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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성명/공지) 스크랩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업적 총람
김상호특전도장 추천 6 조회 214 12.01.31 16:30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업적 총람

 ▲ 농민과 함께 벼 베기를 한후 김밥을 안주로 막걸리를 따라 드리는 분이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새마을운동등의 국민운동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크게 일으키셨고. 투철한 애국심과 헌신으로 국가재건에 공헌하셨습니다. 


가난한 농촌의 아들로 태어나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시대 속에서 성장해 온 박정희 대통령... 어려움과 아픔의 세월을 몸소 겪어 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남북의 부모형제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릴 통일조국의 실현을 희구해왔습니다.

 

박대통령의 소원은 이 땅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제건설 없이는 빈곤의 추방이란 없을 뿐 아니라, 경제건설 없이는 부정ㆍ부패의 온상이 되는 실업과 무직을 추방할 수 없고, 나아가,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즉 자유의 힘이 넘쳐흘러 북한의 동포를 해방하고 통일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박대통령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1ㆍ2ㆍ3ㆍ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서, 공업입국의 터전을 튼튼히 닦아 놓았으며 바야흐로 중화학공업화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선대의 빛나는 전통과 문화를 계승발전 시키고 문예와 학술의 적극적인 창발로 문화한국 중흥에 진력하였습니다.
 

박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은 근면ㆍ자조ㆍ협동의 정신을 일깨우면서 새로운 정신혁명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일환으로 우리의 정신문화와 정치제도도 떳떳하게 그 국적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분단의 논리가 지배하던 냉전의 대결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번영을 추구하는 평화와 조화의 구조로 전환하는 세계 조류에 발맞추어 27년 동안 단절되었던 남북간에 대화의 문을 열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나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그것은 국력배양의 가속화를 통해 번영된 통일조국을 구현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땀 흘려 일하는 근로와 창의, 생산과 능률의 미덕을 사회윤리의 기본으로 삼고 일하는 국민에게는 안정 속에 보람있는 생활을 누리게 할 수 있도록, 근로자의 이익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사회보장제도를 더욱 확충해 나갔습니다.
 

한민족의 엄청난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도성장을 거듭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터전을 굳게 다지면서 세계 속의 한국으로 부상하게끔 했습니다.
 

일상 생활용품까지 우방의 원조에만 의존하던 국내 경제가 자립단계에 도달했고, 소총 한 자루 우리 손으로 만들지 못하던 우리나라 방위 산업을 국산 장거리 유도탄 시대의 막을 열게 함으로써 우리의 국력은 북한을 제압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분단된 국토를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데 신명을 다 바쳤습니다.
 

저마다 자질과 능력을 살릴 수 있도록 사회 개발정책을 계속 확충해 모든 국민이 밝고 보람찬 생활 환경에서 고루 잘 살 수 는 사회, 온 국민이 추구 하고 있는 생활의 미래상을 앞당기기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한강변의 기적을 4대강에 재현시켰으며, 수출입국의 물결을 5대양에 일으키고, 농어촌을 근대화하여 우리나라를 중진국 상위권에 올려놓았습니다.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한 삶을 살다간 박대통령은 물욕은 물론 자신의 재산에 대한 욕심도 전연 없었습니다. 오로지 나라의 경제와 살림살이가 잘되는 것만 바라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근검, 절약하고 청렴했던 박대통령의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이 많습니다.
 

전기를 아끼려고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두었는데, 그것조차 돌리지 않았고, 대신 창문을 열어두곤 했으며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파리를 잡기 위해 손수 파리채를 휘둘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목 부분이 해져 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는 낡은 러닝셔츠를 입었고 몇 십 년을 매었던지 두 겹 가죽이 떨어져 따로 놀고 있는 허리띠 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박대통령이 뇌리에 새기고 국민과 함께 나눠 가지려 했던 국방ㆍ경제 표어는 수없이 많습니다. 증산ㆍ수출ㆍ건설, 근검ㆍ절약ㆍ저축, 근면ㆍ자조ㆍ협동, 한 손으로 싸우고 한 손으로 건설하자, 수출입국, 조국근대화, 유비무환, 자주 국방, 부국강병 등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박대통령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하여 국민정신의 연구ㆍ함양ㆍ진작에 힘써왔습니다.
 

