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장이 이 규빗, 광이 일 규빗,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24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르고 25그 사면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고 그 턱 주위에 금으로 테를 만들고 |
26그것을 위하여 금고리 넷을 만들어 그 네 발위 네 모퉁이에 달되 27턱 곁에 달라 이는 상 멜 채를 꿸 곳이며 28또 조각목으로 그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라 상을 이것으로 멜 것이니라 29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찌며 30상 위에 진설병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찌니라 (출 25:23-30) |
진설병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공급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과 긍휼 안에서 어떻게 자라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그림 중에 하나이다.
진설대의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었고 정금으로 입혔으며 장이 이규빗, 광이 일규빗, 고가 일규빗 반이다.
“광이 일규빗”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장이 이규빗”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무엇이든 그분의 간증을 지키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맹세한 것과 같다 (히 6:13-15).
“고가 일규빗 반”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실 때 우리의 높이의 수준에 맞추심을 의미한다. 반면에 우리는 생명안에서 우리의 성숙의 정도에 따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해야 한다. 진설대의 높이는 언약궤의 높이와 같다.
손바닥 넓이만한 턱
1.턱(frame)의 위치
진설대의 상 주위 사면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frame)” 이 있다 (출 25:25). 성경 학자들은 턱의 모양에 관해 세가지 종류의 의견이 있다.
대부분의 성경 학자들은 처음 두 종류의 모양의 진설대에 동의한다.
턱은 그리스도의 생명 공급인 진설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케일(Keil)과 델리치(Delitzsch), 두 사람은 세 번째 모양의 진설대에 동의한다. 턱이 상 밑에 있어서 운반을 보조하기 위함이다. 채를 끼우는 고리들이 턱에 가깝게 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7). 이것은 매우 흥미롭고 합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테들 (crowns, moldings)은 복수이다. 하나는 상 (table) 주위에 금 테를 만들고, 또 다른 하나는 턱 주위에 금 테를 만든다 (24, 25).
2. 테들 (crowns): 하나님은 그분의 경륜에 따라 우리에게 무한한 은혜를 공급하심
테는 권위와 경륜을 가리킨다. 정금으로 만든 테는 하나님이 그분의 경륜에 있어서 우리에게 어떻게 공급하시는 가를 보여준다.
두개의 테가 왜 있고 어떤 방향으로 테들이 향하고 있는가? 원칙상 테들은 하늘로 향하고 있을 것이 가장 상식적이다. 하지만 진설대의 상(table:하나님을 상징함) 가장자리에 있는 테(crown)는 아래 방향으로 향하며, 턱(frame:우리를 상징함) 가장자리에 있는 테는 위로 향하여 둘이 연결된다고 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영적 해석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두개의 테를 통해서 연결된다.
이 그림보다 살아있고, 효과적이며, 은혜롭고, 긍휼이 넘치는 그림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은혜안에 있는 경륜에 따라서 공급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신실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의 공급을 받아야 한다. 고라 자손이 시편 85편에서”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라고 말한다 (10-11).
3. 손바닥 넓이의 척량: 우리의 분량을 증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진설대의 턱은 “손바닥 넓이”의 척량이다. 이 “손바닥 넓이”의 척량은 하나님이 사람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이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것은 매우 심오하다. “손”이란 단어는 구약에서 분깃에 사용되었다. 특히 히브리 단어인 “손바닥 넓이”는 하나님의 일(work)의 척량에 특별하게 사용된다 (겔 40:1-5).
진설대의 측량할 수 없는 공급, 즉 신성한 생명의 풍성한 공급은 전적으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그릇의 분량과 관련된다. 하나님의 공급은 항상 있다. 그것은 항상 새롭고 우리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상 주위에 손바닥 넓이만한 턱이 밑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우리를 축복하심을 가리킨다.
