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8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예레 7,1-11
복 음 : 마태 13,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가라지는 현실이다
-밀과 가라지의 공존-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가라지의 비유는 늘 들어도 새롭습니다. 늘 현실성을 지니는 비유입니다.
가라지는 현실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가라지 없는 순수한 밀만의 세상은 환상입니다. 가라지의 원인을 밝히는 것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가라지는 그대로 악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선과 악, 밀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세상 밭이요 우리 마음 밭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내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온통 밀과 가라지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이지 않습니까?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를 보십시오.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는 밀밭 같은 세상을 희구希求하지만 현실은 온통 가라지 밭으로 변한 모습입니다.
“주님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서는 유다의 모든 주민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희 길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이와 같이 실현된다면 밀밭 같은 참 좋은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현실은 온통 가라지밭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방심하면 가라지밭으로 변하는 것은 순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거룩한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흡사 가라지밭으로 변한 듯 보입니다.
하여 삶은 전쟁이라, 영적전쟁이라 하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가라지와의 전쟁입니다.
흔히 밭농사를 ‘풀과의 전쟁’이라 칭하곤 합니다.
그냥 놔두면 곡식밭은 잡초밭이 될 것입니다. 곡식은 도저히 자랄 수 없습니다.
가꾸고 돌보지 않아도, 농약치지 않고 거름 안 해도 참 줄기차고 억세게 번성하는 잡초들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잡초들을 뽑아내야 하고 심지어는 제초제도 뿌리곤 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입니다.
발본색원을 말하고 무수한 혁명을 겪었고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했지만
여전히 왕성한 가라지의 현실, 악의 현실입니다.
가라지를 말끔히 제거하려는 것 역시 끈질긴 유혹입니다. 폭력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라지의 원인을 캐는 것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악의 신비, 가라지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진정한 내적성장과 성숙을 위해 가라지는 필수적인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가라지가 없다면 수행의 노력도, 영적전쟁도 불필요하기에
영적성장이나 성숙은 기대할 수 없는 참 무기력한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비유중 주인과 종들과의 주고 받는 문답에서 우리는 삶의 지혜, 공존의 지혜를 배웁니다.
-종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주인;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종들;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우리의 보편적 성급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공존의 인내가 참으로 필요한 시점입니다.
주인의 처방이 참 지혜롭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어떻게 분별합니까?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히면, 또 가라지인줄 알고 뽑았더니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은총의 회개와 수행 여부에 따라 밀이 가라지로, 가라지가 밀로 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고정불변의 밀과 가라지가 아니라, 두 가능성 모두에 열려 있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최종 판단은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는 무한히 너그럽고 자비로워야 합니다.
공존의 겸손, 공존의 인내, 공존의 지혜, 공존의 사랑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무책임한 방기도 아닙니다.
'둘 다 함께 내버려 두되 부단히 밀의 세력을 강화시킴으로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수행의 노력입니다.
부단히 선의 세력을, 밀의 세력을 강화시킴으로 악의 세력을,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이래야 악의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일단 선의 세력이, 밀의 세력이 확고히 자리 잡으면 악의 세력, 가라지의 세력도 힘을 못씁니다.
시들어 저절로 죽기도 합니다. 밭농사를 보며 배우는 이치입니다.
그렇게 왕성하든 잡초들도 채소가 성장하여 확고히 자리 잡으면 도저히 힘을 못 씁니다.
하여 수도원의 일과표가 새삼 고맙습니다.
기도와 공부(성독)와 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일과표의 궤도 따라
충실하고 항구한 수행의 노력이 뒤따를 때 안팎의 악의 세력, 가라지 세력은 점차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밀 세력의 강화와 가라지 세력의 약화에 항구하고 충실한 수행이 제일임을 깨닫습니다.
가라지가 상징하는 바, 바로 무지의 악입니다. 무지의 악에 유일한 처방은 하느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영이자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의 빛에 사라지는 무지의 어둠입니다. 주님의 힘은 말씀의 힘입니다.
말씀의 힘에 약화되는 무지의 세력, 악의 세력, 가라지의 세력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내면의 선의 세력을 부단히 강화시켜주심과 동시에
악의 세력을 약화시켜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제의 순례는 새벽 5시에 출발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전날에 계획했던 일정을 다 마치지 못해서 오늘은 그 부족분까지 채우려고 했지요.
그러나 결과는 뜻하지 않은 산행으로 일정을 다 마치지 못했습니다.
3.5Km를 올라가야 성지가 나오는 곳이 있더군요.
사실 이 성지를 담당하는 성당의 사무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이렇게 더운데 그 성지에 가시려고요?
성지까지 갔다 오는데 3시간이 걸려요. 사무실에 그 성지 스탬프가 있으니 그냥 찍어드릴게요.”
종종 다리가 불편하신 분들은 그곳까지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그냥 찍어주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큰 맘 먹고 시작한 성지순례인데 어떻게 그런 편법을 쓸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신자분들도 가는 곳인데 저도 당연히 가봐야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성지에 오르는 입구에 도착했지만 주차할 곳이 없어서 5,000원의 주차비를 지불하고서 차를 주차했습니다.
