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닮기 2
용서
마 18;21-35.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예수님처럼 용서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중에 중요한 영은 용서의 영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용서에 대하여 유명한 이야기가 오고 간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하여 주는 것도 대단하다고 으시대면서 물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면 숫자적으로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의사들은 한번 밥을 입에 물고 50번 씹으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위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소화시키기에 위가 건강하여지고 소화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50번을 씹어 보았습니다. 50번 씹기전에 밥은 이미 가루가 되어 다 넘어간 상태입니다.
용서는 용서될 때까지 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어떤 사람도 용서하여야 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용서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를 베드로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어떤 주인이 종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인에게 10,000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10,000 달란트는 33억원이나 되는 큰 돈입니다. 종은 그 돈을 도저히 갚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사정하였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주인에게 종이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안 갚아도 좋다고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종은 기뻐하면서 주인 앞에서 물러 갔습니다. 나가다가 문 앞에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100 데나리온은 500만원 정도입니다. 그는 목을 움켜쥐고 빚을 갚으라고 다구쳤습니다. 그 사람은 종에게 사정하였습니다.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자기가 주인에게 하였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주인은 자기의 엄청난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 데 그는 자기에게 빚진 자를 빚을 갚지 못 한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를 보다 못 한 종들이 주인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주인은 빚을 탕감하여 준 종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2-33)
그리고 그를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10,000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지옥갈 영혼을 천국으로 가게 하여 주셨습니다. 가장 큰 탕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속에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큰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다. 그런에 우리는‘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이는 용서를 주어야 합니다. 큰 용서를 받고도 작은 용서를 베풀지 못한 종은 자신의 용서받은 것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주기도문에서 기도하는 것처럼‘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어야 합니다.
2. 우리는 큰 용서를 받아야 하니까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원죄를 용서받았으나 자범죄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원죄도 크지만 자범죄는 많습니다. 육은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혼은 사랑을 먹어야 하고 영은 용서를 먹어야 합니다. 원죄가 10,000 달란트라면 자범죄는 100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받아야 할 우리이므로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3. 용서하는 자가 용서받는 자보다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검은 것을 묻히려는 자는 자기부터 시커멓게 되고 맙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매를 맞고 사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동네 아이들이 자기를 때리지 못 할가 묘안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자기 몸에 다이나마이트를 감고 나타났습니다. 만일 아이들이 때리면 다이나마이트가 터져 모두가 죽게 됩니다. 박살이 날 지경입니다. 아이들은 때리지 않으면 그 뿐이라고 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늘 고통스럽고 언제나 불안하였습니다. 이렇듯 남에게 피해를 주며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는 본인이 당하게 됩니다.
낙타와 사자가 소를 서로 잡아 먹겠다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양보도 타협도 없는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사자는 소꼬리를 물고 늘어졌습니다. 낙타는 소의 목을 물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여우는 우유를 빨아 먹고 있었습니다.
싸우면 서로가 손해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서로 괴롭습니다. 우리는 용서해야 하고 용서도
받아야 합니다.
요셉은 종살이 중에도 형들에게 결코 원한을 품거나 악한 마음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살이 중에도 자기를 억울하게 감옥에 보낸 보디발의 아내를 향하여 칼을 갈지 아니하였습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에도“나를 팔아 넘긴 자들을 당장 대령시켜라”“나를 억울하게 감옥살이 시킨 그 여자를 당장 잡아 오너라”하고 호령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를 용서했고 전부를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이 축복받았다는 이야기는 천지창조 이야기보다 길게 나오지만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가 축복받았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조금도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국 웰링턴 장군이 구제불능인 병사 하나를 사형시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가르쳐 보려고 했다. 징계도 하여 보았고 때려 보기도 하고 심지어 감옥에도 넣어보기도 했다.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너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사형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형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그 병사의 친구가 갑자기 그 곳에 뛰어 들어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은 물론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장군님이 저 병사에게 안한 것이 꼭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저 친구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친구의 말에 장군은 감동을 받아 사형을 취소하고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용서한다. 내가 조건없이 너를 용서한다.
그 다음부터 이 병사는 완전히 달라져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용서받은 사람이 알려진 것이 아니라 용서한 웰링톤 장군이 더 알려 졌습니다. 용서하면 용서하는 자가 더 위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하여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4. 내가 용서하면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의 심정을 알게 됩니다.
주면서 아는 것입니다. 아프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사랑을 줌으로서 사랑을 배우게 되며 용서를 함으로서 용서를 알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을 얼마나 사랑할까요? 이것은 논리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범주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연구를 통해서도 다 파악해내기가 어렵습니다. 상상을 한다고 해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방법이 있으니 부모가 되어 보면 금방 부모의 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에게 영광입니까?
1. 용서하는 자기에게 영광입니다.
