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바이올라의 '교회는 없다'라는 책의 내용개괄입니다. 참고하세요. 단 이 사람의 주장에 대한 객관성이 약간 결여된다는(역사적인 측면에서) 점은 기억하시면서 읽으세요. (자세한 내용은 4566번 글 참고하시면서 보세요....)
내용 요약 |
추천의 말 : 이 책은 300년 전에 나왔어야 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뒤틀리게 비비꼰 후에 신약성경으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들을 승인해 주도록 요구한다.- 진 에드워드
다들 설교하고 가르칠 줄만 알지 개혁 같은 것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원제는 기독교가 이교사상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제도권 기독교(개신교회들과 기독교 단체들)에 정말 교회가 있는가?
제도권 교회를 떠난 지 얼마 후, 나는 그리스도 교회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나 알고 싶었다. 머리말 : 어처구니 없는 듯한 제안 바리새파 사람들은 성경에 뭔가를 첨가했다. 현대의 제도권 기독교는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존재해야 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 질문들 신앙 영심상 그런 종교적 전통들과 영원히 결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결론 말이다. 현대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위조품이라고 말한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였다.
겁나는 초대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서 하는 것들이 성경에서 혹은 유대교에서조차 유래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독교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면 읽기를 중단하라!
1. 예배 순서 :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주일 아침 기초를 카톨릭 미사에 두고 있다. 고대 유대교와 이교사상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교 제사장들의 제복, 정결의식용 향과 성수의 사용, 예배 때 켜 놓는 촛불, 로마 바실리카의 건축양식을 본 딴 교회 건물, 로마법을 기초로 한 교회법, 로마 감독의 칭호로 로마대신관, 그리고 카톨릭 미사를 위한 이교의 제사 의식 등을 이교도들로부터 가져왔다.
루터의 영향 루터가 유카리스트(영성체, 주의 만찬)가 아닌 설교를 모임의 중심이 되게 한 것이다. 다른 주요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루터도 1세기 교회의 방식들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들은 그냥 카톨릭의 신학을 개혁하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국어로 미사를 거행한 것, 설교가 모임의 중심이 되게 한 것, 회중찬송을 도입한 것, 미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사상을 없앤 것, 회중이 떡과 잔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이 루터의 작품이다. 한심한 것은 루터가 만인제사장주의를 한참 부르짖었지만, 성직 안수제도를 철폐하지 않은 것이다.
쯔빙글리의 영향 제단을 대체하고 나무 쟁반과 컵을 사용해서 떡과 잔을 회중에게 전달해서 돌리게끔 했다. 석달마다 거행하도록 권했다. 주의 만찬이 기념이라는 견해를 제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칼빈과 그의 사람들의 영향 설교 다음에 헌금을 수거하는 순서를 집어넣었다. 이 헌금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개인주의적이었다. 개인을 중시하는 성향은 청교도와 경건주의자들, 그리고 부흥운동가들에게 옮겨졌다. 가장 파괴적인 요소는 강단에서 예배의 대부분을 인도한 것이었다! 기여한 또 다른 요소는 회중이 예배당에 들어올 때 가져야 할 엄숙한 태도였다. 미사를 그대로 옮겨온 또 하나의 예는 예배 시작 때 회중이 서서 찬송하는 동안 성직자가 걸어 들어와서 지정된 자리에 앉는 관습이다. 칼빈의 예빼 순서는 지나치게 의식적이고 관습적이며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던 3-6세기 사이의 초기 교부들의 글에 기초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이 개혁은 주로 지적인 운동이었다. 신학은 로마 카톨릭의 것에 비해 급진적이었으나 교회의 관습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교회의 관습에 칼을 들어대며 개혁에 더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을 가리켜 '급진주의자'라고 부른다.
