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기행(4)-2일차, 헤이안 신궁, 청수사
일본체재 하루를 완전히 도둑맞은 씁쓸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5시27분. 일본은 해가 일찍 뜬다. 우리나라보다 땅이 훨씬 동쪽에 있는 때문이다. 아침 식사는 6시부터라니 그 전에 세수를 하고 여행가방을 정리하는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오늘 일정을 살펴보니 오늘은 뭣 좀 구경할 게 있어 보였다. 8시 2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버스는 교토로 향했다.
교토….
오사카에서 북동쪽으로 47km의 거리에 있다. 30분이면 족히 닿을 거리다.
794~1868년까지 천 년 이상 황궁이 있던 일본의 수도였으며 현재 간사이 지방의 중심도시다. 옛날의 영화를 오늘에 전하는 교토는 한 마디로 빛바랜 역사도시다. 우리의 서라벌 경주와 비견되는 도시다. 역사도시는 스스로 지닌 그 역사성으로 하여 개발에 제한이 많이 따르고 더딜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다.
794년 간무(桓武:737~806) 천황은 나라(奈良)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 세워진 수도가 헤이안쿄(平安京)로 중국의 장안(長安)을 모방하여 건설된 도시였다. 이후 교토는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초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일본의 황실이 자리 잡았고, 문화·경제·종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1,500여점의 국보와 중요문화재, 헤이안 시대 이래의 수많은 사적과 사찰 등이 볼거리를 제공하며, 현대적인 거리에도 전통적인 일본가옥 등이 남아있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역사도시의 운치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니 기대가 클 밖에.
먼저 헤이안 신궁에 도착했다.
밝은 주홍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문이 방문객을 맞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드넓은 대지가 눈부시게 펼쳐진다. 굵은 은빛 모래가 깔린 대지가 태양빛을 반사하여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따가웠다. 은빛 모래가 깔린 저편이 본전이다. 우리는 너른 대지의 한복판에 우르르 몰려서서 가이드의 약식 설명을 듣는다.
신궁(神宮)이란 신사(神社)의 격을 높인 호칭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신(神)을 모신 곳을 신사라고 하는데, 특별한 신을 모실 때는 신궁(神宮)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다이사(大社)’가 붙는 경우는 그 중에서도 가장 격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일본 열도는 예전부터 화산폭발 같은 천재지변과 태풍의 길목에 있어 풍수해가 많은 땅이었다. 그러기에 고대 일본인들이 나라를 세울 때에도 이런 천재지변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을 골라 수도로 삼는다는 것이 현재의 나라(奈良)지역에 도읍을 정하게 됐다. 그러다 제50대 천황인 간무(桓武) 천황이 현재의 교토로 수도를 옮겼다. 간무 천황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 말하자면 간무의 출신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1년 12월, 현재 일본의 천황 아키히토(明仁)는 자신의 67세 생일 기자회견에서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며 일본 ‘천황가’가 백제 계열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간무의 생모인 니가사의 무덤은 현재 교토시 니시교쿠(西京區) 옛 산인가도(山陰街道)옆 산기슭에 남아 있는데 통칭 인근 지역의 이름을 따서 ‘오에릉(大枝陵)’이라 불린다. 도래인의 후손인 간무 천황은 당시 수도였던 나라(奈良) 인근의 사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토착민 세력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으므로 간무 천황은 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당시 교토 서쪽 지역에 건너와 정착하고 있던 도래인 출신 토호들과 손을 잡기 위해 수도를 옮길 결심을 한다. 784년 천황의 자리에 오른 지 4년이 된 간무 천황은 당시 수도였던 나라의 헤이조쿄(平城京)에서 현재 교토시의 서남쪽에 위치한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옮겼다. 그리고 10년 뒤인 794년 간무 천황은 도읍을 현재의 교토시에 해당하는 헤이안쿄(平安京)로 다시 옮기게 된다.
