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간 목요일 2007/10/25
말씀의 초대
믿음의 길을 걷는 이는 의롭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제1독서).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변화의 불이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불이다. 그리하여 바뀐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가르침이다. 불신과 아집을 태워 은총이 머무를 자리를 마련하려면, 모든 관계와 인연에 이 불을 가져가야 할 것이다(복음).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오늘의 묵상
◆몇 해 전 존경하던 선생님의 병환이 깊어지자 가까운 제자들이 모여 그분이 사시는 시골집 옆에 사무실을 하나 냈다. 거동이 힘드신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담아듣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정말 온몸으로 일하는 그들이 나는 더 놀라웠다. 매달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대여섯 시간씩 걸리는 곳까지 와서 밤새워 편집회의를 하고 문장 하나 토씨 하나라도 틀릴세라 조심하며 회지를 만들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 한 스승을 모신 제자들의 그 진한 애정에 나는 감탄하면서 5년을 함께했다.
한데 선생님이 돌아가실 무렵이 되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우린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했지만 장례식 때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형제처럼 여겼던 그들이 이상한 글을 인터넷에 올려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다. 5년 전에 무슨 일로 사무실을 옮겼네, 어찌어찌해서 선생님을 돌아가시게 만들었네 하면서 5년 동안 먼 길 마다 않고 선생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매도하여 샛길로 가는 무리로 전락시켜 버렸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슬픔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판에 이런 공격을 어찌 감당할까? 우리는 모든 걸 놓아두고 조용히 떠났다. 우리는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는데`…. 차마 선생님 영전에서 싸울 수 없어서 조용히 떠난 것이 밖에서 보면 분열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 두 달 동안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다.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린 것 같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이들도 저마다 아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동무들 맘에도 평화가 찾아들고 있다. 평화는 결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부활의 기쁨을 얻기 전에 예수께서는 온갖 비난을 한몸에 받으며 홀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의 길을 걸으셔야 했다. 눈물의 힘일까? 그 일을 겪고 나서부터 나약하기 짝이 없던 내 안에 무엇이든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기는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릴 따름이다. 노미화(양양 조산초등학교)
<예수님 앞에 깨갱>
가출만 했다하면 빈집이나 가게, 차 등에 불을 지르던 아이가 기억납니다. ‘방화범’인 경우 피해의 심각성이 크기 때문에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여성 청소년계’가 아니라 ‘강력계’에서 수사를 담당하지요. 수사도 엄중합니다. 상습적으로 불을 지르는 아이가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아이 내면에는 그냥 있으면 미칠 것 같은 주체하지 못할 에너지로 가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에너지는 굉장히 부정적인 에너지, 무척이도 파괴적인 에너지, 그래서 정말 위험한 에너지였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지금까지 받아온 상처와 소외에 대한 반발, 사회를 향한 강한 적개심이 방화로 발산된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내면도 조금 더 참으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력한 에너지로 충만해있습니다.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표현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면에 가득 찬 에너지는 철저하게도 생산적인 에너지입니다. 긍정적인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는 세상을 파괴하는 에너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에너지가 아니라 다분히 창조적인 에너지입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녕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 사랑, 사랑이 아닌 사랑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참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불신과 냉랭함, 상호비방과 다툼만이 활개를 치는 이 세상에 연민의 눈물, 그 소중함을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폭력과 분열, 전쟁과 무고한 죽음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 참 평화가 무엇인지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난데없이 “예수님으로 인해 식구들이 분열될 것이라”는 말씀은 또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까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제대로 된 사랑을 주시는 분, 평생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참 평화 그 자체이신 분, 그간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던 따뜻한 위로를 베푸시는 분,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 이제 다른 모든 것들은 한 마디로 ‘깨갱’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세상만물은 새로운 질서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시어머니...등등의 존재가 이제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이 아닙니다. 멀쩡한 그들을 갑자기 원수 보듯 대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우리 삶의 제1순위로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대상도 예수님보다 우선시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말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 아세요? 잘하는 사람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속담이지요. 제가 그저께 이 속담에 해당하는 모습을 갖추었답니다. 그저께는 어제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말씀드렸듯이, 졸업연주회를 다녀왔지요. 그런데 조금 일찍 가서 그 주위를 자전거로 돌면서 구경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자전거를 가지고 갔었습니다. 그리고 제 동창신부와 함께 그 대학교 주위를 자전거로 돌면서 구경하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도 세게 넘어졌는지 글쎄 제가 입은 셔츠의 앞단추 3개가 투두둑 떨어지더군요. 떨어진 앞단추를 주워들고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곧바로 음악연주회에 들어가야 하는데, 앞단추가 떨어진 불량한 차림으로 입장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곧바로 가게에 가서 반짇고리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는 동창신부에게 근처의 커피숍에 가서 단추를 달겠다고 말했지요. 동창신부는 제게 묻더군요.
“창피하지 않을까?”
저는 이 말에 곧바로 응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다시 올 것도 아닌데 뭐가 창피해?”
한번 상상해 보세요. 대학교 앞이라 얼마나 사람이 많습니까? 더군다나 그곳은 여대이기 때문에,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특히 많은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옷을 벗고서 커피숍에 앉아 바느질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로 부끄럽고 창피해야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어요. 왜 그럴까요? 빨리 단추를 달아야 음악발표회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창피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들을 떠올리면서 문득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끄러워하고 창피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 체면이 깎인다는 생각 때문에, 남의 시선에 신경을 더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내 체면도 남의 시선도 아닌, 바로 주님의 시선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 그러한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 되게 하소서.’라면서 기도하셨던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성경 속의 모습들을 묵상하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이 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남들의 이목과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면서 때로는 불의와 타협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생활을 하셨기에 불의의 반대편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편에 서고 있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임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불의와 타협하면서 그들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편에만 설 것을 다짐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맙시다.
닫힌 문을 열어라(‘행복한 동행’ 중에서)
중국의 화웨이 회사는 십여 년 동안 2가지의 신기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첫째는 회사의 영업부서에 영업부장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비밀의 사무실에 관한 것이었다. 런정페이 회장은 회사 직원들에게 8층에 있는 ‘비밀의 방’에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규칙을 사규에 넣었다. 회사가 문을 연 이래, 많은 직원들이 그 방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지만 문제의 그 방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신입 사원들이 들어왔고, 런정페이 회장은 이와 같은 사규를 다시 한 번 말했다. 신입 사원 중에 왕스라는 청년이 호기심에 못 이겨, 그 잠겨 있지는 않지만 닫혀 있는 8층 ‘비밀의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다만, 중앙에 탁자 하나와 그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 종이에는 ‘런정페이 회장에게 가서 이 종이를 보여라.’라고 적혀 있었다. 왕스는 종이를 가지고 회장을 찾아갔다. 이 종이를 본 회장은 아주 기뻐하면서 말했다.
“내가 몇십 년을 기다렸는지 아나? 이제야 용감하게 금지 구역을 들어간 사람이 나타났군. 오늘 부로 자네를 영업부 부장으로 임명하겠네.”
런정페이 회장은 전 직원 회의 때, 왕스의 이야기를 했다.
“왕스는 호기심과 용기 모두를 갖췄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다이아몬드를 찾아낼 것이고, 인생의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할 것입니다.”
몇 년 후에 왕스는 런정페이 회장의 격려 덕분이었는지 정말로 오늘날 중국 최대의 부동산 회사 완커를 차렸고, 중국의 100대 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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