청교도의 영향 설교 전에 있는 길고 긴 목회기도라는 것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회중에게 간증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감리교와 프런티어 부흥운동의 영향 존 웨슬리는 주일 저녁 예배를 일반화시켰다. 프런티어 부흥운동가들은 설교의 목적을 변화시켰다. 잃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설교했다. 휫필드는 야외 열린 공간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한 근대 최초의 전도자였다. 휫필드가 잃어버린 순회사역을 부활 시킨 장본이이며 즉흥 기도와 즉흥 설교를 부활시키는 데도 공로가 있다. 음악은 영혼에 호소해서 구원 메시지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매개체였다. 부흥 운동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나 교회를 향한그분의 계획에 무지함을 보여주었다. 기도를 받기 위해 강단 앞으로의 초대를 탄생시켰다. 피니는 신약성경엔 어떤 지정된 예배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모든 방식들을 다 받아들여서 미국 프런티어 부흥운동은 교회를 설교소로 바꾸어 버렸다. 사도 바울의 우선적인 관심은 개인의 회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커뮤니티들을 설립하는데 있었다. 존 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집단적인) 종교이다. 외톨이(개인적인) 종교로 만드는 것은 실로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다"고 부흥운동의 위험에 대해 이해했었다. 주일아침 주보가 탄생하게 되었다.
무디의 경이적인 영향 무디는 설교 다음에 독창을 집어넣었다. 가가호호 방문해서 전도하는 방식과 복음 전도 집회 광고나 캠페인 같은 것을 물려주었다. 무디에게는 교회라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인 단체에 불과했다. 무디도 감정에 호소했다. 대각성운동가들의 설교 때문에 종교적 자아의 관념만 강해졌다. 이안 머레이는 부흥과 부흥운동을 구별했다. 무디는 환란 전 재림의 가르침인 전천년설 세대주의를 가르침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종말이 오기 전에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상에 불을 지폈다. 1세기 크리스천의 사고방식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세계복음화가 그리 급하지 않았다.
가가호호 전도는 재침례파도 이미 그렇게 했던 것이고 모든 전도하는 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선교회가 비록 교회의 모습에서 빗나가긴 했지만 교회가 그와 같은 열정으로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런 전도와 열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순절 운동의 영향 회중찬송에 더 감정적인 표현을 가미했다. 그의 자리에서 좀더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되었을 뿐이다. 방언이나 통역이나 예언에 의해 노래가 중단되기도 한다. 목사가 때로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다음 주일까지 설교를 잠정 중단하기도 한다. 심히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이다.
많은 조정들,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 변화 예배가 성직자에 의해 인도되고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고 그리고 회중은 수동적이어서 사역할 기회가 없는 것 등이다. 개혁자들이 스스로를 개혁 카톨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그림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주일아침예배순서는 영적으로 해로운 것이다. 상호 간의 참여와 크리스천 공동체의 성장을 억눌러 버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에 의해 예배가 인도된다. 지루하고 다양성과 자발성이 결여되어 있다. 구도자에게 민감한 교회들은 미디어와 단막극 같은 것을 방대하게 도입하기도 한 것이다. 개신교의식은 실질적으로 영적 변화를 방해한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구경하고 듣는 것이 아닌 기능을 발휘함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2. 설교 : 건드렸다간 큰일나는 개신교의 신성한 소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보다 위에 있다.
설교와 성경 성령의 감동에서 나온 설교와 오늘날의 설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모든 지체가 제 역할을 하는 것은 좌담형식이었다.
크리스천 설교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설교의 진원지는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의 삶 속에서 실천된 진리들이 아닌 추상적인 것들이었다. 특별한 옷으로 자신들을 구별했다.
오염된 물줄기의 도래 3세기를 전후해서 자발적인 부담에 의해서 말씀을 전하고 다녔던 순회사역자들도 교회의 역사의 장으로부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전직 이교 철학자들이 초기 크리스천 교회의 신학자가 되어 교부들로 알려진 사람들이다. 유급전문교사가 유대교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자기 직업을 따로 갖고 있던 것이 유대교 랍비들의 관습이었다. 수사학에 훈련된 사람들만 청중 앞에서 연설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 내용은 성경적이지만 방식은 그리스적인 그런 설교를 물려주었다.
개혁자들, 청교도 그리고 대각성운동 청교도들은 설교 원고를 암송하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청교도들은 구절강해설교를 회복시켰고,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구원으로의 초청이 주를 이루었다.
