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
본문/요한복음14:1-6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떤 시인은 “모든 종류의 마지막은 각각의 죽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우리에게 묘한 감상을 줍니다. 우리가 학교 교정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수업을 했던 날을 연상해 봅시다. 또한 남자는 군대를 가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을 생각해 보고, 여자는 시집가기 전날 친정에서 보낸 마지막 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는 사랑하는 이들의 임종을 지키던 그 순간을 연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북구라파의 성자였던 오 할레스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이 아름답도록 기도하십시오.”
14장 전체 전개
본문 14장은 소위 다락방 강화 즉 예수님의 설교로 불리우는 요한13-17장 기사의 연속부분입니다. 그리고 좁게는 예수님의 고별설교에 해당되는 요한복음14-16장의 기사의 시작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이제 성자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여전하게 세상에 남아 세상의 핍박을 감수하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과 신약 시대의 전 성도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교훈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제14장의 첫 단락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 처소 예배에 대한 약속을 주시며 주님 자신이 천국 구권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신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게서 이러한 교훈을 주신 것은 가룟유다의 배신과 그리고 주님께서 곧 떠나시는 것을 예고하시고 그로 더불어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시면 안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요13:21-38) 의기소침해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먼저 예수님께서는 불안해 하는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위로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권면으로 교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결코 제자들과의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제자들 곁을 잠시 떠나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반드시 세상에 다시 오셔서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말한 도마의 질문(5절)이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한 말씀 곧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였는데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은 앞서 자신을 “양의 문”(요10:7-9)과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14절) 그리고 요한11:25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성과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함으로써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나아갈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직 예수님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것이 그 해답으로서 참 하나님이심과 참 인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천국 구원에 이를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절 한절 새기면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이제 곧 지상사명을 다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심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이 이제 비로소 주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들 곁을 떠나가실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은 지금까지 믿고 의지해 왔던 주님께서 자기들 곁을 떠나시게 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하게 되면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두려움과 불안,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심으로 다시 한번 그들에게 두려움을 떨치고 믿음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새겨야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힐 때가 한 두번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마다 흔히 “내게 좀더 많은 돈과 재물이 있다면 이러한 걱정 근심은 없었을 텐데”라고 말하는가 하면 또는
“내 지위가 좀더 높았더라면” 혹은
“좀더 건강만 하다면 아무런 염려도 없을거야”라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모든 근심과, 걱정 염려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방패를 얻기 위해 재물과 지위 등을 얻으려 그 귀한 인생을 헛된 곳에 쏟아 붓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나 소원 성취만 이루어지면 그 모든 염려와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리라는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 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많은 재물과 돈을 모으려는 소원이 성취되면 정말로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집니까? 또한 우리가 바라던 대로 높은 지위가 올라가면 그동안 우리들을 그토록 괴롭혀 오던 모든 염려와 불안 말끔하게 사라집니까? 오히려 재물이 모이면 그 재물을 관리하고 잃을까봐 새로운 염려와 걱정이 과중되는 것입니다.
또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일수록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낮은 지위에 있을빼도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국회 선거가 끝나고 보십시오, 얼마나 잡음이 많습니까? 그리고 다수당 더불어 민주당 국회의장을 선출하는데 그쪽 진영에서 일어나는 잡음을 보십시오, 자신을 분명히 친 이재명 계라고 자신하던 추미애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이재명계의 사람이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것을 보고 그쪽 진영에서 일어나고 잇는 잡음을 보시면 참으로 꼴사납습니다.
