약에 그러한 겉과 속이 다르다면 실망 또한 클 것인즉,
그것이 거짓 예언자라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참 예언자가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거짓 예언자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거짓 예언자에 대한 구별은 참으로 중요한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하여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원리를 구별의 기준으로 내세우신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보다 행위의 과정과 결과가 구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는 언제나 함께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님 당대에도 그랬고, 마태오복음 공동체 안에서도 그랬다.
구약시대의 예레미야 예언자도 일생 동안 전문적인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였다.
예레미야는 야훼께서 보여주시는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구별을 통하여
자신을 참 예언자(예레 26,1-24)로
거짓 예언자(예레 23,9-40; 특히 거짓 예언자 하나니야: 28,1-17)와 구별하였고,
거짓 예언자와 섞은 사제들이 한 통이 되어 이스라엘 전체를 그릇 인도하고 있음을 통탄하였다.
예레미야에 의하면 참 예언자는 백성을 일깨워 회개하도록 하지만,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이익을 좇아 권력에 아부하느라 정신을 빼앗긴다고 하였다.
아모스 예언자도 거짓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원수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그들의 멸망을 예언하지만, 참 예언자는 이스라엘
자신의 죄를 고발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다고 하였다.(아모 1,3-2,16)
신약성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결성된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 자료로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은 단연 100년 이후에 집필된 ‘디다케’로 손꼽힌다.
《12사도의 교훈》으로 통용되는 디다케는 총 16장으로 구성된 초대교회 규율에
관한 지도서로서 신약외경(新約外經)에 속한다.
예언과 복음의 수용자세를 다루고 있는 11장에 다음과 같은 거짓 사도와
예언자의 식별 기준이 들어있다.
“사도는 하루 동안만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이틀을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사흘이나 머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머물 곳을 찾을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더 가지지 말아야 한다.
만약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영(靈)으로 말한다고 모두가 다 예언자인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활태도를 지녀야만 예언자이다.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그 생활태도로써 밝혀진다.
진리를 가르치는 예언자라도 가르치는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짓 예언자이다.
누구든지 영으로 말한다면서 돈이나 다른 어떤 것을 달라고 한다면 그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빈궁한 이들을 위해서 달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를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디다케 11)
예언서와 디다케를 근거로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요약한다면,
참 예언자는 주님의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바치지만
거짓 예언자는 생명은커녕 자신에게 손해 될 일은 하지 않는다.
참 예언자는 하느님나라를 구현하기 위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끊임없는 쇄신과 회개를 촉구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고 필요하다면 쓰레기로 여기지만(필립 3,8),
거짓 예언자는 되도록 남의 잘못을 꾸짖고 남의 불행을 축복하면서
개인의 이익과 명성을 도모하고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학식과 견해에 더 의존한다.
이러한 기준이 바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행실을 보고 아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는 공존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하여 얻은 식별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야 한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를 쉽게 깨뜨릴 수 있다.
따라서 남보다는 우선 내가 스스로 맺는 열매에 따라
주님의 ‘참 제자요, 참 목자’인지를 물어보고 점검하여야 할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ㅡ 년중 제 12 주간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