설교가 교회에 어떤 손상을 입혔는가 회중을 벙어리 구경꾼으로, 영적 성장을 교착 상태에 빠트렸다. 비성경적인 성직자 사고방식을 보존시킨다. 교회 안에서 사이가 벌어지게 하고 비인격적으로 만든다. 설교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꽉 막아 버리는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이다. 신약적 방식은 교회가 성직자 없이도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골고루 구비시킨다. 신생 교회에 말씀을 전해주고 오랫동안 그 교회를 내버려 두었던 사도 바울의 방법을 주목하라. 설교자들은 경험해 보지도 못한 것들에 관해 권위자이다. 순간적인 흥분제와 같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늘 만남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이다. 더 많은 영적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지체 간의 상호 권면과 상호 사역의 회복이 필요하다.
요약 불신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든지 혹은 신자들을 가르치든지 메시지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기독교는 역사상 최초로 출현한 성전 없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건물이 아닌 사람들이 신성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클레멘트가 "교회에 간다"라는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다. 2세기 크리스천에게는 모임을 위해 사용했던 개인 집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틴데일은 ekklesia를 church로 번역하는 것을 거부하고 좀더 정확한 congregatio(회중)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칭송할 만하다. 불행히도 흠정역의 번역자들은 이런 우수한 번역을 따르지 않고 church로 번역해 버렸다.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로만카톨릭은 또 전문적인 제사직제를 확립했고 신성한 건물들을 세웠다. 주의 만찬을 신비스러운 희생제사로 둔갑시켰다.
가정집 교회로부터 거룩한 성당으로 신약 크리스천들에게 거룩한 장소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는 건물들을 임시로 사용했다. 시리아에 있는 듀라 유로포스라는 집은 AD 232년 경에 크리스천 모임 장소로 개조된 단순한 개인집이었다. 약 70명이 모일 수 있는 크기가 되었다. 15세기까지 그들의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신성한 장소와 물건의 등장 상징적인 표햔인 십자가는 콘스탄틴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만찬에서 Holy Communion이라고 불리는 일정한 양식을 갖춘 의식으로 둥갑했다. 카타콤에는 죽은 성도들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그곳에서 모였을 뿐이다.
콘스탄틴, 교회 건물의 아버지 콘스탄틴의 생각은 미신과 이교마술로 가득 차 있었다.
콘스탄틴의 건축계획 거룩한 장소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수많은 거대한 건물들이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최초의 교회 건물들에 관한 탐구 감독의 의자 또는 보좌로 불렸던 의자는 건물 안에서 가장 크고 정교한 자리였다. 바실리카 건축 양식에서는 계급의 구분이 확실했다. 그레고리 교황이 성수의 사용과 성물의 사용을 제정했다.
예배에 끼친 주요 영향들 성직자는 특별한 의복들을 입기 시작했다. 로마 행정관들이 입던 의복이었다. 친밀감이 사라진 것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던 모임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구경꾼인 평신도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전문적인 성직자가 예배의 모든 것을 인도했다. 1세기 크리스천들은 그들 자신을, 세상을 역행하도록 따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 보고, 이교문화와의 접촉을 피했다. 모든 교회 자산에 대해 세금의 면제가 허가되었다. 구약 성경을 참조해서 정당화 되었다. 교회건물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구약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다. 옛날 모세의 신성한 제사장, 신성한 건물, 신성한 의식, 그리고 신성한 물건들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영원히 소멸되고 사라졌다. 이에 덧붙여서 그것은 계급 없고, 예법 없고, 의식절차 없는 교회라고 불리는 생명체에 의해 대체되었다.
교회 건축양식의 발달 빛과 색채와 과도한 높이를 교묘하게 사용해서 신비스럽고, 초월적이고, 두려운 분위기를 조장시켰다. 플라톤으로부터 빌려와서 넘겨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만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분이라는 복음 메시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 건물 마틴 루터는 교회가 건물이나 기관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뒤집어엎기엔 불가능했었을 것이다.
뾰족탑 뾰족탑의 메시지는 신약성경의 메시지와 모순되는 것이다. 하늘에 도달할 필요가 없다! 우리와 함께 계신다.
강단 루터교회에서는 강단이 제단 앞으로 옮겨졌다. 개혁교회에서는 제단이 사라지고 성만찬 테이블이 대체되고 강단이 독점했다. 신성한 책상의 존재가 없는 개신교회 예배는 상상할 수가 없다!
회중석과 발코니 현대교회의 무기력함과 수동성의 상징으로 공동체적 예배를 공연구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현대 교회의 건축양식 회중은 극장의 좌석에 앉아 있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다. 크리스천 건축 양식은 그것이 4세기에 탄생한 이래 정체 상태에 빠져있다.
