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_
전남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송 명 화
창은 닫혀 있다. 난방 효율을 위해 이중창을 하고 거기다가 두터운 커튼까지 드리워져 나는 고립되어 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온갖 생각을 하고 잡다한 일들을 한다. 무료한 시간이 견딜 수 없어져 탈출하고 싶지만 정신의 공황상태에 다다랐기 때문일까. 권태에 사로잡혀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싫어지면 잠을 청한다. 긴 잠이나 늘어져 빈둥거림으로 인한 피로는 풀기가 쉽지 않다. 나무늘보 꼴의 내가 한심해서 스트레스가 시루떡이 된다.
개방의 시대다. 공중에 높이 솟은 우리 아파트 앞에 두 배나 높은 빌딩이 떡하니 버티고 설 줄 누가 알았으랴. 번쩍이는 그 창을 통해 사람들이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물고 늘어진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우리는 묶여있다. 누군가의 카메라에 소리 소문 없이 몰카의 모델로 찍혀 인터넷상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될 지도 모른다. 길을 걷다가도 불순한 목적으로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는 나는 발가벗겨져 걷는 것처럼 위태하다.
자폐의 시대다. 여덟 살에 세 자리수 곱셈을 능숙하게 해내는 아이를 보고 엄마는 천재라고 기뻐하였다. 몇 년이 흐른 지금 아이는 말없이 숫자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누구나 숨고 싶어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사수하기 위해 덧창을 달고 커튼을 치며 블라인드를 내린다. 선글라스를 애용하고 차창을 짙게 코팅한다. 표정을 굳히고 목적지를 향해 한 번의 곁눈질도 없이 사람들은 바삐 길을 걷고, 혹시나 어슬렁거리게 될까봐 자신을 다그친다.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은 세계적인 연예인들조차도 엄청난 돈을 치르고 무인도나 외딴 곳으로 가재처럼 숨는다. 숨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 그 순간에 삶의 무게는 우리를 짓누른다.
귀가할 때는 늘 눈을 든다. 거대한 아파트 한 동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불 켜진 창들은 시집올 때 고모가 만들어 준 조각보처럼 화려하다. 집집마다 넘실대는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혼자서 품평회를 한다. 붉은 빛 전등이 켜진 창은 폭 안기고 싶은 양털 담요처럼 따스하다. 식구들의 다정한 웃음과 칭찬이 넘치는 거실창으로 언뜻 보이는 그림자가 정겹다. 푸른빛 형광등이 내뿜는 희망을 본다. 생동감 넘치는 저 집의 사람들은 활기찬 내일을 위해 오늘도 늦게까지 불을 켜 두리라. 두어 집은 신비한 보랏빛 불빛이 안방을 채우고 있다. 사랑으로 도배를 했을 것 같은 저 집은 혹 신혼의 젊은이들이 사는 집이 아닐는지. 불 꺼진 열 번째 층 우리 집 창에 나는 형광등으로 희망의 빛을 칠할까. 보랏빛 커튼을 드리워 신비함을 더해볼까. 아니면 노란 버티칼을 펼쳐 따스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 아파트 전체가 내 집 같은 착각을 한 연후라 창들은 모두 그리움의 울타리에 안긴다.
부엌창은 온전히 내 차지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싱크대 앞 가득 들어찬 풍경에 가슴이 벅찼다. 강과 풀밭, 공원, 산, 나지막한 아파트들과 단독주택들, 도로와 어디론가 달려가는 차들이며 기차, 그리고 하늘. 전에 살던 집에서는 벽을 보며 설거지를 해야했지. 음식을 준비하고 그릇을 닦는 동안 내 눈은 온천천에 머문다. 운동을 하러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손놀림도 리듬을 탄다. 금정산 자락에 구름 걸리는 것을 보며 어줍잖은 시를 읊조리기도 하고, 자율 방학과제를 매일 온천천 달리기로 정한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집에서 내려다보고 체크를 하겠노라고 큰 소리도 쳤다. 창을 통해 나는 자폐의 공간을 벗어나 사람과 자연을 불러들인다. 육중한 시간을 경쾌한 콧노래로 바꾸고 사람 사는 모습에 감동한다.
