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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원의 문이다.
본문/요한복음10:7-16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나는 구원의 문이다.
오늘 주제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현대의 기독교가 혼란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이유는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분명하게 선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교회만 나오면 저절로 교인이 된다고 자위합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스스로를 교인이라고 간주하고 맙니다. 주위에서 보더라도 그리스인 됨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고백하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 의외로 적다는 사실 앞에 깜짝 놀라곤 합니다. 교회에서 상당히 많은 시간동안 복음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세레 문답 등을 해보면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하게 신앙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지를 모르고 교회 속에 들어와 있는 교인이 상당수여서, 확신없는 교회생활 혹은 확신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정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오랜 세월 교회 안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교인들은 교회에 나오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 공부나 기도나 찬양이나 헌금이나 봉사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신앙생활 답게 하는 중요한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경을 읽는 다는 것 자체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도한다는 그 자체도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찬송을 하고 헌금을 해도 교회안에 각종 봉사를 해도 그 자체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하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에 궁색하고 신앙 생활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고 메마르고 무기력한 상태로 전략하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는 —이다”라는 예수님의 두가지 무명한 선언을 통해서 교회의 이 두가지 딜레마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자기 계시 즉 선언 나는 문이다. 라는 선언과 나는 목자다 라는 선언입니다. 이 두가지 선언이 어떻게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이 두가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얼을수 있는지 함께 나누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문이신 예수님
본문 10: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양들의 공동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당시에 목자들은 개인적으로 양을 몇 마리씩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양들을 재울 때는 개인적으로 마련된 우리 속으로 양들을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의 우리에 맡겨 관리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 그 공동 우리를 지키는 관리자가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그를 문지기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다시 와서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가 개나 애완용 동물에게 그 이름을 붙여서 부르듯, 발레스타인 지역의 양들에게도 이름이 붙여져 잇었습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에서 옵니다. 그러면 목자는 다시 자기 양들을 데리고 푸른 초장으로 갑니다.
그러기에 이 “우리”라는 것은 양들의 공동체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공동의 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양무리들의 우리 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10:1절에서 이 “양의 우리”를 말씀 하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계셨음이 틀림없습니다. 구약 신앙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이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게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시작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들만 사랑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사역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신약에 오면 신앙의 공동체는 좀더 넓어집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열방의 모든 이방 민족들이 함께 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신앙 공동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신약 교회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양이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이 필요합니다. 엣날 팔레스타인의 양의 우리는 벽으로 된 높은 담으로 되어 있었는데 문은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문에는 문지기가 있어서 그가 통과시켜 주어야 들어갈수가 있었답니다.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다가와 문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대답을 합니다.
“내가 곧 문이야!”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본문10:1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단 하나의 문이었던 것처럼,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도 단 하나의 문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서응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그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라는 하나님 백성의 무리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하나의 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중생을 얻게 되는 문입니다.
요한복음3:5절에 중생 즉 거듭남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라고 질문 하면서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1,7절)
그분이 문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가 절도요 강도라고 주께서 규탄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주님이 절도와 강도를 말씀하시면서 어던 사람들을 연상하였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때때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성경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당시의 문화적 배경에서 나타난 사고와 상당히 다른 것을 많이 느낍니다.
저는 예수님이 나는 —이다. 라는 이 설교를 전하면서 그 배경을 역사적으로 많이 살펴보면 평소에 성경 한두절을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이 메시지가 당시의 어떤 문화적 배경속에서 주어졌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한 말씀을 갖고도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든지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상상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무엇을 상상했습니까? 이 말씀은 당시의 절기를 배경으로 한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절기 끝날에 하였습니까? 그것은 장막절입니다. 이 장막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사실을 감사하며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연상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빛에 대해 주관적으로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 자유까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의도는 아닙니다.
본문이 포함 되어 있는 요한복음10:22절을 보시면 “수전절”이라는 절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영어 성경을 보면 “dedication” [dèdikéiʃən]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교회당을 지어 봉헌할 때 쓰는 단어로서 봉헌하다는 뜻입니다.