박대통령이야말로 혁명가ㆍ군인ㆍ교육자ㆍ행정가의 장점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지도자로서 임진왜란ㆍ병자호란ㆍ한일합방ㆍ남북분단, 6.25동란을 거치면서 쇠잔의 길을 걷던 우리 민족에 있어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초석을 확립한 위인으로서 주요 공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수출입국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입안할 당시, 우리 정부는 수출보다는 수입 대체형 공업화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수입대체산업의 공업화에 따른 외화부족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국가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용단에 따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기본 방향을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경제개발 방향의 재정비는 선진산업국으로 도약하는 시발점인 동시에, 우리 국민을 치열한 국제 경쟁사회로 뛰어들게 한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당시 정부는 수출제일주의를 모토로 수출진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64년 부터 매년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마련, 수출진흥정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해나갔다. 
 

특히 1967~69년도는 수출산업육성에 중점을 두고, 1967년에는 수출산업 기반의 확대, 1968년에는 수출산업의 양산체제 확립, 1969년에는 수출 산업 시설의 현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수출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이런 체계적인 계획을 통해 기업 중 수출특화산업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한편, 수출지원제도 및 행정체제를 개선하고 해외시장 개척의욕을 고취하여, 업계를 수출지향적으로 정비하고 수출추진 체제를 확립하였다.
 

우리나라 수출정책과 수출독려의 산실은 1966년부터 박대통령이 수출최고 사령관이 되어 매월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였다. 수출진흥회위원과 정부, 학계와 연구기관을 비롯해 수출지원기관과 업계 등 유관기관 대표들 약 250여명이 참석하여 월별, 품목별, 지역별 수출동향을 점검하는 이 회의는 수출증대를 위한 모든 시책과 업계의 애로타개 등의 매월 추진상황을 점검ㆍ보고하여, 수출진흥을 위한 시책과 제도를 하나하나 정착시켜 나갔다.
 

1979년까지 계속된 이 회의는 수출에 관한 최고전략회의로서 수출진흥종합 시책, 수출계획, 수출촉진제도, 수출독려 등을 논의하여 최종 결정하는 장이 되었다. 우리는 ‘한국의 수출’ 하면 박대통령을 연상하게 된다.
 

수출입국에 대한 노력의 결과는 점점 가시화되었다. 1962년이래 노동집약 중심으로 한 수출공업화정책이 성과를 나타내며 수출이 급속히 신장되고 고율의 경제성장이 유도되었다.
 

1962년 5천만 달러이던 수출은 1964년 1억 달러로 급신장을 보였으며, 1968년 5억 달러, 1969년 7억 달러, 그리고 1970년에는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수출 상품 구조면에서도 1차 상품과 공산품의 수출 구성비가 1960년 83.2%대 16.8%이던 것이 1970년에는 공산품이 83.6%로 급속히 높아짐으로써 후진국의 수출구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 10월 유신을 거치며 박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 1,000 달러 소득” 이란 지표를 제시,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을 선언하면서 철강, 비철금속, 기계, 자동차, 조선, 전자, 석유화학 등을 육성하여 수출의 획기적 증대를 이룩했다. 특히 수출산업의 중화학공업화는 전자산업의 전략적 육성, 조선 공업의 수출산업화, 기계공업의 국산화, 자동차 공업의 수출전략산업화 등에 역점을 두었다.
 

아울러 수출용원자재의 국산화, 수출취약산업의 육성 등을 통한 수출의 질적 고도화와 종합무역상사의 육성, 그리고 수출자유지역의 설치, 외국인 투자 유치, 중소기업의 수출능력 강화 등 수출산업의 저변확대에도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74년의 석유위기도 수출로 극복하고, 1977년 12월 22일, 당초 1980년 달성키로 한 대망의 100억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앞당겼다.
 

‘한강의 기적’으로 평가되는 수출입국 정책의 성공은 우리나라를 가난하고 힘겨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경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저개발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탈바꿈시켰다. 더 나아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경제의 부상과 남북통일을 추진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세계13위 무역대국의 위상 역시 박대통령의 수출입국에서 발원하고 있다.
 


