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10월 15일 월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루가 11,29-32)
“This generation is an evil generation;
it seeks a sign, but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Ninevites,
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교회에게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라고 한다. 우리는 율법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이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규정한다. 이 세대 사람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이기적 야심으로 빠져들고 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지만, 이 세대는 회개하지 않고, 이방인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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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요나 예언자는 처음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도 귀찮아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을 고비를 겪은 뒤, 요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은 주님의 일을 합니다. 요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던 이방인들의 상징이 바로 니네베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요나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기 시작합니다. 죽었다가 새롭게 태어난 요나를 통하여 니네베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의 기적을 지금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 사건은 기적이라기보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이 빚어낸 혁명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회개한다는 것은 혁명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주님께 되돌려 놓는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산다면, 우리의 삶은 날마다 기적 속에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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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불만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예언자가 되기 싫어 도망을 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끄심에 결국은 승복하고 ‘니네베’로 갑니다. 당시 니네베는 이방인의 큰 도시였습니다. 그가 할 일은 도시의 멸망을 예언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회개합니다. 요나 역시 긴가민가하고 예언했는데, 니네베 사람들은 즉각 뉘우침의 단식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이방인들도 요나의 외침에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언자가 ‘되기 싫어했던’ 사람의 설교를 감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조건을 답니다. 스승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함을 꾸짖으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을 ‘악한 행동’으로 규정하고 계십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기적을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매일매일을 ‘기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상의 기적’을 모르는 사람이 특별한 기적에 감동할 수는 없습니다. 신기해할 수는 있어도 감동을 받지는 않습니다. 감동 역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은총 선물
-김희준 신부-
돼지 한 마리가 울타리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빨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가 돼지 눈앞에 떨어졌습니다.
돼지는 얼마간 킁킁거리다 조심스럽게 입 안에 넣어 봤습니다.
그러자 꿀맛같이 단맛이 입 안에 퍼졌습니다. 돼지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 천상의 맛을 다시 먹고 싶어 주둥이로 감이 떨어진 주위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감이 나올 리 없었지만 돼지는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깨진 병 조각들이 돼지의 주둥이를 찔러 피가 나고
기진맥진해진 돼지는 마침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돼지는 달디 단 홍시의 맛을 잊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숨진 돼지 등 위로 빨간 감 하나가 뚝 떨어졌습니다.
감이 나무 위에서 떨어진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땅만 파헤친 돼지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미련함을 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허락되었을진대, 정작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생존 경쟁 속에서 상처입고 피를 흘려도 땅의 일에만 집착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은총을 입은 아홉 명의 나환자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복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주어진 선물임을 인정하고
겸손되이 감사드리는 사람입니다.
어머니 땅과 오누이 강산
- 유정원-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얼마나 망가져가고 있는지 접하면서, 그것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만하는 인간이 이루어낸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풍요롭게, 조금 더 편리하게 살려는 욕심이 바벨탑처럼 쌓이고 쌓여 다른 생명들을 짓밟고 있습니다. 이상 징후들이 덮쳐오는데도 여전히 자기밖에 모른 채, 우리 생명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는 소중한 지구와 그 안에 깃든 나무 · 꽃 · 동물 · 곤충이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외면하는 우리는 과연 악한 세대일 것입니다.
요나가 이방인인 니네베인의 구원에 하느님이 개입하시지 않기를 바라며 도망쳤지만, 결국 그는 니네베인의 회개와 하느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하느님이라는 좁은 소견에 갇힌 요나에게, 하느님은 당신 사랑을 국경이나 민족 감정으로 갈라놓을 수 없다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솔로몬의 지혜를 얻고자 적극 찾아 나선 남방 여왕은 꽤 통이 큰 여성이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을 자신의 복음 말씀과 이적치유에서 헤아려 보라고 말이지요. 복음서는 소외와 멸시에 짓눌린 병자와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그럼 오늘 이 세상에서 가장 억압당하고 상처 입은 병자와 죄인은 누구인가요 ? 어머니 땅과 오누이 강산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내 피붙이들을 모조리 만신창이로 만들어 우리조차 숨 쉬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우리는 악한 세대의 끝을 십자가로 짊어져야 하겠지요.
표징이 되라시는 주님
-김찬선신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2년 전인가, 도라산에서 한우리 야외 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남북의 화해를 위해서 기도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있던 때였기에
우리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땡볕에서 미사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난 뒤였든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습니다.
한참동안 그렇게 있었기에 저도 볼 수 있었고
몇몇 분들은 사진에도 그것을 담았는데,
거기에 대해 제가 어떤 말도 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 어떤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사업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표징으로 여기고 고무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저도 회원들이 이 현상으로 고무되기를 은근히 바랬지만
사실 그것이 오늘 주님이 한탄하시듯이 사악함입니다.
하느님을 자기 일에 끌어들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꼭 무슨 특별한 이적이 있어야지만 느낍니까?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은 모든 것이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나 계시기에
매일 뜨는 해가 하느님의 표징이요,
매일 보는 내 창 문 옆의 이파리가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나의 눈이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나의 귀가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혀가 회개해야 하고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을 찾는 나의 촉각이 회개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무딘 마음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요나와 무엇보다도 당신이 표징이 되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야말로,
그것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회개,
육은 죽고 영으로 다시 살아나는 회개야말로
하느님께서 진정 우리와 함께 계시는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며
회개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닌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늘 보는 것이고 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너희가 표징이 되라고.
