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남도 땅. 알싸하게 귓불을 스치는 바람결에 놀라 벚나무 가지의 흰 꽃들이 만개한다. 거리가 온통 꽃비로 뒤덮여 봄을 맞는 사람의 마음을 흥성거리게 한다. 올해로 제 46회를 맞는 ‘진해 군항제’ 그리고 1946년 4월 2일 김석창 씨 외에 5명의 음악인이 발족해 진해의 명물이 된 ‘해군군악대’가 분주하게 찾아드는 상춘객의 내방을 맞는다.
1955년 해사생도 순항훈련함대에 편승해 일본, 동남아, 미국, 유럽 등을 순회하며 군악연주회와 교민위로행사를 실시하던 해군군악대는 이제 항구도시 진해에서 그들만의 독창적인 연주와 음악적 기량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달하고 있다. 이러한 일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해군군악대 박준형(40) 대장을 진해 ‘해군의 집’에서 만났다. 그는 1993년 해군에 입대해 이듬해인 1994년 6월 30일 해군본부 교육대 군악대장이 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14년 복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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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군악대의 주요 업무는 무엇인가.
_ 해군군악대는 우선 제일 먼저, 군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사에 대한 의전을 담당하고 있다. 모든 축제와 행사, 군항제를 도맡아 흥을 돋우고 위무를 하며 보다 화려하게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다. 또한 정부의 행사인 올림픽과 월드컵 등에서 시범행사와 의식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외에 1년에 270회 가량 장병을 위한 위문공연을 부대 내에서 실시하고 있다. 국민 위문공연, 지자체 국악축제, 정기연주회로 돈독한 신뢰감을 구축하며 지역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한다. 2008년 9월 30일에는 국방부가 주관하는 행사를 한강 특설무대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참여한 행사 중에 가장 의미 있었던 자리는 무엇인가.
_ 청와대에서 개최한 대사 만찬파티 연주회다. 각 나라 대사들이 참석해 한국 해군의 위용과 기량을 관전했다. 그로써 국가 성장도와 발전상을 엿보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또한 올해로 2회째 열린 ‘군악 페스티벌’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 2007년의 경우 여러 나라가 참여했고, 2년에 한 번씩은 ‘세계의장페스티벌’로 해군, 육군, 공군 등에서 연합해 군 페스티벌을 연다. 여기서 본 행사를 담당하는 주요 군악팀이라는 데 자부심이 크다. 올해는 잠실 경기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통해 해군군악대의 연주를 전 국민에게 들려줄 생각이다.
세계 여러 나라와 대한민국 해군군악대의 차별성을 설명한다면.
_ 먼저 세계 여러 나라 군악대와 같은 점을 설명하자면, 의식행사와 국민을 위한 공연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때 국가의 경제적 성장에 따라 군악 연주를 하는 데는 여러 모로 많은 차이가 있다. 그 나라의 경제적 부유함이 문화를 한층 격상시켜 질적으로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2007년에는 몽골 군악대가 내한했다. 악기 상태와 음악적 완성도도 열악한 수준이었다. 반면 같은 해 몽골 외에 미8군, 미7함대, 러시아, 일본, 뉴질랜드 등에서 여러 군악대가 초대됐다. 그런데 그중 미7함대는 ‘스윙 밴드’와 함께 ‘제시카’라는 싱어를 데리고 와 시연을 벌였다. 뮤지컬 분위기였고 자유로움이 느껴졌으며 우리 해군군악대가 본받을 장점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 해군군악대의 장점은 한국적인 사물놀이 팀과 연합해 한국적인 음악을 선보인다는 데 있다. 또한 창작곡을 이용해 공연하며 ‘불멸의 이순신’ O.S.T 전투장면을 연주했다. 기존의 외국 곡보다 독창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008년 4월 18일 정기연주회에서는 ‘서해교전’에 참여한 서해 영웅들을 음악으로 표현한 황성호 교수 작곡의 ‘바다 그리고 그들’을 발표했다.
‘진해 군악페스티벌’과 세계 군악대의 흐름은 어떠한가.
_ 군항제는 해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해마다 진해시에서 성대히 진행하다가 민간단체인 ‘충무공 선양회’에 넘어가고 현재는 ‘진해 국제군악의장 페스티벌 추진위원회’가 발족돼 행사를 담당하고 있다. 내년에는 ‘세계진해국제군악제’로 발족한다. 음악적 흐름은 전 세계적으로 타투(Tattoo)가 유행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도 한국을 위시해 말레이시아, 일본, 부루나이, 중국 등에서 그러한 기류를 타고 있다. 올해는 세계 대회에 한국에서도 참여할 예정이다. 우리가 먼저 가야지 그들도 오기 때문이다.