2.경부고속도로건설
 

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67년 4월 박대통령이 제6대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대국토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와 항만의 건설 및 4대강(한강ㆍ낙동강ㆍ금강ㆍ영산강)유역의 종합개발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기간 중에 착수하겠다”고 그 계획을 공표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 실정으로 고속도로건설이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부정 또는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까지의 우리나라 교통문제를 조사한 IBRD 조사단도 교통 및 수송난을 고속도로망으로 해결해야 된다는 건의는 물론 방향조차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원대한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국가경륜의 일환으로, 1967년 11월 7일 건설부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한 후 본인 스스로가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국토개발계획을 비롯해 각 노선과 단면도의 비교검토 및 건설비 산출, 용지매수에 따르는 자료 등을 직접 지휘하였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공사비였고 박대통령이 노심초사한 문제도 바로 그것이다. 박대통령은 ‘국가기간고속도로건설계획조사단’을 1967년 12월 15일 발족시키고 관련자료 검토와 분석을 거쳐 3백억원 선이면 무리가 따르더라도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68년 2월 5일 제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경부고속도로건설 재원확보 계획을 확정했다.
 

1968년 2월 1일 원지동에서 서울~부산고속도로 건설공사의 첫 발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어 4월 3일 오산~대전간 공구(1백 6.6㎞), 9월 11일에는 대구~부산간(1백23㎞), 마지막 난공사 공구인 대전~대구간(1백 52㎞)은 1969년 1월 13일에 착공되었다. 재원확보 다음의 난제는 건설장비의 도입 문제였다. 정부는 비상조치로서 미ㆍ영ㆍ불ㆍ스웨덴 등의 유명업체와 협의하여 건설회사부담의 상업차관으로 도입하였다.
 

가장 난공사였던 대전~대구간은 전 노선의 약 3분의 1인 1백 52㎞이지만 토목공사는 전체의 약 47%, 절토량은 약 50%, 장대교는 17개소로 60%, 그리고 터널은 전체의 90%가 이 구간에 몰려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난관을 겪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당재터널 공사가 가장 난공사로서 13회에 걸친 낙반 사고와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 공기에 차질을 빚었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서울~부산 천리간에 거창한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는 헬리콥터로 혹은 지프를 타고 수없이 현장을 시찰하며 공정을 살피고 현장 관계자와 인부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박대통령 친필의 ‘고속도로 구상도’, ‘서울~부산선 축선 확정도’, ‘용지 매수계획에 관한 노트’, ‘감독반 구성에 관한 지시’, ‘공정계획표’, ‘연도 조경을 지시한 메모’ 등은 박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건설 시초부터 완성까지 시종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세세히 알게 해 준다.


착공한지 2년 5개월만에 당초 3백 30억원으로 예상했던 공사비는 설계변경과 물가상승 등으로 4백 29억원,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약 9백만명 및 장비 1백 65만대가 투입된 총 연장 4백 28㎞의 단군이래 최대토목공사인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일 드디어 개통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교통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군사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새로운 일대도약의 전기를 마련했고 전국을 하루생활권으로 묶음으로써 국토 및 국민생활의 균형적 발전을 이룩했으며 ‘우리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각을 전 국민에게 일깨워 집약된 국력으로 1980년 목표했던 1백억 달러 수출, 1천 달러 소득을 3년이나 앞당겨 달성하는 기적을 낳게 했다.

 

박대통령은 京仁, 경부, 호남, 남해, 영동, 동해, 구마, 언양~울산간 의 8개 고속도로를 완공시켜 1967년 4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조국근대화의 기본설계의 하나인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ㆍ강릉ㆍ부산ㆍ목포를 잇는 기간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지켜 전 국토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고속 도로망을 구축함으로써 전 국토를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부산~마산간 고속도로는 1978년 5월에 4차선으로 착공되어 박대통령 서거 후인 1981년 9월에 준공되었다.


박대통령이 단행한 2차선 고속도로의 4차선 폭 용지확보, 접도구역의 통제, 그리고 그린벨트의 설치와 엄수는 우리나라 국토개발 백년대계와 후세를 위한 위대한 선견지명이요 영단이라 하겠다.