이웃집이 넘겨다 보이는 나지막한 담,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대문, 나무기둥으로 사람의 있고 없음을 표시만 하였던 제주도 지방의 정낭 등을 보면 이웃끼리의 자연스러운 소통을 중시한 옛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일부분처럼 살아간 이들의 삶터는 더 열려있기 마련이다. 하긴 동시대의 집들이라 해도 가진 것이 많은 집에서는 소슬대문을 세우고 후세에 와서는 담을 높이고 그 위에 철조망을 감아 두거나 유리조각을 꽂아두기도 하였다. 이제는 방범전문회사에서 cctv를 설치해 놓고 스물네 시간 감시를 해주기도 하니 단단한 금고 안에 안전하게 들어앉아 한숨 놓고 있는 격이 된 셈인가.
窓(창) 내고쟈 창을 내고쟈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쟈
고모장지 셰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져귀 수돌져귀 배목걸새 크나큰 쟝도리로 둑닥 바가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쟈
잇다감 하 답답할 제면 여다져 볼가 하노라.
화통하고 화끈하게 자신을 열어젖히고 싶은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청구영언에 실린 이름도 없고 연대도 없는 이 시조의 주인공은 아마 여자이리라. 인습에 얽매여 닫고 닫고 또 닫는 처신과 사고의 테두리 안에서 속시원하게 신선한 공기를 맞아들일 창이 얼마나 절실했으랴. 수다스럽기까지 한 중장의 표현을 소리내어 읽다보면 비통한 눈빛으로 세설하는 아낙의 얼굴이 떠오른다.
창을 닦는다. 명경 같이 닦아 나를 내보이리라. 인위적으로 가리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누군가 내 창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다면 움직이는 내 그림자로 그도 이웃을 느끼고 가슴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으리라. 문득 놀라 손가락으로 퉁겨 본다. 닫혀 있어도 열려 있는 창, 그 곳을 통해 나는 인정을 받아들이고 자연을 호흡하며 온전한 나 자신을 만든다. 숨지도 고립되지도 않고 내가 있음을 알린다. 앞창과 뒤창을 함께 열어 설렁대는 바람 속에 나를 맡긴다. 내 가슴의 장지는 이미 활짝 열려있다.
전남일보 webmaster@jnilbo.com
부산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수필] 찔 레 / 문 계 성
땀내 젖은 적삼으로 날 맞던 어머니 같은 찔레
꽃이 지면 그리움에 눈물 짓던 날 추억하리라
나는 일곱 살이었습니다.
세상이,온종일 나를 따라다니며 까맣게 탄 목을 간지럽히던 햇살처럼 정답고,모래사장을 뒹굴며 깔깔거리던 웃음처럼 재미있고,갈마산 위를 떠돌던 흰 구름처럼 한가롭던 때였습니다. 그때의 하루는,학교에서는 그런대로 놀고,하교 후에는 본격적으로 노는 것이었는데,하교 후 노는 장소는 땡볕에 달구어진 모래사장과 버드나무 잎이 피라미 등짝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그늘이었습니다.
그곳은,작고 은밀한 생각들이 연못의 송어들처럼 한가롭게 헤엄치는 장소였습니다. 그 은밀하고 행복한 곳은,흙탕물이 밴 좁은 진흙길을 지나 둑 너머에 있었고,책가방을 벗어던진 나는 작은 풍뎅이처럼 그 별천지로 숨어들곤 하였는데,흙탕물이 밴 진흙길 옆 언덕배기에는 찔레 덤불 하나가 있었습니다.