해군군악대가 되기 위한 신체조건이나 자격조건이 있는가.
_ 키는 군 입대 자격조건에 부합되면 된다. 그러나 실기 면에서 악기 오디션을 통과해야 해군군악대에 들어 올 수 있다. 지원자 98% 이상이 음대 재학 중에 군복무를 이행하기 위해 들어온다. 현재 부사관도 대학 졸업 후 들어온 선례다. 심지어는 병사들은 제대 후 음대를 졸업하고 다시 이곳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부사관의 지위가 좋아져서 특별히 선호하고 있는 추세다. 그것이 선진국 군악대의 차이점이다. 그중 일본 등 선진국 군악대들은 병사보다 간부가 많다. 아마추어기보다는 프로 군악대를 형성한다. 우리나라 해군에서도 이를 지향한다. 간부 50%, 병사 50%로 보다 수준이 높고 음악적 성향이 풍부한 ‘해군군악대’를 보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악보를 잘 볼 수 있는가, 악기 스케일이 가능한가, 처음 본 곡을 연주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점이 해군군악대 대원에게는 가장 중요하다. 일종의 기본기다. 연주곡보다는 연습곡을 많이 준비해야 한다.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해군군악대에 들어 올 수 없다. 유명대학에서 지원하는데 3~5등 안에 들어야만 본부 군악대에 들어 올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많이 연습을 해야 한다. 개인적인 노력이 군에도 많은 부분 작용한다.
해군군악대에서는 어떤 군사 훈련을 하며 대원의 사기충전을 위해 어떤 위무가 이루어지나.
_ 군대에서 시행하는 모든 훈련에 해군군악대도 똑같이 조련된다. 그러나 자율적이고 자체적인 면이 많아 융통성이 있다. 을지훈련도 자체적으로 잡혀 있고, 군사훈련은 1년에 1회, 사격은 1년에 2회, 행군도 1년에 1회 정도 하고 있다. 이를 해군본부가 있는 ‘계룡대 법무지원단 해군지원부군악대’에서 한다. 그러나 행사 일정에 따라 기간의 변동DMS 있을 수 있다.
또한 특징은 해군에서는 군사훈련 4주 후 해군군악대에 편입하면, 초급반 교육병인 경우 특기 8주 후 3박4일의 휴가가 있다. 또한 실기, 음악이론을 합한 성적이 1등인 경우 병사에게 4박5일의 ‘포상휴가’를 준다. 연습시간은 보통 아침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워밍업으로 파트별 연습을 한다. 그리고 오후 13시 30분부터 16시 30분 까지는 합주를 한다. 발표회 등 많은 연습이 필요할 때는 야간 연습도 실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외에 해군 부대 안에 ‘병사 PC방’이 있다. 병사의 고민을 싸이월드 같은 인터넷 미니홈피에 올리면 비공개로 상담하고 직접 해결해 준다. 현 실정에 맞게 군대서도 인터넷 매체를 통해 신세대 대원들과 교류하고 있다.
1994년 해군본부 교육대 군악대장이 되어 14년간 복무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군악대의 모습은 어떠했나.
_ 당시의 군악대는 예스럽고 진부했다. CD 제작, 녹음실, 시설, 장비도 없어 열악했다. 그러나 지금은 연주 환경이 많이 향상됐다. 고전성을 탈피하기 위해 외국에 나가 직접 식견을 넓히고 좋은 시스템은 적극 도입한다. 또한 각국 군악대를 초청해 군악제를 열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됐다. 특히 정부와 지자체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응원해 줘TJ ‘2007년 아시아 군악 협의회’에 많은 군악대장들이 참여해 화합과 결의를 맺을 수 있었다. 흘러온 14년간 해군군악대도 많은 부분 진일보한 것이다.
또한 군악대 내 분위기도 많이 부드러워 졌다. 경직되고 명령 전달적인 수동적인 자세에서 밝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서 처리할 수 있도록 자율적인 환경이 조성됐다. 사회적인 변화가 군악대 내에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을 체감한다. 용어 자체도 ‘내무반’이란 용어가 없어지고 ‘생활반’으로 바뀌는 등 입대한 병사들은 출퇴근 개념으로 오후 5시 이후는 개인적인 정서생활을 향유하고 있다. 군대도 편안해진 것이다. 여기에 해군에서는 3군 최초로 ‘해군군악대 전용버스’가 생겼다. 이번 계룡시에서 진해에 내려올 때 처음으로 타고 왔다. 육군과 공군 의장대에서도 경쟁적(?)으로 즐겁게 준비하지 않을까 싶다.