 

박대통령은 한국형 고속도로의 건설원칙, 즉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고속도로 건설의 아이디어를 착안해내고 실천하였다.
 


3. 새마을운동
 

아직도 근대화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어려운 농촌, 이곳을 박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잘사는 마을로 만들자는 물결이 급속하게 전개됐으니, 바로 새마을운동이다.
 

1970년 10월 전국 농어촌 3만4천6백65개 부락에 300여 부대의 시멘트와 철근1톤씩 무료로 배급되었다. 반드시 마을의 공동사업으로 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배분된 이 시멘트들은 마을진입로의 확장과 농가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등에 사용되었는데....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은 정부의 기대를 훨씬 웃도는 성과를 가져왔다.
 

마을 주민들은 정부에서 배분한 시멘트에 자신들의 노동력을 투자하여 마을 공동사업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1차 연도의 새마을사업이다.
 

그 후 박대통령은 근면, 자조, 협동하여 우수한 성과를 올린 마을부터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세우고, 주민들의 참여도에 따라 전국 3만5천개 마을을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의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1972년 제2차 새마을운동 때에 박대통령은 반응과 성과가 좋았던 1만6천6백개 마을에만 지원하고 잔여 1만8천여 마을에는 지원하지 말라는 지시였다.


이는 해묵은 농민들의 의타심을 고치고 자조정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무기력하고 태만하던 농민에게 경쟁심과 협동정신을 주입시켜 노동의욕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에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하여,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승화, 지속시켰다.


새마을운동은 환경개선사업부터 시작했으나 그 저변에는 농민들의 자립ㆍ자조정신을 일깨우자는 뜻이 담겨있었기에 정신계발, 소득증대 등과 함께 삼위일체로 추진되었다. 특히 소득증대사업으로 농촌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가소득은 1974년부터 도시노동자 소득을 상회할 만큼 되었고 1977년에 이미 1981년 소득목표액인 140만원에 도달하였다.

 

모든 마을에 자동차가 드나들게 되었고, 모든 작은 하천에 둑이 개수되었으며, 예전의 볏짚지붕은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농가에 간이상수도 시설이 설치됨은 물론이고, 전 국토 어디에서나 전기불이 들어왔으며, 모든 법정 리, 동까지 전화가 가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모든 마을에 마을회관이 세워져서 그야말로 살맛 나는 농촌으로 탈바꿈 하였다. 그 결과 새마을운동 10주년에 해당하는 1980년 4월까지, 정부 투입 자금 2조7천5백21억원, 운동참가 연인원은 약 11억명, 새마을회관 3만5천9백 50개소, 신설농로 4만4천㎞, 폭을 넓힌 마을도로 4만㎞, 신설용수로는 4천4백 40㎞가 이뤄졌다.

 

농촌새마을운동은 더 나아가 사회 전역으로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도시주민들은 농촌 새마을운동이 마을의 모습만을 바꾼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태도나 마음가짐까지 함께 달라지게 된 것에 더욱 감명을 받았다.
 

이와 함께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실시해 온 남녀 새마을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이 공직자나 사회지도급인사들에게도 확대되어, 새마을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도시주민은 도시생활에 맞게, 학교는 학교대로, 기업인들은 공장새마을운동 확산, 추진에 앞장섰다.

 

이런 새마을운동의 물결은 기업 분위기와 농촌 여성 지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의 기업인들이 농민과 함께 새마을교육을 받은 후, 종업원들의 복지후생에 많은 노력을 하게 됐으며, 농촌여성들의 발언권과 지위는 새마을 운동에 의해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가난의 악순환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왔던 우리 국민에게 짧은 기간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안겨준 새마을운동...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 개인적 구상에서 범국민적으로 번진 새마을 운동은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잘사는 농어민, 잘사는 내 고장, 번영된 조국’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새마을사업 추진을 위한 의사결정을 주민총회에서 결정케 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의식을 실천적으로 정착시키는 계기조성과 함께 민주화의 기초를 닦게 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마을운동을 민주주의 훈련도장이라 명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4. 치산녹화 
 

1960년대 당시 우리의 국토는 그야말로 벌거숭이였다. 과거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헐벗은 산에는 터전을 잃은 동식물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하지만 현재... 과거와 같은 산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푸르름이 눈이 부실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대한의 산야...
 