나는,4월에는 겨드랑이에 신발을 끼고 서서 찔레순을 꺾어 먹었고,5월이 되면 무성한 찔레 덤불이 내뿜는 꽃내에 질려,윙윙거리는 벌들을 고무신 코에 잡아넣어 빙빙 돌리다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이 찔레 덤불을 지나면,길 위쪽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돌보는 이랑이 긴 우리집 밭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빨리 그 은밀한 곳으로 가고 싶어,학교에서 집으로 뛰다가 길바닥에 뒹구는 깨진 유리병을 발로 차,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정강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깜짝 놀라,절룩거리며 집으로 뛰었는데,집에는 축담에 배를 깔고 늘어져 한참 낮잠에 취해 있던 '삽살이'가 뛰어나와,눈치 없이 사색이 된 어린 주인의 어깨에 발을 걸치고 얼굴을 핥아댈 뿐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절룩거리며,분명히 어머니가 있을 이랑이 긴 우리 밭으로 뛰었는데, 그 길은 참으로 긴 여정과 같았습니다. 이부잣집을 지나고 곰보아저씨 점방을 지나서,다시 기와막을 지나 작년 봄 물방개가 헤엄치던 논을 지나서…,나의 상처를 발견하고는,내가 상처를 보고 놀란 것보다도 훨씬 더 놀라며 상처를 싸매줄 어머니를 상상하며,절룩거리며 뛰고 또 뛰었습니다.
진흙길에 접어들면서,찔레 덤불 뒤에 누워 있는 이랑이 긴 밭과,흰 꽃이 만발한 찔레처럼 흰옷을 입은 어머니를 발견하고,급한 마음에 신발을 벗는 것을 잊어버리고 진흙길에 뛰어 들었다가,한쪽 신발이 진흙에 빠져 신발을 빼지 못하게 되자,한쪽 신발은 진흙 속에 버려두고 발만 빼서 더욱 절뚝거리며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상처를 본 어머니는,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놀라며,치마를 찢어 피가 흐르는 나의 정강이를 둘러맸습니다. 나는 비로소 안도하여, 마치 전장에서 할일을 다한 병정처럼 풀밭에 누워,흰 구름이 나는 한가로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그날따라 더욱 하얀 찔레 덤불을 보면서,찔레가 모시적삼을 입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서른일곱 살이었습니다.
나는,나프탈린 냄새와 찌들어 빠진 지린내가 범벅이 된 역한 냄새에 토악질을 하던 기억밖에 없던 도시로 들어왔습니다. 도시는 불안하고 교만한 부유와 꾀죄죄하고 비겁한 가난이 물결치는 더러운 예배소 같았고,하루하루 일을 팔아서 산 빠듯한 월급은 내게 한없는 서글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자기가 만든 욕망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해 돈을 모으는 노예들이었고,나는 예배할 신조차 모호한 얼이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골짜기만 배회하는 깊은 산에 갇힌 사람처럼 길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5월 어느 날 암자로 가던 길에,도랑 가 언덕배기에 앉아 있는 찔레 덤불 하나와 만났습니다. 찔레는 연년이 품어온 연정을 5월 햇살에 한꺼번에 토해내듯,농익은 향기로 벌레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고,진한 찔레 향기가 배어 있는 나의 기억은,한순간에 나를 일곱 살 저쪽 먼 세월 속으로 데려갔습니다. 온종일 모래바닥을 파닥거리며 뛰놀다 지쳐 쓰러져 바라보던 장밋빛 황혼,이랑이 긴 밭,어머니 모습 같다고 생각하던 찔레….
나는 그 땡볕에 달구어진 모래사장에서도 너무 행복하였고,그 신발이 빠지는 진흙길을 걸으면서도 새처럼 자유로웠고,그 이랑이 긴 밭만으로도 굶주리지 않았음을 기억하였습니다. 내가 경험하는 삶의 질곡은 나의 욕망이 만든 덫이었음을,찔레는 누구도 자리를 다투지 않을 언덕배기에 호젓이 앉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지치고 재미없는 뜀박질을 어서 끝내고,하루빨리 이랑이 긴 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십을 훌쩍 넘겼습니다.
여류(如流)하는 세월은 나의 머리에 서리꽃을 뿌렸고,나는 유년의 기억에는 없는,철로를 따라난 작은 길을 매일 걷습 니다.
