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은 언제 일어났을까? |
출애굽 사건은 가나안 정복 이야기와 더불어 구약 성서에서 가장 뜨겁고 혼란스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입니다. 고고학 발굴이 더해지면서 수많은 학자들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 관해 엄청난 분량의 다양한 학설을 발표했으며 출애굽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과는 상당부분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출애굽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출애굽의 여정을 고고학과 함께 탐구하지 않으면 앞으로 구약성서 전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헤매었던 것 같이 광야에서 길을 잃는 것입니다. 성서와 고고학을 비교하면서 출애굽의 여정을 뒤따라가 보겠습니다.
출애굽의 배경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이집트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파라오는 전쟁이 일어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대적과 합하여 싸우고 이집트 땅에서 나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감독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세우고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합니다. 하지만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파라오는 히브리 산파에게 아들이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때 레위 지파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나고, 석 달을 숨겼다가 할 수 없이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두었는데 마침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어 이름을 ‘모세’로 짓게 됩니다. 모세는 히브리 사람을 도와주다가 도리어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미디안 족속을 만나 결혼하고 계속 양을 치다가 ‘호렙산’에서‘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신을 알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집트 파라오와의 만남과 대결 속에서 열 가지 재앙이 내려지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탈출을 하게 됩니다. ‘엑소더스’(Exodus)는 탈출을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출애굽의 난제들
출애굽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에 몇 가지 문제점이 생깁니다.
성서의 숫자를 그대로 적용하면, 출애굽은 창조 후 2,666년에 일어납니다. 더욱이 2,666년은 4,000년의 2/3에 해당합니다. 4, 40과40의 배수는 창세기-열왕기하 전체에 걸쳐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광야 유랑은 40년이었고(민수기 32:13, 하지만 신명기 2:14에서는 38년), 사사들이 통치하는 것도 대부분 40이라는 숫자와 관련됩니다. 다윗은 40년을 통치했으며(삼하 5:4), 솔로몬도 40년 통치합니다(왕상 11:542). 출애굽부터 솔로몬 성전이 세워질 때까지의 기간은 480년(왕상 6:1)이고, 이때부터 바벨론 포로의 귀환까지의 기간도 480년입니다. 이렇게 주요한 사건의 기간을 4의 배수로 기술하는 성서의 기록은 도식적이고 인위적입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도식적인 연대를 과연 실제 연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문제입니다.
성서를 기준으로 한 출애굽의 연대는 정확히 1446년입니다. 연대를 추적하는 기준은 열왕기상 6:1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어찌되었든 성서의 기록을 실제 연대로 환산해보면, 솔로몬 930년에 사망/ 르호보암왕 5년에 이집트 셰숑크(성서에서는 ‘시삭’)가 예루살렘을 침략(왕상 14:25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의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이집트 역사에서 셰숑크의 침략은 기원전 925년이므로 솔로몬은 930년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 솔로몬은 40년을 통치(왕상 11:42)/ 930+40=기원전 970년-에 왕위에 오름
성전 건축은 4년이 지난(왕상 6:1) 966년에 시작. 따라서 출애굽 연대는 966+480=1446년
이집트에 얼마나 체류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네 세대(창 15:16), 400년(창 15:13), 430년(출 12:40-41) 등을 언급합니다. 1세기 유대인 역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215년, 고대 랍비들은 210년을 제시합니다. 215년으로 보는 근거는 갈라디아서 3:16-17에 근거하여 창세기 12:1-3의 아브라함에게 언약이 주어졌던 때로부터 430년 뒤에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2091년)은 야곱이 이집트로 갔을 때(1876년) 보다 215년 앞서기 때문에, 이집트 체류 기간은 215년 동안 이어집니다.
요셉의 손자인 마길의 경우, 마길의 아들들은 요셉이 살아있을 때 태어났지만(창 50:23),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도 참여합니다(민32:39-40; 수 13:31, 17:1).