건물에 대한 해석 예배와 일상생활 사이의 괴리현상으로 특징짓는다. 혼적인 감각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감정이 일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것으로 측정할 수 없다.
역겨울 정도로 막대한 경비 교회 건물을 소유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없다. 가정집 모임에서 줄일 수 있는 비대한 경비는 목사 사례비와 교회 건물 경비이다. 가정집 교회는 수입의 95% 이상을 사역, 선교, 전도 등 실질적인 것들에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전통에 도전할 수 있는가 건물은 만민제사장주의를 부정하는 건축양식이다.
4. 목사 : 지체들의 역할을 훔쳐가는 도적 목사를 제하면 현대 기독교는 무너져 버린다. 현대 목사의 직책과 역할을 묘사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에베소서 4:11은 목사라는 말이 사용된 유일한 구절이다. 복수로 사용되었다. 목사들의 원어인 poimen은 목자들이다. 1세기 목자들이 지역교회의 장로들과 관리자들(감독들)이었다.
그는 어디에서 왔는가 타락한 인간은 특별한 제사장 계급을 세우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특별한 훈련, 특별한 복장, 특별한 말, 그리고 특별한 삶의 방식이 돋보인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하려는 성직자적인 사고방식을 강하게 반대했다. 사람을 영적 중재자로 세우려 하는 인간의 추구는 계급구조에 중독되게 만들었다. 요한계시록 2:6절의 니골라당은 사람들을 정복한다는 뜻이다. Nikos는 정복하다라는 뜻이고 laos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니골라당이 성직자를 등장시켜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평신도로 만들어 지배하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단일 감독체계의 탄생 2세기까지 제사장과 성전과 제사가 없는 종교그룹들이었다. 크리스천들은 그들 자신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 두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순회하면서 다녔던 일꾼이 있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 또는 사도라고 불렀다. 안디옥의 이그나시우스(35-107)는 교회 안에서 단독 지도자를 지향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장로들 중에 높여진 장로를 감독이라고 불렀다. 거짓 교회를 추방하고 교회의 통합을 확립하는 구제책이라고 생각했다. 단일감독 또는 절대감독체제로 알려져 있다.
장로에서 사제로 카르타고의 키프리안(200-258)은 제사장, 성전, 제단 그리고 희생제사가 부활되었다. 감독들은 사제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경우에 따라서 목사라고도 불렸다. 감독이 교인을 거느리는 것도 키프리안으로부터 유래했다. 감독이 죄를 사해주는 대제사장으로 여겨졌다. 특정한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로부터 끊이지 않고 계승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사도권의 계승'이라고 한다. 성직자 제도를 주장했고 성직자는 스스로 거룩하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유카리스트를 통해서 다시 한번 희생되는 것이었다.
사제의 역할 밀라노의 암브로스(339-397)에 의하면 사제는 하나님을 하늘로부터 떡 속으로 옮겨가시도록 기원하는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로만카톨릭 교회에서는 사제라는 말이 지역의 장로를 일컫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 안디옥의 이그나시우스의 뒤를 바싹 따라서 키프리안은 교회의 조직이 로마제국을 모델로 해야 함을 강조했다. 마침내 교황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단일감독체제가 만인제사장주의를 삼켜버렸다.
콘스탄틴과 로마 계급구조 로마는 조직을 주었다. 주교관구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큰 행정구역을 일컫는 세속적인 용어였다. 예수님께서 그분은 지도자 계급구조뿐 아니라 종교전문계급도 다 폐하셨다.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명의 연장선상에서 초기 교회는 역사상 최초의 평신도 위주의 운동이었다.
콘스탄틴과 미화된 성직제도 성직자는 특별계급으로 취급되었다. 콘스탄틴은 성직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다. 성직자에게 고정된 급여(사역수당)을 주라고 명령했다!
거짓된 이분법 세상은 기독교를 회심시켰고 인류의 자연적 이교사상을 전시했다. 크리스천의 삶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 신성한 것과 불경스러운 것, 두 부분으로 분리되었다. 로마의 클레멘트(-100)는 평신도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터툴리안은 성직자라는 말을 사용한 최초의 저자이다. 그와 알렉산드리아의 터툴리안(150-215)는 성직자라는 말을 일반화시켰다. 모든 믿는 자들이 동일한 신분을 가졌다는 1세기 크리스천의 사고방식과는 분명히 이별을 고한 것이다. 부정기적이던 주의 만찬이 소위 평신도의 규칙적인 습관이 되었다.