군악대 대장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위인과 나름대로 대원을 통솔하는 좌우명은 무엇인가.
_ 과거 일본 해상자유대 후나야마 군악대장이 ‘어떻게 연습할 것인가’를 질문한 적이 있다. 당시는 중위 시절이라 ‘음악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을 제일 많이 고려한다’고 대답했다. 그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대원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들어주라’고 귀띔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가슴으로 느낀다. ‘음악적인 기량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기에 그것을 어떻게 감흥적으로 이끌어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감정은 그들의 마음에 있기에 작게 하라, 크게 하라 명령하기보다는 ‘깊은 바다에 있는 것처럼 연주하라’는 말로 그들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 외에 업무를 볼 때에는 ‘거짓말 하지 마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것은 우리 집 아이들에게도 항상 하는 말이다. 솔직하면 가장 좋은 것 같다. 불편한 점과 개선될 점도 솔직담백하게 얘기해 주면 좋다. 그러나 때로는 직설적인 말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줄 때도 있다. 하지만 진실 되고 솔직하면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다. 사람은 서로 감정을 교류하며 사는 것 아닌가.
군악연주에서 가장 감동적 지휘를 하였던 때는 언제인가.
_ 세계 관악축제 때 싱가포르에서 앙코르 곡으로 아리랑을 연주했다. 듣고 있던 관중이 기립 박수를 쳤다. 그때는 ‘대한민국 군악대가 세계에서 인정받는구나’고 희열을 느꼈다. 또한 2007년 말레이시아 공연에서는 애국가를 연주했는데 교민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를 통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게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 마음 놓고 애국가를 부를 기회가 없다고 한다. 목청껏 애국가를 부르는 교민을 보며 나 역시 감동한다. 외국 가면 다 애국자 되는 것 같다.
또 한 번은 일본 자위대축제 때 재일교포 3세가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는 품에서 자기 부모 영정사진을 꺼냈다. ‘우리 부모님이 오늘 한국 군악대 공연을 보셨으면 굉장히 기뻐하셨을 것이다’고 말할 때 교포들을 위해 공연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연말이면 불우시설, 장애시설에서 연주를 한다. 그들은 돌아올 때까지 손을 안 놓아준다. ‘너무 잘 왔구나’ 싶어서 오히려 큰 걸 얻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섬 지방인 울릉도와 흑산도를 다녀왔다. 해군이면서도 군악 연주만 신경을 쓰느라 배를 많이 못 타봤다. 섬 지방을 돌며 그동안 섬 지방 주민과 화합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많이 신경 쓰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도서 주민들과 함께 위무하며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으로 봉사하며 베푸는 것도 해군에겐 중요하다.
해군군악대가 지향할 점은 무엇이며 어떠한 목표를 세우고 있는가.
_ 첫째 슬로건은 ‘세계적인 군악대를 만들자’다. 최초 민간 항공기를 타고 외국에 나간 건 해군에서 처음이었다. 일본 자위대축제 때의 일인데,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 수송기 외에 다른 나라 수송기가 일본에 도착한 것이 처음이란다. 아이러니하지만 해군이 공군수송기를 타고 일본에 간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계속해서 보다 활발하게 해외 여러 군악대와 돈독한 우의를 맺고 교류할 생각이다.
또한 2005년에는 세계관악협회에서 8대 관악단 대표로 뽑혀 싱가포르 개막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2007년 말레이시아 타투에도 참여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해상자위대 객원지휘자를 맡았고, 일본에서 위촉된 그들 관악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물론 그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국내에서 해군을 위해 열심히 연주하는 것이다.