2. 용서받는 이에게 영광입니다.
3.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펜실바니아에 피터 밀러라는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온 교우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 이웃에 교회를 핍박하고 목사님을 헐뜯고 모욕하는 악질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살인죄를 짓고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이 소식을 듣고 60마일 약 100 km나 되는 먼 곳을 걸어 갔습니다. 워싱톤 장군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사형을 면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끈질긴 요청에 목사님에게 워싱톤이 물었습니다.
“왜 살려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목사님이 대답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나의 가장 큰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동을 받고 사면장을 써주었습니다. 목사님은 15 마일 약 23 km 떨어진 사형 집행장까지 뛰었습니다. 마침 교수대에 묶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보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 늙은 목사가 내가 교수형을 당하는 꼴을 보고 기뻐하려고 오는구나!”
목사님은 사명장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목사님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사면장을 보여주며 악질 원수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목사님과 교회와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용서하니까 자기에게도, 용서받는 이에게도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한 말은 진실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19;11)
용서하는 방법
그러면 용서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1. 이해가 용서입니다.
이해라는 영어는‘under stand’입니다. 즉 밑에 서보는 것이 이해입니다. 용서는 오해가 아니라 이해며, 용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한 명이 연필 깍는 데 걸리는 시간이 1분이라면 60명이 깍으면 1초면 됩니까?
전기선에 참새가 열 마리 앉아 있습니다. 총으로 한 마리를 쏘았습니다. 그러면 9마리가 남아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실제로는 틀립니다. 그 사람처럼 그 일을 당하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하면 안 됩니다.
미국에 자동차 사업을 일으킨 찰스 키터링은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이었습니다. 83세 생일 때 그의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연구를 중단하고 쉬십시오.”
이 말을 듣고 키터링이 말했습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흉하게 늙는다. 나는 항상 미래를 바라본다.”
사람들은 늙으면서도 건강하고 우아하게 늙고 싶어 합니다. 그러려면 세 가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1.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2. 무슨 일에나 함부로 참견하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3.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남을 헐뜯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사람을 흉하게 늙게 하는 5가지 독약이 있습니다.
1. 불평, 2. 의심, 3. 절망, 4. 경쟁, 5. 공포 이 5가지의 독약이 많을수록 노년의 얼굴은 심하게 늙어갑니다.
반대로 사람을 우아하게 만드는 5가지 묘약이 있습니다.
1. 사랑, 2. 여유, 3. 용서, 4. 아량, 5. 부드러움입니다.
용서하는 이는 늘 여유가 있고 너그러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게 됩니다.
2. 사랑이 용서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웁니다. 사랑을 하는데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중국에 나이많은 황제가 있었습니다. 황제는 이웃 나라를 모두 섬멸하고 정복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적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포로들과 적들과 같이 식사도하고 농담도 하고 즐겁게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황제 폐하! 폐하는 적들을 섬멸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모두 섬멸하였다. 다 용서하고 다 친구로 만들었기에 적이 없어졌다.”
사랑이 용서입니다.
어느 남자가 교회에 들어와 강대상을 때려 부수었습니다. 나쁘지요. 그러나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를 이해하려고 하니까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들에 나가 새벽부터 일하는 데 때가 훨씬 넘어도 아내가 밥을 가져 오지 않았습니다. 참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찾으러 와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교회 강대상 아래에서 “주여.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나이다”하며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대상을 홧김에 부수어 버렸습니다. 남자도 나쁘지만 여자는 더 나쁩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남편 밥도 주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나는 그 남자를 이해하고 사랑하니까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를 이해하고 사랑하면 모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해와 사랑이 용서입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두 여자가 출연하였습니다. 사실은 원수지간입니다. 한 여자가 알콜 중독자로 운전을 하다가 마주 앉아 있는 다른 여인의 딸을 치어 죽게 하였습니다. 가해자 여자는 딸을 셋 두었습니다. 딸을 죽였지만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오히려 술을 끊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주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여야 합니다. 나는 내 딸을 치어 죽인 저 여자를 용서함으로 주님의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나는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눌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용서입니다.
3. 기도가 용서입니다.