특별한 현상을 요구하지 말고 너희의 회개가 표징이 되라고.
모든 것 안에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는 회개가
다른 사람도 보게 하는 것이 되게 하라고.
청하지 말고 배웁시다
-김귀웅 신부-
며칠 전 오랜 후배의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하는 사업이 조금
어렵다는 이야기와 함께, 남편이 며칠 전까지 54일 기도를 했는데 기도를
마치자마자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움에 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편은‘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도 하느님은 하나도 들어주시지 않으니, 하느님이 정말 계시냐’고 하더랍니다. 전세계 곳곳의 성모님의 발현지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가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기적, 표징을 일으킨 예수님을 보면 그 모든 기적은 다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난처한 입장이 된 혼인 잔치 주인을 위해서, 배고파 하는 군중들을 위해서,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해서, 수십 년 동안 한자리에 누워만
있어야 하는 불쌍한 처지의 환자를 위해서, 풍랑에 시달리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죽음도 당신이 아닌 다른 모든 이를 위한 것이었고, 부활 역시도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표징을 구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악한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찾으러 왔던 여왕처럼 그분의 모습을 배우려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여야 합니다. 그분에게 청하지 말고 그분에게서 배웁시다.
“이 세대는 정말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기적 중의 기적>
인간이 지닌 심리적 특징 가운데 특별한 것이 ‘호기심’입니다. 어디 가나 호기심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뭐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이곳 저 곳 다 기웃거립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다 관심 있습니다.
취미 활동도 그간 거쳐 온 것만 해도 수 십 가지입니다. 뭔가 새로운 기기가 판매되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구입합니다. 요모조모 살펴보고 뜯어보고 조립하고, 완전히 파악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런 사람 특징이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파악했다 싶으면 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립니다. 그러다보니 이것 저 것 많이 아는 것 같지만 깊이 알지 못하고, 어느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지 못합니다. 저희 수도회에서는 이런 형제를 두고 ‘찢어진 백과사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호기심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진보를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기심도 어느 정도여야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합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호기심이 과한 신앙인들이 계십니다. 어디 뭔가 특별한 곳이 있다면 득달 같이 달려갑니다. 누군가 특별한 체험을 했다면 귀가 솔깃합니다. 꼭 내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다보니 교통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가 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과 치유활동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하느님의 권능을 군중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지 군중들은 더 많은 치유, 더 강도 높은 기적을 끝도 없이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에 예수님께서는 노기 찬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정말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시대, 기적이 무엇이겠습니다.
하느님의 한량없으신 자비에 힘입어 이 아침, 우리가 다시금 눈떴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아침, 우리가 그 누군가의 부축 없이 우리 자신의 두 발로 서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또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성체성사야말로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비천한 우리 인간과 합일한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어께에 메어진 멍에의 무게로 휘청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 살며시 그 멍에를 벗겨주시는 하느님, 그분 안에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무인도처럼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매일 다정한 친구로 다가오시는 예수님, 그분 사랑 안에 하루를 기꺼이 견뎌나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반짝이는 눈에는 눈물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라는 체코 출신의 시인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소설 <말테의 수기>나 시 <가을날>로 알려져 있지요. 아니면 그보다 ‘장미의 시인’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렬하다고 해야 할까요? 장미를 무척 사랑했고 결국 장미가시에 찔려 상처가 덧나 숨을 거두었으니 말이지요.
릴케와 장미에 얽힌 일화입니다. 젊은 시절, 매일 아침이면 집으로 그의 연인이 방문하고, 두 사람은 함께 산책을 합니다. 그때마다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 구걸하는 노파를 만나곤 했는데 릴케의 연인은 으레 동전 한 닢을 적선했습니다. 그러나 손바닥 위로 동전이 떨어져도 노파는 고맙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얼굴 한번 드는 법 없이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생기도 없고 세상에 희망과 애정이라곤 전혀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어느 날 연인이 릴케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동정심이 없나요? 왜 한 번도 그 노파에게 적선을 하지 않죠?” 릴케는 웃기만 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릴케와 연인이 산책길에 나섰을 때 릴케의 손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파 앞에 다다르자 릴케는 몸을 수그리고는 두 손으로 노파의 손을 다정스럽게 잡고 그 장미를 꼭 쥐어주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눈을 떠 장미를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릴케를 봅니다. 곧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함께 일어섭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포옹을 합니다. 포옹이 끝난 뒤 노파의 뺨은 홍조로 물들고, 반짝이는 눈에는 눈물이 고였으며 입가엔 잔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지요.