이제 곧 하누카 라는 이 수전절이 됩니다. 우리가 성탄을 맞을 무렵이면 유대인들은 집에서 촛불을 밝힙니다. 그러나 그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들의 하누카를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음력처럼 유대인들의 달력도 매년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 절기는 대개 12월 중순 경으로 성탄절 직전에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0장은 바로 이 절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절도와 강도”라는 것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바리새인 같은 당시의 종교인들 대상으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됩니다. 자칫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나쁘게만 매도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봉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딱 하나가 부족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고, 제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다. 그것이 이사야 1장에서와 그리고 눅 19장의 세리의 기도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기도도 형식적이었다/마6장. 그리고 그들은 종교적인 생활은 열심이지만 돈을 좋아했고, 지위에만 집착했다. 마23장) 그들은 예수 없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이 매시지를 좀 더 실감 있게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문이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이 문을 들어가려 하는 자는 다 절도며 강도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분!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요, 그 백성이 되게 하고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자 힘썼던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은 엄청난 슬픈 아니러니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에는 이러ᅟᅩᆫ 사람이 없겠습니까? 예수를 빼놓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책임 있는 응답을 주장하고 강조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바리새인과 같은 잘못된 신앙으로 만들어 버릴 가능서이 있습니다.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가졌던 결정적인 결함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되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열심히 믿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 말고 또 누구를 믿으라고 하는가? 하나님 외에 아무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그 땅에서 척결하기 위해 다메섹 까지 좇아 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 정도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롬10장을 보시면 나중에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바울 사도가 자기 동족들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1-3)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죄지으면서 살아왔던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죄인이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그 사이가 죄로 말미암아 벌어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와야 했던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의를 세우기에 힘썼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으나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음절인 롬10: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의 완성자로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향해 신앙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교인들 가운데에서도 새벽기도회까지 나가서 신앙고백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진짜 예수님에게 집중해야 할 바른 신앙을 대체해버리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땅에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을 소망으로 주신 그 놀라운 축복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미미한 교회 출석과 종교적인 열심히만 자신을 확인하려는 얄팍은 신자들이 한국교회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나를 통하지 않고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이니라.”
라고 하십니다. 본문 요한복음 10:9절에 그 사실을 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별로 큰 충격이 아니지만, 당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충격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유대인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제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아무나 오라!”
이 주님의 초청은 우주적인 초청입니다. 그것이 요한3: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구원 문제에 질문하는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세상을(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것은 성경을 자기 멋대로 인위적이며 한 사람의 교리를 극대화 시키는 사람의 주장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그대로 받아 들어야 합니다.
비슷한 말씀이 딤전2: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보시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사람들 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첫장부터 마지막 장가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며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충만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두 번째 충격
그들은 지금싸지 메시야 되신 그리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게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본문에서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합니다.
본문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이 문은 예수로 말미암아 받는 구원의 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없이는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할 아무런 근거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교회 출석한 그 연조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교히에 받은 직분에 여러분의 신앙을 연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부모나 조상때부터 믿어온 신앙의 배경으로 우줄해 하지 마십시오, 이런 것들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문으로 그분을 나의 구주와 임금으로 믿는 믿음의 문을 통과하셨습니까? 그 예수님의 내가 눈으로 보는 물질세계보다 이것은 변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는 더 영원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 영원하신 주님을 체험 하셨습니까? 성경에 보시면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데 자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34:8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요한 21장에 보시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만나지 않고서는 그분과 교제가 불가능하고, 교제가 없이는 그분을 알 수가 없고 그분을 개인적으로 깊이 체험하신 분들만이 그분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종교적인 삶을 살아갈 때에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텐데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주께서 심판대 앞에서 마7:21-23절에서 선지자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은사로 교회안에서 큰 일을 했다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비극적인 주인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예수라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 그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고 그분을 충분히 아는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 나누었던 예수님은 나의 빵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에 주님은 “나는 문이다”라는 이 말씀 속에서 두가지 진리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진리/유일함
“나는 문이다는 영어로 여러분 잘 아시듯이 ”I am a door“가 아니라. ”I am the door“입니다. 그 뜻을 제대로 표현하자면 ”나는 그 문이다.“ 입니다. 즉 하나밖에 없는 문이라는 말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문은 하나뿐입니다. 그 문을 열지 않고는 아무도 방주 안에 들어갈수 없었습니다. 그 문이야 말로 노아 시대에 살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문이었습니다. 이 방주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문 밖에서 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추측이지만, 그런데 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 문을 통해서 방주 안으로 들어온 노아의 여덟식구들 만이 구원을 받았음을 기억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유익한 구원의 문을 나의 온 전 인격을 다해 통과해야 합니다. 나의 전 인격을 다해 그분의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모셔들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언의 계획 가운데 예배하신 예수 그리스돌르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방주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방주 바깥에 있습니까?“
