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과 우리말 / 서울 부암동 외
바위 관련 땅이름
붙임바위 용바위 두텁바위 선바위 매바위
땅이름과 우리말 / 서울 부암동
바위 관련 땅이름
붙임바위 용바위 두텁바위 선바위 매바위
옛 사람이 읊은 바위타령의 풍자
우리 민요 '바위타령'에는 많은 바위 이름들이 나온다.
<바위타령>
배고파 지어 논 밥에
뉘도 많고 돌도 많다
뉘 많고 돌 많기는
임이 안 계신 탓이로다
그 밥에 어떤 돌이 들었더냐
초벌로 새문안 거지바위
문턱바위 둥글바위
너럭바위 치마바위
(이하 중간 생략)
동교(東郊)로 갓바위
동소문 밖 덤바위
자하문 밖 부침바위
백운대로 결단(決斷)바위
(이하 중간 생략)
도로 올라 한양 서울
경퇴(景退)절 법당 앞 개대바위
서강(西江)의 농바위같은 돌맹이가
청대콩 많이 까 둔 듯이
드문듬성히 박혔더라
그 밥을 겉복을 치고
이를 쑤시고 자세 보니
연주문 돌기동 한 쌍이
금니 박히듯 박혔더라
그 밥을 다 먹고 나서
누른 밥을 훓으랴고
솥뚜겅을 열고 보니
해태 한 쌍이 엉금엉금
이 바위타령은 약 200년 전부터 전래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배고파 지어 논 밥에 뉘도 많고 돌도 많다. 그 밥에 어떤 돌이 들었더냐 하고는 갑자기 바위로 바뀌면서 '너럭바위, 치마바위 식으로 읊어 나간다. 뒤에 여미는 대목에 연주문 돌기둥이니, 해태 한 쌍이니 하는, 지나친 과장이 재미있다. 밥알 속의 작은 돌을 바위나 돌기둥 따위로 비기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이만큼 우리 조상들은 바위와 가까이해 왔기에 땅이름에도 바위와 관련한 이름들이 적지 않다. 서울만 해도 부암동(付岩洞), 종암동(鐘岩洞), 안암동(安岩洞), 상암동(上岩洞), 후암동(厚岩洞), 응암동(鷹岩洞) 등의 이름이 있다.
아들 낳으라 빌던 붙임바위
'애기빌이'라는 말이 있다. 애기를 낳아 달라고 하늘에 빈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옛날에는 시집 온 여자들에게 그 가정의 중요한 덕목처럼 여긴 것이 애기를 낳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애기를 못 낳는 아낙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원 잘 들어 준다는 바위를 찾아 애기빌이를 하기도 했다.
서울 자하문 밖의 붙임바위(부침바위)는 애기 못 낳는 아낙들이 애기빌이를 위해 많이 찾아간 곳이다. 위 <바위타령>에도 이 바위가 나온다.
서울 경복궁 서쪽의 자하문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 창의문(자하문)을 지나 세검정 로터리에 이르면 ‘부침바위 터’라는 안내 표석이 나온다. 부침바위는 이 근처 부암동 134번지, 약 2m 정도로 비스듬히 서 있던 바위였는데, 1970년에 큰 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아기낳기를 원하는 여인들은 이 바위에 돌을 붙여 소원을 빌었디. 작은 돌을 가져와 혼신의 힘으로 비벼서 비스듬히 기운 바위에 붙게 하였다. 음(陰)을 상징하는 바위구멍에 양기(陽氣)로 발기한 돌(음경)이 삽입돼 아기를 만든다는 속설에 따른 것이다. 그 돌이 바위에 붙지 않고 미끄러져 내리면 허사가 된다고 믿었다. 어찌나 비벼 댔던지 바위 곳곳이 옴폭하게 패일 수밖에. 그래서 바위는 벌집과도 같은 곰보 얼굴이 되었다.
"우리 집안에 제발 떡두꺼비같은 아들 하나 낳게 해 주소.“
이 바위는 ‘붙임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인근 지역뿐 아니라 서울 장안 에까지도 널리 알려졌다.
이 바위는 50여 년 전에 도로 확장으로 이미 없어졌다. 그러나 ‘붙임’과 ‘바위’의 뜻을 담은 한자 이름 부암(付岩)은 지금 서울 종로구의 한 동이름(부암동)으로 남게 되었다.
서울 여러 곳의 바위 관련 땅이름
서울 성북구에는 종암동(鐘岩洞)이 있다. 이곳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었단다. 그래서 이를 북바위라 하고, 한자명으로 종암또는 고암(鼓岩)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종암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에 속했으며, 고종 4년(1867)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 종암리계로 되었고, 1895년 제도개혁 때는 한성부 동서(東署) 숭신방 동문외계 대종암・소종암으로 칭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부 종암정이 되었고, 1943년 6월 10일 구제도(區制度)가 실시될 때 동대문구에 속하였다. 광복 후 1946년 10월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종암동이 되었다. 1949년 8월 성북구가 동대문구에서 분리되어 신설될 때 성북구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같은 구에 안암동이 있다.