이제 국내에도 세계 군악 축제가 많다. 진해, 원주, 대전 계룡시 등 문화축제를 하는 곳이 많이 늘었다. 외국에서 이러한 행사를 보기 위해 내한하는 사람들이 많도록 군악제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도 하나의 목표다. 아울러 육·해·공군에서 서로 화합해 음악이라는 토대 아래 국위를 선양하도록 결의한다. 육군 군악대가 선임인데 많이 배려해 주는 부분이 크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에서 서로 잘 하기 위해서는 자대 내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해군군악대 박준형 대장. 현재 그의 지휘 아래 많은 군악대원들이 사회로 나가 음악 연주를 한다. 그중 일각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연주가도 많다. “해군군악대를 제대하고 나서 각 분야의 오케스트라에서 톱클래스에 오르면 무엇보다 그들이 고맙고 뿌듯한 생각이 듭니다. 오케스트라 활동 중에 해군제대사병만의 모임이 있는 것은 해군군악대뿐입니다. 제대 후에도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협연기회를 마련하고 군악대를 잊지 말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길 고대합니다”고 일설하는 그. 부드럽고 온화한 외모에 제독 같은 카리스마가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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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악연주에서 가장 감동적 지휘를 하였던 때는 언제인가.
_ 세계 관악축제 때 싱가포르에서 앙코르 곡으로 아리랑을 연주했다. 듣고 있던 관중이 기립 박수를 쳤다. 그때는 ‘대한민국 군악대가 세계에서 인정받는구나’고 희열을 느꼈다. 또한 2007년 말레이시아 공연에서는 애국가를 연주했는데 교민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를 통해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게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 마음 놓고 애국가를 부를 기회가 없다고 한다. 목청껏 애국가를 부르는 교민을 보며 나 역시 감동한다. 외국 가면 다 애국자 되는 것 같다.
또 한 번은 일본 자위대축제 때 재일교포 3세가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는 품에서 자기 부모 영정사진을 꺼냈다. ‘우리 부모님이 오늘 한국 군악대 공연을 보셨으면 굉장히 기뻐하셨을 것이다’고 말할 때 교포들을 위해 공연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연말이면 불우시설, 장애시설에서 연주를 한다. 그들은 돌아올 때까지 손을 안 놓아준다. ‘너무 잘 왔구나’ 싶어서 오히려 큰 걸 얻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섬 지방인 울릉도와 흑산도를 다녀왔다. 해군이면서도 군악 연주만 신경을 쓰느라 배를 많이 못 타봤다. 섬 지방을 돌며 그동안 섬 지방 주민과 화합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많이 신경 쓰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도서 주민들과 함께 위무하며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으로 봉사하며 베푸는 것도 해군에겐 중요하다.
해군군악대가 지향할 점은 무엇이며 어떠한 목표를 세우고 있는가.
_ 첫째 슬로건은 ‘세계적인 군악대를 만들자’다. 최초 민간 항공기를 타고 외국에 나간 건 해군에서 처음이었다. 일본 자위대축제 때의 일인데,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 수송기 외에 다른 나라 수송기가 일본에 도착한 것이 처음이란다. 아이러니하지만 해군이 공군수송기를 타고 일본에 간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계속해서 보다 활발하게 해외 여러 군악대와 돈독한 우의를 맺고 교류할 생각이다.
또한 2005년에는 세계관악협회에서 8대 관악단 대표로 뽑혀 싱가포르 개막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2007년 말레이시아 타투에도 참여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해상자위대 객원지휘자를 맡았고, 일본에서 위촉된 그들 관악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물론 그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국내에서 해군을 위해 열심히 연주하는 것이다.
이제 국내에도 세계 군악 축제가 많다. 진해, 원주, 대전 계룡시 등 문화축제를 하는 곳이 많이 늘었다. 외국에서 이러한 행사를 보기 위해 내한하는 사람들이 많도록 군악제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도 하나의 목표다. 아울러 육·해·공군에서 서로 화합해 음악이라는 토대 아래 국위를 선양하도록 결의한다. 육군 군악대가 선임인데 많이 배려해 주는 부분이 크다. 그러나 선의의 경쟁에서 서로 잘 하기 위해서는 자대 내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해군군악대 박준형 대장. 현재 그의 지휘 아래 많은 군악대원들이 사회로 나가 음악 연주를 한다. 그중 일각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연주가도 많다. “해군군악대를 제대하고 나서 각 분야의 오케스트라에서 톱클래스에 오르면 무엇보다 그들이 고맙고 뿌듯한 생각이 듭니다. 오케스트라 활동 중에 해군제대사병만의 모임이 있는 것은 해군군악대뿐입니다. 제대 후에도 유명한 음악가가 되어 협연기회를 마련하고 군악대를 잊지 말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길 고대합니다”고 일설하는 그. 부드럽고 온화한 외모에 제독 같은 카리스마가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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