이는 박대통령의 치산녹화 정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산림황폐는 조선조 중반부터 인구증가와 국가의 산림관리능력 상실이 그 원인(遠因)이다. 여기에 한일합방과 일제말기부터 시작된 전쟁물자의 조달, 해방 후의 인구증가, 6.25 전쟁, 그리고 전후 복구를 위한 자재수요의 증가, 특히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임산 연료 이외에는 대체연료가 거의 없었던 사회상황이 민둥산을 만들어내는 주범이었다.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한 우리나라 특유의 온돌은 막대한 양의 나무를 소비한다. 산림이 황폐해지면서, 우리 인간 생활은 물론 자연생태계도 파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복구할만한 국가의 산림관리기능 실종까지 가세하여 산림자원이 더욱 황폐화되어 갔다.
 

해방 직후 ‘사방사업 10개년 계획(1948~57)’과 전쟁 후인 1951년에 ‘산림 보호임시조치법’과 같은 복구노력이 있긴 하였지만, 재원과 기술 부족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본격적인 복구노력은 1961년의 ‘산림법’을 제정하여 3공의 전신이 총력을 기울인 사방사업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 ‘치산녹화 7개년계획(1965-1971)’과 ‘제1ㆍ2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 등이 세워져 치산치수정책이 추진되었다.


 

봄철 식목일 외에도 가을철에 ‘육림의 날’을 휴일로 정하여 온 국민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3년 박대통령은 녹화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농림부 산하의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시킨 데 이어 연두기자회견에서 10년 이내 국토녹화를 완성할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고 식목 및 육림 현장을 수시로 직접 찾아 지도 격려했다.
 

치산녹화과정에서 사방사업 사상 최대의 난공사이며, 단일지구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 있었으니, 바로 영일지구 사방사업이다.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중에 실시된 영일지구는 일본에서 항공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할 때 관문으로 그 어느 곳보다도 민둥산의 모습이 흉물스러웠던 곳이다.


그런데, 지질구조상 한번 황폐되면 복구가 어려운 곳이어서 그 동안 50여 회에 걸쳐 소규모 사방사업을 실시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번 번히 복구에 실패한 곳이었다.

 

2-3년 내에 완전 복구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우량한 종자와 묘목을 선정하여 파식하고, 개량공법 등을 적용해 녹화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특히 황폐지에 노출된 암반의 등고선으로 단을 끊고 단상에 구덩이를 파고 객토를 하여 묘목을 식재 한 후, 3년마다 한번씩 추비를 주어 사방지 사후관리도 철저히 함으로써 영일지구 사방사업은 비로소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풀 한 포기 없는 벌거벗은 4,538ha의 집단 황폐지가 1973년부터 77년까지 추진된 5개년 연차계획의 성공으로 완전 복구되었다.

 

치산녹화사업은 제1차 계획기간에 100만ha에 21억 본을 심기로 한 목표로 4년 앞당겨 108만ha에 29억 본을 식재했으며, 78년에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여, 새로 2차 계획을 수립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 나무는 일부 산간오지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산림녹화운동 기간에 심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결과 현재 우리나라는 전국토의 어딜 가도 푸른 산을 쉽게 만나볼 수 있고, 독일, 영국,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 4대의 조림 성공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이 최대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21세기...
 

치산녹화의 성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시대를 거슬러 현재에도 남아있다.
 


5. 중화학공업육성
 

1962년 이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면서 공업입국ㆍ수출제일주의에 기반을 둔 경공업의 수출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근대화된 공업구조가 정착되고 중화학공업의 기반도 조성되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경제개발이 단순한 5개년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1980년대 1인당 GNP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경제개발목표로 세웠다.
 

그리고 “공업구조개편론”을 성안하고 1973년 박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추진선언과 함께 과학화운동전개를 강조했다.


