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강 이미지, 전경과 배경
석야 신웅순 시인·평론가·서예가,중부대 명예교수
이미지
시조는 시보다 이미지 압축이 더 요구된다. 시조에 있어서의 압축은 시조의 생명이다. 12개의 소절로 시상을 완성해야하기 때문이다.
데이 루이스는 이미지는 '언어로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하였다. 마음 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형상이다.
'사랑'을 표현해야하는데 ‘사랑’ 이라고 쓸 수는 없다. 구체적인 모양이나 사물로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실감이 난다. 사랑의 표현을 장미로 제시했다면 독자들은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와 사물이라는 구체적인 장미를 결합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야한다. 그래야 독자들은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라고 느낄 수 있다.
이미지=추상적인 단어 + 구체적인 사물 → 의미
플레밍거는 이미지를 정신적 이미지, 비유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의 셋으로 나누었다.
정신적 이미지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오관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감각적 심상을 말한다.
달과 별이 숨었어도 스스로 차는 밝음
나무들 하나같이 뿔 고운 순록이 되어
한잠 든 마을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조동화의 「눈내리는 밤」 일부
눈리는 밤 나무를 순록의 뿔로 표현하고 있고 그 순록이 수레를 끌고 깊이 잠든 마을을 끌고 간다고 했다. 동화의 세계처럼 그 광경이 눈에 환히 뵈는 듯하다. 시각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달, 별, 나무, 순록, 마을 같은 시어들을 동원시키고 있다.
작품을 시각적으로 처리할 것인가, 청각적, 혹은 후각적, 미각적으로 처리할 것인가는 작가의 마음에 달려있다. 하얗게 덮힌 앙상한 나무 가지는 마치 순록의 뿔과 같아 눈 내리는 밤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다. 소복이 눈에 덮힌 하얗게 잠 든 마을을 순록들이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다. 눈 내리는 밤 나무를 대신한 순록 뿔의 시각적 이미지는 매우 감동적이다.
비유적 이미지는 직유, 은유, 의인, 환유 등을 말한다.
비유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개념과 매개념이 필요하다. 그런데 원개념과 매개념은 동질적이든 이질적이든 어떤 상관 관계도 없다. 두 사물은 낯설기 때문에 문맥 속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긴장을 해소시키기 위해 두 사물은 타협을 하게 되는데 이는 유추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때 두 사물은 서로 상호 침투 되면서 문맥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를 문맥화라 한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달랠 회향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시월 상천을
등불로나 밝힌거다
-정완영의 「감」일부
감을 등불로 환치시켰다. 원개념은 감이지만 매개념은 등불이다. 감을 등불로 은유했다. 감과 등불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감은 먹는 과일이고 등불은 불 밝히는 기구이다. 이 두 이질적인 요소가 한 문맥 안에 들어와 상호 침투되면서 의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문맥 안에서 감은 시월 상천을 붉게 밝혀주는 등불로 표현되어 있다. 이 때 독자들은 감과 등불인 두 사물을 떠올리며 또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상징적 이미지는 원개념이 생략된 채 매개념만 드러나 있다. 원개념이 명백하지 않아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다. 사람마다 달리 읽어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또한 상징은 가시적인 사물을 통해 불가시의 정신세계를 표현해야하기 때문에 은유처럼 한 문장 안에서는 의미를 읽어낼 수가 없다. 전체의 문에서 읽어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유와는 달리 고차원의 유추 과정이 필요하다. 지적 수준과 사회적 약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런대는 소문 마냥 먼데 눈발은 치고
애굽어 아스라이 철길을 비켜가듯
욕망도 희망도 없이 또 그렇게 저무는 하루
그 하루를 다 못채우고 그예 누가 떠나는지
낮게 엎드린 채 확, 번지는 진눈깨비
더불어 살 비비던 것 먼 길 끝에 남아있다.
