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짜 : 2022. 10. 9 (일)
■ 산 행 지 : 인왕산 (서울 종로구 및 서대문구)
■ 코 스 : 독립문역~인왕산2차아이파크~인왕사입구~무학어린이공원~인왕산 성곽길~범바위~인왕천약수터갈림길~인왕산
정상(338.2m)~청운공원~윤동주문학관(자하문/창의문 입구)~경복궁역
■ 거 리 : 5.80km
■ 소요시간 : 2시간 10분 (10:37 ~ 12:47 / 간식 및 휴식시간 포함)
■ 날 씨 : 비
■ 참석인원 : 19명 (김 억,김옥배,김재갑,박영환,박재원,박창흠,박태봉,배종목,변규현,서상택,신현국,오상직,윤 탁,윤근재,
이상교,이재옥,조민규,차일근,현종관)
■ 기 타
많은 비는 아니지만 끈임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산행을 마친 후 경복궁역 인근 '서촌기와집(종로구 필운동)'에서 불고기와
소주,맥주,막걸리 등으로 배부르게 먹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래되긴 했지만 인왕산은 2014.10월에 정기산행으로 다녀 왔던 곳입니다
그 때는 사직공원에서 시작해서 정상갔다가 자하문(창의문)으로 하산했지요
독립문역 독립선언서 앞에서...
독립문역 안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44산악회원들 모습
독립문역 2번출구로 나와서 산행지로 출발합니다
사실은 1번 출구로 나오는게 더 좋아요
인왕산2차아이파크아파트 앞으로 지나갑니다
인왕산 인왕사 입구 모습입니다
♣인왕사 仁旺寺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경복궁을 수호하는 호국도량(護國道場)으로서 인왕사(仁旺寺)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절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 박선묵이 선암정사(禪巖精舍,
현 본원정사)를 세우면서 이 절을 중창하였다. 1914년에 탄옹이 인근에 대원암(大願庵)을 세웠고, 1924년에는 자인이 안일암(安逸
庵)을 지었다. 이어 1927년에는 춘담이 극락전을 세우고 1930년에는 묘법이 치성당을 신축하는 등 1930년경에 이르면 10여 개의
암자가 모이며 군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1942년에 분리된 여러 개의 암자를 통합하여 다시 ‘인왕사’라 칭하고 봉은사(奉恩寺)의
말사로 등록하였다.
현재 5개 종단의 11개 사암이 ‘인왕사’라는 한 명칭의 사찰 아래서 공존하고 있다. 각 암자마다 종단이 다르고 주지가 따로 있지만,
4년에 한 번씩 대표역할을 하는 총주지를 선출하여 절을 운영하고 있다. 인왕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본원정사(本願精舍)는
대웅전과 요사, 유물관인 심우장(尋牛莊) 등의 건물과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주요 법회와 각종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조선 초에 호국도량으로 창건된 단일 사찰이었지만, 근대기에 들어와 여러 개의 암자가 군락을 이루며 ‘인왕사’라는 하나의 사찰로
공존해 오고 있다.
인왕사를 뒤로 하고 성곽길을 찾아 갑니다
인왕사 방향으로 뒤돌아 본 모습입니다
인왕사 뒷편으로 인왕산 모습이 보입니다
야생화 단지에 꽃들이 많이 피어 있습니다
무학어린이공원에서 본 인왕산 모습입니다
중간에 인왕사도 보이고요
이제 세멘트 도로를 벗어나 성곽길을 찾아 갑니다
비가 오니 참 불편하군요.
막걸리도 들어야 하고 우산도 들어야 하고...