기도를 하면 용서의 힘이 샘솟듯 솟아 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 랍비 요세 벤 하니나(Jose Ben Hanina)는 “자기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는 데 세 번이 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랍비 요세 벤 에후다(Jose Ben Jehuda)는 “사람이 한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한다. 사람이 두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한다. 사람이 세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한다. 그러나 네 번째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웃의 잘못에 대한 용서의 한계를 세 번으로 정한 것은 성경에 근거를 두었습니다 (암 1 : 3, 6, 9, 11, 13, 2:1, 4, 6)
그들은 아모스 선지자가 이스라엘 나라의 원수가 되는 완악한 족속들의 죄를 지적함에 있어서 “서너가지 죄”라고 한 것을 숫자상의 세 번, 네 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서너 번까지는 용서해 주시고 그 후에는 벌하시는데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더 관용을 베풀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 번까지는 용서하되 네 번째는 반드시 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 선지자가 말한 “서너가지 죄”는 일정한 고정된 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제한 없는 무한한 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도 돌이키지 않는 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형제가 죄를 범하면 첫째 단계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둘째 단계는 두 세 증인의 입으로 권면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단계는 교회에 말하라. 그러나 교회의 말도 듣지 않을 때에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 : 15-17)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형제에 대해 세 번만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자가 상호간에 윤리적으로 죄를 범했을 때 처음에는 조용히 타이르고 그래도 뉘우침이 없을 때는 두 세 증인을 통해 죄를 지적하고 깨닫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회개함이 없을 때는 주님이 피로 값주시고 사신 교회의 권면을 받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여기서도 불응하면 회개하기까지 교회 밖의 이방인과 세리로 취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서는 자에게는 수천 번일지라도 관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용서를 위한 기도를 빼지 말아야 합니다.
인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무저항주의자 간디가 20여세 때 변호사가 되어 남아프리카에 갔습니다. 어느날 일등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갑자기 백인 차장과 경관이 와서 발로 걷어 차고는 끌어 내렸습니다. 이유인즉 인도인과 유색인종은 백인들이 타는 일등차를 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간디는 민족적 서러움과 인종차별의 모욕을 참으며 이름도 없는 조그마한 역 대합실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백인들의 횡포에 대해 목숨을 걸고라도 투쟁하여 도전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 동안 갈등에 사로잡혀 고민하다가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아니다. 그들이 힘으로 나올 때 우리는 비폭력 무저항으로 나서야 한다.”
그 후 어느 날 또 다시 간디는 백인들의 폭력배들로부터 불시에 습격을 받아 폭행을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폭력배들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피해자인 간디는 원고(原告)로서 법정의 증언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많은 백성들과 여러 나라 기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까만 간디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 주위는 조용하고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이때 간디는 천천히 입을 열어 엄숙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한 가지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저기 앉아 있는 피고인들은 내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폭력을 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 사람들에게 아무런 원한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반드시 그들을 미워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미움은 미움에 의해서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미움은 미움이 없어질 때만이 풀리어 진다는 영원한 진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들의 석방을 즉시 요구합니다.”
이때 그 법정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까무잡잡한 피부의 간디에게 눈물과 동정을 보내었습니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으로 인도를 영국의 쇠사슬에서 독립시킨 민족적 영웅이 되었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지만 만약 우리가 형제의 잘못에 등을 돌리면 우리는 주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해가 용서입니다.
사랑이 용서입니다.
기도가 용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닮아가는 무리들입니다. 용서하여야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어느 아이가 옆집 소옆에서 놀다가 돌로 소를 맞추어 죽였습니다. 주인이 붙들어 경찰에 넘기려고 할 때 아버지가 와서 소값을 넉넉히 물어 주고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잘못 했어요. 용서하세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왜 야단치지 않으세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용서를 빌었으니 야단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닮아가야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이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나는 영어 공부를 CNN international Life 라는 책으로 하고 있습니다. 매달 미국에서 화재의 주인공을 한 명씩 선정하여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이번10월호 화재인물은 음악전자 회사 사장인 Hartley Peavey였습니다. 짧막한 기사였지만 내게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지금 그 회사에서 생산되는 전자 음악기기들은 일년에 3억 5천만불의 이익금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돈으로 약 3,000억원쯤 됩니다. 판매액이 아니라 이익금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간증이 있습니다.
피비는 집안이 어려워서 대학을 가지 못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면서 8,000불을 겨우 모아가지고 대학을 가라고 주었습니다. 피비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 돈으로 나는 대학에 가지 않고 인생의 승부를 걸어 보겠습니다.”
피비에게는 8,000불이 그루터기였습니다. 이 그루터기를 기여코 살리겠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 8,000불로 자기가 연구하여 음악에 사용하는 특수 앰프 한 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팔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두 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내다 팔았습니다. 작업장은 자기 방이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영업 사원 한 명을 고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월급 줄 돈이 없어서 앰프로 월급을 주었습니다.할 수 없이 그 사원을 그 앰프를 팔러 다녔습니다. 또 그렇게 하였습니다. 점점 판로가 개척되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늘어 났습니다. 피비는 아침 9시부터 밤 한시까지 쉬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드디어 작업장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지 지금 3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 최대의 음악기기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도 고생을 많이 하고 자라서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포용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터뷰하는 이가 물었습니다.
“어떤 때 제일 화가 납니까?”
“남을 용서하지 못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못 합니까?.”
“남을 용서하지 못 하는 사람들은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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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