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여행] 천년고찰 교룡산 선국사.........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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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천년고찰 선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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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비에 젖은 돌계단을 따라 위로 오른다. 여전히 장마비는 신경질 날 정도로 내렸다 그첬다를
반복한다. 습도가 높은날씨 후덥지근한 장마철 때문일까 불쾌지수가 교룡산을 덥는다. 조금 오르는
데도 불구하고 등에 땀이 줄줄 흐른다. 가파른 언덕위 축대 넘어 선국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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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비 장마에 그 축대가 무너지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이 여행이끝난 지금 자꾸만 뇌리를 떠나질 않
는다. 아니나 다를까 뉴스에 이곳 선국사도 피해갈수는 없었나 보다. 각설하고 선국사(善國寺)에서 먼
저 유랑자는 반기는 것은 더위를 식혀주는 상사화(相思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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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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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말인데도 벌써 화려하게 피어있는 상사화(개난초,개가재무릇).이다.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
살이풀로. 일본이 원산지이나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정원이나 화분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하고 있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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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상사화는 마치 사랑의 숨바꼭질을 하는 연인 마냥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 한다하
여 ‘상사화’란 이름이 붙었으며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이쯤에서 상사화에 대한 재미있는 설
화가 하나를 소개하고 넘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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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 시대의 송나라 폭군 강왕은 신하의 아내 하 씨를 후궁으로 삼았다. 아내를 빼앗긴 한빙은 강
왕의 횡포를 원망했고, 심기가 불편해진 강왕은 한빙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국경 지대로 쫓아 버렸다.
후궁이 된 하 씨는 강왕 몰래 남편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불행히도 그 편지는 강왕의 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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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식을 들은 한빙은 얼마 뒤 자살했고 하 씨도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녀가 남긴 소맷자락에
는 자신들을 합장해달라는 유언이 적혀 있었다. 그 유언에 몹시 분노한 강왕은 일부러 두 무덤을 서
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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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두 무덤 위에서 각각 나무가 쑥쑥 자라났고 두 나무의 뿌리는 물론 가지들마저 서로 맞닿아 연리
지(連理枝)를 만들었다. 또 두 나무 위에 한 쌍의 원앙새가 날아오더니 서로 목을 비비며 서럽게 울었
다고 한다. 송나라 사람들은 그토록 애절한 광경에 감동하여 두 그루의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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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상사수 밑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올랐는데, 그 꽃을 서로 그리워 한다는 상사화(相思花)
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상사병(相思病)이란 말이 탄생했다는..... 상사화의 키는 60cm 정도 자라며 비
늘줄기는 지름 4~5cm, 길이 30cm이다. 양지바르고 배수가 잘 되는 토양에서 잘 자라는 꽃으로. 비늘
줄기는 약재로도 쓰이는데 주로 호흡기 질환을 다스리고 통증에 효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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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부처님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불도화'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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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꽃무릇하고 상사화를 헷갈려 한다, 상사화는 8월초에 피지만 꽃무릇은 9월 초순경에
핀다. 한참을 구경 하다가 유랑자는 발길을 돌린다. 절집에 가면 흔히 보이는 수국. 수국의 한자 이름
은 수구화(繡毬花)인데, 비단으로 수를 놓은 것 같은 둥근 꽃이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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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이 나무 이름을 붙일 때는 특징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금세 알 수 있게 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수구화는 모란처럼 화려한 꽃이 아니라 잔잔하고 편안함을 주는 꽃이다. 꽃 이름은 수구화에서 수국
화, 수국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본시 수국의 원산지는 중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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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은 불행히도 암술과 수술이 모두 없어지는 거세를 당하여 씨를 맺을 수 없는 석녀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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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이든지 주물러 예쁘고 달콤하게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일본인들은 중국 수국을 가져다
이리저리 교배시켜 오늘날 우리가 키우는 원예품종 수국으로 만들어 냈다. 불행히도 이 과정에 암술
과 수술이 모두 없어지는 거세를 당하여 씨를 맺을 수 없는 석녀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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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은 수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 하나의 꽃을 완성한다. 한여름에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한 아름 안