또 비가 올때면 습기 때문에 카메라 렌즈가 눈을 다 안뜨고 절반쯤 감고 있어서 사진 찍을 때 마다 손으로 만져줘야 눈을 다 뜬답니다
성곽 바깥쪽입니다
인왕산 국사당과 선바위가 어름풋이 보이는데요 우리 친구들도 언제 한 번 인왕사 구경을 할 겸 해서 절 안으로 들어
가서 국사당,선바위를 거쳐 계속 올라가면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연결됩니다
우선 국사당과 선바위에 관한 소개를 간략히 올리겠습니다
아래는 국사당, 위는 선바위 모습입니다
국사당 뒤로(윗쪽) 올라가면 바로 선바위가 있습니다
[인왕산 국사당 仁王山 國師堂]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인왕산(仁王山)에 있는 무속신앙에서 섬기는 여러신을 모신 신당. 국가민속문화재.
1973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동(棟).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에 위치하
고 있으나, 원래는 남산 꼭대기에 있었다. 따라서 그 연혁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의 역사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년 5월, 9년 7월)고 하
며,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년, 2월).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라는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가을에 초제[醮祭: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국사당이라는 명칭과 무신도(巫神
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비로소 볼 수 있는데,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
재 국사당의 전신이다. 1972년 당시 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엽에는 이미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일
이 없었고,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
들이 먼저 이 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 한다.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
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다스리는 기록]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의 명산과 당·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국사당은 1925년남산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도의 신
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국
사당이라는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하
였다고 한다.
현재 당의 평면은 전면 3칸에 측면 2칸의 주간(柱間)이고, 기둥 간 사이는 전면 어간(御間) 약 2.6m에 협간(夾間)과
측간(側間)은 모두 2.4m이다. 따라서 내부의 넓이는 도합 11평이고,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좌우 일부와 뒷면 및 전면에는 무신도가 걸려 있고, 평면 전체가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민간의 일반건물들보다 단순한 구조이지만 규모는 더 큰 편이며, 기둥 위의 구조나 지붕형태 등 전체적인 구성이 견실
과 간소를 위주로 하면서도 방주[方柱: 네모진 기둥]의 실귀[糸刻: 가늘게 귀접이한 재목]나 분합문의 긴 형태, 문살의
새김 등과 같은 드러나지 않는 세밀한 부분에서는 최소한도의 세련된 장식요소가 가해져서 우아한 면도 엿보인다. 아
울러 대들보의 후림이나 연목의 배흘림, 규격 설정 등에서 경공[京工: 뛰어난 장인]의 솜씨를 엿볼 수 있어서, 영조·정
조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한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국사당은 굿만 하는 곳이 아니라 단골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참배객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연중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고 그 다음이 2월·3월·9월
의 순이다. 이 당에서 행하는 굿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이고, 둘째는 병(病)굿 또는 우환굿, 그리고 셋째는 흔히 부
모의 사령(死靈)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진오기굿이다. 그러나 몇 가지 동기가 복합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굿이 1
년에 평균 100여 회 치러진다. 서울시내에도 이러한 굿당이 몇 군데 있는데, 최근 10∼20년 사이에 남산 밑 회현동의
노인성당과 불광동의 할미당, 자하문의 서낭당 등이 없어졌지만, 국사당은 1973년 중요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
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선바위 禪岩]
국사당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특이한 봉우리처럼 보이는 바위가 있다. 바위는 풍화작용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파여 있
지만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 불린다. 독특한 모양의 바
위에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도성을 쌓을 때 조선 개국 공신이던 무학대사와 정도
전에 얽힌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게 설계하려 했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
다. 이에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번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태조
는 선바위를 도성 밖에 두게 했다. 무학대사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
고 따라다닐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로는 서울의 명칭이 유래된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서울 도성 안으로 품자고 하고 정도전은 서울
도성 밖에 두자고 설전을 벌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민하다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 정도전과 나섰다. 그때 선바위 안쪽
에는 눈이 녹아 있고, 선바위에는 눈이 녹지 않아 선바위는 성 밖으로 남겨지게 됐다. 그런 이유로 서울 도성에 안과
밖이 생기게 됐다고 전해진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눈 울타리,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서울이 됐다고 한다.