저물 무렵 한때를 떠도는 영혼처럼
덜 마른 건초더미 어설픈 약속처럼
찢어진 백지 한 장이 가슴 속으로 날아든다
- 이승은의 「설일雪日)」
이 시조는 고도한 상징으로 이루어졌다.
눈 내린 풍경을 바라보며 인생을 되돌아보고 있다. 낮게 엎드린 채 확 번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하루를 못채우고 떠나는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 하루를 못 채운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더불어 살 비비던 것은 또 무엇을 상징하며 찢어진 백지 한 장은 또 무엇을 상징하는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전부다 어떤 정신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이미지만 제시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짐작하거나 유추할 뿐이다. 영혼처럼, 약속처럼 찢어진 백지 한 장이 가슴 속으로 날아든다 했으니 더더욱 의미 천착이 쉽지 않다. 의미를 미루면서 유보해둘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전경과 배경
어느 해변가에 건축업자와 시인이 놀러왔다. 건축 업자는 같은 해변을 보면서 모래의 굵기는 어떻고 건축에는 어떤 쓸모가 있고 등을 생각하고, 시인은 밀려왔다 밀려가는 밀물과 썰물을 보면서 인생과 삶 등의 의미를 생각할 것이다. 제 1차적 수준에서는 똑 같이 해변의 모래를 보고 있으나 제 2차적 수준에서는 보이지 않는 해변의 배경을 보고 있다.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은 똑 같은데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사물을 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경제적 의미에서, 다른 한 사람은 인생의 의미에서 해변을 보고 있다.
대상은 동일하나 생각은 다르다. 출발은 일상적 지각이나 도달은 미적 지각이다. 미적 지각에서 서로 해석이 엇갈린다. 일상적 지각은 실용문의 영역이요 미적 지각은 시의 영역이다. 시는 바로 제 2차적 의미 즉 미적 지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상적 지각 → 미적 지각(시)
1차적 관조의 대상을 전경이라 하고, 2차적 관조의 대상을 배경이라고 한다. 직접 보이는 것은 전경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배경이다. 하르트만은 예술 작품의 미적 가치는 배경층이 전경층으로 오버랩되면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실사적인 전경과 비실사적인 배경이 교차되면서 생기는 통일 현상이다. 이것이 미이다.
전경은 실제로 눈에 띄는 물리적 층위이나 배경은 실제로 있지 않은 정신적인 층위이다. 예술 작품에서는 하나의 전경에 하나의 배경만이 아닌 여러 배경들이 겹쳐 나타난다. 여러 층 위로 배경이 분열되어 경이로운 현상으로 현현되는 것이다. 하나의 전경에 여러 개의 배경이 오버랩되어 나타난다면 의미의 크기는 그만큼 넓고 전경에 한 두 개의 배경이 떠오른다면 의미의 크기는 그만큼 좁을 것이다. 전경은 소재는 될 수 있어도 의미는 될 수가 없으며 배경은 의미는 될 수 있어도 소재는 될 수 없다.
멍든
살을 깎아
모래를 나르는
파도
천 갈래 바닷길이여, 만 갈래 하늘길이여
옷자락 다 해지도록 누가 너를 붙드는가
-홍성란의 「섬」전문
전경에서 배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동원시켜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의미 분열이 시작된다. 파도가 멍든 살을 깎아 모래를 나른다든지, 바닷길은 천갈래, 하늘길은 만갈래가 된다라든지, 옷자락 다 해지도록 섬을 붙든다라든지 하는 것들이 섬인 전경에서 분열된 배경들이다.
의미가 전경에서 배경으로 이동할 때 시인과 독자는 서로 타협을 하게 된다. 이 타협이 어느 시점에서 멈추게 되는 데 이 곳이 바로 의미가 형성되는 지점이다.
텍스트는 시인과 독자 간의 거리를 최소화시키며 새롭게 타협해가는 창조적 공간이다. 일단 활자화되면 시인의 생각은 순간 거기에서 정지된다. 이 정지된 화면에서 서로 다른 배경들이 오버랩되어 분열되기 시작한다. 이를 어떤 식으로 재생산하고 재창조하느냐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분열의 크기가 크다고 해서 감동이 크고 분열의 크기가 작다고 해서 감동이 작은 것은 아니다.