5월 어느 날,철길 옆 언덕에서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찔레 덤불 하나와 만났습니다. 매일매일 같은 길을 걸었지만,찔레가 거기 있은 줄은 몰랐습니다. 찔레는 남모르게 언덕배기에 홀로 앉아,매일 이 길을 걷는 나를 지켜보다,5월이 되자 성장을 하고 수줍게 자기를 들어낸 것이었습니다.
반가움과 애잔한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지만,한참 동안 그 슬픔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세월 저쪽의,진흙길 옆 언덕배기에 있던 찔레는,찔레순을 잘라 먹던 어린 친구가,그 이랑이 긴 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면서도 도시를 떠나지 못하자,이 메마른 도시의 철둑길 위 버려진 언덕에 찾아와,해후를 위하여 꽃으로 단장한 얼굴을 내밀었다는 것을,나는 한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난 뒤에야 알아챘습니다.
찔레는 속삭였습니다. '꼬마 친구! 참으로 오래간만이지?'
갑자기,일곱 살 때 종일 나를 따라 다니면서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어머니의 땀내 젖은 적삼에 안기던 때의 만족감이 나의 전신을 감쌌습니다.
나는 일곱 살 때의 세월 속에 있었던,그 아무 걱정이 없던 행복 속으로 걸어 들어가,이런저런 것들을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봄비가 내리면 꽃을 옮겨 심던 꽃동산,밀사리하던 동무들의 웃음소리,임종을 맞아 갓 시집왔을 때의 남편의 사랑을 생각하며 눈물짓던 이웃집 할머니의 쇠잔하던 모습,벼랑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
그 세월 속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세월로 돌아가는 것은 아직도 버리지 못한 꿈입니다.
찔레 꽃잎이 마르면,나는 다시 찔레를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찔레는 세월 저쪽의 친구이고,세월 저쪽 그때에도,일년에 한 번 꽃이 필 때면 모시적삼을 입은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나와 놀았고,찔레꽃이 지면 곧 찔레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 세월이 지나면,아마 나는 여기 이 철길 옆에 앉아 찔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나를 다시 그리워할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가 경험한 것들을 가슴에 그려놓고,그것이 잃어버린 자기라고 생각하여,그리워하거나 연민하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2005 신춘문예 수필> 홍어
전라도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홍어를 자주 접해왔다. 우리 마을 잔치의 육류 대표가 돼지고기 삶은 것이었고, 어류 대표가 홍어였다. 특히 홍어는 젓가락이 많이 가는데다가 너도나도 부지런히 챙겨가서 가장 빨리 떨어졌다. 또한 전라도 잔치에선 아무리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도 홍어가 없으면 별 볼일 없는 잔치였다고 뒷말이 많기 때문에 혼신을 다해 준비해야 했다. 이렇게 시시때때로 홍어를 접하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홍어를 먹을 줄 아는 그런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사춘기 때는 냄새가 심한 토속적인 홍어를 먹는 게 창피해서 안 먹는 척 하기도 했다. 홍어를 잘 먹으면 왠지 나이 들어 보이고, 억척스럽고, 야만적으로 보이리라 생각 들었던 것이다.