진짜는 하나이듯이 구원도 오직 하나님 한뿐 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인간의 모습으로 이땅에 보내주시고,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나는 문이다“라고 하시면서 나를 믿어야, 나의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분들은 억울하다, 너무 불공평하다, 기독교는 너무나 독선적이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 복음의 소리를 듣고 인격적으로 반응하며 예수님의 문으로 통과하는 자에게만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이런 사건은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를 하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시지만, 그러나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주님앞에 나올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왜 예수님은 딱 하나의 문만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여러개의 문을 준비하셔야죠?“
이런 영적으로 강퍅하고 악한 자의 반응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나마 문을 열어놓고 다 내게로 아라고 하신 그 사건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구언의 기회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이나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에 설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구원의 좁은 문 유일한 문을 예비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이 문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이 문이 항상 열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잔치집의 비유를 통해서도 말씀하셨듯이 언젠가는 닫히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후6:2절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나 잠시 잠깐 후면 이 놀라운 구원의 문이 잠겨버립니다. 진노의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날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의 날입니다. 계6:17절에 보시면 ”진노의 큰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인내하시고 참으시고 구원의 복음을 던져놓으시고 초청하시던 하나님의 역사의 시간을 마침내 진노의 시간으로 바꾸시는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문이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은 누구에게 라도 열려 있습니다.
”내가 문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둘째 진리/풍성함입니다.
본문 9절에서는 구원의 적극적인 의미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어 자체가 그런 편이지만 대개 ”구원“이라고 하면 상당히 소극적인 의미로 생각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건짐을 받았다는 말은 죽을 지경에서 살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겨우 건짐을 받았다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까? 양의 우리속에 들어 간다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우리“안에 들어가면 양들에게는 쉼이 있습니다. 보호가 있습니다.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번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자유가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 사망에서 자유, 천국 백성으로서의 자유함,
그들은 그곳에서 나올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온다는 것은 구원을 잃고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는 말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적용하면 안됩니다. 목자와 한번 관계를 맺고 그 목자의 양이 되어 목자의 우리 안에 들어간 사람은 그 목자와 양의 관계를 절대로 변질시킬수 없기 때문입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이튼날이 되었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에서 나오게 합니다. 어디로 갑니까? 푸른 초장으로 갑니다. 그 초장에 가서 목자와 같이 동행합니다. 산책도 합니다.
구원은 ”내가 건짐을 받았다. 이제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끝-“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풍성의 삶의 시작입니다. 이제 목자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주시는 안식을 즐깁니다. 이제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과의 관계속애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그 모든 풍성한 것을 즐기는 풍성한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9절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 문을 통과할 때 풍성한 삶이 약소고딥니다. 이 문을 통과할 때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기독교의 최대 비극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오늘날 교회안에 신자의 위험성은 바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강조하면서도 실상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분명하게 강조하지 않고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왜곡되게 믿고 있는 교회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
”나는 문이다.“라는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과 함께 본문에 기록된 또 하나의 위대한 예수님의 선언은 ”나는 선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생각해 봐야할 주제입니다. 이것은 다음주에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양의 문이 되시는 그 예수님의 문을 통과할 때, 우리는 양의 우리 안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초장에서 맘껏 즐기고 넉넉하게 먹다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이 양은 목자의 철저한 보호 속에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신학의 술어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 아래서 살다가는 삶입니다.
본문11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왜 ”선하다“는 형용사를 강조하였겠습니까? 악한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악한 목자들을 말씀하실 때, 누구를 염두에 두셨습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깡패나 창녀 등,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하셨는데, 유독 바리새인들에게만은 엄한 책망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종교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안의 심각한 문제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분명한 중생의 체험이 없으면서, 역사와 전통만을 자랑하는 종교인들! 사실은 복음의 원색적인 생살을 알지 못한 채 함부러 기독교는 이렇다 라고 오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악한 목자들은 스스로를 민중의 영적인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도자로 군림하여 그들을 통해서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정작 중요한 것, 즉 양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그들의 마지막 영원한 운명의 장소가 어디인지? 일허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상실한 기독교! 이것은 이미 변질된 기독교인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노라.“
주께서 양들을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라는 선언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생명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둘째, 풍성한 양식을 공급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좋은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영원한 생명이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지고 있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우리의 확고부동한 결심때문이 아닙니다. 선한 목사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주님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시고 계십니다. 주님을 계속해서 인정하고 그분을 따라가는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손이 놓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내 의지적으로 주님을 따라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주님께서 내 손을 놓지 않고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항상 지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 그분의 은혜, 그분의 약속이 내 구원을 보장하십니다. 본문의 메시지를 계속 읽어보시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 납니다.