고 싶은 꽃이다. 수국의 학명 Hydrangea는 그리스어로 '물'이라는 뜻이며, macrophylla는 '아주 작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은 꽃들이 많이 모인 물을 아주 좋아하는 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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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普濟樓)..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뒷면은 평지에서 올라가게 되었으며, 정면은 밑부분의 돌기둥
과 윗기둥의 나무기둥으로 세워졌다. 관음전보수불사방명록(1992년)을 비롯, 시를 적은 현판 9개, 보
제루중수기(1918년), 선국사중수기(1917년) 등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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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보제루의 마루밑에서 <蛟龍山城僧將印(교룡산성승장인)>이라는 동인이 발견되었다. 이 승장
동인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에 승려 처영(處英)이 선국사가 소재한 교룡산성의
승병장(僧兵將)이 되어 성을 크게 중수하고 전란에 대비하였는데, 이 때 조정에서 산성별장의 병부로
써 이 동인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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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普濟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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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다시 발길을 돌려 선국사(善國寺) 경내로 들어선다. 보제루(普濟樓)가 멋스럽게도 금방이
라도 앞에 보이는 지리산을 향해 날아갈 자세처럼 날렵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하부는 돌기둥을 세웠
고 위에 보제루 기둥을 올렸다. 마치 대청마루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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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원스럽게 보이는게 마음 까지도 시원 스럽다. 유랑자는 돌아가 보제루에 올랐다. 본시 보제루
는. 절에 따라 만세루(萬歲樓)·또는 구광루(九光樓)라고도 부른다. 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에
서 보제루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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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普濟樓).에서 바라본 지리산의 파노라마가 환상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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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普濟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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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누각이 있는 절은 대부분 불이문(不二門)이 없으며 불이문의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이 누각 옆에는 법회 등을 알리는 의식 용구를 보관하는 종각(鐘閣)이 있는게 보통 이지만 선국사에
는 종각이 없는 특이한 가람 배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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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 사찰 중심 불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체로 모든 법요식(法要式)은 이곳에서 행하고
있다. 그것은 사찰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 등이 대중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넓지 못하다는 데도 원인
이 있지만, 중심 불전을 마주 올려다볼 수 있는 누각에서 법요를 베푸는 옛 방식의 하나로서, 근세에
이르기까지는 이 누각에서 예불하고 설법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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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제루의 조망권은 가히 압도적이다. 교룡산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파노라마 어
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의 조망권을 자랑한다, 교룡산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풋풋하면서도 싱그
럽고도 향기로운 시원한 바람이 가슴과 마음을 파고 들면서 등줄기를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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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시원함이 남원이 유랑자에게 안겨주는 작은 선물이리라. 어느새 등줄기에 몽글몽글한 땀이 식
어버린지 오래다. 유랑자는 보제루 난간에 앉아 한동안 멍 때리다가 다시 발길을 돌린다. 이번에 선국
사의 메인 대웅전이다. 앞 계단에 역시 수국이 탐스럽게도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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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삼세후불탱화는 가로 177cm, 세로 196cm로 1778년(정조2년) 송광사에서 조성된 뒤 이곳으로 옮겨
봉안된 것이다. 금어는 쾌윤(快玧), 복찬(福粲), 강운(講云) 등 3인이다.그러나 이 탱화는 2000년11월12일
도난사고로 사라지고, 현재 봉안된 탱화는 2001년9월12일 다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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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善國寺)는 교룡산성 내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 말사인 선국사 는
685년(신라 신문왕5년)창건되었고 창건당시 절 근처에 용천이라는 샘이 있어서 절 이름을 ‘용천사’ 라
했다가 절 둘레에 교룡산성을 쌓은뒤 절의 성격이 호국도량으로 바뀌면서 이름도 ‘선국사’ 로 바뀌였
을거라 추정되며 실제 절 건물이 성을 지키는 본부로 쓰인바 있었고 산성 안에 있는 절이라해 ‘산성절’
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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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불단에는 아미타삼존불상, 삼세후불탱화, 지장탱화, 신중탱화, 대북과 중종, 현판 4매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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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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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계단을 올라 국보급인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을 보기위헤 대웅전 문을 살짝 열어본다.