내가 막 중학생이 되던 해 햄팬댁네 아들 결혼식이 있었다. 나와 동네 아이들은 잔치 음식 좀 얻어먹어 보려고 그 집 대문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결국 한 상 받게 됐다. 내가 막 홍어를 먹으려는 찰나에 서울에서 온 그 집 손녀를 보았다. 그 애는 우리와 같은 또래라 금방 우리 상에 끼여들었는데, 뽀얀 피부와 깨끗한 옷이 내 젓가락에 잡혔던 홍어를 슬그머니 내려놓게 만들었다. 난 그 애가 자꾸 날 보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며 계속해서 홍어를 안 먹는 척 했다. 내게 마음이 있었던 동네의 사나운 여자애가 그런 광경을 눈초리 치켜 새우며 쳐다보더니 ‘너 왜? 홍어 안 먹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아닌가? 난 그만 얼굴이 홍어처럼 달아올라서 뛰쳐나가 버렸다. 이렇게 홍어에 예민했던 시절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홍어가 많이 비싸졌다. 6만 원어치 한 짝을 사도 그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젠 사춘기 시절처럼 안 먹는 척 하기엔 너무 아까운 고급 음식이 돼버린 것이다. 홍어하면 흑산도 홍어인데, 흑산도 홍어를 제철에 사면 한 마리에 60만원이나 되고 잘 잡히지도 않아서, 우리가 먹고 있는 홍어는 칠레산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무역이 활발하지 않던 시절에 흑산도 홍어가 고맙게도 많이 잡혀줘서 늘 풍성하게 먹었던 것 같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우리 고모가 시집가던 날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첫 번째 이유가 그 날 눈이 엄청 많이 와서 그렇고, 두 번째가 잔칫상의 홍어 맛이 일품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7남 1녀 중 여자 하나인 우리 고모가 서울로 시집가던 날, 집 마당에서 조촐한 전통혼례를 치렀는데, 그때 홍어 맛이 추위에 언 사람들을 녹여버렸다고 한다. 이처럼 홍어 맛이 유달랐던 잔치는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홍어는 겨울에 살짝 얼어줘야 천천히 은근하게 삭혀져서 더 맛있는 것이다.
할머니는 하나 있는 딸을 시집보내는 날이었고, 울 아버지도 아버지보다 먼저 여동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아마 모든 식구가 가슴이 시릴 정도로 서운했을 것이다. 이런 서운함과 시린 마음을 홍어가 어찌 알고, 맛있게 슬며시 삭혀져서 조금이나마 달래줬다고 본다.
서울 큰 외숙 댁에서 외가 식구들 모임이 있어 어머니가 올라오셨다. 난 내가 시골에 내려가는 것도 좋지만, 어머니나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오시면 그것도 너무 좋았다. 뭐랄까? 고향이 통째로 서울에 옮겨진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올라오시는 날은 일이 집중되지 않고, 부모님 마중 나갈 생각만 하게 된다. 특히 어머니가 가져오실 홍어를 떠올리면 입안에 스르르 침이 고인다.
전라도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온 외숙과 이모들도 전라도 홍어를 그리워했다. 서울엔 없는 게 없다지만 홍어만큼은 물 홍어가 많아서 전라도에서 먹었던 그 홍어 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홍어를 큼지막하게 썰어 항아리에 넣고 적당히 삭힌 뒤 초장에 찍어 먹거나 묵은 김치에 싸먹으면 그 특유의 톡 쏘는 맛이 더해진다. 불그스름한 속살에 붙어있는 오돌 뼈도 맛있고, 꼬리 부분도 맛있다. 전라도 사람들은 여럿이 모여 그 맛을 즐긴다.
예전에는 홍어를 통째로 가져와 집에서 직접 회를 떴다. 그러면 온 집안에 홍어 냄새가 퍼지고, 사람들도 그 퍼진 냄새만큼이나 모여든다. 근데, 요즘은 먹기 좋게 떠져 있는 것을 사온다. 그래도 직접 떠먹었던 홍어가 손맛까지 더해져 더 맛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올라오시는 길에 영산포에 들려 홍어를 구입했다. 영산포는 홍어로 유명한 곳인데, 매년 홍어축제가 열린다. 어머니가 시골에서 싸온 전라도 홍어, 그 홍어 보따리를 들고 서울 지하철을 타니 홍어냄새가 스르르 퍼진다. 사람들은 그게 무슨 냄샌지 모른다. 하지만 같은 지하철에 탄 전라도 사람들은 그게 뭔 냄새인지 금방 알아챈다. 지하철에 퍼지는 그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슬슬 입맛 다시기 시작한 사람들도 늘어간다.
한참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와 통화를 시작하시더니 사투리를 팍팍 쓰신다. 어머니의 통화를 엿들은 사람들은 피식피식 웃기 시작한다. 난 통화를 끝낸 어머니에게 말했다. ‘아따 사투리 겁나게 쓰셔부요이~~’ 사람들은 나와 어머니의 말투에 지하철에 퍼진 이상한 냄새를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더욱 웃었다.