우리(턱)가 자라면 척량하는 치수도 함께 자란다. 이런 성장이 테의 증가와 확장이다. 턱으로부터 테가 자람으로 상에서 산출된 테와 만나게 된다. 턱에서 산출된 우리의 테는 매우 작다. 하나님의 돕는 은혜는 그만큼 멀리 간다. 그러나 “손바닥 넓이”에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생명 전체에까지 자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생명의 성장은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척량에 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4. “한 손바닥 넓이”의 목적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기 위함이다.
“한 손바닥 넓이”의 척량은 에스겔 40장 5절에 사용되었다. 성전이 마침내 성읍처럼 건축되었을 때 “한 규빗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과 한 손바닥 넓이”로 측량되었다. 이것은 “한 손바닥 넓이”의 척량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달리 말해서 그분의 척량은 교회를 건축하는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유기적으로 건축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놀랍고 하늘에 속한 측량이다!
우리는 다음 두가지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한다.
첫째로 우리가 자라고 발전하여 온전케 된 만큼 주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어떤 영적인 것들을 사용할 수 없다.
둘째로 우리의 넓이가 자라면 자랄 수록 테도 함께 성장한다. 이것은 우리는 우리의 분량에 따라 주님의 생명 공급인 은혜를 더욱 누릴 수 있음을 가리킨다.
신성한 척량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고, 만족을 주며, 우리로 하여금 발전하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제한하고 금지시키며, 심지어 우리의 혼 생명과 자아에서 나온 모든 것을 없애신다. 결국 에스겔과 같이 우리는 신성한 강물에서 수영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도달한다. 에스겔 47장 5절에서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인가! 신성한 척량은 우리의 합당한 반응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척량할 때 우리는 결코 어떤 작은 신실함도 경시하면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보호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도 우리의 보호안에서 우리를 보호하셔야 한다.
5. 고리와 채: 하나님의 공급은 전진하는 사람을 위해 있음
진설대는 네개의 금고리가 있고 상을 운반할 두개의 채가 있다. 신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오직 전진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가리킨다.
진설병
5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 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
6.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7.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8. 항상 매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찌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9.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레24:5-9) |
1. 십분 이: 항상 여분이 있음을 계시함
레위기 24장은 매 떡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만들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척량의 “십분의 이(two tenths)”만큼의 양이다.
히브리 성경에서 “에바”라는 단어가 없다. 성경은 어떤 측량을 사용했는 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 당시에 에바로 측량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은 조심스럽게 “십분의 이” 대신에 “십분 이”라고 말하셨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십분 이”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 생명의 떡에 참예한다는 의미이다. 십분 이에는 많은 여분이 있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아무리 많고 풍족하게 누리고 만족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금 더, 조금 더! 너는 매우 잘 하고 있지만 조금 더”라고 말씀하신다.
2. 두 줄의 진설병: 교회 생활에서 우리의 합당한 위치를 배움
레위기 24장 6절은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라고 말한다. 주님은 어떻게 진설병을 진설해야 하는 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았다. 반대로 히브리 말은 떡을 상 위에 자유롭게 진설하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만약 떡을 진설대 위에 널려 놓은 다면 충분한 공간이 없을 것이다. 결국 모세와 아론은 두 줄로 한줄에 여섯씩 진설할 필요가 있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것이 우리의 체험이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사랑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누리고 심지어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생명 공급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항상 교회 생활(상:table)이 우리를 위해 크지 않다고 느꼈다.