독특한 형상의 바위 모습이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모습 같기도 하고, 부부가 나란히 머리를 기댄 것 같다고 해서 부
부 바위라고도 한다. 선바위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그 아래로 옮긴 뒤부터 국사당과 함께 무신(巫信)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됐다.
이름있는 바위들을 한 번 찾아 봤습니다
이 밖에 해골바위 등 등 많은 바위들이 있는데 사진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범바위는 서울 야경 명소라서 밤에 사진 찍으려 많이 올라갑니다
물론 일출 보려도 많이 온답니다. 특히 새해 일출 때는 장사진을 치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잘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실 인왕산은 계단이 좀 많긴 합니다만 1시간 30분 정도면 가볍게 왔다 갈 수 있는 코스입니다
,,,
...
범바위 정상 같은데 아래서 찍은거라 확신을 못하겠네요
우산 때문에 뒤 배경이 거의 다 거려졌네요
저 멀리 청와대 뒤 북악산 정상 모습입니다
비 때문에 렌즈에 습기가 찬 것인지 사진 중간에 희게 보이는 곳이 생기네요
우리가 올라 왔던 방향 전경입니다
저 멀리 남산에 서울타워가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측 봉우리가 인왕산 정상입니다
인왕산 정상이 좀 더 가까워졌습니다
인왕천약수터갈림길에 있는 '종로구 서대문구 경계점과 지적기준점' 시설입니다
인왕천약수터갈림길에서 막걸리 파티를 가집니다
변규현 친구가 갈비를 구워왔더군요. 맛있게 먹었습니다
'옥개석'입니다
아래 사진과 함께 봐야 이해가 될 듯해서 안내판을 띄우니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종로구와 서대문의 경계점 표시가 있습니다
♧인왕산仁王山 (338.2m)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고도 338.2 m의 그리 높지 않는 산이지만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바위산으로모나지 않은
바위가 아름답고 정상을 비롯한 능선에서 사방팔방으로 도심을 내려 볼 수 있는 조망이 아주 좋은 산이다. 한양도성의 산으로는
북악산보다 3.8 m 낮은 2위이며 평균 경사도는 5.12%이다.
북한산에서 볼 때 북악산을 중심으로 좌측에 낙산, 우측에 인왕산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룬다. 특이한 형태의 암석과 암벽이
웅대하다. 산세는 정상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 게 뻗어 내렸는데 사직터널에서 자하문 까지 능선을 따라 서울 외곽을 쌓았던
성곽이 현재 남아 있다.
산은 낮지만 약수터가 많아 물걱정이 없고 능선 곳곳에는 전바위, 범바위, 치마바위, 기차바위, 모자바위, 매바위 등 볼거리가 많다.
경치가 아름다워서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지명이 환원되었다. 군사적인 이유로 1968년 1월21일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인왕산 정상에서 인증삿을 남깁니다
아마도 정상을 찾은 기쁨을 느끼는 듯 합니다
...
마치 시니어 모델 처럼 보입니다
다들 노익장을 과시하는군요
성곽길을 계속 따라 내려 갑니다
사진에는 빨간 우산이 참 예쁘게 보입니다
북악산이 가까이 보입니다
북악산 아래에는 학교가 보이는데 경기상고,청운중,경복고가 함께 모여 있더군요
'한양도성 부부소나무'입니다
뿌리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이어져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을 '연리지'라고 합니다. 한 나무가 죽어도 다른 나무에서 영양을
공급하여 살아나도록 도와주는 연리지는 예로부터 귀하고 상서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연리는 두 몸이 한몸이 된다하여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비유합니다.
청운공원과 윤동주문학관을 거쳐 경복궁역으로 버스 안타고 약 2km 정도를 걸어서 갑니다
반사되어 글씨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옮겨 적었습니다
<북한 무장공비 침투 저지한 곳
이곳은 1968년 1월21일 22시
10분경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공격하기 위해 침투했을 때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가 육탄으로
저지하여 순국한 곳>
이제 즐거운 먹방시간입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첫댓글 재원친구덕분에 우중 산행스케치 참잘 표현했네요 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