지금 한국 축구협회를 보십시오, 지난번 국가대표 감독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자기 마음대로 협회를 운영해 왔습니까? 그게 정몽규라하는 사람이 독재적인 운영 행태의 결말이었습니다. 그리고 23세이하 국가대표 감독인 황선홍에게 국대감 독대행에 맡겨가지고 일어난 일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온 체육계에서 그에게 사표를 내라고 직위에서 내려오라고 난리에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끝가지 그 자리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 사람을 보면 자리에 목숨을 건 마치 맞있는 음식을 탐하는 식탐예 절어있는 그런 사람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사람이 유치하고 더럽기 한량없이 보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겪으면서 그의 얼굴을 한번 보면 밥이 안넘어 갈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같은 보통인간으로서는 과히 상상할 수 없는 자리에 집착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절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의 약속을 믿으며 그분을 통해 오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룻기서에 보시면 모압에 이주해서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싹다 죽는 비극속에 다시 떡집이라는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 갈려고 하는데 모압 며느리 두 명 중에 룻이라는 이 며느리는 고향에 남아 좋은 남편감을 만나서 일생을 편안하게 잘 알아라 는 시어머니의 권고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비록 유상과 불신앙이 가득 찬 모양에서 태어난 룻이지만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남편을 만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비록 남편과 모든 가족의 남자들이 죽었지만 그래도 룻은 끝까지 남편의 가정과 남편의 가정이 섬기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이 선택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그리도르를 어떻게 믿고 따라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해답이 다 나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한 민족의 흥망성쇄를 주관하시고 한 인생의 생사화복을 결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주인이시기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의지하면 우리의 힘으로 막지 못하는 염려와 불안,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어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 홀로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명기30장15절의 말씀에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진정한 인생의 성공과 축복은 “이 세상의 모든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되기 위해 이땅의 그 어떤 것들만 쫓는 마치 불꽃을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주님을 굳게 믿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할 때에 빌립보서4:6-7절에서 하신 말씀처럼 아무것도 염려하지 몰가 오직 기도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을 더하여 주시리라는 그런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주려야 하겠습니다.
이 사실을 벧전1:5절에서 리얼하게 말씀하십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되 우리에게 그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시기 위하여 이땅에 인간을 몸을 입고 십자가에피흘려 대속의 길을 열어놓으신 그 주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길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익한 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지금 예수님이 살고 계시는 시대에는 구약시대의 성부하나님을 절대 주권자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보자로 오신 주님게서 동시에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유대인들 더 세부적으로 자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과 동등하게 자신을 믿으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가는 유익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로 나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심 많은 자들은 이 우주를 다스리는 절대자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님께로 가는 중보자이신 에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거절합니다. 유대교들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나기를 뭐라고 하셨습니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 하셨습니다.(마3:17) 그리고 변화 산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중에 완전히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났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모순입니다.
절대자는 인정하면서 그분께로 인도하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구원에 이를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절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성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결코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은 요한 17장에 예수님의 기도하신 기도가중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잘 이해해 주고 있습니다.(요17:5, 빌2:6)
”그리스도는 분래 근본 하나님의 존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분“이십니다.
그분은 위격에서는 성부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결국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한분인 하나님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분리할수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땅에 오셨고 그 뜻을 다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의 모든 인류의 운명을 십자가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때에 누구손에 심판이 달려 있는가 하면 이땅에 중보자로 죽으셨던 성자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이땅에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그분을 바로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은 독생자 예수님 뿐입니다. 본문 뒤에 있는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 외에 요한복음1:1절에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10: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히브리서1:3절에 독생자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더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의 관심
2-3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 집에 처소를 예비하러 가실것과 처소가 예비되면 그들을 영접하러 다시 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잘 보시면 이 말씀 안에 에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에 대한 말씀인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 안에 잇는 엄청난 복음 즉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재림에 대한 이해를 할뿐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완벽한 구속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즉 많은 성도들이 교리적 측면으로 십자가,부활,재림을 생각할 뿐입 그 이상의 의미와 은혜를 추구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심지어 이 말씀을 놓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이 말씀처럼 주님은 반드시 오신다고 했지, 그렇다면 주님은 언제 오실까?“라고 성경에 가르쳐주지 않는 주님의 재림날짜에만 신경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갖어야 할 부분은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부활하셔서 나에게 부활의 첫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사망 권세 깨뜨리시고 승리하신 부활을 찬미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 이땅에서 가장 큰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낳아주신 것 뿐이지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악한 부모들도 이땅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빌2: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들을 대속해주시기위한 속죄재물이 되기까지 사랑하신 그 주님의 사랑과 희생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오직 이땅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마치 이사야49:15절에서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말씀처럼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러한 끝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 독생자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을 마음속에 묵상하시고 우리에게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에
”주님,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기도할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주님의 관심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히13:5절을 마음에 새기시고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
6절에 본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의 말씀은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생명과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갈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통로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처러 확고부동한 주장의 말씀이 없습니다. 때문에 확고부동한 이 말씀앞에 올바르고 분명한 이해와 믿음으로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시대는 모름지기 포스터모더니즘이라고 합니다. 즉 이 말은 후기 근대 현대주의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근대주의의 모든 특징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근대주의의 특징은 바로 진리나 가치의 절대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을 엎어버립니다.
