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의 간의 간도 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시의 아들 행리, 춘의 아들 자 춘 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그러나 이 이자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당신 원나라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서 차별 호적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원의 이와 같은 이주민 차별 정책을 이주민을 기반을로 하고 있던 이자춘 등은 고려인 관리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한족이 주원장은 장심으로 세력을 일르켜 명나라를 세우고, 원은 명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의 힘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를 위해서는 동북면 유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자춘은 공민왕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그 이 이듬해에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자춘은 이때의 공적으로 대중대부사복경이 되어 개경으로 오게 된다. 하지만 1년 뒤인 1356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고려의 조신들은 그가 동북면으로 돌아가면 토착 기반을 이용하여 고려를 배반할 것이라고 했지만, 공민왕의 판단대로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라를 이어받게 된다(이성계의 형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 물려 죽고 없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태조4년)에 이안사는 목왕에, 행리는 익왕에, 춘은도왕에 추준되었고 이자춘은 환왕에 추존되었다. 그리고 태종 시대에 이르러 선조들이 목조, 익조, 도조에
자춘의 능은 정릉(定 陵)으로, 함흥 동쪽의 귀주동(歸州洞)에 있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세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서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중원은 명이 일어나 원을 위협하고 있었고, 만주 지역 에서는 여진족이 원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한반도와 중국의 양민들은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때라소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는 시기였다
이성계는 그러한 사기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그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동북면 지역에서 뛰어난 궁수로 이를 날렸으며, 아버지 아지춘과 함께 고려의 옛 땅아지 원의 점령지인 쌍성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가 아자춘의 도움으로 쌍성에 있던 원이 총관부를 함락시킨 후에는 고려 병방을 지키는 주역으로 성장하게 돼다.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 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2천 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무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의 활약상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휘화도 휘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자이었다. 이 헉헉한 전공에 힙입어 그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쌍성총고나부를 빼앗긴 원인 여진족 장수 나하추 하여금 고려를 칠 것을 요청했고, 나하추는 1362년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인 삼살(북청)과 홀면(홍원) 일대를 침범하였다.이에 고려는 동북면도지휘사 정휘를 내세워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자 고려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와 대적케 했다.
2월에 남침을 감행한 나하추 부대가 고려 땅 공략한 지 아미 5개월이 자나, 때는 여름의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던 7월이 되었다. 나하루의 주력 부대는 홍원 달단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동안 승저을 거듭한 결과로 군사의 수가 두 배로 불어났고 사기도 한층 고조되어 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나하추는 휘하 지휘관에게 군사 1천을 내주면서 이성계 부대와 맞서게 하였다 나하추는 계속되는 승전에 도취되어 이성계 부대를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나하추 부대의 대패였다. 나하추의 진영을 덕산동으로 전진 배치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먼저 야음을 틈타 나하추의 주력 부대를 기습했다. 이 기습으로 나하추는 다시 달단동으로 후퇴했지만 이성계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맹공은 가해 잔병들은 거의 섬멸 해버렸다.이 전투로 나하추는 수하 몇과 함께 겨우 목숨만르 건져 심양으로 되돌아갔으며, 그 이후 세력이 약화되어 명의 주원장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성계의 활약은 비단 여기에게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는 나하추를 격퇴시킨 이후에도 약30년 가까이 전장을 누볐으며, 그때마다 승리를 거둬 고려 최고의 장수로 맹위를 떨첬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의 순종은 공민왕을 페하고 덕흥군을 새 고려뢍으로 지명하여 최유, 김용 등 덕흥덕 일파에게 군사 1만을 내주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공민왕은 일단 사신을 보내어 순종의 군사들을 회유하여 했으나 기철의 누이인 기황후로 인해 실패하고, 때라서 고려 왕실과 덕흥군 부대의 무력전 불가피하게 되었다.
첫 전투는 의 주에게 벌어졌다. 의 주서을 지키고 있던 사라은 안우경이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최유 부대의 공략을 잘 막아냈지만 지원 부족으로 패전하고 안주로 후퇴하지 않을 수없었다. 의주가 함락되자 고려는 최영을 급파하여 안주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듭었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정예 군사 1천을 내주어 최영과 합동 직전을 펴레 하여 덕흥군의 선발 부대를 대파했다.