홍어는 전라도 사투리를 팍팍 써대면서 먹어야 더 맛있는 것 같다.
“아따 먼 홍어가 이라고 맛나다요. 홍어 으서 맞쳤소”
“오메~ 똑 쏜 거~ 아조 죽여부네!! 아야!! 느그들도 와서 한 볼태기씩 해야”
“홍어 다 떨어져붓소! 많이 좀 마치제만은 그랬소! 좀 싸갈락했드니만...”
전라도에선 왜 그토록 홍어를 즐겨 먹는 것일까? 아마도 한이 많이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판소리, 5월의 광주, 목포의 눈물, 동학 농민운동 등에서 보듯 차곡차곡 한을 쌓아온 지역이 전라도라 할 수 있다. 물론 쌓인 한을 신명나게 푸는 곳도 전라도다. 그 신명나는 행위 속의 흥을 돋는 음식이 홍어였던 것이다.
전라도 대표 음식인 홍어는 버릴 것도 없다. 내장으론 국을 끓이기 때문이다. 보리 이파리와 홍어 내장을 넣어 끓인 국의 국물을 떠먹으면 홍어가 노닐던 바다처럼 속이 확 트인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홍어를 잘 먹으면 속병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 같다. 나 역시 홍어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화를 내 가슴으로 직접 삭여야 했을까? 때문에 나에게는 홍어가 꼭 필요한 것 같다. 난 가장 나를 닮고, 고향을 닮은 홍어를 먹으며 가슴 속 시름들로부터 벗어난다.
최원호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네가 과메기로구나
너희들이 꽁치과메기였구나. 덕장에 주렁주렁 한 두름씩 걸려 짭조름한 바람 속을 유영하고 있구나. 청해를 누비며 군무를 추던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된 듯 하구나. 너희들은 본디 날렵한 몸매에 감청색 양복,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깔끔한 신사가 아니더냐.
하지만 설한풍에 휘불리어 낡은 외투를 걸친 초라한 노숙자 같구나. 유리알 눈동자 납덩이가 되어 박혀 있구나. 살을 에는 추위에 악다물었던 입마저 벌어져 가늘고 긴 신음 토해내고 있구나.
나는 사열하듯 너희들을 둘러보고 있다. 획일적인 표정, 허망한 눈동자 흙투성이 어설픈 훈련병 같구나. 가스실로 열 지어 들어가는 벌거벗은 유대인들 같구나. 대열사이로 넘실되는 너희들의 푸른 고향이 보이는데, 맑은 눈물이 보이는데.
한때 너희들은 해풍 속을 훨훨나는 갈매기가 되는 것이 꿈이었을 게다. 가끔 갈매기의 흉내를 내며 물위로 튀어 올랐겠지. 하지만 지금 공중에 매달린 기분이 어떠니. 바람을 타는 기분이 어떠니. 모두가 고개를 떨어뜨리는구나. 이제 풍경처럼 바람에 몸을 맡기는 슬픈 운명이구나. 물결을 힘차게 거스르던 지느러미는 무용지물이 되었구나.
너희들은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니. 노아가 방주를 띄울 때 내렸던 그 엄청난 비, 그 혁명의 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냐. 물결이 내 몸에 조금만 닫기만 한다면 다시 한번 온몸을 비틀어 바다로 뛰어들 수 있을 텐데.
새로운 삶을 살 것 같은데. 너희들은 잊지 않고 있겠지. 청해를 노닐던 그 때를, 그 자유를 그리고 느닷없이 검은 그물에 걸려 박제된 그 날을. 그 방심의 날을.
나는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있다. 또 다시 하나, 둘 만나는 과메기 덕장. 점차 뻗두룩해지는 몸을 풀기위한 안간힘인가. 멀리서도 너희들의 몸부림치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해안가 선술집에 들렸다. 누른 종이에 ‘과메기 있습니다.’라고 적힌 문구가 견장처럼 붙어 있다. 하얀 접시에 대가리와 내장과 뼈가 추려진 얼 말린 과메기 몇 마리가 올려져 나왔다. 참으로 다행이다. 검게 탄 눈과 내장이 함께 담겨져 왔다면 그 절망의 덩어리를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이제 모든 애착을 버리고 누운 진갈색 살점들이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나는 꾸덕꾸덕한 과메기 한 점을 생미역에 싸서 초고추장에 꾹 찍어 입에 넣었다. 쫀득쫀득한 과메기는 유연한 몸짓으로 목구멍을 타고 헤엄쳐 들어갔다. 전혀 걸림이 없다. 얼마나 깔끔한 보시인가.