출애굽기 12:37-39에서 이집트를 떠난 히브리인들은 성인 남자만 해도 6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인구에 비해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해결책으로, 성서의 몇몇 구절에서 ‘1,000’으로 번역된 낱말(히브리어 ’엘레프‘)은 ’씨족‘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민수기 1:46의 표현은 60만 명이 아니라 600가족 혹은 씨족을 뜻합니다. 하지만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 자손은 603,550명(민 1:16), 장자들의 수는 22,273명(민 3:43)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이스라엘과 함께 탈출한 중다한 잡족들(출 12:37-38)을 더하면 300만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수면 10열종대로 행진한다고 해도 그 길이가 240km가 넘게 이어질 것이고 어느 특정한 지점까지 모두 도착하려면 8-9일이 걸립니다.
히브리인들은 파라오 모르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급하게 나온 것일까요(출 12:39-14:5)? 아니면 무장한 군대로 조직하고 이집트인들로부터 상당량의 재물을 훔친 뒤에 아주 치밀하게 출발한 것일까요(출 11:1-2; 12:35-36; 13:18-19)?
이집트의 가축이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출 9:6; 20-21, 12:2)는 서로 모순되며, 파라오의 병거들을 모는 말들은(출 14:7-9)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출애굽과 재앙들
열 가지 재앙을 자연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피로 변한 나일 강은 물속의 부유물질 때문이거나 홍수 때에 박테리아가 크게 증가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일 강에 개구리가 올라온 것은 물 오염의 결과이며, 이와 모기는 이집트에서 자주 발생하는 해충으로 그 해에 특히 많이 번성했을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특정한 이집트 신들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지팡이를 뱀으로 만드는 장면은(출 7:7-12) 뱀이 이집트 권력의 중요한 상징-이것은 파라오의 관 위에 우라이우스(Uraeus, 뱀 상징)이라는 것과 연결됩니다. 피처럼 붉게 된 나이 강은 풍요의 신인 하피(Hapi)가 나일 강과 밀접한 신이라는 것에 주목합니다. 태양이 어둡게 되는 것은 이집트의 태양 신, 아몬-레(Amon-Re)가 연상됩니다. 개구리 재앙은 헤켓(Hekhet)과 가축에 대한 재앙은 하쏘르(Hathor)와 연결됩니다. 물론 헤켓과 하쏘르는 그 자체가 신이 아니라 신들이 형상화 될 때 개구리나 소의 머리를 가지는 것으로 신들에 대한 상징일 뿐입니다.
여러 재앙과 바다가 갈라진 현상을 청동기 시대에 혜성 또는 혜성들이 지구 가까이 통과하면서 생겨난 사건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에게 해에서 일어난 후기 청동기 시대(아마도 기원전 1,450년)의 화산 폭발로 인해서 어두움, 이상 강우 등이 발생했을 것이며, 이 때 데라 섬의 일부가 가라앉으면서 생겨난 엄청난 조류의 일부가 남동 지중해 해안선을 강타해서 이집트 군대를 수장시켰다는 가설입니다.
열 가지 재앙 가운데 특히 맏아들이 모두 죽는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의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기록에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홍해
홍해(Red Sea)로 번역된 히브리어 ‘얌 수프’를 직역하면 ‘갈대바다’입니다. ‘얌’은 바다이고 ‘수푸’는 갈대이므로 ‘갈대 바다’(Reed Sea)로 번역이 되어야 알맞습니다. 붉은 바다(Red Sea)를 그대로 옮기면 히브리어는 ‘얌 아담’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지리상의 홍해에는 갈대가 자라지 않으며 갈대는 바닷물이 아닌 민물 가에서만 자라며 수에즈만 북쪽의 습지에서만 발견됩니다. 따라서 얌 수프와 실제 지리상의 홍해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몇 몇 구절(민 21:4; 왕상 9:26; 렘 49:21)에 따르면 얌 수프로 언급된 바다는 오늘날의 홍해 또는 홍해와 연결된 그 북부에 손가락 모양으로 들어간 두 곳, 수에즈만이나 아카바 만(에일라트 만) 가운데 하나가 분명합니다. 처음에 얌 수프는 칠십인역(LXX)에서 홍해로 번역되고 라틴어, 영어를 거쳐 한글 성경에서 홍해로 번역됩니다. 아마도 홍해는 고대에도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은 몇몇 구절에서 언급된 물이 홍해임을 알았기에 그 용어가 나올 때마다 홍해로 번역했을 것입니다. 이와 달리 루터는 히브리 성서에 의거하여 얌 수프를 정확히 ‘쉴프메르’ 곧 ‘갈대 바다’로 번역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발을 적시지 않고 건넜다는(출 15:4) 물이 실제 홍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 홍해는 매우 넓은 바다이고 거기에는 갈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는 실제 지리상의 홍해일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4:2에는 얌 수프의 위치가 꽤 상세하게 나오지만 관련된 지명들(비하히롯, 믹돌, 바알스본)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민수기 33:10-11(엘림을 떠나 홍해 가에 진을 치고)의 홍해는 수에즈 만을 가리키는 분명한 예이지만, 그러나 엘림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프’가 ‘마지막’을 뜻한다고 의견도 있습니다. 곧 바다를 건너는 것이 출애굽의 마지막 단계임을 암시했을 수도 있으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을 키웠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시 77).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건넌 얌 수프는 지리적으로 어디일까요?