릴케의 장미 한 송이는 세상에 아무런 낙이 없이 살아가던 노파의 마음에 따뜻한 사랑을 심었습니다. 하지만 장미는 하나의 상징일 뿐입니다. 걸인노파를 잠시나마 삶의 기쁨에 젖게 한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릴케의 따뜻한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릴케의 마음과 노파의 마음이 장미라는 상징으로 서로 통한 것이지요. 기쁨에 찬 노파의 모습은, 노파의 일상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처럼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어떤 표징도 그 자체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믿는 마음, 사랑의 마음이 없을 때 그 표징은 한낱 물건이나 의미 없는 현상일 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표징, 사랑이 없는 표징은 우상이며 거기에 매달리는 행위는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재적 자유
-김찬선신부-
인간은 누구나 해방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언짢은 소리를 들어도 그 말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기를.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에 집착치 않고 자유롭기를.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기를.
사랑을 하면서도 그 사랑으로 구속되지 않기를.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에 의해 구속되지 않기를.
불가에서는 부처가 집착케 하면 부처를 죽여 버리라고 합니다.
법경이 집착케 하면 법경을 태워 버리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치면
하느님마저 죽이고 성경도 태워버리라는 말인데
그만큼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고
집착치 말라는 것이겠지요.
에릭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대학생 때 읽었으니 벌써 30년이나 된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자유에 대한 그의 표현입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 자유가 있는데
하나는 “-으로부터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으로서의 자유”라는 내용인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으로부터의 자유”는 불완전하고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매여 있다는 반증이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할 때마다 사실은 그것에 매이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만큼 그것에 더 매이게 되기에
우리는 “-으로서의 자유”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소유적 존재의 비 소유적 자유도 좋지만
근본적으로 존재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적 자유인은
어떤 말에도 자유롭고
어떤 평가에도 자유로우며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육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되게 하여
우리는 자유부인의 아들로서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바오로 신학의 표현으로 얘기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육의 존재에서 영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지만
우리는 육의 세계에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독서강론> : 하느님의 약속으로 구원받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후손이 없어서 걱정하는 아브라함에게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 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창세 15,4-5) 하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사라는 몸종인 하갈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자식을 낳도록 하여 아브라함이 86세 되던 해에 이스마엘이 태어났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것은 인간적인 생각과 계산의 결과였다.
하느님께서 친아들을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약속에 온전히 의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친아들을 낳지 못하리라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기에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에 사라는 친아들 이삭을 낳았다. 그리고 친아들 이삭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어났다.
사도 바울로는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은 것을 율법과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에 비유하며,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 사는 사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참된 상속자임을 설명한다.
하갈을 시나이 산의 계약에 비유하고 사라를 그리스도를 통한 새 계약에 비유한 것이다. 하갈이 여종이었던 것처럼 시나이 산의 계약으로 만들어진 율법은 이스라엘을 종처럼 지배한다. 율법이 지배하는 한 인간은 종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사라는 하느님의 약속에 의해 이삭을 낳았다. 그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은 사람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주고 자유를 누리도록 하며 새 계약 아래 살도록 한다. 그러므로 다시는 율법이라는 종의 멍에를 메고 살 필요가 없다.
이삭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상속자이듯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이 곧 진정한 상속자이다. 하느님의 약속 안에 사는 사람은 지상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는 천상의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된다. 그곳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예루살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에게 영적 자유를 주셨다.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행복을 구한다면 자신의 업적에 얽매여 노예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의 대가를 치루셨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신다. 이처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기면 우리는 율법에 매이지 않고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아직도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 줄 안다면 이는 다시 율법의 종이 되어 멍에를 메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계산에 의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이삭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이루셨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인간적인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의 결과이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얄팍한 지식과 꾀는 통하지 않는다. 구원이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다만 겸손하게 이를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행위와 업적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신앙인이 되자. 행위와 업적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우리 시대 기적>
-양승국신부-
오늘날도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디 가면 특별하다더라, 어디가보니 정말 말씀이 좋다더라, 어디 가니 어떤 분 ‘기도빨’이 세다더라며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가시는 분들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큰 교회 행사만 치러지면, 하늘을 유심히 쳐다들 보십니다. 일상생활 안에서도 꾸준하고 지속적인 영적생활보다는 뭔가 대단 한 것, 눈길을 확 끄는 화끈한 것을 찾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탑 쌓듯이 하나하나 쌓아 올라가기보다는 드라마틱한 대반전,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동화 같은 결말을 기대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서 표징이나 기적을 찾아야 되겠습니까?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멀리 가실 필요도 없습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할 수 있는 매일의 미사야말로 기적 중에 기적이요, 표징 중의 표징입니다. 정성껏 봉헌되는 미사 안에서 우리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준비된 미사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홍해의 기적을 연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어제의 나를 홍해바다에 깊숙이 묻고 새로운 나로 새로 거듭 태어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입국할 수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이웃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기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한 쪽 문을 닫으시지만 언젠가 또 다른 문을 열어주심을 굳게 믿는 이웃들 안에서 우리는 하늘의 표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의 병폐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이 시대, 없이 살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웃들 안에서 우리는 기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 수련자 형제들, 제가 봐도 불쌍합니다. 