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녹)
<연중 제3주일 기도문>
입당송 시편 96(95),1.6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엄위와 존귀가 주님 앞에, 권능과 영화가 주님 성소에 있도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저희를 주님의 뜻대로 이끄시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선행에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 있게 말한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 겪는 시련과 아픔이 나중에는 커다란 상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제1독서).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바뀐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모든 씨앗은 작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 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면, 씨앗만 보아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하느님의 다스림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확연히 느낄 만큼 커다란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복음).
제1독서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18-25
형제 여러분, 18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21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6(125),1-2ㄴ.2ㄷ-3.4-5.6(◎ 3ㄱ)
◎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도다.
○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노라. 그때 우리 입은 웃음으로, 우리 혀는 환성으로 가득하였노라.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도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노라. ◎
○ 주님, 저희의 운명을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이다.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11,25 참조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1
그때에 1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19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21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 기도
자비로우신 아버지, 저희 예물을 받아들이시고 성령의 힘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예물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6 참조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에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저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의 핵심은,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바뀐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미한 것이지만, 나중에는 엄청난 것이 되어 나타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 믿음의 씨앗에 담긴 신비입니다.
아이 적에는 왜 기도해야 하는지, 왜 주일 미사에 참여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 마련입니다. 그저 부모의 강요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렇지만 성장하면서 서서히 깨닫는 가운데 그때의 기억과 체험이 신앙생활의 힘이 됨을 느낍니다.
모든 씨앗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꽃과 열매가 숨어 있습니다. 신앙의 씨앗도 ‘겨자씨만 한 크기’일 뿐이나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엄청난 힘과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가꾸는 일입니다. 꾸준하게 잘 가꾸면 그 씨앗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를 선물할 것입니다.
인생을 내 것이라고만 여긴다면 ‘겨자씨 한 알’에 불과한 삶으로 끝납니다. 내 뜻만을 고집한다면 결코 ‘겨자씨 수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은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찾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권정생 선생님이 쓴 동화 「강아지똥」을 떠올렸다. 이 세상에 아무 쓸모 없이 생겨났다고 슬퍼하던 강아지똥은 샛노랗게 피어난 민들레를 만나 자기 존재의 필요성을 알고 기뻐한다. 어느 비 오는 날, 마침내 민들레의 뿌리 속에 스며들어간 강아지똥은 너무나 행복하다.
겨자씨는 씨앗 중에도 가장 작다고 한다. 그 작은 씨앗 하나가 제 몸을 썩히고 싹을 틔워 그 몸으로는 작아서 생각도 못할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새들의 보금자리를 이룬다. 그래서 겨자씨는 행복하다. 누룩도 그렇다. 제 몸을 썩여 냄새나는 곰팡이를 피워 마침내 맛난 빵을 만들고 술을 담그고 된장을 담글 수 있다.
겨자씨의 행복을 맛본 사람은 누굴까? 내가 만난 공부방 선생님들이 그랬다. 인천의 만석동, 송림동 산동네 판자촌에서 살면서 온몸으로 아이들과 사랑을 나누던 이들. 나는 전교조 해직교사로 그들과 함께 지내는 특권(?)을 누린 적이 있다. 판잣집 좁은 방에 순대 한 접시, 동태찌개 한 냄비만 놓고도 얼마나 웃음과 기쁨이 넘쳐났던가. 정부의 도시개발로 그 동네가 없어질 때까지 우유 배달과 신문 배달을 하며 근근이 살면서도 아이들과 함박웃음을 나누던 그들이야말로 겨자씨와 누룩 같은 사람들이었다.
대학 시절 잠시 동안 예수의 작은 자매회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청치마에 머릿수건, 샌들 하나가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하루 종일 파출부로, 공장 보조로 일하고 돌아온 수녀님들은 수제비 한 그릇을 맛있게 먹고 행복해했다. 밤이 되면 손을 잡고 둥글게 서서 찬송을 드린 후 잠자리에 들었다. 천사가 따로 있나! 가진 게 없어도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행복한 이들, 여기가 바로 하늘나라가 아닐까!
노미화(양양 조산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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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부모가 아이들의 요구를 전부 들어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여행의 목적지까지 가기가 상당히 힘들 것 같습니다. 휴게소에 들릴 때마다 “이거 사줘, 저거 사줘.”라고 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면 어떨까요? 시간이 많이 소요가 될 것입니다. 또한 먹는 것을 아이들이 좋아해서, 계속해서 응석을 부린다면 어떨까요?
“아빠, 저기서 우회전하면 피자 가게가 나오는데 거기 들렀다 가요.”
“저 길로 가면 정말로 맛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요. 거기도 들러야 해요.”