세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남쪽 통로로, 수에즈만을 쓴 호수(비터 호수, Bitter)와 연결시키는 부분을 건넜다는 가설입니다. 비록 이곳이 바다는 아니지만, 히브리인들은 바다와 호수를 혼동해서 바다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신약 성서에서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부른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중앙부의 횡단지역으로 보면, 멘잘레 호의 남쪽 연장부에 위치해 있었을 ‘얌 수프’를 건넜을 것입니다. 셋째는 북쪽으로 간 것인데, 얌 수프를 펠루시움과 라피아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지금은 바르다윌 호로 불리는 시르보니스 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지역에는 넓은 갈대 지역이 있습니다.
몇 가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건넌 ‘얌 수프’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시내산
출애굽의 핵심 지역인 시내산은 출애굽기와 레위기 및 민수기 등에서 토라를 받은 곳으로 15회 언급되지만 얌 수프(홍해)와 같이 찾기가 어렵습니다. 시내산은 ‘호렙’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번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두 곳은 같은 산입니다. 다양한 장소들-전통적으로 시내 산으로 예상되는 예벨 무사(기원전 4세기까지 로만 거슬러 올라가는 전승)로부터 남부 시내(Sinai)에 있는 다른 산들, 북서부 사우디아라비아의 어떤 산 등 무려 10곳이 넘는 지역이 후보에 올랐지만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주는 곳은 없습니다. 시내 광야의 북쪽 지역의 어느 지점일 것이라는 추측이 이스라엘이 그 부근에서 아말렉과 전투를 했다는 전승(출 17:8-16)을 통해 나왔습니다.이를 뒷받침하는 몇 몇 구절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데스로 곧장 갔음을 암시하는데(출 15:22; 삿 11:16) 그렇다 해도 결정적인 확증을 주지는 못합니다.
또한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묘사되는 시내산을 중심으로, 광야에서 주어진 복잡하고 다양한 제사 의식은 군주제 사회의 도시 생활 속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삭막한 광야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시내 산의 정확한 위치와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위는 안개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가데스-바네아
가장 난감한 것은 가데스-바네아(Kadesh-Barnea)입니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뒤 38년 동안 가네스-바네아에서 진을 치고 생활했습니다(민수기 13, 14, 20장). 학자들 대부분은 그 장소를 시내 광야 북동부의 엘-쿠데이라트(Ein el-Kudeirat)와 동일시합니다. 물의 이용 가능성과 다른 환경 조건들을 고려해볼 때 그곳이 가장 유력한 곳입니다. 그런데 가데스-바네아는 천 명 이상의 사람이 생활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
이 지역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1956년, 1976-1982년에 발굴하였습니다. 고고학자들은 그곳에서 기원전 10~7세기의 글귀들과 함께 작은 요새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출애굽 당시의(15세기 또는 13세기) 파편 조각 하나 찾지 못했습니다. 이집트 군대를 피해 피난하는 2-3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40년 동안이나 생활했는데 도기 조각이나 거주 지역 같은 흔적이 없을까요? 아니면 아직 찾지 못한 것일까요?