예컨대 근대 물리학은 뉴톤의 물리학이 기초로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에서 출발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이러한 절대개념을 부정하고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문학 예술 그리고 신앙의 세계에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절대성을 강조하면 마치 시대착오적인 잘못된 인간으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적대적 가치는 상대성과 다원성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아무리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통하여 절대성을 부정하고 상대성만 인정하고 다원화를 부르짖어도 부정될수 없는 가치와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는 영적 세계에서 놓쳐서는 안될 진리입니다.
그레서 종교의 세계에도 절대성을 부정하고 다원화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절대성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신학교 교수들에게 이런 사상을 가지고 가르친다면 더 이상 우리는 신학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우리를 낳은 어머니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이게 맞는 말입니까? 남편과 아내가 둘일 수 있습니까? 이것은 절대적인 가치와 사실 아닙니까? 그러나 종교다원 주의 자들은 타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장점을 인정할수 있는 마음은 있어야지만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에는 졀코 놀아나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경을 읽어보시면
나는 그리스도 외에 여러 아들이 있어서 그들을 통해서도 천국에 올수 있다 라고 말씀하신 적인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가지 세상의 가치관과 사고의 기준을 좇아 각자 다른 목소리로 그 모양을 흉태태어 진리를 외치던 모든 종교와 모든 사람들은 이제 참 진리를 알고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중보자 예수님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늘의 별들은 많지만 이땅에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태양은 오직 하나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한분 세상의 빛되시고 길과 진리과 생명되시는 예수님 한뿐이십니다.
사도행전4:12절에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갈1:7절에도 도장찍듯이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좀더 심층적으로 연구하자면
첫째로, 영원한 처소가 예비되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죽음 저 건너편에 주게서 예비하신 놀라운 처소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수가 있습니다.
천국은 분명한 하나의 처소입니다. 본문 2-3절에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오래전에 미국이나 한국의 천국에 대한 인식중에 천국을 믿고 있는 사람이 꽤 높았습니다. 80%였습니다. 그러나 오랜후에 삶의 편해지고 이땅에 천국인양 잘 살다보니까 천국에 대한 확신이 엄청 많이 줄여들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천국을 믿는 신앙을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비하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이 기복신앙에 빠져버린 이류는 사실은 천국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축복에만 너무 매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내세를 믿는다면, 주께서 나는 위해서 죽음 저 건너편에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처소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놀랍고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의 유치한 축복들에 그렇게 매달리며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럽고도 정의로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할 때 현재의 삶은 좀더 의연하고, 좀더 자유롭고 좀더 당당하게 변화될수 있을 것입니다.
”최대의 저주는 내일이 없는 삶“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시집가는 여자분이 결혼 생활에 대한 기대가 전쳐 없이 예식장에 선다면, 그 결혼의 자리는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자리있습니까? 그곳은 무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진학이나 내일에 대한 굼이 없다면 그 졸업식은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의 입구에는 ”일체의 희망을 버리라“라는 푯말이 붙여 있다고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영원한 처소에 이르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슴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여섯 번째 ”나는 —이다.“(I AM)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게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길“이라는 단어 앞에는 하나박에 없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당시에 대단히 밝고 환한 큰 길을 말할 때 특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길을 묘사하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우리 말에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오솔길, 골목길, 자도, 대로(大路),고속도로 같은 것이 있고, 영어에는 path[pæθ, pɑːθ] n. (pl. ~s [pæðz, pæθs/pɑːðz])① 길, 작은 길, 보도(步道); 경주로; 통로)
alley[ǽli] n.① 《미국》 뒷골목(back-lane); 《영국》 좁은 길, 샛길,
road [roud] n.① 길, 도로; 가도, 공도; 가(街) 《도시 등의 가로의 명칭
way [wei] n.① 길, 도로, 통로, 진로.
street, [striːt] n.① 거리, 가로; …가(街), …거리《생략: St.》
avenue,[ǽvǝnjùː] n.① 가로수길.⟨SYN⟩ ⇨ROAD.