1960년대의 정책이 공업입국, 수출제일주의였으며 1970년대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위한 중화학 공업화였다. 이를 위해 ‘중화학공업위원회’와 ‘기획단’을 두고 선진 산업국으로 나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 공업 등의 6개 업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중화학공업화의 기본 바탕이며 중심이 된 포항종합제철, 아연ㆍ동ㆍ연ㆍ알루미늄 등 4대 전략품목을 육성할 수 있는 온산비철금속공업기지, 천혜의 기후조건과 항만, 그리고 양질의 인력을 바탕으로 한 옥포조선공업, 품질과 가격면에서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기계류와 플랜트의 국산화에 기여한 창원 기계공업기지, 반도체, 컴퓨터 산업 등의 고도정밀 전자기기 산업기지인 구미전자공업단지, 석유화학제품의 국내수요 충족과 비약적인 수출증대의 기반을 마련한 울산과 여천 석유화학단지들이 바로 당시 중화학공업 추진의 결과물들이다.
 

하지만 중화학공업 정책이 추진되기까지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종합제철 건설의 경우 경제성에 대한 우려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반대의 벽에 여러 번 부딪혔으나, 박대통령의 단호한 추진력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놓았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이 진행되면서 관련 과학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대덕에 업종별로 전문연구단지가 들어서고, 산업기지별 실용연구소가 만들어 지면서 장기 기초연구를 수반한 전문연구가 추진되어 나갔는데, 이들은 모두 오늘날 기초 과학연구의 기반이 되고 있다.
 

중화학공업을 이끌어 나갈 기술인력 양성 노력도 함께 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기술교육제도를 도입하여 공고교육에 의한 기능사, 대학 교육에 의한 기술자를 양성하고, 현장에 맞는 일반 기능공 양성을 위해서 각종 직업훈련원 등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와 함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우리의 방위산업을 선진국형 체제를 갖추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미국의 대한방위 공약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탈피해 자주국방 태세를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우리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80년대 경제 미래상으로 제시된 1인당 GNP 1,000불과 수출 100억불을 당초 계획보다 3년이나 앞당겨 1977년에 달성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세계적인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공업화, 특히 중화학공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화의 획기적인 도약이 없었다면 한국의 산업과 경제는 현재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핵심이 바로 중화학공업이다.
 


6. 자주국방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남한보다 월등한 군사력으로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의 군사도발과 위협은 극심하였다. 북의 남침 위협을 저지하고, 무력침공 야욕을 근원적으로 포기케 하기 위해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의 확보가 우리에겐 절실한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계획의 일차적인 목표는 "부국강병"에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에 부심한 기간이었다.


당시 북한은 총기류는 물론 화포와 대포, 군함, 잠수함까지도 생산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소총 한 자루 못 만드는 실정이었다.


북한에 병기산업이 뒤져있던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무기생산을 계획하고, 무기생산의 소재가 되는 중화학공업을 더욱 육성시키면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여하한 무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 ‘여하한 무기도 규격의 소재를 설계대로 정확히 가공해서 결합하면 소정의 성능과 호환성을 갖출 수 있다’는 소신 아래 무기의 부품별, 뭉치별로 82개의 생산공장을 지정하되 평상시에는 그 공장능력의 80%는 민수용으로, 20%만 방산용에 충당토록 하여 평시 경제성을 제고시키고 유사시에는 전 능력을 방산에 충당하도록 했다.


그 결과 1979년 말에는 최신 첨단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지상군의 기본 병기인 155mm 곡사포, 20mm 대공발칸포, 4.2인치 박격포, 3.5인치 로켓포 등 각종 화기와 5백MD 다목적 헬리콥터와 산악전용 경장갑차, 그리고 각종 실ㆍ포탄류의 양산체제가 갖추어졌다.