투에서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림으로써 중앙 돌파에 성공한 것이 승전의 기반으로 작용했다. 이성계의 중앙 돌파는 덕흥군 부대의 전열을 뒤혼들어놓았고 최영은 좌우로 흩어진 적군을 공략했다. 고려의 이와 같은 전술에 말려든 덕흥군 부대는 거의 섬멸당하고 덕흥군은 간식히 목숨만 부지한채 원으로 달아났다.
1369년과 1370년에 걸쳐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만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동녕북를 공격부를 공격하였으며, 1376년(우왕2년)에는 왜구에 왜구에 의 충청도 공주가 함락되고 함락되고 개경이 위협을 받자 군사를 남으로 몰아 왜구 토벌에 나섰다.
일본은 14세기 당기 호죠 정권이 몰락하고 사무라이 군벌이 들어서면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내부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본의 영주들은 공공연히 인접 국가와 상인들에 대해 침탈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영 왜구라고 했다.
이성계는 1377년을 전후하여 고려에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경상도,전라도 일대와 지라산에서 크게 물리쳤으며, 1380년에는 소년 장ㅅ 아기바투가 아기바투가 아끄는 왜구를 운봉에세 섬멸하였다. 이 전투를 흔히 황히 황산대첩이라고 부르는데, 최무선이 화약과 화통을 응용한 포를 등장시킨 것이 이때이다.
1382년 여진의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는 동북면 자휘사가 되어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이들을 격퇴했으며, 1385년에는 함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시켰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휘치가 올라갔다. 1362년 동북면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면,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門下侍中)바로 아래인 수(守)문하시중이 되었다.
2.역성혁명을 통한 조선의 개국
위화도 화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
1388년 이성계는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명의 요도을 공략하기 위해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에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페위시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데가 철령 이북 땅을 차자하겠다고 고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명은 철령 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급기야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가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자이 나왔다. 이때가 1388년 2월이었다.
우왕은 최영의 주자을 받아들였다. 우왕은 8도에서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왕족들을 한양산성으로 보내고 후현보로 하여금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 요동 정벌을 준비했다.그리고 이해 4월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주민수 그리고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 하고는 드디어 요동 절벌을 감행다.
이성계와 조민주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 당도한 것은 5월이었다. 그들은 위화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하지만 고려 대군에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첫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당이었다.
하자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아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댄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황을 옹립한다.
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다. 위화도 회군이 위왕를 찬탈하기 위한 계획된 쿠테타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요동성을 공략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 상황에서 단행한 자군책이었 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성계의 사불가론 중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 사대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하느 사가들도 있고,한편으로는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실리주의적 선택이었다는 시각도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면 이성계의 위화도 희군은 정권 장악을 노린 쿠데타였다. 그러나 경쟁 관계에 있던 조민수와 함껨 회군을 단행한 것을 볼 때 계획 된 행동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고 오히려 상황 판단에 따른 실리적인 선택이 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왕조의 최후
우왕을 페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주의 자라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 복도 원시 호복을 금하고 며의 것을 입게 했다.
하자만 조민수와 이성계는 차기 왕을 옹립하는 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조민수가 우왕의 아들 창을 내세우는 대 반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이 신돈의 자손 이기 때문에 왕씨 일족 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양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해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國璽)를 맡겼고, 안씨는 우왕을 아들 차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게 한다. 그가 곧 창왕으로 겨우 아홉 살이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가 1388년 6월이었다.
그러나 창황은 아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당하고 만다.표면적인 이유는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싸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함께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塡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미자 폐위도니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순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가게 된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고려 종정을 완정히 장악하게 된다.
창왕이 폐출된었을 때 조정 중신들 중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들의 권고를 사양하고 공양왕을 세웠다.그런데 마지막 정적이던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정도전,남은,이방원 들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고 전와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은 원주,간성,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내친 후에 왕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에 방문을 붙여 왕씨들은 한곳에 모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방문의 내용은 왕씨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 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는데,기왕에도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강화도해 배를 탔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이때 이성계 일파의 모략임을 간파한 일부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았으며,그들은 산 속에 숨어 살면서 대개 자신들의 성씨를 전(全)씨,옥(玉)씨,전(田)씨,용(龍)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한 것을 전새지고 있다. 또한 (대조실록)에는 왕씨의 후손들은 아버지 성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한 기록이 있어, 이성계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3.조선 태조으로서의 이성계
(1335-1408,재위 기간 1392년 7월 .6년 2개월)
1392년 4월 고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지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 섯째아들 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자, 이성계는 마침내 그 해 7월에 공양왕을 내쫒고 정도전,조준,남은,이방원 드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즉위 초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자만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갇추어자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아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이성계는 국호를 개정한 후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로운 땅을 물색토록 한 뒤에 무악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삼는다.