내 배 속이 무덤이다. 방형도 장방형무덤도 아니다. 자궁 같은, 고향 같은 무덤이다. 잔에 바다처럼 맑은 소주를 한잔 따라 마신다. 그리고 염원한다. 이 길이 환생의 길이 되라고, 이 세상에서 과메기가 된 것을 서러워 말라고, 어차피 인간도 죽으면 어두운 땅 속에서 얼리고 풀리는 영원한 과메기가 된다고.
인간 세상은 잡고 잡히는 살벌한 곳이다. 나는 졸지에 떼송장이 되어 걸려있는 너희들의 천편일률적인 표정에서 나의 모습을 보았다. 아니 한결 같이 황금을 좇는 개성이 말살된 인간들의 박제된 군상을 보았다.
너희들이 느닷없이 그물에 걸려 과메기가 되었듯이 인간도 어느 순간에 땅 속 과메기가 될지 모르는 어지러운 세상이다. 지금도 현실의 그물에 걸려 찬바람 부는 어느 지하도 구석진 곳에서 얄팍한 박스를 깔고 누워 꾸덕꾸덕한 과메기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들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너희들이 청해가 그립듯이 인간도 돌아가지 못할 어머니의 따뜻한 자궁을 꿈꾸고 있단다.
매운 업보를 치른 과메기들아. 주검이 되어서도 뜬눈으로 용맹정진 하였고, 육신을 버리고 정신을 구하는 수도승처럼 온몸을 보시하여 공덕을 쌓았으니 좋은 인연으로 다시 태여 나길 기원한다. 나는 젓가락으로 또 한 조각의 살점을 집어 입에 넣는다. 부디 내 속에 들어가서 절집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처럼 내가 방일하고 나태할 때 댕그랑댕그랑 맑은 소리로 나의 가슴을 깨워 주길 바란다.
덕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풍경들아. 과메기들아. 선술집 앞 붉은 가로등 위에 너희들의 꿈이었던 갈매기가 솟대처럼 서서 밤하늘의 먼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구나, 과메기야, 꽁치과메기야. 공덕과메기야.
/김인호
*꽁치과메기: 동해지방에서 꽁치를 덕장에 널어 해풍에 얼 말린 것
"난생 처음 경험하는 뜨거운 전율" 김인호씨 당선소감
절집을 나왔다. 매운바람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추위에 내몰리어 산길을 종종걸음 치던 내 발길을 묶는 것이 있었다. 한겨울 냉기를 뚫고 가늘고 긴 가지 끝에 진달래 봉오리가 봉긋 솟아나 있었다. 그것은 흡사 성냥개비 끝에 붙어서 점화를 기다리는 빨간 화약처럼 보였다.
그 탱글탱글한 봉오리는 햇볕이 대지를 스치는 어느 날 성냥불이 일 듯 일순간에 붉은 꽃을 피울 것이다. 뿌리는 지금도 그 순간을 위해 부단히 어둡고 차가운 땅을 헤집고 있을 것이다. 느닷없이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언제 저렇게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있었는가.
내 언제 저만큼 글에 혼신의 힘을 쏟아 보았는가. 대상에 끊임없이 매달려서 종국에는 아름다운 작품의 꽃을 피우고 마는 열정적인 정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정신이요, 수필정신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못한 나는 공연히 꽃봉오리 보기가 민망했다. 그러고도 은근히 신춘문예에 당선을 기대하며 염치없이 부처님과 아버지 영정에 넙죽넙죽 절을 올렸다.