그리고 산을 오르는데, 계속해서 오르막길입니다. 후회가 밀려옵니다.
그냥 사무장님 말씀처럼 스탬프 찍고서 더 많은 성지를 다녀오는 것이 더 나을 것만 같았습니다.
햇볕은 너무 뜨겁고 숨이 턱에 찹니다. 땀은 비 오듯이 쏟아집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 성지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너무 힘을 쏟아서 완전히 녹초가 되었지만, 성지에서 느낀 것은 더 많았습니다.
이렇게 산골까지 신앙생활을 위해 들어온 우리 선조들을 떠올릴 수가 있었고,
이 길을 얼마나 많이 왔다 갔다 하셨을까 생각하니 편하고 쉬운 것만을 선택하려고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가 가라지를 밀 가운데에 뿌려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종들은 쉬운 방법을 선택합니다. 수학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가라지를 뽑아내자고 합니다.
문제는 가라지와 밀이 처음에는 비슷해서 실수로 밀을 가라지인 줄 알고 뽑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수확 때까지 기다렸다가 먼저 가라지를 일일이 뽑아낸 뒤에 좋은 밀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쉽고 편한 길만을 쫓다보면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길을 피하지 않고 쫓다보면 어떤 유혹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분이시지요.
마지막 수확 때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분명히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성지순례를 마칩니다.
지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주말에는 사람들도 많아서 성지순례 하기에 불편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천천히 몇 개의 성지를 돌면서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계획한 일정을 다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참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은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인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태오복음>에서 세 번째 설교집인 13장은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핵심 메시지인
“하늘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일곱 가지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중 두 번째인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 24)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밭으로 삼아 좋은 씨를 뿌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 좋은 씨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의 밭”에 침입자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마태 13, 25).
그렇습니다. 가라지가 뿌려진 것은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벌어진 일입니다. 곧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밭에 뿌려진 “좋은 씨”를 방치한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자신 안에 심어진 말씀의 씨앗에 응답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편리와 안주로, 자신이 잠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가라지는 뿌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태 26, 41)
그러기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먼저 “좋은 씨”의 존귀함을 깨닫고, 깨어 지켜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밀을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고,
가라지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막고 “좋은 씨”가 잘 자라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마태 13, 28)라고 말하는 종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 29-30)
사실, 가라지는 밀보다 뿌리를 깊이 내리기도 하고, 밀의 뿌리와 서로 얽혀 있기에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히게 되기 때문에 수확 때에 뿌리를 함께 뽑아서 분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두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밀인 사람들에게 수확 때까지 견뎌내는 성실함을 당부함이라 말하며,
히에로니무스는 가라지인 사람들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 둠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신이 가라지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 베네딕투스는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악습은 미워하되 형제들은 사랑할 것이다.
책벌함에 있어서는 현명하게 할 것이며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 것이니,
녹을 너무 지우려다 그릇을 깨뜨리는 격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규칙서 64, 12)
사실, 공동체 안에도, 가정 안에도, 우리 자신 안에도,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망막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 14)라는
주님께서 가르쳐준 기도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이나 악을 제거하거나 없애주거나 해결해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것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 속에서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주님 사랑하기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울 시장님께서 한 달 동안 삼양동의 옥탑방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싶고, 직접 살아보면서 시민들의 고충과 아픔을 겪어보고 싶다고 합니다.
저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소국에 있으면서 본당 방문을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들께서는 교구에서 직접 왔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성소 후원회 회원들은 저의 방문으로 힘이 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성소 후원회 회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본당 방문 이야기는 사진과 함께 성소국 소식지인 부르심에 담았습니다.
옥탑방에 살면 무척 더울 것입니다. 쓰레기를 분리해서 수거하고 버리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차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을 볼 것입니다. 소박한 시민들의 아름다운 모습도 볼 것입니다.
옥탑방도 시장이 살면 시장의 공관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시민들을 위한 재개발인지 고민하면 좋겠습니다.
필요하다면 강남의 아파트에서도 한 달 사는 것도 좋습니다.
강남의 아파트에 사는 시민들은 또 다른 고충과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장의 소리를 직접 보고 듣는다는 시장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밀은 나누려는 마음이고, 더 주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밀은 베푸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가라지는 빼앗으려 하는 마음이고 소유하려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 역시 가라지입니다.
이런 마음은 현실의 세상에서 조금 이익을 얻을 수 있지만,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지는 마음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더 주려고 한다면, 더 베풀려고 한다면 우리는 ‘밀’이 되어 많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육상경기에서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넘어졌습니다.
그 뒤로 오던 선수가 넘어진 선수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둘은 서로 손을 잡고 결승점에 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손뼉을 쳤습니다.
넘어진 1등을 뒤로하고 2등으로 오던 선수가 1등이 되었다면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본당의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비난하고, 헐뜯고, 미워하면 그것은 바로 가라지를 키우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분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적어 보면 좋겠습니다.