우리는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고 이 부담을 실제로 적용하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한다. 또한 우리는 성경공부를 하기를 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가대를 조직해서 집회에서 활기 있는 생명을 주기위해 찬송을 인도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모든 부담들을 실현하기에 우리가 생명 떡으로 교회에서 공급할 만큼 충분한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우리는 심지어 주님 자신도 우리를 위하여 적절하지 않다고 느낀다. 우리는 그분을 접촉하고 영접하고 누리고 체험하고 심지어 여러 면에서 그분과의 교통에 참예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충분히 채우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형제들과 조화를 이루며, 동반자로써 배우고, 함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주님께 순수하고 순종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큰 “6”이라 할 지라도 우리의 척량은 “6”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족하는 것은 “두줄”이 되어야 함을 발견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합당한 성장은 우리를 자신의 개인주의에서, 천연적인 열심에서, 강한 욕구에서 나와야 한다. 합당한 교회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간증으로 발전되고, 우리의 생명이 자람으로 다른 형제들과 함께 건축된다.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자아 생명과 혼 생명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 생활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 자신과 주님의 간증과 교회에 축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떡 덩이 가운데 섞여 있기 때문이다.
3. 떡 열 둘: 그리스도와 교회가 우리의 완전한 만족이 됨
그리스도는 진설병, 생명의 떡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시길 원하신다. 레위기 24장은 진설병을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총 열 둘을 진설하라고 말한다. 열 둘은 영원 안에서 완전한 숫자이다. 완전함은 오늘날 그리스도와 교회에서 실제화 된다. 비록 우리가 진설병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누리지만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도 같은 풍성한 만족을 누린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이며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이 생명의 떡을 더욱 풍성하게 누린다.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개인적인 생활에서 “둘”의 간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산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교회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누림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누려야 한다.
구약에서 떡 열 둘은 주님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모든 필요를 채우셨음을 가리킨다. 오늘날 열 둘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완전한 만족임을 의미한다.
4. 진설병: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 중에 가장 거룩한 제물
레위기 24장 9절은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진설병이 화제라는 뜻이 아니다. 사실 진설병은 불로 구워서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안식일을 대치한 것이다 (레 24:8). 오래된 떡은 성소에서 꺼내서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다. 영적으로 우리는 어디가 “거룩한 곳”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진설병을 누리는 곳마다 거룩하다고 간증할 수 있다.
떡은 번제단에 태울 수 없었다. 제사장들이 먹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설병을 화제라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화제 중에서 “가장 거룩” 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정결한 유향을 진설병 매 줄 위에 둔다는 것은 우리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 공급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떡이 우리의 본질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부활 안에 있어야 한다. 이 부활 안에 있는 생명은 하나님 자신에게 가장 거룩한 화제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지루하고, 따분하며, 활기가 없이 종교적 절차에 따라 일을 해서는 안된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으로 생명의 떡을 누리고, 활력이 넘치고, 하늘에 속한 것을 누릴 준비하기 위해 항상 준비하며, 성도들의 제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야 한다. 동시에 진설병의 공급에 참예해야 한다.
이러한 삶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늘에 속하고 제사장의 영역에 있는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영역은 하나님이 공급에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움직임에 따라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갈망에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만족을 위해 산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화제로 간주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두종류의 화제를 본다. 번제단에서 불로 태워진 제물이 있다. 동시에 제사장으로 그리스도를 극도로 먹고 누리는 화제인 진설병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체험을 한다. 우리가 자신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우리를 불태우신다. 이것이 번제단에서의 화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제사장으로 살 때는 그리스도를 “거룩한 장소”에서 누리고 완전히 만족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고 그리스도가 넘쳐 흐르고 그리스도를 확대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만족할 때, 하나님은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화제인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5. 진설병과 함께 한 전제: 놀라운 만족의 순서
떡이 새로 바뀔 때 마다 아마도 전제가 함께 드렸을 것이다. 출애굽기 37장 1절은 “상 위의 기구 곧 대접과 숟가락과 잔과 붓는 병을 정금으로 만들었더라”고 말한다. “붓는 병”이 왜 있는가? 이것은 놀라운 순서이다.
1) 우리는 우리가 화제가 되도록 그리스도를 진설병으로 누린다.
2) 그리스도가 우리를 만족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제(drink offering)로서 우리의 최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 모두 서로 만족한다! 이것이 놀라운 진설병과 함께 한 전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