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문갑식 선임기자
⊙ 박혁거세, 계림 근처 알에서 태어나
⊙ 역시 알에서 태어난 알영부인과 함께 ‘二賢’으로 추앙받아
⊙ 왕위를 양보한 김알지의 후손은 오랜 기다림 끝에 김씨 왕조 이끌어… 그 첫 번째 미추왕은 혼백마저 신라를 지키며 시조 박혁거세보다 더 높은 대접 받아
⊙ 김해는 신비로운 신화의 고장, 수로왕릉과 허황후릉이 지척
⊙ 인도에서 왔다는 허황후의 출신지는 중국이라는 說도
⊙ 가야는 망한 뒤 김무력·김서현·김유신·김원술 등 신라의 명장 잇달아 배출… 통일신라는 금관가야의 후손들이 만들었다
⊙ 이집트·로마·터키 못지않은 한민족 ‘왕가의 계곡’을 찾아보자
대한민국의 유래는 하늘(天)로부터 시작됐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첫 부분이다.
〈《위서(魏書)》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서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불렀으니 바로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다.”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환인(桓仁)의 서자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여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즉시 내려 보내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 그 당시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항상 기원했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가 이것을 먹되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이 내용은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다. 이것이 각종 시험에는 다음과 같이 출제된다. 첫째, 단군왕검이 나라를 연 시기가 중국 요 임금과 같으니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대등하다. 둘째, 아사달은 어딘지 알 수 없으나 북한 평양이라는 설(說)과 중국 랴오둥 지방의 자오양(朝陽)이라는 설이 있다. 후자의 경우 우리 역사의 무대는 만주가 된다.
셋째, 태백산을 두고 지금의 백두산, 혹은 강원도 태백산, 혹은 신화 속의 삼고산(三高山)이라는 설이 있다. 넷째, 앞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환웅이 각각 바람, 비, 구름을 관장하는 어른을 대동하고 땅으로 내려왔기에 당시 농경이 주된 생업임을 알 수 있다. 역시 인용하지는 않았으나 살인 등 여덟 가지를 금했기에(팔조금법) 법률이 정비된 사회였다.
다섯째, 호랑이와 곰은 이 동물을 숭상했던 토템 신앙의 소산이라는 것이 초·중·고등학교 시험에 출제된 내용의 전부다. 문제는 우리가 장구(長久)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지언정 이것이 결코 확인할 수 없는, 눈으로 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신화(神話)’라는 사실이다. 북한에 단군릉이 있다지만 진짜인지는 미지수다.
그런데 단군신화에 비슷하면서도 우리가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신화와 역사의 중간단계쯤 되는 현장이 이 땅에 두 군데 있다. 신라와 가야다. 고구려의 시조는 부여의 신화 속 인물의 아들이었기에 실재(實在)했다. 백제의 시조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기에 역시 실존했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전 지식을 가지고 경주(慶州)와 김해(金海)로 가 본다. 먼저 경주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권(卷) 제1 신라본기 제1은 이렇게 시작된다.
‘시조의 성은 박(朴)씨, 휘(諱)는 혁거세(赫居世)이다.’
옛 진한(辰韓) 땅에는 여섯 부족이 살았는데 그들은 지도자가 필요했다. 하루는 그들이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 근처 숲 사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가 보니 말은 간데없고 큰 알이 있었다. 그것을 깨어 보니 남자 어린 아이가 나왔다. 박혁거세다. 그로부터 5년 뒤 괴상한 일이 또 생겼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용(龍)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나 오른쪽 갈빗대에서 계집아이를 낳았다. 늙은 할멈이 아이를 데려가 키우고 그가 태어난 우물(알영)을 이름으로 삼았다. 시조(始祖·박혁거세)가 그를 비(妃)로 삼으니 사람들이 이현(二賢)이라 일렀다.〉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가 온 날 알영도 동시에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역시 용의 왼쪽 옆구리에서 나왔는데 특이한 것은 얼굴은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이를 월성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이 바가지처럼 생겼다고 해 성을 박(朴)이라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 가지다. 첫째는 정사(正史)라 할 《삼국사기》의 맨 첫 부분에 왜 박혁거세에 이어 알영이 등장했으며, 둘째, 알영이 박혁거세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뜻의 ‘이현’으로 평가됐느냐는 점이다. 셋째, 용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알영이 나왔다는 것은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다는 《구약성서》 창세기 부분과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이다.