에시온게벨
에시온게벨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영한 곳으로 전해지는 또 하나의 장소입니다(민 33:35). 후대에 아카바 만 북쪽 끝의 항구도시가 되었다는 성서의 여러 차례 언급을 토대로 고고학자들은 에일라트와 아카바 두 도시 중간에 위치한 오늘날의 이스라엘 및 요르단 국경 지역에 있는 작은 언덕을 에시온게벨로 지목했습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몇 차례 발굴한 결과 후기 철기시대(기원전 1000년경) 유적은 발견되었지만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200년경)의 거주지 유적은 없었습니다. 광야의 수많은 야영지 명단 가운데에서 가데스바네아와 에시온게벨은 실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지만 두 지역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방랑생활을 했던 자취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요르단
동쪽 건너편에 있는 요르단도 비슷합니다. 이 지역에서 유랑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막으려했던 아모리족의 시혼 왕과 헤스본에서 전투를 벌입니다(민 21:21-25; 신 2:24-35; 삿 11:19-21). 고대 헤스본이 위치했던 암만 남쪽의 텔 헤브반을 몇 차례 발굴했는데, 후기 청동기 시대의 도시는 물론이고 작은 마을의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또한 에돔인들과 암몬인들의 저항을 받았다고 기록하는 성서의 이야기(민 20-21장)와는 달리 요르단 고원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인구가 매우 희박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왕국뿐만 아니라 농경인구조차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출애굽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족들과 전쟁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출애굽은 언제 일어났을까?
출애굽 시기에 대한 네 가지 학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최후기 연대(1220년): 이 견해는 페트리(W. M. F. Petrie)가 지지한 1911년 이후에 큰 지지를 받았다.
둘째, 초기 연대(1446년): 잭(J. W. Jack)의 「출애굽 연대」가 출간되고 1920년대에 유행했다. 열왕기상 6:1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를 둔다.
셋째, 초기 연대(1470년): 이 견해는 보수적인 관점인 존 빔슨(John J. Bimson)이 1978년에 처음 제기했다.
넷째, 1930년대에 올브라이트(William F. Albright)의 연구에 의해 촉진되었다. 고고학 연구에 근거를 둔다.
출애굽이 언제 일어났는지가 출애굽의 역사성을 풀어가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대표적으로 15세기와 13세기 학설이 있습니다.
15세기 출애굽?
15세기 출애굽 학설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창세기부터 여호수아의 이야기의 역사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하고 480년이 지난 해, 솔로몬 통치 4년째에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왕상 6:1). 솔로몬이930년에 죽었고40년을 통치했으니 그는 기원전 970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성전 건축은 4년이 지난 966년에 시작됩니다. 966년에480년을 더하면 1446년이 되므로 성서에 따르면 출애굽은 정확히 기원전 1446년이라는 가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두려움을 1648년부터 1550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던 힉소스 민족과 연결시킬 수도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했던 그 왕은(출 1:8) 힉소스를 쫓아내고 다시 이집트 왕조를 세웠던 아모세 1세(기원전 1550-1525)일 것이고, 출애굽 당시는 투트모세 3세(1479-1425)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기원전 15세기에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파라오 투트모세 3세(기원전 1479-1425)와 그의 아들 아멘호텝 2세(기원전 1425-1401)가 가나안에서 대규모의 전쟁을 벌이는 시기였습니다. 이집트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은 고대 근동과 지중해 동부를 잇는 군사-경제 요충지였기 때문에 투트모세 3세를 시작으로(1482년 므깃도 점령) 여러 수비대가 전략적으로 배치되었으며(가자, 욥바, 벧스안, 예노암) 향후 100년 가까이 이집트의 지배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아마르나 서신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집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데, 도시간의 분쟁과 농촌의 불안 속에서도 패권은 이집트가 쥐고 있었습니다. 이집트는 작은 도시들을 정복하고 그들로부터 충성과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이 이처럼 강력한 왕들의 통치기에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시대착오적인 기록도 있습니다. 파라오는 말이 끄는 수레들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적합니다(출 14:6-9, 15:1-4). 그러나 말과 수레는 기원전 15세기에는 무척 희귀했고 기원전 13세기에 가서야 상당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출애굽 과정에서 만나는 에돔,모압 민족은(민 20-21장) 역사적으로 보면 13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민족들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만약 출애굽이 15세기에 일어났고 가나안 정복을 위한 대규모의 군사작전과 정착이 있었다면 기원전 15-14세기에 가나안 중부 산지에서 대규모의 정착 흔적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거주 흔적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중부 산지에서 처음 나타납니다.