요즘 동네 개들도 목에 걸고 다닌다는 그 흔한 핸드폰도 없어서, 가끔씩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합니다. 집에 전화 한통 걸려 해도 저한테 허락받고 해야 합니다. 우리 형제들 호주머니 뒤져보면 동전 한 푼 없습니다. 점심식사만 끝나면 오후 내내 ‘강제노역’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 수련자 형제들 한명 한명에게 물어보면 그래도 행복하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행복입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고통 속에서도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서, 심각한 투병생활 가운데서도 한없이 평화로운 환자의 모습에서, 임종의 병상 위에서도 또 다른 희망으로 상기되어 있는 형제의 얼굴에서 우리는 기적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적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오늘 엮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기적은 어디 다른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특별한 대사건이 아니라 오늘 내 삶 안에서 내가 이뤄내야 할 숙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을 계속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경 세계로의 여행
-유경희-
◆‘성서못자리’ 교육과정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은퇴란 누구한테나 큰 충격이 될 수 있다. 특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평생을 푸른 제복 속에 산 인생이었기에 제복을 벗고 예편을 했을 때는 혼자 사회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때 명동성당 새벽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순간 게시판에서 ‘성서못자리’ 교육과정이 눈에 띄었다. 바로 그 과정을 신청하고 모두5학기 교육과정을 마쳤으며 그때 강의를 해주신 스승 신부님과는 지금도 교류를 하며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또한 교회 미술에 대하여 특강을 나온 신부님께 감명을 받은 적이 있어 신부님이 하는 일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가톨릭 미술 아카데미’ 창설에 부름을 받고 생각지도 않은‘원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
성경 공부는 성경 속 인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어 묵상 안내가 되고 있다. 특히 성경 속 주요 인물은 예수님께 책망받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인데 그들이 내 자신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부활이라는 큰 사건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깊이 알고 있는 현재도 의심과 회의 속에 사는 우리인데 상상도 못했을 그일을 경험하지도 못한 그들이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라는 말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부활이라는 큰 사건을 경험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시기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김찬선신부-
표징,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는 악하다!
오늘 주님의 말씀입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왜 악한가?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왜 악마적인가?
사랑하는 이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청하는 것도 그러면 악한가?
홍수로 마을이 다 잠겨 비를 그치게 해달라는 것도 그러면 악한가?
이런 표징의 요청은
자비를 청하는 겸손한 요청이기에 악하지 않습니다.
악한 것은 하느님의 힘을 시험하는 교만한 요구입니다.
불신의 표시로서 기적을 요구하는 교만한 요구입니다.
이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이 빵이 되게 하라는
그 악마의 시험과 다름 아닌 요구입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끊임없이 시험하는
그 사랑 없는 자의 투정과 다름 아닌 요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돌이 빵이 되는 능력을 보이라는 시험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빈정댐에,
참으로 전혀 말려들지 않는 담담함으로
참으로 아무런 힘없는 자의 죽음으로 답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당신의 표징은 죽음을 껴안음이요,
당신의 진실은 죽음을 직시함이요.
당신의 능력은 죽어서 사는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은
요나가 니니베 사람들에게 회개의 표징이 되어 회개하게 한 것처럼
당신도 회개의 표징이 되어 우리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회개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기적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광주 대교구 최창무 주교님께서 나주 율리아의 모든 것들이 거짓된 것임을 교령으로 반포 하셨습니다.
나주 율리아를 제가 처음 접했을 땐 저도 매우 신기했었습니다. 성체가 입 안에서 피로 변하였다가 다시 성체로 변하는 모습 등을 비디오를 통해 보았을 땐 정말 믿음이 더 깊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차차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진 것은 자신이 쥐고 있던 제병을 던진 것이라는 증언과 자료를 보고 또 입에서 성체가 피로 변하는 것은 입 안에 나 있는 상처를 터뜨려 피가 나오게 했다는 것을 들었고,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것도 그녀가 묵고 간 곳에서 향수병이 발견됨으로써 거짓이었다는 것 등을 듣고 나서는 그녀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특히나 그녀가 미용실을 할 때부터 많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또 그녀의 소변을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여 사람들이 나누어 마시는 것 등을 보았을 때는 그런 기적들에 제 믿음의 바탕을 두지 않았던 것에 크게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또 얼마 전엔 수원 교구 최덕기 주교님께서 미리내 상주 데레사의 모든 것들도 거짓임을 교령으로 발표 하셨습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에도 수녀님들에 의해 그 계시 받아 그린 그림들을 보고 글을 읽어보며 신기해했었습니다. 역시나 그런 것들로 믿음이 커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배우며 그 때 보았던 많은 것들이 신학적으로 오류가 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것들이 마귀에게 속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면 미리내 중앙에 있는 삼위일체상도 계시를 통해 보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간단히만 말하면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양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은 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분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무엇에 제약을 받으신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서도 하느님은 영(靈)이시고(요한 4,24)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이가 없다고 하고 (요한 1,18: 6,46) 교회의 가르침도 아버지는 볼 수 없는 분이라고 가르치는데 아버지를 보았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리스도와 동급이 되려는 것이고 하느님을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저도 믿음이 이런 신기한 기적 같은 현상들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면 교회에서 그것들이 거짓이라는 발표를 할 때 믿음도 동시에 흔들렸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의 믿음이 그런 신기한 현상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고찰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신기한 경험이 있고 없고는 저의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늘도 어떤 분이 오랜 시간 동안 당신이 살아오면서 신앙을 가지게 된 계기가 몇 차례의 놀라운 기적 같은 경험이 있어서였다고 마치 신앙 간증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저는 그 분의 신앙이 그런 경험에서 이성적이고 영적인 과정을 통해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이렇게 나무라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의 기적이란 요나가 삼 일간 물고기 뱃속에 있다 나왔던 것처럼 예수님도 죽임을 당하여 땅 속에 있다가 삼 일째 되는 날 부활하리라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수많은 표징들을 믿지 않았던 이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활의 표징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바탕이 당신을 깨닫고 알려고 하는 지성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먼 아프리카에서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오랜 여행을 했던 남방 여왕이 솔로몬보다 훨씬 크시고 성경과 교회를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기적만 바라는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란 의미입니다. 남방 여왕은 바로 이성적인 지혜를 갈구하여 오랜 여행도 마다 않았던 신앙인의 표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남방 여왕처럼 눈으로 보이는 신기한 기적들이 아니라 이성으로 깨닫는 진리를 더욱 추구해야 합니다.