![]() |
경주의 오릉은 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곳이다. 머리와 사지를 따로따로 묻어서 오릉이라고 한다. |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하회(下回)가 필요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박혁거세는 61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하늘로 올라갔는데 1주일 후 시신이 땅에 떨어졌고 왕후, 즉 알영부인도 곧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왕을 장사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다니며 방해하는 통에 머리와 사지(四肢)를 각각 제사지냈으니 이게 곧 오릉(五陵)이며 알영도 거기 함께 묻혔다.
박혁거세의 뒤는 태자 남해(南海)가 이었는데 여기도 설화가 있다. 처음에는 남해가 매부였던 석탈해(石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는데 탈해가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봅시다”라고 했다. 그래서 이빨 수를 세어 보니 남해가 더 많아 왕이 됐다. 남해는 정식 명칭이 ‘박노례이질금’, 달리는 유리왕 혹은 유례왕(儒禮王)이라 부른다.
그런데 박혁거세의 사위였던 석탈해 역시 출생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가락국, 즉 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 시절, 바다 한가운데서 홀연히 배가 출현했다. 수로왕이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북을 두드리며 그들을 맞이하려 했는데 웬일인지 배는 계림, 즉 경주 동쪽 아진포에 닿았다. 마침 포구에 박혁거세를 위해 고기를 잡는 노파 아진의선이 있었다.
배에는 까치들이 모여 있었고 길이 스무 자에 너비 열세 자가 되는 상자가 있었다. 아진의선이 잠시 후 열어 보니 남자 아이가 있었고 뒤이어 칠보(七寶)와 노비들이 쏟아졌다. 아이는 자신이 용성국(龍城國) 사람이며 원래 알에서 태어났는데 용성국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해 자신을 배에 실어 보내며 ‘아무 곳이나 인연이 있는 곳에 가서 살라’고 했다고 말했다.
![]() |
알영이 태어났다는 알영천이다. |
용성국은 왜, 즉 일본으로부터 동북쪽으로 1000리 지점에 있다는 섬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할린 근방일 것이다. 이 석탈해가 남해왕이 죽자 신라의 3대 왕으로 즉위했다. 놀라운 것은 석탈해가 왕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경주 월성(月城) 근처에서 박혁거세가 이 세상에 올 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석탈해가 가서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툭 튀어나왔기에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다. 왕이 알지를 대궐로 데려오는데 새와 짐승이 뒤따르면서 춤을 췄다. 석탈해는 알지가 금궤(金)에서 나왔다고 성을 김(金)으로 삼았다. 석탈해는 김알지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었던 파사 이사금에게 사양했다.
해서 석탈해 뒤는 4대 파사(婆娑) 이사금, 5대 지마(祇摩) 이사금, 6대 일성(逸聖) 이사금, 7대 아사달 이사금, 8대 벌휴 이사금, 9대 나탈 이사금, 10대 조분(助賁) 이사금, 11대 첨해 이사금처럼 박씨와 석씨가 번갈아 왕위를 잇다가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 이사금이 12대 왕에 올랐다. 4대 왕이 될 수 있었던 김알지 후손이 왕이 되는 데 9번을 기다린 것이다.
여기서 다시 《구약성서》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구절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으니 구도가 곧 미추의 아버지였다….〉 그렇다고 김씨가 왕위를 찬탈했던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첨해왕이 아들이 없어 국인(國人), 즉 백성들이 미추를 갖게 됐다고 했으니 김알지의 후손은 인심을 얻으며 세월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후 김씨는 다시 타성(他姓)에게 세 차례 왕위를 내줬다가 내물왕 대에 이르러 멸망할 때까지 김씨 왕조를 이어 간다. 이런 역사상 기록이 마치 신화 속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경주(慶州)에 가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경주 오릉 옆에는 숭덕전이라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신라시조 왕비 탄강(誕降) 유지(遺址)라는 팻말과 함께 샘이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미추왕은 신력(神力)이 대단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미추왕 다음에 왕에 오른 14대 유리왕 때 신라가 외적의 침공을 받아 고전할 때 홀연히 귀에 댓잎을 꽂은 군대, 즉 죽엽군(竹葉軍)이 나타나 적을 물리친 뒤 자취를 감췄다. 사람들이 찾아보니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아마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본 분들이 이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
수로왕의 역사를 담은 비석 |
미추왕은 삼국통일 후인 37대 혜공왕 때에도 등장한다. 서기 779년 갑자기 김유신 장군의 능에서 회오리바람과 함께 장군과 같은 위용을 지닌 사람이 준마(駿馬)를 타고 나오니 뒤이어 마흔 명가량의 군사가 줄을 이어 미추왕의 죽현릉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두려워 들어보니 김유신 장군의 혼백이 미추왕에게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신(김유신)은 평생을 시대의 환란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어 통일을 이룩한 공이 있사온대 지난 경술년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으려 하니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이에 미추왕의 혼백이 답했다. “나와 공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 되겠는가. 공은 예전처럼 힘써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의 세 번에 걸친 청을 미추왕이 세 번 모두 거절하자 비로소 회오리바람이 멈췄다. 이 소식을 들은 혜공왕은 즉시 신하를 김유신의 무덤에 보내 사과하고 취선사라는 절에 땅을 하사했다. 취선사는 김유신이 평양을 정복한 후 세운 절이다. 또 미추왕의 제사 차례가 이때부터 오릉보다 위에 올랐으며 사람들은 미추왕릉을 대묘(大廟)라고 불렀다고 한다.
