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항아리 1 / 홍윤숙 (1925~2015)
비어있는 항아리를 보면
무엇이든 그 속에 담아 두고 싶어진다
꽃이 아니라도 두루마리 종이든 막대기든
긴 항아리는 긴 모습의
둥근 항아리는 둥근 모습의
모 없이 부드럽고 향기로운
생각 하나씩을 담아 두고 싶어진다
바람 불고 가랑잎 지는 가을이 오니
빈 항아리는 비어 있는 속이 더욱 출렁거려
담아 둘 꽃 한 송이 그리다가
스스로 한 묶음의 꽃이 된다
누군가 저처럼 비어서 출렁거리는
이 세상 어둡고 깊은 가슴을 찾아
그 가슴의 심장이 되고 싶어진다
빈 항아리는 비어서 충만한
샘이 된다
빈 항아리 2 / 홍윤숙 (1925~2015)
빈 항아리는 기다리고 있다
비어서 막막한 가슴 열어 놓고
꽃이든 구름이든 비바람이든
예고없이 들이치는 이 세상 돌팔매들
밥상처럼 받아안고
묵묵히 시간의 비약(秘藥)에 묻어 버린다
시간을 이기는 그 어떤 무쇠도 없음을 알고 있다
빈 항아리가 사철 비어 있음에도
그처럼 육중하게 무거운 것은
무수한 기다림과 가슴앓이가
쌓이고 쌓여 돌처럼 굳어 버린 때문이다
수십 년 한자리에 잊혀진 듯 지켜 온 빈 항아리는
이 세상 형체 있는 모든 것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허상임을 알고 있다
꽃은 시들고 물은 마르고 불은 재가 되는
천리(天理)의 질서를 이제 안다
그럼에도 빈 항아리는 기다리고 있다
아침엔 저녁을 저녁엔 다시 아침을
기다리는 나날엔 희망이 있고
미완성의 시간은 꿈꿀 수 있기에
빈 항아리는 그 밖의 일을 알지 못한다
빈 항아리 3 / 홍윤숙 (1925~2015)
빈 항아리 속에선
사철 까닭 모를 비가 내립니다
굵지도 세지도 않은 실비가
남도 나도 모르게 내립니다
비를 먹고 자란
철없는 아기 똥풀 노오란 꽃송이들이
잎이며 꽃이며 비에 젖어
오돌오돌 떨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빈 항아리는
우두커니 똥풀꽃 옆에 주저앉아
제 안의 빗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
다만 들을 뿐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그렇게 실비 내리는 까닭을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기에
그 비 그치게 할 힘 없음도 알고 있기에
어쩌다 비조차 그쳐버리고 가뭄이 들어
마른 가슴 팍팍한 사막이 될까봐
그나마 비라도 내려
똥풀꽃 노오란 꽃이나마 피어주는 게
다행이지 뭐냐고 혼자 다독이며 중얼거립니다
항아리 밖은 어느덧 청명한 가을
싸리비 같은 구름도 먼 길 걸어온 듯
잠시 한숨 돌리고 쉬고 있는 하늘
이 해도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그중에도 빈 항아리는 날마다 비에 씻겨
속이 맑아지고
외로움에 스스로 아름다워져
오늘도 무심한 햇살의 비 노박이로 맞으며
하늘 아래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빈 항아리 4 / 홍윤숙 (1925~2015)
비어 있는 항아리 속엔
보이지 않는 풍경 하나 걸려 있다
꼭꼭 닫아건 문 안에서도 녹슬고 삭은 풍경은
스르릉 울리는 제 목소리에 저 혼자 취해 있다
이른 봄날 청솔가지 마디마디 눈트는 소리
목련 지고 산단화 지고 모란 작약도 지고
바람에 날려 땡감 떨어져 땅에 구르는 소리
쥐똥나무 울타리에 쥐똥 같은 열매들
똑똑 떨어지고
앵두열매 딴다고 발돋움하다가
엉덩방아 찧고 까르르까르르 웃어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노랫소리
재깔대며 쿵쾅쿵쾅 뛰어다니던 소리
여름날 저녁 어머니 손주들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여주신다고
빨간 꽃잎 모아 백반 넣고 콩콩콩 찧는 소리
스무 개 서른 개 풀잎 같은 손가락 일제히 내어밀고
마루 끝에 앉아서 쿵다쿵쿵다쿵 궁둥방아 찧던 소리
이윽고 차례로 가방 하나씩 등에 지고
훨훨 떠나던 이별의 아침
하얀 손 흔들며 돌아서 가는 길에 바람 소리
어느 날 고목 같던 어머니 맥없이 쓰러져
산으로 가시고 땅에 묻히던 육중한 관 소리
흙 다지던 소리 가슴에 못박혀 빠지지 않는다
생의 동반자도 그렇게 가고
모두 다 말도 없이 떠나버린 후
텅텅 빈 집은 그대로 거대한 빈 항아리가 되고
남은 그 집 주인도 스스로 빈 항아리가 되어
저 혼자 그렁그렁 울리는 그 많은 소리들
깊고깊은 굴 속 영혼의 토굴에 울리는 소리들
아무도 그 소리 듣지 못하는데
빈 항아리 혼자 듣고 있다
빈 항아리는 한 뼘 가슴에 끝없이 공허한
광야가 되고
평원처럼 널린 허공이 된다
빈 항아리 5 / 홍윤숙 (1925~2015)
빈 항아리 속엔
잡목나무 툭툭 찍어 무작위로 세운
산사 하나 아니 산사도 못되는
암자 하나 있습니다
울타리도 산문山門도 없는
온종일 비바람과 마른 잎과
정체 모를 모르스가 제멋대로 날아드는 암자엔
먼 길에 핍진한 백발의 나그네 혼자
저녁 등불을 켜놓고 앉아 있습니다
그의 기억 속엔 잎 지는 가을과
눈 내리는 겨울이 찍혀 있을 뿐
그밖의 계절은 신화처럼 아득하여
추억으로 가는 길도 막혔습니다
나그네 혼자 종일 문 열어 놓고
산 아래 먼 마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막연히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은 다만 의미없이 길들여진 산탄일 뿐
사실은 아무것도 올 것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덩그렇게 빈 공간이 점점 자라서
어느 날 스스로 묻힐 묘지가 될 것을 예감하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그가 살아온 지상의 집엔
지붕도 있고 서까래도 든든하여
비바람 눈보라 막아 주었으나
안식이 없었다고
지금 텅 빈 항아리 속 해묵은 암자엔
지붕도 문도 없어 비바람 제멋대로 들이치지만
알 수 없는 안식이
따스한 용서의 눈길로 감싸온다고
이미 해 저물어 산도 길도 마을도
어둠으로 지워져 지상의 땅 끝 어디쯤인지도 모를
빈 항아리 속 허궁에 앉아서
끝없이 무변한 광야가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고 따뜻하여 눈물나는
눈부시게 흰 허무의 꽃 한 송이 신비롭게 피어나는
기이한 향기에 가슴 젖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