성경 안에는 모든 진리가 들어있고 그것으로 조금만 진리를 깨달으려는 의지만 있어도 믿음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이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삶을 바꾸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의 삶을 회개하고 변화시킬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보다 더 큰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아니라 가르침을 추구해야 하고 가르침대로 실천할 마음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바로 이성적인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바티칸 성당에 가면 4명의 교부들이 베드로의 교황좌 를 바치고 있는 작품을 제대 뒤편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기적이 아니라 신학의 바탕과 성령님의 영감 안에 굳건히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기적이나 신기한 이적과 같은 모래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성으로 당신께 다가오도록 인간에게 지성을 주셨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고 그래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주님께서 친히 우리 믿음을 굳건한 바위 위에 세워 흔들림이 없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잘 믿지 못하여 신기한 기적들을 찾아다니는 이유가 우리 스스로가 거짓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믿지 못할 사람들이 되어있지는 않은지 반성도 해 보아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사람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나타나엘이 쉽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그 사람 안에 거짓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단순하고 깨끗한 사람은 그만큼 더 쉽게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큰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래서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만 요구하고 찾아다니는 악한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 먼저 거짓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 되고 또 그래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성적으로 믿어야 하는 타당성을 찾아가는 노력을 기울여야겠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지성을 주셨고 그 지성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쓰여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저는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짐을 했지요. 이제 좀 더 열심히 그리고 좀 더 착하게 살겠다고……. 또한 무엇보다도 주님처럼 내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했습니다. 성사를 본 뒤에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11시 교중미사 때였습니다. 저희는 교중미사 때에는 창미사로 봉헌하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를 부르는 부분에서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음을 못 맞춰서 이 부분만 세 번씩이나 반복했답니다. 첫 번째는 첫 음이 잘못되어서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다시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에는 글쎄 한 달에 한 번 하는 국악미사 때의 ‘그리스도를 통하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지요. “다시 하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에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사제가 하는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교우들이 함께 해주시더군요. 저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아무튼 실수 연발로 이 부분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첫 음을 못 맞춘 저에게 화가 나는 것은 물론, 첫 음을 잘못 쳐준 반주자에 대해서 화가 납니다. 더 나아가서 제가 할 부분을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부르는 교우들에 대해서도 화가 납니다.
바로 그 순간, 새벽에 고해성사를 보면서 ‘내 자신을 낮추겠다.’며 다짐했던 것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뭐 화를 낼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지만, 주님 앞에서 잘 난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실수를 하는 것이고, 누구나 다 주님 앞에서는 부족할 뿐인데요.
화를 내고 있는 것은 교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벽에 분명히 고해성사를 보면서 낮추는 삶을 살겠다고 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금세 잊어버리고 다른 이로부터 인정받는 높은 자리를 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 자신의 성찰을 통해 실수한 것이 오히려 감사하더군요. 그래서 공지사항 시간에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좋으셨지요? 제가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부분을 틀려서, 미사도 보고 또 쇼도 봤잖아요.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이렇게 편하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던 것. 이것 역시 또 하나의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러한 기적은 내 삶 안에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만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교만함으로 인해 그 기적 체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말을 듣고서 모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에 비해서, 요나보다 더 큰 분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꾸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마술사 예수님만을 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기적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적은 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주님 체험. 그보다 더 큰 기적은 하나도 없음을 기억하면서, 그 기적을 체험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일상의 삶에서 주님을 체험하는 기적 같은 오늘을 만드세요.
빠다킹신부
삶의 궤도
- 이수철 신부-
제가 즐겨 쓰는 단어 중에 ‘삶의 궤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회개는 삶의 궤도에 충실함으로 드러납니다. 내 본래의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되면 죄를 짓게 되고 이때 내 삶의 궤도에 들어오도록 하는 게
회개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 이는 이제 그들이
본래 제 삶의 궤도, 즉 하느님께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삶의 궤도에 충실한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충실히 살기 때문에
외적 표징들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회개로 깨끗해진 마음에는
하늘 나라의 표징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궤도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삶의 궤도는 구체적으로 질서 있고 균형 잡힌 일과로 표현됩니다.
내 삶의 궤도에, 내 삶의 질서에 충실하다보면 떠났던 마음도 곧 돌아옵니다.