안수에 대한 잘못된 생각 장로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교회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안수는 만민제사장주의를 짓밟는 교회의 계급을 만들어 내었다. 로마의 행정관리들을 임명하는 관습에서 안수식을 본받았다. 어거스틴(293-373)에게는 안수가 펄회할 수 없는 영구적인 자격증이었다. 안수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성립시키는 제도로 이해되었다. 닛사의 그레고리(330-395)는 안수가 사제를 보이지는 않지만 실지로는 다르고 더 월등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신도 위에 그를 높이 세워준다고 주장했다. "존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할 하나님 다음의 존재이며, 땅에 있는 여러분의 신입니다." 성직자-평신도 전통은 대부분의 다른 이단사설보다 더 신약성경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종교개혁 루터(1483-1546), 칼빈(1509-1564), 그리고 쯔빙글리(1484-1531)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관하여 신자가 제사장임을 긍정했다. 반쪽만 회복한 것이었다. 개혁자들이 실패한 것은 공동체적 차원에서 신자가 제사장임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이 진리를 회복시킨 사람들은 재침례교인이라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왜 개신교와 카톨릭의 칼이 재침례파 사람들의 피로 물들었는가의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비극적으로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은 교회에서 모든 지체가 기능을 발휘하게 하는 재침례파 교인들을 난폭하게 짓밟았다. 재침례파 교인들은 모든 크리스천 모임에서 얼마든지 일어나 말알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성직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이것을 반대한 나머니 그것은 지옥불에서 나왔다고 했고 그것을 믿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개신교의 사역자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죄를 사하는 중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중재자로 인식되었다.
사제에서 목사로 애석하게도 루터는 모두가 제사장 제도 아네 있지만 누구나 다 실지로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루터는 교회가 단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믿었다.
영혼의 치유 칼빈과 루터는 목사의 두 가지 주요 역할을 말씀의 선포와 만찬의 주재라는 견해에 일치를보았다. 칼빈은 거기에 제3요소를 가미시켜 목사는 영혼의 치유자였다. 목회상담의 갸념을 쉽게 발견된다 부담이 한 사람(목사)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1세기에는 교회 전체와 장로들이라 불리는 경험많은 사람들의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목사의 지위 특별한 지위는 신적 주도권에 기초했다. 신약성경에서 사역을 일커는 diakonos는 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청교도인 존 오웬(1616-1683)과 토마스 굿윈(1600-1680)은 목사에게 열쇠의 능력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목사는 어떻게 몸의 생명을 빼앗는가 우리는 산 돌이지 죽은 돌이 아니다. 그렇지만 목사의 직책은 우리를 숨쉬지 못하는 돌로 바꿔 버렸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개신교 예배는 평신도 절대 다수가 찬송 몇개 부르고 기도하는 자세로 주의 깊게 듣는 가운데 목사가 사역할동을 하는 것이 라고 압도적으로 받아들이는 풍조에 감염되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상호간 제사장이라는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목사는 어떻게 자신을 파괴시켰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에게도 목사가 지고 있는 엄청난 부담을 다 감당하라고 의도하신 적이 결코 없다. 목사의 역할은 부정직한 삶을 조장한다. 현대 목사들은 신약성경에 58번이나 등장하는 "서로(또는 피차)" 권면하라는 것을 혼자서 어깨에 짊어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현대 목사는 옛 사제를 큰 글자로 썼을 뿐이다!
교인들은 이제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격에 맞는 옷들을 입고 공들여 치장한 교회 건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란 말인가 새언약에 대한 모독이다. 거짓된 메시지를 분다. 초대교회의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사회적 신분의 차별에 대한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성직자의 가운 성직자의 복장은 그리스-로마의 세속적인 의상에서 유래했다.
종교개혁이 변화시킨 것 학자들의 검은색 가운을 채택했다. 여전히 성직자의 예복을 보존시켰다. 검은색을 선호하였다. 전문자들의 색깔이었다.
성직자 의상은 과연 해로운가 주님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감동시키는 특별한 옷이나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구별시키는 어떤 옷도 알지 못했다.