『간무 임금은 ‘옛날부터 역대 임금들이 각지에 궁을 세웠지만 이만한 승지는 없었다’며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대신이나 공경 및 각 분야에 뛰어난 인물들과 상의한 끝에 이 터가 영구히 이어지라고 흙으로 8척이나 되는 인형을 만들어 쇠갑옷을 입히고 투구를 씌운 뒤, 쇠 활을 들려 히가시야마의 산봉우리에 서향으로 세워서 묻었다. 후세에 도성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 있거든 수호신이 되어 막아달라는 바람에서였다. 그래서 세상에 변고가 일어나려 하면 반드시 이 무덤이 크게 흔들리고 소리가 났는데, 이를 장군총이라 하여 지금도 그대로 있다. 간무 임금은 다름 아닌 다이라 씨의 조상으로서 이곳을 헤이안쿄라 이름지었는데, 말 그대로 평안한 서울이 되라는 의미에서였다.』-〈헤이케 이야기〉에서. 오찬욱 옮김.
1895년(메이지 28년) 3월 15일에, 헤이안쿄 천도 1100주년을 기념해 교토에서는 내국권업박람회가 열렸는데, 이때 주요 행사장의 하나로 쓰기 위해서 창건, 박람회가 끝난 뒤 건물은 그대로, 헤이안쿄로 천도한 당사자인 제50대 간무(桓武) 천황을 모시는 신사로 바뀌었다. 이것이 헤이안 신궁의 시초이다.
그런 중 1976년 1월 6일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해 신궁의 본전(本殿)과 내배전(內拜殿) 등 아홉 동(棟)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3년 뒤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이 어쩐지 새로 지은 듯 산뜻하고 세월의 때가 묻은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고 여겼더니 이와 같은 사연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교토답사 1번지 기요미즈데라(きよみずでら, 淸水寺)
뭐니 뭐니 해도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를 꼽으라 하면 누구나 주저 없이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きよみずでら)를 꼽는다. 수많은 블로그와 여행기에서 청수사는 빠지지 않았고, 사진으로 봐도 절벽 위에 세워진 사찰이라 그 희소성으로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헤이안 신궁에서 버스로 30여 분 거리.
버스에서 내려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에 가려면 마츠바라(松原通)거리로 불리는 비좁고 복잡한 오르막길을 지나야 한다. 산넨자카(三年坂)와 니넨자카(二年坂)라는 유명한 언덕길로, 각각 807년(大同2年)과 808년(大同3年)에 건설되어 연호가 곧 거리 이름이 된 유래가 있는 거리다. 산넨자카의 경우 ‘다무라마로’ 부인의 산후 조리와 연관해 발음이 비슷한 ‘산네이자카(産寧坂)’로 부르기도 한단다.
이 길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 유념할 사항이 있다. 걸을 때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넨자카에서 넘어지면 3년 밖에 못 살고, 니넨자카에서 넘어지면 2년 밖에 못 산다는 속설이 있어서다. 그러나 너무 근심하지 말지니 헤어날 방법이 있다. 아래에 있는 가게에서 호리병을 사서 액을 물리치면 된다는 것이었다. 실로 가소롭고 황당한 믿지 못할 미신이다.
비좁은데다 사계절 북새통을 이루는 가운데서도 역사고도의 운치가 있어 보이는 골목길 옆으로는 관광지 특유의 가지가지 기념품상들이 즐비하게 관광객들을 맞고자 가게 안을 펼쳐 내보이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비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벗어나 오르면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의 정문격인 니오몬(仁王門)을 마주하게 된다. 이 니오몬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 역내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본당 앞 무대(舞臺-부타이).
본당은 건물 전체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산비탈을 겸하여 지은 건물이라 일부 비탈면 바닥이 평면에서 일부가 돌출되므로 이 부분을 139개의 나무기둥을 세워 완성했다. 이 부분이 무대(舞臺-부타이)로 가로가 18미터, 세로가 10미터에 약 100장 정도의 다다미를 깔 수 있다고 한다. 새삼 놀랄 일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목재로만 완공했다고 하는 것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부타이(舞臺)에 서면 교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아악(雅樂)이나 노(能), 교겐(狂言)과 같은 전통 연희를 공연하여 관음상에 봉납했으나 지금은 행사가 멈춘 상태라고 한다.