하루에 3가지 정도를 찾아내면 밀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점을 이웃들에게 전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온통 밀밭이 될 것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겸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내면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대하는 최선의 방법은
둘 다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 어떤 것도
우리 힘으로
우리가 함부로
밀어낼 수 없는
가라지의 존재입니다.
가라지가 있기에
밀이 있습니다.
밀 같은 가라지
가라지 같은 밀입니다.
가라지를 잘 아시는
주님께
가라지와 밀을
모두 맡겨드립니다.
모두가 자랄 수 있도록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라지 때문에
우리의 길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가라지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수확의 주체
완성의 주체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가라지까지 뽑으려 한
욕심과 어리석음 대신
믿음으로
가라지까지 맡겨드립시다.
분명 이유가 있어
함께 자라고 있는
가라지일 것입니다.
주님께
내 마음의
가라지와 밀을
온전히 의탁하나이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전삼용 요셉 신부
가리옷 유다는 나머지 11제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그는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어떤 사람은 첫 영성체 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에게는 예수님의 살과 피가 구원을 위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 같은 은총이 이렇게 상반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같은 밭에서 자라지만 어떤 것은 열매를 맺는 밀이 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불속에 던져질 가라지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시스템’의 차이를 말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젖이 되지만 뱀이 먹으면 독이 됩니다.
이것이 시스템의 차이이고 본성의 차이입니다.
같은 요리사라도 해적선에 타고 있으면 악당이 되고 경찰선에 타고 있으면 애국자가 됩니다.
같은 돼지고기라도 어떤 시스템에 들어가면 햄이 되어 나오고, 어떤 시스템에 들어가면 소세지가 되어 나옵니다.
돼지가 하루는 암소에게 평소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암소야, 너도 보다시피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해주니?
사람들은 내 고기로 햄과 베이컨을 만들어 먹잖아?
또 내 창자를 빼내 순대를 만들어 먹고 심지어는 발도 족발로 만들어 얼마나 맛있게 먹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만 좋아할까?”
암소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죽어서만 좋은 일을 하고 살아있을 때는 너만 먹잖아!
그러나 나는 살아있을 때도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주고 또 맛있는 우유도 주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너는 싫어한단다.”
돼지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이전의 시스템을 벗고 살아있을 때도
무언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소와 같은 새 시스템을 입어야합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자칫 오늘 복음이 이미 인간은 밀과 가라지로 결정이 되어있다는 식의 예정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역할이 없어집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당신을 통해 구원될 가능성이 있어야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사실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다 가라지에 속합니다.
모두가 불속에 던져질 운명이었는데 그 가라지들 중에 어떤 것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본성을 변화시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식으로 우리 안에서 본성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우리는 각자가 만들어놓은 시스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모든 시스템은 어떤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해적선은 해적질을 하는 목적이 있고, 경찰선은 그런 해적을 잡는 일을 합니다.
햄을 만드는 기계에 돼지고기를 넣고 소세지가 나오길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처음에 다 가라지라는 시스템이었자면
이제 밀이라는 시스템으로 변화되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시스템이 지향하는 것을 바꾸면 됩니다.
본성이나 시스템은 그것이 지향하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뱀이었다가 산삼을 먹기 시작하면서 몸의 색소가 빠져나가
백사가 된 이 뱀은 더 이상 개구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었다면 더 이상 나뭇잎에는 관심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좋아하고 지향하는 것으로 우리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우리 본성을 변화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의 변화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뱀이 백사가 되려면 반드시 산삼을 먹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삼만을 좋아하게 되어야합니다.
2005년 일본인 돗토리 카즈미치 씨는 당시 9살이었던 돗토리 쇼지로 군을 데리고 한국에 관광을 왔습니다.
그런데 쇼지 군이 경찰차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했고 그 순간 순찰을 마치고 들어오는
경찰관에게 이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경찰관은 흔쾌히 아들과 사진을 찍어주었고 머리에 자신의 모자까지 씌워주었습니다.
이 사진을 책상에 올려놓고 공부하던 쇼지 군은 한국 경찰관의 친절이 너무 좋아서
결국 자신도 경찰관이 될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1년 당당히 경찰학교를 졸업하여 경찰관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고마워 한 아버지 돗토리 카즈미치 씨가 당시 사진을 들고 와
그 사진 속의 경찰관을 수소문해 찾게 되어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사가현 경찰기동대에 근무하게 된 돗토리 쇼지로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10년 전 한국 경찰관과 사진 찍었는데 그때가 너무 좋아 경찰이 되고 싶었다.”
좋아해야 닮게 됩니다.
가라지는 자신을 밀로 만들고자 하는 분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의 변화가 시스템의 변화입니다.
한 아이가 경찰관이 좋아지자 자신이 경찰관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고 돈을 원했기에 결국 가라지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면 좋은 시스템을 가진 밀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그분이 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바란다면 가라지로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기가 예수님이 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피를 빨아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고 남을 위해 피를 흘려주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기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 모든 이들은 시스템적으로 남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본성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가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웃사랑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끝이 좋아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 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