6. 음악 사역자들 : 조연급 성직자들
성가대의 기원 콘스탄틴의 통치 아래서 유카리스트를 돕기 위한 들러리로 성가대가 생겨났다. 그리고리는 찬송이 훈련된 성악가들만 독점할 수 있는 권리라고 믿음으로써 회중찬송의 마지막 흔적마저 싹 지워 없애 버렸다.
장례 행렬 장송곡은 이교에서 온 것이다.
종교개혁의 영향 보헤미아의 존 후스(1372-1415)는 회중찬송을 회복시킨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루터로 예배의 일부분으로 회중찬송을 부를 것을 권면했다. 본격적인 회중찬송은 웨슬리의 부흥운동에서 시작되었다. 특별찬송이 회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가대에 의해 불러졌다. 성가대원들이 특별한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예배 인도팀의 기원 예배 인도팀이 성가대를 대신하게 되었다. 미리 선택된 노래들을 밴드의 반주에 맞춰 따라 부르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 인도팀의 기원은 척 스미스에 의해 1965년 창립된 갈보리 채플로 가야 한다. 새로운 음악 형식을 프레이즈 앤 워십이라고 한다. 예수 은동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마라나타 뮤직이라는 레코드 회사를 설립했다. 존 윔버의 영향 아래 빈야드 교회가 1977년 예배 인도팀의 개념을 도입해서 그 뒤를 따랐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성도들의 기능이라 함은 모임에서 그들이 스스로 노래를 선곡하고 인도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교회들에서의 찬양은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집합적이다.
7. 십일조와 성직자 사례비 : 상처뿐인 지갑 하나님의 일이란 교역자의 생활비와 교회 건물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전기 사용료 같은 것을 의미한다.
십일조가 성경적인가 성경적인 십일조는 (1) 가나안 땅을 상속받지 못한 레위 사람들을 위해 땅의 소산 중에 바치는 십일조, (2)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절기 행사를 위해 땅의 소산 중에 바치는 십일조, (3) 마을의 레위인들, 고아들, 나그네 그리고 과부들을 위해 땅의 소산 중에 모아 두었다가 3년에 한번씩 바치는 십일조의 세 종류를 제정하셨다. 매년 소득의 23.3%를 바치라고 했음을 주목하라. 땅의 돈이 아니라 땅의 소산이었다. 모든 절기법과 사회법과 종교법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장사되었다. 십일조는 율법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십일조의 기원과 성직자 사례비 키프리안은 성직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관습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크리스천이다. 우리가 모두 다 제사장이 되었다. 처음 700년 동안엔 십일조가 거의 언급된 적이 없다. 사역자들이 처음 3세기 동안은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등장해서 봉급을 지급하는 제도를 제정했다.
일만 악의 뿌리 원래의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복음의 심장부를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1세기 장로들(목자들)은 결코 봉급을 받은 적이 없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양떼들에게 주면서 살았다. 교회가 제대로 기능이 발휘된다면, 전문직 성직자는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튼튼한 십일조 교인들을 놓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목사는 자유롭게 말할 자유가 없다. 아무런 기술(자비량할 수 있는)도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결론 율법, 옛날 제사장 제도, 그리고 십일조는 모두 십자가에서 못박혔다. 지갑과 마음과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약성경의 38개의 비유 중 12개가 물질에 관한 것이다.
물을 희석시키는 세례(침례) 터툴리안은 처음으로 유아세례를 언급한 사람 중 하나였으나 그것을 반대했다. 초기 교회에서는 회심한 사람이 믿는 즉시 침례를 받았다. 침수세례가 크리스천 교회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1세기에는 물세례가 한 개인의 믿음을 밖으로 드러내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이것 이상으로 물세례는 사람이 주님께로 오는 유일한 1세기 방법이었다.오늘날에는 물세례의 역할을 '죄인의 기도'가 대체했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죄인의 기도에 의해서 주님께로 인도된 사람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성경 어디에도 개인의 구주라는 속삭임도 찾아볼 수 없다. 세례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의 분리는 2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몇몇 영향력있는 크리스천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학습의 기간과 기도와 금식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세례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받는 표시로 바뀌었다.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는 더 깜짝 놀라게 하는 사상을 우려냈다. 세례 받은 후에 죄를 범하면 사함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최대 한도까지 세례를 연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죄인의 기도와 개인의 구주 죄인의 기도는 아주 최근에 고안된 작품이다. 무디가 그것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다(1837-1899). 개인의 구주라는 표현도 찰즈 풀러(1887-1968)에 의해 일반적인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개인의 구주라는 말은 개인적인 신앙을 더 심하게 당화시킨다. 신약성경은 나와 예수님 뿐이라는 신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오히려 크리스천 신앙은 매우 집합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함께 알아가는 성도들이 모인 몸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주의 만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설명해 주는 극적이고도 구체적인 그림으로부터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의 연구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우리의 죄를 상기하도록 되어 있다. 전통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위함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 초기 크리스천들에게는 주의 만찬이 공동체적인 식사였다. 분위기는 축제와 같았고 기쁨이 넘쳤다. 주의 만찬은 본질적으로 크리스천의 연회였다.