본문 10: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의 기록들이 초기의 문서에 많이 발견됩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요구의 수준들을 지키려고 애쓸 때, 그 노력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켜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뒤집는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에게 허락된 영원한 생명을 지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손에 들어가 있을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므로 이 구원이 영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선언되었던 절기가 예루살렘의 수전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누카라고 해서 BC168년으로 거슬러 올가갑니다. 그 당시 알렉산더 대제는 자신의 영토를 크게 몇 등분으로 나누어서 다스렸습니다. 그때 유대를 포함은 그 주위의 지역을 시리라(수리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팔레스타인은 완전히 장악한 후 유대인들의 서언 제사를 금지해 버렸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제사하던 일체의 예배 행위를 금지 시켰을 뿐 아니라. 하나님 대신에 제우스 같은 희랍의 신들을 성전 안에 안치시켜 놓고 그것을 섬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마음 속으로만 얼마간 분노할 뿐, 먹고 살기 위해서 이 악한 지도자와 타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치를 떨며 분노의 칼을 갈던 한 가문이 있었습니다. 마카비 가문이었습니다. 특히 유명한 마카비가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이 유다 마카비 형제들은 자기들의 땅을 더럽히고 부패시키는 이 적들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성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게릴라 전쟁을 벌렸습니다. 이때가 BC164년이었습니다. 2-3년동안 혈전을 벌린 끝에 드디어 그 악한 세력들을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바칠 수가 있었습니다.
성전을 회복해서 봉헌하는 그날 금촛대의 불을 켰는데, 하루 정도밖에 쓸수 없는 등잔의 기름이 이상하게 8일 동안이나 활활 타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꺼지지 않고 환하게 성전을 비추는 그 불빛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찾은 성전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누카, 즉 수전절의 유래입니다.
이러한 유래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전절이 되면 8일 동안 촛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역사적인 위대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찾았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되찾은 것은 그들의 투쟁이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예수님에서 10:28-29절에서 말씀하실 때, 아마도 수전절에 담긴 그러한 의미를 개인적인 면에 적용시키고 계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의 신앙도, 또 우리 개인의 자유도,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이 지켜지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때문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결심도 있어야 하지만 그 결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이시간까지 이글어 주셨던 것입니다.
모든 동물은 저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보호색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자기를 지키기도 합니다. 또 날카로운 발톱이나, 부리로 자기를 방어하는 동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한 동물입니다. 양은 제 먹을 마련하지도 못합니다. 또 양의 가장 큰 취약점은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다른 동물은 다 자기 집으로 찾아갈 수가 있지만, 양은 방향 감각이 아주 둔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해 줄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목자가 양의 생명을 지킵니다. 목자가 양에게 필요한 모든 양식을 공급니다. 목자가 의들이 가야 할 그 길을 인도합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그분은 아직도 우리의 인생 길에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양은 철저하게 의존적인 동물이면서도 독립적인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누구와 같습니다. 인간입니다. 이 모습을 시아야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53:6)
양은 철저하게 목자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하려고 하는 고집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본성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원초적인 방항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만을 철저하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철저하게 의존하것 자체가 구원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구원은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때 그분이 나를 영원히 지키십니다. 나를 인도하기 원하시는 그분께 기꺼이 나아가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 하루도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 생활은 철저하게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이 위대한 선언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다.“
묻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이 여러분의 선한 목자로 삼고 있습니까? 선한 목자를 따라서 푸른 초장에 맘껏 뛰놀며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된 목표도 없이 방황 가운데 불안한 인생길을 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의 구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나의 인도자로서 내 평생 삶의 주권자가되어 주니 놀라우신 주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문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나는 선한 목자다.“
그럴 때 우리의 대답은
”오 주님 이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 앞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한평생 주님을 따라가며 늘 기쁘게 주님을 신뢰하며 살가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고백여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 위해서 문이신 예수님 안에서 더 확고한 주님을 알고 주님을 체험하고 그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그분을 따라가는 믿음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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