안암동3가에 10여 명이 앉아 편히 쉴만한 큰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앉일바위’라 했는데, 한자명으로 안암이라고 표기한 데서 유래되었다.
같은 구에 돈암동(敦岩洞)이 있으나 이 동명은 바위와는 관계가 없다.
지금의 미아리고개를 조선시대 야인(되놈)들이 동소문을 이용하여 도성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되너미고개라 하고 한자로는 적유현(狄踰峴)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 되너미고개를 한자명으로 ‘되너미’라는 음에 가까온 돈암(敦岩)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마포구의 상암동은 바위와 관계가 있다. 상암동이란 동명은 이 일대의 옛 지명인 수상리(水上里)의 ‘상(上)’자와 휴암리(休岩里)의 ‘암(岩)’자를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이 상암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성외) 수암리계・수생리계 지역이었다. 1867(고종 4년)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성외) 수색리계・휴암리계(鵂岩里契)에 속하였다.
휴암리는 우리 토박이 땅이름으로는 ‘부엉바위’이다. 이곳 힌깅가에 부엉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이렇게 불렀는데, 이 ‘부엉바위’가 나증에 ‘봉바위’로 변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불렀고, <바위타령>에 ‘봉바위’로 들어가게 되었다.
서울 은평구의 응암동은 매바위라는 바위가 있어서 나온 이름이다.
매바위는 매바윗굴 뒤에 있는 바위로, 바위의 모양이 매와 같아 매바위라 했고 한자로는 응암(鷹岩)이 되었다.
매바위약물이 있는데 찬우물, 냉정, 응암동약수라 한다. 물이 매우 차서 여름에도 어름 같아 찬우물, 또는 한자명으로 냉정(冷井)이라 하며, 피붓병에 특효가 있다고 전해진다. 약 1백 년 전에 학이 늘 와서 상한 다리를 이 우물에 담그고 있더니, 너댓새 만에 완치되어 날아갔으므로, 그 후부터 약물로 쓰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3가에는 ‘바우독’이라고 하는 큰 버위가 동네 골목 한가운데에 있다. 바위 중 일부가 일반 주택으로 들어가 있기도 한데, 아직도 바위의 모습은 옛날 거의 그대로다.
바위 아래쪽을 자세헤 보면 촛불 같은 것에 조금 그을린 흔적이 보이는데, 동네 사람들이 전에 이 바위에 와서 소원을 빌었던 것 같다. 동네 깊은 골목길에 위치해서 찾기는 어렵지만 이 지역에 오래 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잘 안다. 한때 이 골목 앞의 도로를 바우독길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다른 이름의 새 도로명이 붙어 있다.
인천시 남구 주안동에는 석바위가 있다. 석바위라고 하지만 이 역시 선바위이다. 한자로는 석암(石岩)이라고 쓰는데 여기서의 석(石)은 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서 있음’의 ‘섯’을 음차한 것이다.
섯(立)+바위 >섯바위 >석바위
인왕산의 선바위
인왕산 서쪽 중턱에 '선바위'라 하는 큰 바위가 있다. 행정상의 위치는 서울 종로구 무악동(毋岳洞) 산 3번지의 4호.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바위는 원래 '서 있는 바위'의 뜻의 '선바위'였으나,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에 의해 '선(禪)바위' 또는 '선암(禪岩)'으로 표기되거나 불러오기도 했다.
두 개의 큰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의 이 선바위는 높이가 7∼8 m쯤 되고, 가로가 11 m 안팎, 폭이 3 m쯤이다. 그러나 이 바위는 오랜 옛날부터 이곳을 찾는 이들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바위 아래로는 시멘트 제단이 마련되었는데, 제단 앞에는 제를 올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항상 젯상과 촛불이 놓여 있다.
이 선바위로 인해 그 옆의 관리사무소 건물 이름이 '석불각(石佛閣)'이고, 불자들은 이 바위를 '석불님' 또는 '관세음보살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아들을 낳기 원해서 이 바위를 찾는 이들은 기도를 해서 자식을 얻는다는 뜻으로 기자암(祈子岩)이라 부르고도 있다.
이 바위는 멀리서 보면 마치 남성의 그것과도 같다. 그래서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그것을 달고 나올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아기를 갖고자 원하는 여자들이 많이 찾아오곤 했었다.