특히 1978년에 들어와서는 미 탱크와 동일한 화력과 기동력을 지닌 전차를 양산하고, 마침내 9월에는 평양까지 도달하는 한국형 지대지 중장거리 유도탄을 개발, 시험발사에도 성공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유도병기 등 각종 고도정밀병기를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축적됨으로써, 독자적인 한국형 무기체계의 개발과 무기성능의 개량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방위세 신설, 향토예비군과 민방위대 창설, 병기개발위원회를 통한 국산신무기개발을 통해 방위산업의 기초를 닦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우리 군은 역사상 최초로 해외파병을 단행했다. 국군의 월남파병은 국군의 사기와 긍지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 증강과 국가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미군 철수 문제를 고심하던 박대통령은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1978년 한ㆍ미 연합사령부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ㆍ미간의 긴밀한 협력 하에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재임기간 중 미군 철수와 호전적인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라는 위기상황에서 국가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국가안보를 정책의 최상목표로 설정하고 자주국방을 적극 추진했다.
 

오직 자주국방의 일념으로부터 출발한 방위산업의 기반은 이제는 오히려 해외에 기술과 제품을 역수출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안보와 국방에 대한 집념은 오늘날 막강한 국군 육성으로 국가안보의 초석과 토대가 되고 있다.

 


7.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 창달
 

문화는 한 나라와 민족의 뿌리이며 정신이다. 수없이 많은 외침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그 힘은 무엇이고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민족의 저력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질문과 해답이 박대통령의 모든 의식의 출발점이었다.
 

1ㆍ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국민소득 수준이 크게 향상되고 국가재정에 여유가 좀 생기자 박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우리 전통문화의 유산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계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호국과 관련된 유적을 보수ㆍ정화하였다. 그 속에 어려있는 호국자주 정신을 계발, 우리 국민들이 자주자립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함이었다.


다음, 신라의 삼국통일정신이 앞으로 남북통일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통일전을 조성하고 전국 각지 선열의 유적들을 보수ㆍ정화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사상을 형성하고 발전시켜 온 선현들의 유적도 보수ㆍ정화하였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신화 유적에서부터 삼국시대와 고려ㆍ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민족 사상의 뿌리를 일깨우고 정립한 선현들의 유적들을 보수ㆍ정화하여 우리 민족문화를 재발견하고 자주성을 선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일반적인 전통문화유적에 대한 보수ㆍ정화와 보존전승사업도 함께 했다.


우리 고유의 문화적 바탕 위에서 외래 문물을 수용, 이를 독창적으로 창조 발전시킨 전통문화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선사시대와 신라ㆍ백제 문화의 연구ㆍ조사ㆍ발굴ㆍ보존사업들은 그 동안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우리의 문화사를 주체적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새로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문화보존을 위한 각종 사업과 함께 민족문화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할 문화시설도 건립하였는데, 경주ㆍ공주ㆍ부여박물관을 비롯해 국립중앙 박물관, 국립극장들도 모두 이 시기에 탄생된 것들이다.
 

1962년엔 ‘문화재보호법’이 처음 제정되면서, 음악, 연극, 춤 등의 무형문화재와 민속문화재를 문화재의 범주에 포함하고 법으로 지정해 보호받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유적총람>을 작성, 오늘날 문화재관리행정 체계의 기틀을 잡았다.


호국정신의 계승이라는 연장선상에서 국적 있는 교육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국적 있는 교육의 발판을 마련하고, 한국적 가치관의 정립과 체계화를 위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창립, <민족문화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국적 있는 교육은 곧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새마을운동과 연계 되면서 국민적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국가개발지도이념으로 발전돼 나갔다.
 

그밖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민속박물관 개설, 1979년에는 해외공보관 산하 해외한국문화원을 일본, 미국, 프랑스의 수도에 각각 설치해 일찍부터 한국문화의 해외선양, 보급에 힘썼다.
 

찬란했던 전통문화를 하루속히 복원해 국민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을 일깨워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겠다는 박대통령의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창달 이념은 지금도 우리 민족이 살아가고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생명력으로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다.

 

 ○ 출처 : 아름다운 강산 - 김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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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1.31 17:03

    첫댓글 박대통령에 대하여 음해짖거리로 국민선동질 대모하던 놈들이 정권 잡더니 대한민국 개판 만든 놈들을 청소해야
    대한민국 전통성이 바로 설텐데.......

  • 12.01.31 18:35

    대한민국의 아버지,,,나는 박정희대통령 모든책을 다읽었다..영웅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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