주목하고자하는 것은 전경과 배경이 얼마나 유리되어 나타나는가이다. 이 거리는 전경에 대한 배경의 분열 크기로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여러 의미들이 왔다 가면서 남겨놓은 면적들이다. 이것이 크다면 ‘대상을 보는 눈이 새롭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감동의 문제와는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너를 범하는 것은 참으로 간단하다
가벼운 칼질 몇 번에 몸뚱이가 해체되고
바다를 지탱한 은비늘도 사정없이 벗겨지고
뜨거운 냄비 속을 욕심으로 들여다본다
짠 내를 토해 내며 공유하는 너를 본다
죽어서 더 향기로운 식탁 위의 갈치여
나도 우려낼 그 무엇이 남아있을까
접시 속의 네 뼈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
자꾸만 밥상 앞에서 무릎 꾾는 이 저녁에
- 김종렬의 「갈치 찌개를 끓이다」 전문
시인은 전경인 갈치 찌개를 바라보고 있다. 갈치 찌개가 죽어서도 향기로운 갈치로 배경이 분열되더니 나중에는 화자 자신의 모습으로 분열되고 있다. 갈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 갈치의 뼈처럼 고요할 수 있을까라고 시인은 반문하고 있다. 고요를 해탈(?)의 경지로 보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갈치 찌개라는 평범한 음식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갈치만도 못한 자신이라고 생각해 갈치라는 음식 앞에서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조는 일종의 알레고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찮은 것에 대해서는 무릎을 꾾지 않는다. 그런데 시인은 평범한 일상의 밥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느끼지 못하고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에 대한 질타일 수도 있다. 언제나 의미는 남기 마련이어서 나머지 배경은 작가와 독자들이 타협하면서 채워갈 수 밖에 없다.
시조를 쓴다는 것은 같은 전경을 보고 다른 특성을 발견해내는 일이다. 날카로운 눈을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주관적이나 누구나 감동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객관적인 배경이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시조를 쓸 수 있다. 시조는 12개의 돌로 3장이라는 3개의 주춧돌을 세우고 훌륭한 한 수의 정자를 지어야한다.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는 나그네가 쉬어갈 수 있는, 강과 산을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그런 정자를 지어야 한다.
어린 염소
등 가려운
여우비도
지났다.
목이 긴
메아리가
자맥질을
하는 곳
마알간
꽃대궁들이
물빛으로
흔들리고.
부리 긴 물총새가
느낌표로
물고 가는
피라미
은빛 비린내
문득 번진
둑방길
어머니
마른 손 같은
조팝꽃이
한창이다.
-유재영의 「둑방길」전문
「둑방길」은 ‘염소, 여우비, 메아리, 꽃대궁, 물총새, 비린내’ 등의 소재들과 같은 일반적인 경치만을 나열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어린, 가려운, 목이 긴, 마알간, 부리 긴, 피라미 은빛, 문득 번진, 마른 손 같은’ 등의 수식어들과 ‘자맥질하는, 흔들리고, 물고 가는, 문득 번진, 한창이다’ 등과 같은 서술어들을 제시해놓고 있다. 이 수식어와 서술어들 때문에 평범한 소재의 전경이 독특한 파스텔톤 배경으로 분열되고 있다. 이것이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의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에는 텍스트와 또 다른 텍스트가 있다. 텍스트의 세계는 1차적인 전경화된 텍스트요 또 다른 텍스트는 2차적인 배경화된 텍스트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전경 속에 숨어있는 분열된 배경들을 읽어내는 일이다. 이것이 감동으로 오랫동안 남아 명작이 되는 것이다.
-신웅순,‘이미지,전경과 배경’,『서예문인화』(2020.10),45-49쪽.
[출처] 제22강 이미지, 전경과 배경|작성자 석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