절벽 위에 세워진 청수사(淸水寺).(사진은 인터넷에서 빌려옴)
예로부터 일본에는 ‘산악신앙(山岳信仰)’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목숨을 내놓고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 절벽도 마다 않는 혹독한 신앙행위를 일컬음인데, 이 정신으로 지어진 절이 청수사다. 기요미즈데라의 기요미즈 무대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 그 믿음을 대변한다. 본전을 지탱하는 기요미즈 마루는 인간이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 위에 세워졌다. 절을 받히는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생명을 오로지 부처님께 의탁한다는 믿음으로 작업에 임하였으리라고 충분히 짐작이 된다. 대체로 인간이 사물을 보고 감탄이나 감동을 느끼는 계기는 유사한 사례의 비교를 통해 감동의 높낮이가 정해지는 것 같다. 중국의 장가계(張家界)를 갔을 때의 정경이 아찔하게 비교대상으로 떠올랐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난 잔도를 걸었을 때의 공포심과 경외감은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이 같은 절벽은 절벽 축에도 끼지 못한다. 신앙이 없어도 인간은 무서운 작업을 감행할 줄 안다. 신앙보다도 무서운 것은 굶주림일 터다.
본당 앞에는 커다란 가마솥 같은 향을 피우는 그릇이 비치돼 있다. 여기서 피어오르는 향의 냄새와 연기를 많이 쐬면 백사에 길하다고 해서 사람마다 연기를 몰아 쐬느라 열심들이다.
‘물이 맑은 절’이라는 뜻의 청수사는 교토가 도읍이 되기 이전인 778년 세워진 사원이다. 교토 시내의 동쪽에 있는 오토와산(おとわ山)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청수사라는 명칭은 이곳에 있는 오토와(おとわ) 폭포에서 유래되었다. 창건 이후 몇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에도시대 초기인 1633년 도쿠가와 이에미스의 명령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1994년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도 교토의 문화재’의 일부이다. 청수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는 ‘십일면천수관음상’을 모시고 있는 본당과 절벽 위에 거대한 목조 구조물로 지어진 ‘기요미즈의 무대’이다. 이곳에서는 교토 시내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본당 오른편에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세 줄기로 물이 떨어지는 샘이 있다. 물 한 줄기에 부처님께 귀의하고, 또 한 줄기에 진리의 말씀에 귀의하고, 마지막 줄기로 승단에 귀의 한다. 삼보(三寶)에 귀의한다는 불교의 삼법인을 의미하는 이 물줄기는 세속의 사람에게는 한 줄기의 지혜와, 한 줄기의 사랑과, 한 줄기의 건강이 된다. 태어나 성장하고 사랑하고 괴로움에 신음하는 삶의 이치를 알아가는 과정이 세 물줄기 안에 담겨 있다.
청수사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는 ‘오토와노타키((音羽の滝, おとわのたき).
타키(滝,たき)는 일본어로 폭포라는 뜻인데. 폭포라 부르기에는 걸맞지 않은 약수터 샘물 정도의 물줄기가 흘러내릴 뿐이지만, 청수(清水, 기요미즈) 라는 이름도 이곳 오토와노타키의 맑고 신비로운 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세 개의 물줄기중 왼쪽은 지혜, 가운데는 사랑, 오른쪽은 장수를 기원한다며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다만 욕심을 내어 세 개의 물을 한 번에 모두 마시면 전혀 효험이 없다고 하니 사전에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바를 잘 생각해서 물을 마실 일이다. 아무리 그 같은 큰 효험이 있다 하더라도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우리가 오래도록 줄을 서서 기다려 샘물을 마시기에는 여건이 허락하질 않았다.