② 《영국》 (특히 대저택의 대문에서 현관까지의) 가로수길.
highway,[háiwèi] n.① 공도(公道), 간선 도로, 큰길, 한길, 하이웨이.
등이 있습니다. 하여간 헬라어의 이 ”길“은 아주 크고 밝은 길을 묘사할 때 쓰여지던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찬송가처럼 ”하늘가는 밝은 길“이시고 ”환한 길“되십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그 죄악의 수렁을 뛰어넘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그 사실을 성경 딤전2:5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자기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16:25절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그분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길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없으면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53:6절에 우리 인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리고 신약에서 로마서3;12절에 비슷하게 인간의 모습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이런 방황하는 인생 여정속에서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우리 나그네 인생길에서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인생길의 안내자가 되시고 길자체가 되셔서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신다는 놀라운 축복의 선언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우리가 길을 갈 때 간혹 길거리에서 헤메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묻습니다. 어디를 가십니까? 그러자 그분은 목적지를 이야기 하는데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저를 따라오시지요? 하면서 그분은 목적지로 인도한 적이 가끔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영원한 비전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천국가는 길도 인도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그분이 없는 우리의 삶은 어둠일수박에 없습니다. 그분이 없는 우리의 거짓의 아비인 사단에게 묶인바 되어, 세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길이되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리이십니다.
”나는 진리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천국도 진리의 나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게시록21장에 마지막 구절에 천국을 다음과 같이 모샤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27절)
일체의 죄악이나 오류가 천국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나라요, 진리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 진리의 나라에 들어갈수 있도록 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죄를 이길수 있는 능력가지 주시는 거룩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8: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8:36절에서,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고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이다.“
그분이 없는 우리의 삶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계시록3:1절에 아시아 7교회 중에 사데 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가?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현대인의 권태, 살아도 재미가 없고 그 삶이 권태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삶속에 지정한 생명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이 ”생명“이라는 단어는 본래 질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생명은 시간적으로 무한한 영원한 생명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없으면 재물을 모아도, 명예를 쥐어도, 남들보다, 무언가를 더 많이 갖춰도, 삶은 끝없는 권태요, 허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 손에 쥐어 봤습니다. 그러나 자기 인생의 석양에 서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업습니다.
전도서1:2절에,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러한 우리 인생을 향해 주님은 친히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0: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바로 져와 여러분들에게 이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삶이 무력하고 권태로운 인생 속에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 발버둥치며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환자실을 가보십시오,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인생이 아무리 건강하고 재력가라고 할찌라도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은 죽은사람과 실상은 같습니다. 요한복음10:10절에 말씀처러 주님은 ”우리에게 목자가되시어 생명을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링 인생의 진정한 ”생명“이시라고 합니다.
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는 영원한 미래를 향한 확신을 가질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이 엄청난 희생을 대신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과거를 다 청산해 버리고, 새로운 삶을 누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천국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게서 친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0:28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 영생의 나라! 예수님께서는 그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이다.!“
우리를 위해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신 그 주님이 바로 그 영원한 처소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한 걸음 더 아나가서 본문의 메시지는 그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서도 우리의 길이요, 우리의 진리요, 우리의 생명이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한 처소에 이르게 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여기 내 삶에서도 그리스도가 여전히 진리요, 나이 생명이심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근심하십니까? 이 말씀앞에서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염려는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 전체를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새겨 넣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읽겠습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주님이 없으면 저희는 방황과 어두움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생명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 풍성한 삶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 드립니다. 이제 저희들은 더욱 새로운 하루하루를 살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겉은 이 한 걸음 한 걸음은 생명의 걸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길 이십니다. 진리 이십니다. 그리고 풍성한 생명의 길 이십니다. 그리고 이 길을 끝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품이 있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이제 삶속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일에 일히일비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게서 저희의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말씀앞에 늘 순종하게 하옵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