서로 다른 읽기를 보여주는 후대의 이차적인 필사본에 의존하는 것도 민감한 문제입니다. 연대기 같은 문제들에 있어서 창세기-여호수아서에 대한 사마리아 히브리어 사본, 마소라 히브리어 사본, 헬라어 사본 가운데 어느 것을 따라야할 것인가 또는 이 셋을 조화시켜 읽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합니다(이집트 체류 기간이 출애굽기 12:40에서 마소라 히브리어 사본은 430년으로, 70인역 성서는 215년으로 기록). 이와 같이 성서 본문의 어느 부분이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때로는 특정한 구절에 대하여 어떤 사본 전승을 따라야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13세기 출애굽?
출애굽에 대한 성서 자체의 모순, 출애굽에 대한 묘사와 고고학의 발굴 결과의 불일치로 인해 출애굽 전체를 부정해야 할까요? 물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1200년경 중부 가나안 산지에서 이스라엘이 출현한 것을 근거로 대부분의 학자들이 13세기 출애굽을 지지합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 시대가 열리면서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지역에서는 광범위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짧은 시간에 중부 고지대에는 수많은 새로운 정착민들이 나타납니다. 마을들이 언덕 꼭대기에 세워졌고 대규모의 삼림 벌채가 이뤄졌습니다. 증가된 인구의 먹거리를 위해 경사지 땅을 개간해서 계단식 경작지로 만듭니다. 아울러 중부 고지대 전역에 물을 저장하기 위해 석회 반죽을 바른 방수 내벽을 갖춘 저수지들이 건설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변화의 주역이 성서 속의 이스라엘 지파였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그러나 이는 아주 타당한 가정입니다. 이곳은 성서가 이스라엘의 정착지라고 말하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입니다(수 17:14-18, 20:17, 21:11, 20).
출애굽을 13세기로 잡으면 요셉을 모른 새 왕(출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은 세티 1세였을 것입니다. 이집트는 세티 1세의 세 번째 자식인 람세스 2세 때에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하지만 말년에는 급속도록 약화되는데 정복 이야기들에 가나안에 있는 이집트 군사력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이집트의 패권이 약화된 기원전 13세기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파라오(출 1:8과 2:23의 파라오는 같은 파라오인가?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는 람세스 2세일 것)는 말이 끄는 수레들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추적하는데(출 14:6-9, 15:1-4), 말과 수레는 기원전 13세기에 가서야 상당수 사용되었다는 고고학 자료와도 알맞습니다.
출애굽기 1:11에 나오는 국고성 비돔(Pithom), 라암셋(피-람세스)과 관련해서 보면 13세기 학설이 더 힘을 얻습니다. 비돔은 텔 엘-마스쿠타(Tell el-Maskhuta) 또는 텔 엘-레타베(Tell el-Retabeh)가 유력하지만 문제는 텔 엘-마스쿠타는 기원전 1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는 사람들의 정착이 없던 곳임이 밝혀졌습니다. 텔 엘-레타베 또한 기원전 12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사람들이 정착했습니다.비돔은 사이스 왕조 기간(Saite, 기원전 664-525년)에 있었던 도시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전부로 비돔이라는 도시는 7세기 이후에 존재한 도시입니다.
