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녹)
입당송 시편 27(26),1-2
본기도
말씀의 초대
제1독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룹니다.>
화답송 시편 13(12),4-5.6(◎ 6ㄱ)
복음 환호송 2테살 2,14 참조
복음 <동쪽과 서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예물 기도
영성체송 시편 18(17),3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노미화(양양 조산초등학교)
한 가족이 차를 타고 놀러 가는데 5살 먹은 아들이 갑자기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자 아빠는 학창시절에 배운 것을 기억하면서 아주 복잡하게 설명했지요. “연료가 연소되면 발생하는 열에너지를 기계에너지로 바꾸어서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동력을 얻는단다. 후륜의 경우 클러치-변속기-추진축-차동기-액셀축-후차륜 순서로 동력을 전달하여 자동차를 움직이지. 알겠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던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듣던 아들이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자 엄마는 단 한마디로 끝내 버렸습니다. “응…….빙글빙글!” 엄마의 답도 틀린 것은 아니겠지요? 자동차 바퀴는 ‘빙글빙글’ 도니까요. 더군다나 어린 아들에게는 어려운 설명이 전혀 필요가 없겠지요. 따라서 엄마의 답인 ‘빙글빙글’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쉽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을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끊임없이 걱정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갓난아기가 젖 먹는 것을 걱정할까요? 아니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까요? 아니면 남들과 달리 장난감 없는 것을 걱정할까요? 아니지요. 만약 이 갓난아기가 먹을 것 입을 것 또는 놀 것을 걱정하고 있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시겠지요. “얘! 그건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야. 네 부모가 걱정할 것이지…….” 어쩌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갓난아기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들의 걱정거리가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걱정하고 행동하실 것이지,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갓난아기가 젖 먹는 것, 입을 것, 놀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엄마 아빠만 함께 있어도 편안해하면서 방긋방긋 웃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서 함께 있다는 사실에 편안해하고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진리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걱정과 욕심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께서 제시하는 길의 정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세우는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순간적으로는 행복해보이지만, 참 행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의 좁은 길로 가고 있는 지 깊이 묵상해 보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마세요.
죽음을 이기는 신념(‘좋은생각’ 중에서) 그는 군대에 복귀하자 예전보다 더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했고, 몸을 아껴도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사병의 일까지 자진해서 맡아 해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도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늘 ‘숨이 붙어 있는 한 내가 맡은 일을 완수한다.’고 다짐하며 동료나 부하의 만류를 뿌리치고 임무에 매진했다. 3년이 지나도 그는 무사했다. 오히려 암의 증세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의사와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장교는 바로 무적함대로 세계에 용맹을 떨친 미 해군 제7함대 사령관 로젠버그다. 만일 로젠버그가 보름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을 때 좌절했다면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까? 죽음마저도 물리친 로젠버그의 비결은 특효약이나 기적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신념의 힘이 그런 위대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처럼 한 인간의 신념은 죽음보다도 강하며 자신의 운명을 바꿔 놓기도 한다.
<하느님 품안에 있다 할지라도>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좁은 문으로(루가 13,22-30)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 중에 "예술가의 길"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세 페이지의 아침 글쓰기'를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무슨 생각이든, 말이든 상관없이 매일 세 페이지씩 쓰라는 것이다. 많은 사건들이 이 세 페이지의 글을 쓰는 동안 정리가 되고 해답을 찾을 수도 또 어떤 영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가능한 한 나는 매일 복음 묵상을 쓰려고 한다. 쓰다보면 새롭게 묵상되는 것들이 있고 또 정리가 된다. 그리고 매일 복음 묵상을 쓰기 위해서 하루 종일 복음을 묵상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세 페이지를 쓰라는 것은 단순히 세 페이지를 쓰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 페이지를 쓰기 위해 하루 종일 생각하게 되고 말씀에 몰두하게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 하고 아무 목적 없이 생활하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떤 목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늘 깨어있다는 것이다. 늘 생각하고 고민하는 데에서 예술가들의 어떤 창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매일 아침 세 페이지를 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골프 치는 사람은 하루 종일 골프 치는 것을 생각할 것이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하루 종일 바둑판을 생각할 것이다.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자나깨나 고시원에 들어 앉아서 고시 시험을 준비할 것이고, 야구 선수는 야구만을, 축구 선수는 축구공만을 생각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자기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축구공을 가지고 논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노는가? 나는 자나깨나 무엇을 생각하는가? 돈 버는 일인가? 출세하는 길인가?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가져간 강도는 강도 짓을 하기 위해 얼마나 생각하고 준비를 했겠는가? 무슨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법이고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들어가려고 힘써야할 좁은 문이란 어떤 문인가?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고 있는가? 대입시생들이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가? 학생뿐만 아니라 고 3 학생을 둔 부모도 그 학생 뒷바리지 하느냐고 얼마나 고생하는가? 그들은 모두 돈, 시간, 희생을 바치면서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무진장 애쓴다. 왜그러는가? 대학교에 들어가는 문이 좁으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이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만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란 어떤 문인가? 나도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할 좁은 문이 있는가? 있다면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금 나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좁은 문이란 구원의 문이다. 구원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대학교가 모든 학생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학생이면 무조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듯이 구원의 문은 모든 이를 위해 마련되었고 개방되어져 있지만 모든 이들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쓰는 사람만이 들어간다.
구원의 문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4)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구원의 문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쓴다는 것은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시된 구원의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길을 만들어서 걸어갔던 길을 버리고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 즉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고 걸어간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복음에 제시한 것과 다른 것은 버린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복음에서 제시하는 길이 아닌 길을 걸었던 삶에서 이제부터 복음이 제시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나를 심판하는 것은 내가 만들어 온 길을 얼마나 열심히 걸어왔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 즉 복음이 제시한 삶을 얼마나 실천하면서 살아왔느냐가 합격 불합격의 기준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구체적으로 복음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날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복음의 삶을 사는 이의 삶은 항상 낮은 자리 겸손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항상 꼴찌처럼 보이겠지만 마지날 날 구원의 문 앞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시험 문제를 다 맞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복음을 살려고 힘쓴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 갈 것이다.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위해 무엇을 힘쓰고 있는가? 내가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복음의 삶은 무엇인가? 오늘 내가 복음에서 벗어난 삶에서 회개해야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회개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눈을 돌려 복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은총이며 선물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회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회개의 삶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아야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구원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제시한 그 길을 걸을 때만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유 광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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