간소화된 식사 1세기와 2세기 초에 초기 크리스천들은 주의 만찬을 사랑의 향연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잔칫상과 함께 떡과 잔에 참예했다. 터툴리안 즈음에 떡과 잔이 식사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레니우스(130-200)는 떡과 잔을 제사라고 불렀던 최초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후부터 그것은 제사 또는 희생이라고 불렸다. 유카리스트에 가미되어 있던 신비스런 분위기는 이교의 신비주의 종교들의 영향 때문이다. 몸이라는 말은 더 이상 교회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지 않았다. 화체설 교회와 함께 떡과 잔을 둘러싼 공포의 느낌이 생겼다. 죄에 관해 자신들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존 칼빈으로부터 온 관습이다.
요약 물세례는 하나님 앞에서 표현하는 믿는 자의 최초의 고백이다. 주의 만찬은 꾸밈없는 단순함으로부터 정교한 화려함으로 옮겨갔다.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식후에 말씀하신 것으로 식사와는구분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은 집에서 먹고 오라고 적고 있다. 베드로전서의 애찬(아가페)가 공동체적인 식사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9. 기독교 교육 : 잔뜩 부어 오른 두개골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 터툴리안. 크리스천 일꾼이 자격을 갖추려면 성경대학이나 신학대학원을 꼭 다녀야 한다는 생각은 소름끼칠 정도로 뿌리가 깊다. 1세기의 크리스천 일꾼들이 종교적인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 훈련을 받았을까? 오늘날의 사역훈련과는 달리 1세기 훈련은 학구적이지 않고 실질적인 체험이었다. 지적인 학습이 아니라 실습의 문제였다. 이성과 정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주로 영을 겨냥했다. 교회생활을 경험하는 것에 의해 훈련되었다. 연장자의 지도 아래 주님의 일을 배웠다. 지역 교회 이외에 양육과 훈련을 공급한 그 무엇도 없었다. 현대의 사역훈련은 욥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왔던 괴로운 세 친구에 비유할 수 있겠다(이성적이고, 객관적이고, 추상적인 사람들).
신학교육의 네 단계 1) 감독 신학 각종 의식과 예법의 실시 방법을 감독과 사제들에게 훈련했던 것과 관련되어 있다. 2) 수도원 신학 금욕적이고 신비한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많은 교부들이 회심하기 전에 이교 철학자와 연설가였기 때문에, 크리스천 신학은 곧 철학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했다. 순교자 저스틴(100-165)은 철학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오리겐(185-254)은 이교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3) 대학 신학 1200년경 대성당 학교들은 대학으로 발전되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이 최초의 대학으로 등장했고 파리대학은 두번째, 옥스포드대학이 그 뒤를 이었다. 파리대학은 그 당시 세계의 철학과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피터 아벨라드(1079-1142)는 신학이란 말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이전에는 이 말이 단지 이교신앙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4) 신학대학원 신학 신학대학원 신학은 대학 신학에서 자라나왔다. 칼 바르트는 신학교육이 전문엘리크계층의 사람들에게 속해야 한다는 견해에 반대했다. "평신도라는 말은 종교용어 중에서 가장 잘못된 말 중의 하나이다." 아퀴나스가 현대신학의 아버지이다. 그의 신학대전 여기저기에서 다른 철학자의 말을 아주 많이 인용했다. 현대신학은 크리스천 사상과 이교철학이 뒤섞인 작품이다.