1393년 9월에 시작된 궁궐 건립 공사는 1396년 9월까지 계속되었며, 미처 궁귈이 완성되지 않은 1394년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판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지방에는 향고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고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성계는 새 왕조느이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왕조들 사아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한 싸움이 벌어져 노년에는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게 된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덞째 이들 방석을 제자로 결정했다. 물론 이런한 결정에 대한 첫째부인 한씩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없었다.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과 일곱째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왕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의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상계는 태상왕이 되었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이 문안을 위새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버리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이 예라 할 수 았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댄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용한 나날을 보내다가,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4.태조 이성계의 가족들
태조 이성계는 74세를 향수하는 동안 3명의 아내게게 13명의 자식을 얻었는데.첫째부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장남 방우를 비롯한 6형제와 두 딸을,신덕왕후 강씨에서 방번,방석 형제와 딸 하나를, 그리고 다른 후궁에게서 두 딸을 두었다.
신의왕후 한씨
태조의 첫째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본관은 안변이며 중영문하부사 한경 딸이다. 그녀는 이성계가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라로 세상을 6남과 경신,경선 등 2녀 있었다.
조선이 개국된 다음날 한씨의 시호는 절비로,능호는 재롱으로 추존되어고,1398년 정종이 즉위한 후에는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의 제릉은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능을 개성에 둔 것은 그녀가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둘째부인아자 계비인 신덕 왕후 강씨의 본관은 곽산(또는 시천)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세기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제자로 삼기까지한다. 강씨 소생으로는‘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살해당한 방번,방석 형제 경순공주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에 강씨는 현비로 책봉되었으며,1396년 사망 후에 시호는 신덕왕후,능호는 정호는 정릉이라 하였다.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 차례에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를 페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백년 뒤어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어 왕비의 기산제도 복구되었다. 송시열이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강씨가 이성계에 의해 정비로 책봉되었을 뿐만 아나라 정릉이 왕비의 능으로 조성된 점을 일깨웠던 까닭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후 정릉은 여러 번 이장 된다. 첫 번째 이장된 것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분풀이였다. 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각각을 헐고, 십아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 때문에 정릉은 현종 때 복구될 때까지 2백여 년 동안 주인 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 6명.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 2명이다. 이들 8명의 형제들은 조선 개국 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단합하여 강씨 소생이 왕자들은 참살한‘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의 역사를 피로 얼룩지레 만든 첫 번째 사건이었다.아래에 이들 왕자들의 삶을 약술하여 그들이 조선에 끼친 영향을 되짚어단다(8명의 형제 중 방과와 방원은 각각 정종과 태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덕안대군 방연에 대하서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으므로 나머리 5명에 대해서만 약술한다).
진안대군 방우(1354-193)
방우는 1354년 태조와 신의 왕후 한씨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했다.일찍이 관직에 나가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 창왕 즉위년의 1388년에는 밀직부사로 밀직사 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창왕의 친조를 전했으나 뜻을 아루지 못하고 귀환했다.
방우는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진안군으로 책봉되고 함경도 고원의 전답을 녹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지병으로 이들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함에 따라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조선 제 2대 왕은 둘째인 방과가 이어받게 된다.
익안대군 방의(?-1404)
방의는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익안군에 봉해졌으며,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방원을 보좌한 공로로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정종 즉의 이후 종친과 훈신들이 군사들은 나누어 관정했을 때,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1400년, 아우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카자 이를 개탄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간접적으로 방원을 지원하였다. 그는 태종이 즉워하자 1400년에 익안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404년 병으로 죽었다.
방의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야심이 적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와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것으로 전하고 있다.
첫댓글 ..................... 읽기 힘들어요 ! 간추려주세요 ! ^^;
와! ♡_♡ 남 멋져!! 조선왕조 실록 나 대빵 좋아해요!! 까약!! 태종 알랴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