하여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 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하느님께 부친 연서(戀書)>
데레사 성녀, 하게 되면 사람들은 즉시 교회를 아름다운 장미로 장식한 작고 빛나는 꽃 소화(小花) 데레사, 즉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를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가르멜의 작은 꽃이 가르멜 개혁자들의 영성도장(靈性道場)이란 토양을 바탕으로 만개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가르멜 개혁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아빌라의 데레사, 다시 말해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입니다.
이 두 분은 가르멜 수도회와 영성의 개혁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목숨을 건 개혁 작업, 쇄신작업 끝에 가르멜의 고목에 새싹이 돋게 하였습니다.
50세에 이르러 성녀께서는 성덕(聖德)의 정상에 서게 되는데, 고백지도 신부님의 권고에 따라 적기 시작한 자서전 ‘천주자비의 글’ 안에 성덕의 정상에 이르는 과정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자서전을 통해 우리는 데레사 성녀의 생애 안에 하느님께서 얼마나 큰일을 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데레사 성녀의 삶은 한 마디로 하느님을 향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데레사 성녀의 생애는 하느님과 성녀 사이에 오갔던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설정했습니다. 그분과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연서(戀書), 연애편지가 바로 ‘천주자비의 글’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삶은 한 마디로 기도의 삶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에서 묵상과 관상을 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인간의 지상과제는 200살까지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입니다. 빛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훌륭하게 산다는 것,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완벽한 일치 안에 사는 것, 하느님을 가장 깊은 우정관계로 맺어진 절친한 친구로 설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하며 사는 것입니다. 묵상하며 사는 것입니다. 관상생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드럼 세탁기나 김치 냉장고를 선물로 받았다고 해도, 포장을 뜯지 않고 창고 속에 넣어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가전제품에 달린 플러그를 전원에 꽂아야 작동이 시작되고, 능력을 발휘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가만히 넋을 잃고 앉아있으면 그저 한 평범한 인가, 한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달려있는 플러그를 하느님이란 전원에 꽂아야만 비로소 참 인간인 그리스도인, 신앙인으로 탄생되는 것입니다.
플러그를 전원에 꽂는 행위는 바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느님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제대로 된 삶이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고,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인 측은지심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기도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을 뵙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보물과도 같은 열쇠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성(城) 깊은 곳에 있는 궁방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은총의 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문입니다.”
“좋은 벗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 하느님과 단둘이 우정을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의 이성을 가지고 그분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개념들도 끄집어내지 마십시오. 대단하고 복잡한 명상도 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청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안성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요나의 기적을 말씀하신다. 기적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기적이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사실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그분의 도우심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 기적이다.
그 옛날 요나에게 니네베의 회개를 선포하라는 소명이 주어졌을 때, 요나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자기에게 없음을 알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니네베까지 인도하시고 그를 통해 니네베를 구원하셨다. 이때 요나는 단지 하느님 구원계획에서 하나의 도구로 쓰일 뿐, 그가 이 모든 일을 해낸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니네베를 돌아다니며 그분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따름이다. 니네베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었고, 여기서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수많은 예언자와 성인이 행한 기적도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이루신 것이다.
한때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제생활을 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사제의 길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제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은총을 그때그때 허락할 테니 사명을 받아들여라.” 그렇다. 주님께서 모든 일을 하신다.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어 드리면 되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그분께 내어 드리면 그분은 나를 통해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신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 아닌가! 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가능해진다는 기적을 우리는 늘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있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강우현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하고 탄식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악을 향한 강한 충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악의 유혹을 가장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선과 악의 이중적인 성격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대립 가운데 선택의 기로에 서서 삶의 현장 속에서 결단을 내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삶의 현장에서 선을 추구하며 삶을 이끌어가기보다 은연중에 악을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선한 일을 하면 왠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인간은 악을 손쉽게 행동으로 옮기고 그 길을 통하여 유익을 구하려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선한 양심을 스스로 마비시켜 갑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있는 우리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로 하느님 앞에서 회개한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되돌이켜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대가 왜 이렇게 악할까!” 탄식하시며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인간을 위하여 당신 삶 전부를 내놓으실 계획을 내비치십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구원의지에 의하여 하느님께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지난 삶에 대한 뉘우침과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 날 때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스스로의 선한 의지로 가능하기보다는 우리를 선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가능한 선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은 우리가 세상의 삶에 지치고 자신을 더욱 완고하게 만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지난 삶의 흔적을 하느님 앞에서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며 그분의 십자가를 똑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언뜻 보기에는 인간이 당한 모욕과 수치이지만,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한낱 보잘 것 없는 나무토막이 예수님이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의 표징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매일의 삶에서 다가오는 선과 악의 대립에서 항상 우리의 마음을 선으로 기울게 하는 끊임없는 결단의 표징이며 영광스러운 구원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생활이 펼쳐지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순간, 인간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의 것에 의지하며, 결국에는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깨어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설 수 있도록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들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진정으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결단의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기적은 어떤 것인가?