이 선바위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연 암반 위에 있었으나, 그 60년대 중반에 시멘트로 평평하게 다듬어 제단까지 만들고, 그 둘레에 담도 쳐 놓았다. 이것은 주위의 절이나 암자에서 한 것이 아니고, 이 바위에 치성을 드려 효험을 본 한 불자가 자신의 비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암자에서 관리인을 보내 관리하고 있다. 이 바위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씩 참배객이 다녀가는데, 그들이 내는 불전(佛錢)과 인등(引燈)을 켜는 비용으로 바위를 관리하고 있다.
이 바위에 대해서는 조선 초기부터의 역사적 사실이 얽혀 있다.
태조 이성계가 도성(都城)을 쌓을 때, 왕사(王師)인 무학대사(無學大師)와 문신인 정도전(鄭道傳)이 이 바위를 성 안에 들도록 쌓느냐, 성 밖에 들도록 쌓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크게 의견이 엇갈렸다. 불교를 받드는 무학대사는 당연히 이 바위는 성 안으로 들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불교와는 거리가 먼 정도전은 이 바위가 성 밖으로 나가게 성을 쌓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태조 이성계는 이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의견을 두고 고심하던 중에 어느 날 밤에 인왕산 일대에 하얀 눈이 쌓여 선바위 안쪽으로 햇볕과 관계없이 눈이 모두 녹아 버리면서 눈이 있는 자리와 녹은 자리가 뚜렷이 구분되는 꿈을 꾸었단다.
하늘이 자신에게 도성 쌓을 자리를 정해 준 것이라 생각한 이성계는 그 선을 따라 성을 쌓도록 했다. 결국 성 밖으로 선바위를 내놓자는 정도전의 주장과 똑같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본래 불교 신봉자는 아니어서 '이 바위를 성 안에 넣으면 불교가 왕성하고, 밖으로 내놓으면 유교가 왕성하게 된다'는 정도전의 말을 따라 꿈을 핑계되고 성을 그렇게 쌓도록 했다는 설도 있다. 이 일로 크게 실망을 한 무학대사는 '이후부터 중은 선비의 책보나 짊어지고 다닐 신세가 되었다'며 한탄을 하고, 어디론가 길을 떠나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선바위 위쪽 5백 m쯤의 거리에 옛날 축성한 성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선바위의 바로 밑으로는 국사당(國師堂)이 있고, 주위의 인왕산 중턱에는 열 두 암자가 있다. 또, 선바위의 위쪽으로는 묘한 모습의 바위들이 널려 있어 가히 바위의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
아마 인왕산 호랑이의 본부(?)는 바로 이 바위 모습이 아니었을까 한다.
선바위는 수도권 지하철역으로 잘 알려진 경기 과천시 과천동의 선바위를 비롯하여 충남 논산시 두마면 입암리, 경북 예천군 개포면의 입암리 등 여러 곳에 있는데, 이런 땅이름을 가진 곳에는 이름 그대로 ‘서 있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한자로는 대개 입석(立岩)이나 입석(立石)으로 표기된다.
선바위와 비슷한 바위에 갓바위가 있는데, 선바위와는 조금 모양이 다른 것이 많다. 선바위와 달리 끝이 몽툭하고 더러는 갓 모양인 것이 있어 다른 한자의 입암(笠岩)으로 표기된다. 옛날 자식을 못 낳는 여자들은 선바위보다는 갓바위쪽에 치성을 드리는 일이 많았다던데, 이것은 그 바위 모양을 보고 선택한 데 따른 것이다.
이 밖에 바위 관련 이름으로는 매바위, 용바위. 흔들바위, 너럭바위, 아들바위 등 수도 없이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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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척말
-바위 바우 바구(사투리)
* 친척 땅이름
-선바위 [입암] 【바위】경기 연천군 전곡면 은대리
-선바위 【바위】충북 청주시 남일면 송암리
-선바위 [선암] 【마을】충남 예산군 광시면 노전리
-선바위 [입암] 【마을】충북 청주시 북일면 입동리
-선바위 [좃바위] 【바위】경기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
-선바위 [입암] 【마을】경기 양평군 단월면 삼가리 등
2022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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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개 [암포] 【마을】 전북 임실군 청웅면 향교리
바우거리 [너벙바우, 광암] 【마을】 전북 임실군 지사면 계산리
바우고개 [암치재] 【고개】 전북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바우고개 [바우배기] 【고개】 전남 나주군 봉황면 옥산리
바우골 [암동] 【마을】 경북 군위군 고로면 학암동
바우내 [암천, 암천리] 【마을】 충남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
바우독골짜기 【골】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3가
바우모롱이 [회수정] 【마을】 전남 화순군 청풍면 신석리
바우모텡이 【빨래터】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동
바우배기 [거북바우] 【바위】 전북 김제시 금산면 구월리
바위내 [암천.岩川] 【마을】 충남 연기군 남면 연기리
바위뫼(암산) 【마을】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바위배기 【마을】 충남 서산시 운산면 수당리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