대웅전 내부에는 보물 제1517호.인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불
상 내부에서 다라니, 묘법연화경 등의 복장물이 발견 되었다. 대의를 입은 방법이나 승각기, 금구장
식, 군의를 묶은 매듭 표현을 통해 고려후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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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금산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건칠불상은 고려시대 에서부터 조선전기까지 유행했던
불상의 재료로서 약 20여 구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암튼 이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균형감 있는 신
체비례 와 당당한 자세, 둥근 얼굴의 긴 눈매 와 오똑한 콧날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인상, 굴곡진 가
슴의 양감 표현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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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앞에 있는 7층 석탑과 배롱나무의 어울림은 가히 예술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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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나무로 만들어 따로 끼웠다는데,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아 엄지 와
중지를 맞대었다. 착의법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편단우견의 대의를 입었으며 자연스럽게 접혀져 형
성된 옷주름이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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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없는 완만한 육계, 둥근 얼굴 그리고 왼쪽 어깨에서 접혀져 늘어진 옷자락 과 왼쪽 무릎에 흘
러내린 옷자락 역시 1274년 이전에 제작된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나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
좌상(보물 제930호)에 보이는 고려후기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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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과 찰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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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탱(七星幀)은 수명장수신(壽命長壽神)으로 일컬어지는 북두칠성을 뜻하며, 본래 중국의도교사상과 불교가
융합되어 생긴 신앙이다. 대개는 손에 금륜을 든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주존으로 하여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좌우에 협시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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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건칠불상에는 경기도 안성 청원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전라남도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
여래좌상, 경상북도 봉화 청량사 유리보전 건칠여래좌상과 건칠보살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칠
보살좌상, 일본 동경 대창집고관(大倉集古館) 소장 건칠보살좌상 등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을
포
함하여 7점이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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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선국사!.는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당시 승병들은 이 절을 거점으로 활동을 했던 것으로 기
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사상 승병들의 활약은 참으로 대단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
어나자, 휴정(休靜)은 전국 사찰에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승
군(義僧軍)이 궐기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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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성탱(獨聖幀)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독수성(獨修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
를 일컫는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독성탱(修獨聖幀)·나반존자도(那畔尊者圖)라는 독성탱화(獨聖幀畵)를 모신다.
산신탱(山神幀)은 한국의 토속신 산신령에 해당하는 호법선신으로 산신이라는 인격신과 화신인 호랑이로 나타
난다. 인격신으로서의 산신은 나이 든 도사의 모습이고, 호랑이는 대부분 산에 위치한 사찰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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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싸움은 영규(靈圭)의 청주성발성, 처영(處英)의 행주산성대첩을 비롯하여 유정(惟政)
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평양탈환 때의 모란봉전투와 도성수복 때의 수락산전투·노원평전투·송교전
투 등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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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국적으로 애국지사 승병들의 전공은 실로 대단하였은릉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 암튼
선국사는 3.1 독립만세를 주도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조사가 처음으로 출가를 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다시 대웅전을 뒤로하고 좀 더 오르면 대밭이 양편으로 늘어서 있다. 그 대밭 사이에 석비 하나
가 보인다. ‘군기 터’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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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의 기단위에 7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갖춘 7층석탑으로 역사는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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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뒤편에 이런 군기터가 있었다는 것은 승병들이 선국사를 거점으로 삼고 활동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 근거이기도 하다. 교룡산성은 백제를 거쳐 조선조에 들어서 두 번의 일본과의 교전, 그리고
나중에는 동학군의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도 이 산성을 방어선으로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결국 교
룡산성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산성이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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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산성은 남원지역 20여 개의 산성 중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성으로, 백제 때 신라와 대적
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또한,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 당시 승장 처
영이 크게 수축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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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대종사 첫 출가성지라 적힌 푯말.
백용성(白龍城) 대종사는 본관은 수원(水原), 법명은 진종(辰鍾), 속명은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法號)이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출생, 16세 때 해인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후 전국의 명찰을 돌면서 심신 연마
에 힘썼다. 1911년 서울에서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일로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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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입상: 1991년에 세웠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저술에 진력하
을 지원하였다. 1940년2월24일 나이 77세, 법랍 61세에 입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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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하면 동학혁명 때는 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관군과 큰 접전을 벌인 역사적인 유적지
이기도 하다. 절이름에 ‘국(國)’자가 들어가는 사찰들은 대부분 나라를 위해 큰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
처럼 선국사도 나라를 지켜낸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곳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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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호남지역의 6개 군현에서 거둔 군량미(軍糧米)를 바로 이 교룡산성에
보관했는데, 이때 선국사는 교룡산성을 지키는 수비대의 본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성
기에는 300여 명의 스님이 머물 정도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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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보제루에서 발견된 구리도장은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에게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교
룡산성과 선국사를 나라에서도 중요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국사는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
서 평상시에는 불법 수행도량으로, 전시(戰時)에는 방어진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흥망을 함께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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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모든 시름을 뒤로한 채 허물어진 성벽 과 더불어 인적 드문 깊은 숲에 홀로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다. 대웅전에 걸려있는 커다란 북과 백골(白骨)같은 보제루는 치열했던 시절을 말해주는
상징물로 남아, 선국사를 찾아주는 이를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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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이어보기
http://cafe.daum.net/b2345/9toB/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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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산성길 239,
(지번) 산곡동 419
063-625-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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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 가본적이 없네 ㅋ
예~~ ㅎㅎ 그렇군요,
본시 등잔밑이 어두운 법이라 하잖아요.
절집에 대한 관심 부족 이겠지요.
고향이 남원이라시니
부러운 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