『고대 일본에서는 대륙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아 율령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는 일과 일본말로 오랑캐를 의미하는 ‘에미시’를 정벌하는 일이 국가의 대사라 할 수 있었다.
8세기 말 간무 천황 때 걸출한 장군 사카노우에노 다무라 마로가 마침내 ‘에미시’ 세력을 어느 정도 평정하게 된다. 788년 제 1차 원정을 필두로 791년부터 797년까지의 전투를 거쳐 다무라 마로가 세이이다이쇼군의 직위로 참여한 802년의 정벌에 이르기까지 대략 15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다무라 마로가 두 번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자 일본 역사상 최초로 ‘세이이다이쇼군’의 칭호가 주어진다.
아무튼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본래 도래인(渡來人-대륙에서 건너온)으로서 간무 천황을 도와 천도에 온 힘을 다한다.
그런데다무라마로의 성(姓)인 ‘사카노우에(坂上)‘는 곧 '언덕 위'라는 뜻이다. 이 언덕은 교토의 동쪽 언덕인 '히가시야마'를 가리키며, 다무라마로가 ’에미시‘ 정벌로 공을 세운 뒤 이곳에“기요미즈데라(淸水寺)”라는 절을 건립하여 이름을 붙였다.』 〈「천년의 시간을 걷다」조관희 p79에서 축약 인용〉
『옛날 야마토국(大和國) 다카이치(高市) 마을에 겐신(賢心)이라는 믿음 깊은 중이 있었다. 밤낮으로 도를 닦던 중 하루는 꿈에 산신이 나타나 북쪽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험한 산길을 가던 중에 폭포소리가 나서 다가가 보니 폭포 밑에 수염 덥수룩한 백발노인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겐신을 마지했다. 백발노인은 자신을 교에이(行叡)라고 소개하면서 지난 200여 년간 그 자리에서 겐신이 오기만을 기다렸노라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리고는 이 자리에 절을 짓고 수행하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쳐주고는 사라졌다. 꿈이었다. 겐신은 노인을 찾아 헤맸으나 노인이 벗어두고 간 신발이 있는 곳에 작은 암자가 있을 뿐 노인은 온데 간데가 없었다. 겐신은 그 백발노인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고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다무라마로 장군은 아내의 산후조리가 좋지 않아 산모에게 좋다는 사슴고기(일설에는 사슴새끼)를 얻고자 깊은 산 속으로 사슴을 잡으러 들어갔다. 시슴 한 마리를 잡아 막 껍질을 벗기고 나니 갈증이 났다. 때마침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나서 따라 올라가 보니 커다란 폭포가 앞을 가로막았다. 물안개 사이로 자세히 보니 폭포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청아한 독경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독경 소리를 듣고 있자니 살아있는 짐승을 죽인 것이 마음에 걸려 참회의 마음이 다무라마로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때 독경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서 만난 스님이 겐신 스님이었다. 장군은 살생의 죄를 뉘우치고 이후 겐신 스님을 도와 기요미즈데라(淸水寺)를 지었다. 그 덕에 부인은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이에 보답하고자 부부는 다시 관세음보상상을 이 절에 바쳤으며, 이 불상은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후세까지 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곤자꾸 이야기(今昔物語集)〉「다무라마로 장군 기요미즈데라를 짓다」중에서
본당 바로 앞에는 길이 260센티미터에 90킬로그램이나 되는 쇠로 만든 석장(錫杖)과 12킬로그램이나 나가는 게다(下駄-일본식 나무신)가 한 켤레 놓여 있다. 청수사 스님들이 수행할 때 잡고 신은 철지팡이와 철신발이라는데 황당무계하기가 비길 데 없을 정도다.
기특한 것은 사찰내에 신사(神社)가 또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신사는 이성과의 인연을 맺어주는데 영험이 있다고 알려져 청춘남녀들이 많이 찾아와 기원을 올리고 부적 등을 구입해간다고 한다. 알다가도 모를 일본의 다양한 모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