이렇게 계속되는 응석에 부모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너무 심하다고 싶으면 이렇게 말하지요.
“안 돼!”
여행의 최종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이 ‘안 돼’라는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시 지금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서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여행길에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생길에서 어떻게 하고 있나요?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만을 주님께 내세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안 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위해서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들이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당장 내 계획과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낙담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신다고 해서 주님의 도우심을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옳은 것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해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가슴 아프지만 ‘안 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겨자씨는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던 식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겨자씨는 급속하게 퍼져서 다른 채소에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밭에다가 아예 심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를 밭에다가 심었다고 합니다. 또한 다음에 나오는 누룩 역시 그렇게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지요. 이 누룩은 부패의 상징으로 일상생활에서 불결한 것으로 표상되곤 했거든요.
바로 예수님께서는 부정하다고 이야기되는 것을 통해서 가장 거룩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더없이 크신 일들이 거창한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들을 위해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이렇게 일상의 삶 한 가운데에서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한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안 돼’라는 주님의 메시지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매력있는 사람(‘좋은생각’ 중에서)
사랑은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 줍니다.
매력 있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습니다.
매력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당기는 힘이 있고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매력은 참 멋진 개성입니다.
매력은 사람들을
잘 묶어주는 힘입니다.
매력 있는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매력 있는 사람은
참과 거짓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고통의 순간조차
기쁨으로 바꾸어놓는 사람은
매력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은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삶에 독창성이 있는 사람은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남을 신뢰할 줄 아는 사람은
매력이 있습니다.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매력이 있습니다.
매력은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우리들의 삶을 부드럽게 인도해 줍니다.
거짓으로 꾸미고 가장하는 것은
매력을 만들지 못합니다.
남을 배려해주는 사람은
매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욕심 속에 살지 않고
나눔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남을 진심으로 칭찬하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하면
강한 의욕이 만들어집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은
매력의 산실입니다.
사랑을 주고받으면
매력은 배가됩니다.
내 매력은
당신의 가슴에서 자라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s.catholic.or.kr%2Fattbox%2Fbbs%2Finclude%2FreadImg.asp%3Fgubun%3D100%26maingroup%3D2%26filenm%3Da20020110%25280%2529%252Ejpg)
<기적 같은 평화로움의 비결>
한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분의 본업은 봉사입니다. 특기도 봉사입니다. 취미 역시 봉사입니다. 여기저기 어려운 시설만 골라 다니십니다. 여러 일들 가운데 꼭 필요한 일, 굳은 일, 때깔나지 않는 일만 도맡아서 하십니다.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힘들어하는 사람 보면 가슴 아파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자주 다녀가시지만 언제나 소리 소문도 없이 조용히 다녀가십니다. 차라도 한 잔 대접하려고 하면 어느새 사라지고 없습니다.
너무나 착해빠져서인지, 아니면 너무 열심히 봉사하셔서 그런지 병이 나셨답니다. 내일 아침 수술에 들어간답니다. 부디 수술이 잘 되고, 경과가 좋아서 그 좋아하시는 봉사 계속할 수 있게 되길 기도드립니다.
제가 생각할 때 꽤 심각한 병인데도, 조금도 심각한 기색이 없습니다. 저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한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언제나 그랬듯이 쾌활한 목소리로 남 이야기하듯이 태연하기만 합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그 ‘기적 같은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분 내면에 이미 어느 정도 하느님의 나라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가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그분의 위로가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를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주실 상급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하느님 나라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하는 의문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의문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나라의 풍성함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풍성함, 하느님 사랑의 풍성함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위로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이 아닐까요?
따뜻한 봄볕이 꽁꽁 얼어붙어있던 대지를 소리 없이 녹이듯이 그 숱한 우리의 죄악과 부족함, 실수와 과오들이 크신 하느님 자비 앞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 아닐까요?
참혹하리만치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들의 고통이나 좌절, 분노, 끝도 없는 방황... 이 모든 괴로움들이 크신 그분의 위로 앞에 자취 없이 사라지는, 그래서 부드러운 그분의 손길만이 우리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랑으로 충만한 곳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러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조금씩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가능하다면 이승에서부터 최대한 만끽해야 되지 않을까요?
언젠가 또 다른 세상에서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려야만 하는 하느님 나라 역시 중요합니다.
우리가 풍요로운 하느님의 자비 안에 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와 닿는 현실이 아무리 팍팍하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s.catholic.or.kr%2Fattbox%2Fbbs%2Finclude%2FreadImg.asp%3Fgubun%3D100%26maingroup%3D2%26filenm%3D%253D%252810%2529%252E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