절집에 모셔둔 영정은 재가 덮여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하얀 수건으로 그 얼룩을 말끔히 지웠다. 반질반질해진 유리액자에 아버지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얼마 전 꿈속에서 아버지는 저 얼굴로 나를 빤히 들여다보시더니 발을 돌려 총총히 현관문으로 사라지셨다.
무언가 한 마디쯤하고 싶으신 듯 보였다. 어머니를 잘 모시라는 말씀이었을까. 삶을 열심히 살라는 말씀이었을까. 그렇게 아버지를 뵙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당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식구들은 전화 받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고 했다. 사실 그것은 난생처음으로 경험하는 뜨거운 전율이었다. 나는 이 전율을 내 문학정신에 깊이 심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선 아직 여물지 않은 글을 뽑아주신 전북일보사와 심사위원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늘 문학정신을 일깨워주시는 선생님과 동서문예 문우들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고 싶다.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 나영, 나경 두 딸에게도 이 기쁨을 전한다. 당선패를 받으면 다시 아버지를 찾아뵈어야겠다.
<김인호 약력>
1958년 부산출생
한국방송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수필과 비평’ 2003년 등단
심사평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이 적지 않았지만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서 읽는 재미와 고르는 어려움을 함께 겪어야 했다. 대부분 중·장년들의 작품이어선지 다양한 제재 속에 만만찮은 사색의 깊이를 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일상에 대한 겸허한 반성, 가족·이웃간의 사랑, 사물에 대한 진지한 성찰 등의 내용을 산문 형식 속에 담는 방식도 다양하게 구사되어 있었다.
먼저 십여 편을 골랐다. ‘어머니에게 못한 이 편지를’(이한교), ‘눈으로’(정병율), ‘달팽이 소리 지르다’(김경순), ‘문’(김윤선), ‘꽁치’(이경임), ‘옹기가 있는 풍경’(모임득), ‘길 위의 사람들’(곽흥렬), ‘벽’(김정임), ‘숲으로 가는 길’(박선희), ‘두절이 소통이다’(김한수), ‘민들레족’(옥남), ‘네가 과메기로구나’(김인호) 등은 나름의 개성과 묘미를 갖춘 수준작들이었다. 소재를 주제로 구현해 가는 솜씨, 울림의 크기, 내용과 형식의 조화, 문장에 깃든 향취 등을 염두에 두고 다음 다섯 편을 다시 읽었다.
‘벽’은 자연스러운 문장과 무리 없는 짜임이라는 미덕을 지녔지만 울림이 적은 것이 아쉬웠고, ‘숲으로 가는 길’은 아버지에 대한 애잔한 연민은 담담하게 잘 녹아 있지만 약간의 군더더기들이 전체적으로 구성의 긴장도를 느슨하게 하였다. ‘두절이 소통이다’는 정확하고 예리한 논지 속에 작가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살아있는, 그래서 에세이 성격이 강했으나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전체적으로 메마르고 딱딱하였다.
‘민들레족’은 우연한 일상 경험을 주제로 다듬어가는 짜임새가 돋보이고 무엇보다 잘 다듬어진 문장 속에 큰 울림을 담고 있어서 여운이 깊었다. ‘네가 과메기로구나’는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탁월하고 그 관찰의 결과를 자신의 삶과 일상에 대한 성찰로 연결하는 솜씨도 남달랐으며, 그것을 담아내는 문장도 재치와 운치 사이를 넘나들면서도 도를 넘지 않는 절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읽혔다.
‘민들레족’과 ‘네가 과메기로구나’는 공히 당선작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되었으나, 한 편을 고르는 책무 때문에 결국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더 높다고 판단되는 후자를 뽑았다. 이 작품 외에 함께 응모된 같은 작가의 다른 두 편의 수필이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면서도 모두 일정한 품격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리하면서도 여유로운 이 작가의 미덕이 한결 미더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사위원
임명진(전북대 교수, 문학평론가)
첫댓글 늘 이렇게 발빠른 정보를 주셔서 뭐라 감사를 드려야할지 ... 복 많이 받으세요.
심미성님! 궁금하던차 잘 읽었읍니다. 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