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엔 진짜 예수쟁이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니들이 진짜 예수쟁이라 내가 좋아한다고.
그들중 일부는 나의 전도가 자기 생애 최고의 목표라고 얘기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냥 웃는다.
찐 예수쟁이들은 참 열심히 산다.
봉사도 기부도 진짜로 한다. 본인들은 얘기한다.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보고 있음 부러워 진다.
아예 계율로 못박혀진 그들의 기부는 먼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그들의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천국의 통장에 저금한다는 그들의 사고가 한편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 확고한 믿음이 부럽다.
난 얼마전까지만 해도 불전함에 작은 성의를 표하는 것도 쑥스러워 했었다.
행여 누가 볼세라 얼른 넣고 돌아서곤 했었다. 그러다 자현스님의 말씀에 좀 어깨를 펴고 넣을 수있게 되었다. 당신은 꼭 다른 절을 방문하실때 불전에 성의를 표시하며 나아가 부처님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보며 당당히 서원을 말씀하신다던가
그리고 원빈 스님이 절에 기부 내역서 신청을 어려워하지 말고 꼭 신청하라는 독려에 아! 이래도 되는 거구나 라는걸 알게 되었다. 보시의 장려를 위해 꼭 하도록 하라는 스님의 말씀에 괜히 폐끼치는 거 아닌가하는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었다.
왜 우리는 몰래 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들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스님은 금강경에 물들다 책속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무주상보시에 대한 잘못된 적용으로 인해 유주상보시를 금기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보시가 즐겁지 않아 지고 심지어는 보시를 하면서 죄책감까지 느끼도록 만들어진 지금의 보시문화를 안타까워하신다.
보시를 하면서 서원을 품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 마음을 보게 되면 자신이 마치 속물처럼 느끼도록 유도하게되니 보시를 할수록 죄책감은 커지고 자존감은 떨어지게 되는 이런 상황을 잘 지적해주시고 있다.
무주상보시란 그런 것이 아닌데 오랜 시긴을 두고 박혀진 잘못 인식된 생각은 참 바꾸기가 어렵다.
내 복은 내가 받는다.
모두들 알고 있다. 그래도 쉽지 않다.
보시에 있어 중요한 것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더 여유로워지면 해야지 하는 마음은 더 나를 인색하게 만들 뿐이다.
처음 지푸라기 하나를 보시하다 보면 점점 더 커진 마음으로 목숨까지 줄 수 있게 되는 마음 연습이 진정한 보시바라밀일것이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원한다.
어디를 가다 무언가를 보고
또 무엇을 먹다 문득 아는 누군가가 이것을 좋아하고 어울릴거 같을때, 망설임없이 그 사람을 위해 사고, 해줄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주는 것으로 인한 기쁨의 느낌은 뜨듯한 아랫목처럼 식지 않고 오랫동안 두고 두고 나를 즐겁게 한다.
아귀처럼 사는 삶이 아니라 보살의 길을 걷기로 약속한 나는 뺏기는 삶이 아니라 주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 서원을 부처님께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