-이정희 -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기적은 어떤 것인가? 요나는 야훼께서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치라”고 하시자 배를 타고 도망을 간다. 그리고 바람과 태풍이 몰아치고 배가 난파될 지경이 되자 뱃사공은 죽는다고 난리를 치는데 요나는 배 밑창으로 내려가 깊이 잠이 든다. 그러나 태풍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알게 되고,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고 죽을 지경이 되자 하느님께 구해주실 것을 호소, 육지로 나온다. 이제 야훼의 두번째 말씀이 요나에게 내린다. “니느웨로 가서 내가 일러준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여라.” 그리하여 요나가 야훼의 말씀을 전하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께 돌아서고 야훼는 그들에게 내리려 했던 재앙을 거두신다. 요나가 그렇게 피하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니느웨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도구가 된 것이다.
요나가 야훼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에서 회피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회피적인 사람은 무슨 일이든 주어지기 전에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끝까지 버티다 어쩔 수 없을 때 한다. 누군가가 나서서 먼저 해주는 것을 좋아하고 앞에서보다는 뒤에서 있기를 좋아한다. ‘일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간단한 문제를 위기 상황으로 치닫도록 만든다. 바닷속에 던져진 요나처럼.
나는 파트너십 여정 프로그램으로 삶의 태도 진단을 했을 때 회피적인 태도가 높게 나타나 매우 놀랐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 일상을 회피하며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괴로웠지만 구체적으로 보면서 왜 일할 때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런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나의 일상의 태도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기가 쉽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태도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요나처럼 그분의 손이 다른 이들의 구원에 내가 장애가 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청한다.
새벽을 열며
내가 공부를 잘해서 1등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춰서 친구들에게 인기 짱이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집이 엄청난 부자였으면……. 그래서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을 다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어렸을 때 이런 꿈들을 한번쯤은 꾸지 않았을까요? 저 역시 이런 꿈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런 꿈들을 이루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큰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들만이 주님의 놀라운 기적일까요?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부와 명예를 얻게 되고,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그것을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들 각자의 삶 안에서 주님의 기적과 표징은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예를 한 번 들어보지요.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 4~5살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본당신부님께서 저희 집에 가정방문을 오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더니만 번쩍 들어 올린 뒤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커서 신부님 되라. 신부님 되겠다고 말하면 내려주고, 말하지 않으면 안내려줄꺼야.”
그리고는 저를 내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4~5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제가 얼마나 겁이 났을까요? 잘 모르는 사람이 저를 들어 올리고 있는데, 더군다나 그 높이가 얼마나 높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결국 저는 울먹이며 신부님의 협박(?)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신부님 될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답변이 자라면서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떨치지 못해서 이렇게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셔서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신 신부님이지만, 이 신부님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저를 불러주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부르심이 바로 나의 삶 안에서 계속된 주님의 표징이며 기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주님의 표징과 기적은 얼마나 많을까요? 문제는 그 표징과 기적을 이상한 쪽에서만 찾는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다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 예언자의 말 한마디로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했던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며 표징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요나 예언자는 이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민족을 지배하던 니네베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멸망은 곧 자기 민족의 구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까지 갔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몽땅 다 회개합니다.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말이지요.
바로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가장 큰 기적과 표징이며, 이런 것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적과 표징을 찾아보세요.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지요?
빠다킹신부
표징,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말씀
-이성우-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요나의 입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로 인해 회개하고 단식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공생활을 통해 주로 하신 일도 바로 말씀선포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계시였고 하느님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이는 표징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하고 강한 표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바랐고 우리들이 바라는 기적과 표징들이 우리의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 어떠한 표징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그것들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표징입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징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라(회개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사랑과 자비와 인내가 지극한 아버지이신지, 예수님은 그분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군중들이 원하는 표징은 그들의 말초신경만 자극할 뿐 진정 구원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표징을 보여주기를 원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 존재를 걸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인간을 뿌리째 바꾸고도 남을 구원으로 이끄는 복음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 어떤 삶인지 예수님은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하나씩 곱씹으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주시는 구원의 삶에 동참해봅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
-김정대 신부-
신앙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그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신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어리석거나 아직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나 그 기도의 내용은 많은 경우 자신의 필요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인간 언어의 한계상 어쩔 수 없이 청원기도밖에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느님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만일 그 기도가 이루지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은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생존의 지혜를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세상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를 알려주신 분이다. 또 우리의 나약함과 인간 조건을 어떻게 대면하고 끌어안아야 하는지를 역설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느님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결국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만이 가장 인간적임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 조건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느님다움이 드러날 것이다. 이로써 인간관계가 편안해지고 폭력이 없어진다. 이런 변화가 바로 기적이고 표징이 아닐까?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다
-이회진신부-
지혜 추구와 회개의 삶
-이수철신부-
언젠가 어느 수사님과의 대화 중,
저의 한 마디 답변에 내심 흡족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살아가는 데는 기도와 일의 평범한 리듬에 충실함이 제일입니다.
평범함이 비범함이며, 단순함이 지혜입니다.
평범함 속에서 깊이를 추구하는 기도와 일이 균형 잡힌 삶입니다.
보이는 기적이나 놀라운 변화가 아닌,
보이지 않는 마음의 순수에 초점을 두는 삶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음 순수한 우리들은 결코 보이는 표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마음 순수한 우리들에게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들로,
기적들로 가득 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찾아 땅 끝에서 왔던 남방 여왕처럼
지혜를 추구하는 삶이요,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니네베 사람들처럼
표징이 아닌 회개에 초점을 두는 삶입니다.