최초의 신학대학원들 종교개혁이 점점 왕성해지면서 교육을 받지 못했던 목사들에게 학교와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그들이 신학을 알게 되면 설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이런 유형의 신학 훈련은 세로운 직업인 신학교육을 받은 목사를 배출해 냈다. 16세기 중반쯤 대부분의 개신교 목사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대학교육을 받았다. 개신교인들은 더 이상 예일과 하바드 같은 학부교육을 신뢰하지 않았다.
성경대학 성경대학들은의 초점은 평신도들을 훈련시커 풀타임 크리스천 사역자들(직업적)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성경대학은 신학대학원의 마이너리그인 셈이다.
주일학교 1700년이상 지난 후에 생긴 현대적 발명품이다. 로버트 레익스(1736-1811)가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기초교육을 시키려고 주일학교를 세웠다. 자선사업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바뀌었다. 무디가 바로 미국의 주일학교를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다. 연구보고들에 의하면 주일학교는 유소년들의 삶에 거의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 목사 십대 소년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핵심을 파헤치다 신학으로 구비되고 높은 지식을 쌓은 것이 한 개인을 하나님의 집에서 섬기도록 자격을 주지는 못한다. 이론만 무성한 신학대학원이나 성경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이. 교회생활의 도가니에서 실질적인 체험을 해본 적이 없음을 암시해준다. 더 한심한 것은 신학대학원 제도가 조장하는 엘리트 의식이다. 그들의 삶은 뱐화되지 않는다.
10. 다시 봐야 될 구세주 : 혁명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혁명가이신 당신의 주님을 보라 꼭 필요한 것은 기독교 안의 관습들에 일어나야 할 철저한 대변혁이다. 모든 전통은 영원히 철폐되어야 한다.
11. 신약성경에의 재접근 : 성경은 그림맞추기가 아니다 존 다비는 프루프 텍스팅을 예술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신약교회의 실천으로부터 한참 멀리 떠나 잘못된 길로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다.
마빈 스너들리와의 만남 마빈의 편지들에서 고립된 프루프 텍스팅(구절을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울 서신들의 순서 길이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올바른 연대순서는 다음과 같다. 갈라디아서-데살로니가전후서-고린도전후서-로마서-골로새서-빌레몬서-에베소서-빌립보서-디모데전서-디도서-디모데후서.
장과 절의 첨가 1227년 스티븐 랭턴이 장들을 탄생시켰다. 1551년 로버트 스테파누스가 절로 나누고 번호를 매겼다. 신약성경을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하는데 마구 사용되는 지침서로 둔갑시켰다. 성경을 산산조각으로 만드는 것이 이런 짓을 비교적 쉽게 해내게 한다.
신약성경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우리는 그림맞추기처럼 성경에 접근하도록 배워왔다. 너나 할 것 없이 클리보드 접근방식에 의해 성경공부를 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죠 하우스처치와의 만남 집을 개방해서 거기서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갖는다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1세기에 세워진 교회들은 피와 땀으로 세워졌다. 교인들이 그들을 환히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교회의 인정을 받고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경험할 지를 알고, 모임에서 인간 지도자 없이 주님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한다. 1세기에 장로들을 세운 사람들은 순회사역자들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장로의 등장이 14년 쯤 걸렸다. 소위 지상명령이라는 것은 그렇게 교회를 세우는 일꾼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근 8년 동안 사도들 외에 아무도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교회샐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웠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쏟아부어주심으로 주체할 수 없어서 주님을 전파했다.
클립보드 접근방식의 결과 생명력 없고 무미건조하며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많은 가정교회들을 또한 잔쯛 만들어 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그것은 태어나야 한다.
실제적인 구제책 파노라마를 감상하듯 신약성경을 볼 필요가 있다. F.F.브루스는 바울의 서신들을 읽을 때 그것은 마치 전화통화의 한쪽편에서 드는것과 같다고 했다.
마지막 도전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충만함을 추구하기 위하여 인간의 전통과 깨끗이 결별하고, 당신이 발견한 절대적인 빛을 따라가는 데 충성을 다 하겠는가? |
첫댓글 이글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많은 비판들이 잇으니 이 글에서 개혁의 답을 찾지 않길 바랍니다. 개혁의 끝은 성경에서 찾아야 겟죠!!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