라암셋(피-람세스)은 오늘날의 칸티르(Qantir)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에 정착하고(창 47:11),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출 1:11), 나중에 그들이 이집트를 떠날 때 이곳에서 모입니다(출 12:37; 민 33:3,5). 이런 사실은 이집트의 행정 중심지를 삼각주 북동부로 옮기고 그곳에 자신이 건설한 수도를 자기 이름을 따서 명명한 파라오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와의 관계를 강하게 암시합니다. 람세스 2세 치하 이집트 왕실이 부역 노동력을 동원하여 사막 도로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요새들을 포함해 80곳이 넘는 신왕국의 유적지들이 수에즈와 가자 사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40톤을 저장할 수 있는 곡물창고, 40개의 정거장은 10일간의 행군로에 분산되어 세워졌습니다. 그는 외국인들을 징집하여 시행한 광범위한 토목사업으로 유명하며 그가 세운 도시는 피-람세스(람세스의 집)라 불립니다. 이는 최근 텔 엣-다바(Tell ed-Daba)라 불리는 유적을 발굴하던 중에 밝혀졌으며 힉소스 시대에는 아바리스(Avaris)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1530년 무렵에 큰 파괴가 있었으며 람세스 2세 때 라암셋은 재건됩니다.
피-람세스에서 진행된 건축 공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람세스 2세의 한 관리가 아피루('Apiru)에게 양식을 나눠주라고 현장 주임에게 지시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아피루’를 성서의 ‘히브리’와 연결시키기도 합니다(아피루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아피루 또는 하비루는 일반적으로 일종의 변절한 외국인들로서 학자들은 그들을 ‘뿌리 잃은 떠돌이들’이라고 불렀으며 때때로 그들은 용병들과 동일시되기도 합니다. 만약 아피루가 히브리인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면 그들은 람세스 2세 시기의 수도를 건설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람세스 2세의 말기에 이집트의 세력은 축소되고 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가 벌인 가나안 공격을 빼고는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은 눈에 띄게 약해졌습니다. 기원전 1200년 무렵 제19왕조는 무질서와 혼란 가운데 막을 내렸는데, 13세기의 정치역학 관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억압에서 벗어나 정치적인 해방을 시도할 만한 가장 적합한 환경이 됩니다.
요단 동편 상황 역시 13세기 출애굽을 뒷받침합니다. 민수기 20:14-21과 21:21-35에서 모세는 에돔, 모압, 암몬 왕국들과 접촉합니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이 정착 왕국들은 아무리 일러도 기원전 13세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출애굽 당시는(출 2:23) 람세스 2세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13세기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성서가 제시하는 1446년의 출애굽 연대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13세기 출애굽을 주장하는 것이 15세기 출애굽을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점을 적게 만듭니다.
이집트 | 메소포타미아 | 가나안 |
1640년경 유목민 힉소스가 북쪽을 점령하면서 중왕국이 끝남 | 1700년경 니느베(니느웨) 코르사바드(Khorsabad)의 아시리아 궁전에서 자물쇠가 사용됨 | 1750년경 히타이트 족이 가나안에 널리 퍼짐 |
1630년경 제17왕조가 ‘테베’로 옮겨감 북쪽에서는 힉소스가 ‘아바리스’에 수도를 세움 1600년경 고양이를 길들여 키움 | 1650년경 바벨론 인들이 금성 출현을 기록함 | 1600년경 페니키아에서 유리가 다양한 형태로 가공됨 |
1600년경 인체 각 부분의 기능을 정확히 서술한 의학서가 만들어짐 | 1600년경 아리아 어를 구사하는 미탄니 족이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지배함 | |
1530년경 파라오 아모세(Amose)가 힉소스를 이집트 땅에서 몰아냄 | 1595년경 히타이트 인들이 바벨론을 정복함으로써 첫 번째 바벨론 왕국이 멸망함 | 1530년경 이집트에서 쫓겨난 힉소스가 가나안 남부에 임시 거점을 둠 |
1520년경 힉소스 제15왕조가 막을 내림(*요셉의 이집트 체류기간을 힉소스 15왕조시기로 추측) | 1500년경 수금과 기타 등 여러 악기가 히타이트의 종교 무용에 사용됨 | 1500년경 미탄니 제국이 시리아 북쪽을 지배함으로써 지중해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확장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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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