솔로몬보다 더 큰 분이신 하느님의 지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요,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께 귀 기울이며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지혜 추구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통해 주어지는 내적 자유입니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천상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우리의 어머니인 교회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얽어매는 종살이의 모든 멍에를 풀어 주시고
참 자유인들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기적의 표가 되리라.
-강영구신부-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그대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감지(感知)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적(奇蹟)이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적(奇蹟)을 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4,16)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 기적(奇蹟)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해 뜨는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이 기적입니다.
뜰 앞의 나무들이 겨울 채비를 하느라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는 것이 기적입니다.
찬 서리를 맞으며 국화꽃이 향기롭게 피어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해가 뜨고 지고, 밤하늘에 보석 같은 별이 반짝이고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기적입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고 한 남자가 아버지가 되고 한 여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승에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노인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제까지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온 천지가 하느님의 사랑인 기적으로 가득하고,
우리는 기적을 숨 쉬고 기적을 먹고 기적처럼 살아갑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하느님의 큰 사랑이 현신(現身)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당신도 기적입니다.(一明)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조건부의 믿음은 강요된 믿음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군중이 계속 모여들자 예수께서 이 세대를 악한 세대로 규정하시고,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29절)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한다는 근거는 좀더 앞서간 구절에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벙어리 구마기적을 두고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이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 달라.’(11,16)고 요구한 사실을 지나간 시점에서 다시금 논제로 삼으신 것이다. 즉, 기적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가 갑자기 끼어 든 한 여인의 마리아에 대한 행복찬사(11,27-28) 때문에 무시되는가했더니, 예수께서 잊지 않으시고 다시 거론(擧論)하셨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는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믿음의 조건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모든 조건부의 표징이나 기적은 거절하신다. 오히려 조건부의 표징요구를 믿음으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불신(不信)의 태도로 간주하시면서 이들에 대한 단죄와 심판을 예고하신다는 것이다. 딱 잘라 말하자면, “기적을 보고 믿겠다.”는 주장은 “기적 없이는 믿지 않겠다.”는 불신의 태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사실 믿음에 조건이 따를 수 없다. 그것은 믿음이 자유의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을 위한 조건으로 기적이 주어지고, 그 기적을 보고 난 뒤에 믿음을 가진다면 이 믿음은 자유의지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밝혀진 사실에 대한 수긍과 인정이다. 이는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을뿐더러 강요된 믿음으로서 주관성을 상실한 객관적 차원의 사실 확인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따로 보여주시려는 것은 기적이라기보다는 이미 있었던 과거의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 온 사실(1열왕 10,1-13; 2역대 9,1-12)이고, 다른 하나는 죄악에 빠진 니느웨의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왕을 비롯한 전 시민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회개하고 단식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내리고자 하셨던 재앙을 거두신 일(요나 2,1-11; 3,1-10)이다. 여기서 세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은 이방인들로서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 야훼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조를 이룬다. 예수께서는 지혜를 찾으며,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이방인들이 오히려 심판 날에 이스라엘의 불신하는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복음의 요지는 예수님 자신이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며, 예수님의 지혜와 가르침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물론 요나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고 도망치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내다 뭍으로 다시 나온 기적(요나 2,1.11)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기적이 될 것이지만, 군중은 아무도 이를 예상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가서나 심판 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과 ‘여기’이다. 따라서 솔로몬과 요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군중 앞에 계시는 예수께 대한 선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를 선택하지 않는 행동자체가 곧 불신이요, 심판이다. 그리고 조건부의 믿음은 결국 강요된 믿음일 뿐이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루가 11,29-32)
-유 광수 신부 -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활하셨던 시대를 가리켜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라고 단정하셨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라고 현재 동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2천년 전의 세대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세대가 왜 악한 세대인가? 무엇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있었지만 연일 서울 지하철의 안전 소홀로 적지 않은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고, 부정 부패가 극에 달하고, 이라크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위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말하시는 것일까? 물론 이런 것만 본다면 분명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악한 세대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사건들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회가 꼭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세대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무슨 뜻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사건이나 부정 부패 등에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고 요나 예언자와 당신에 관한 것이다.
즉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와서 말씀하시는 데도 전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징만 요구하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요나가 니느웨에 들어 가 하룻동안 돌아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니느웨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의 뜻을 모아 니느웨 시민들에게 아래와 같이 선포하였다. 사람이나 짐승, 소떼나 양떼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맛을 보아서는 안 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은 모두 버려라.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를 멸하려던 뜻을 돌이키실지 아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 서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다."(요나 3, 4-10)라는 것이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이다. 즉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사건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즉 요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단순히 요나의 말만 듣고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그리고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 세대에 가능한 일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는 요나보다 더 크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과연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세대가 악하다는 것은 어떤 부정을 저지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 때문에 악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생활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선포된 복음은 믿지 않고 어떤 특별한 표징(기적)만을 요구하는 것이 악한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만을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하느님이 직접 복음을 선포하시는데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세 개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순절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지정된 날에 단식을 하고 금육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의 삶을 생활하는 것이다. 즉 복음과 달리 생활하였던 생활에서 다시 복음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포된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