신라 초기사를 보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박혁거세와 함께 알영을 이현으로 숭앙할 정도라면 당시 여권(女權)이 꽤 강했다는 뜻이며 세 성씨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지 않고 비교적 평화적으로 정권, 즉 왕위를 교체했다는 것은 당시 신라사회가 합의에 바탕을 둔 나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혁거세와 알영의 관계는 가야에서도 재현된다.
![]() |
수로왕이 하늘에서 왔다는 구지봉이다. |
부산에서 서진(西進)하면 김해가 나오고 김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 진영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나지막한 산이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그곳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구간(九干)이라 불리는 아홉 명의 추장들이 7만5000명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는데 거북이와 알 여섯 개가 원형을 이루는 형상인 구지봉(龜旨峯)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사람들이 있는가?”
구간이 답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이 말했다. “구지봉입니다.”
“하늘이 내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온 것이다. 너희들이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내면서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이 기뻐 춤추게 되리라.”
구간들이 시킨 대로 하자 하늘에서 자줏빛 새끼줄이 내려왔다. 그 끝에는 붉은색 보자기로 싼 금합(金盒)이 있었다. 그것을 열어 보니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다. 12일이 지나고 보니 알은 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나날이 자라 열흘 지나자 키가 아홉자로 모습이 은나라의 탕왕 같았고 얼굴은 용 같아 한나라 고조를 닮았으며 눈썹의 여덟 색채가 요임금과 같았다.
![]() |
수로왕릉의 입구인 가락루다. |
그달 보름에 즉위했는데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도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6가야의 시작이다. 여기서 앞서 등장했던 석탈해가 다시 나온다. 수로왕처럼 알에서 사람으로 변한 탈해는 바다에서 수로왕의 궁궐로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왕위를 빼앗으러 왔소이다.”
그러자 수로왕이 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왕위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명했으니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 너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 없고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도다.” 그러자 탈해는 “그대는 나와 술법을 겨룰 수 있소?”라고 도발해 오는 것이었다. 이에 수로왕은 “좋다”며 탈해와 술법을 겨루기 시작했다.
탈해가 매로 변하자 수로왕은 독수리가 됐고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수로왕은 새매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에 탈해가 말했다. “제가 매가 되자 독수리가 되었고 참새가 되자 새매가 되었는데도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인께서 저의 죽음을 원치 않는 인(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고는 계림 땅 경계로 도망쳐 버렸다.
![]() |
허황후 상. |
수로왕이 배필을 맞는 과정이 박혁거세보다 더 신비롭다. 수로왕은 자신들의 딸 중에서 제일 훌륭한 처자를 뽑자는 신하들의 말에 “왕후를 맞는 것 역시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라며 망산도(望山島)로 부하들을 보냈다. 그런데 홀연히 서남쪽 바다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육지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수로왕이 해안가로 달려갔다. 신하들이 배에서 내린 아리따운 왕후를 궁궐로 모시려 하자 왕후는 “나는 그대들과 평소에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수로왕은 옳다고 여겨 대궐 아래 60보쯤에서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그러자 왕후는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오는 것이었다.
![]() |
김해에 있는 수로왕릉이다. |
왕후는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고 신하 20명을 대동했는데 각종 비단과 금은, 구슬과 옥, 장신구 등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오자 왕후가 비로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許)씨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본국에 있던 금년 5월에 부왕과 왕후가 저를 보고 말하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똑같이 꿈속에서 상제(上帝)를 보았다. 상제께서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왕이 되게 한 신성한 사람으로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그곳으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신선이 먹는 대추를 구하고 하늘로 가서 선계(仙界)의 복숭아를 좇으며 반듯한 이마를 갖추어 이제야 감히 임금의 용안을 뵙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이 결혼해 141년을 함께 살았다. 서기 189년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그때 나이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왕후가 가락국에 처음 와서 닿은 도두촌을 주포촌이라 부르고 비단바지를 벗은 언덕을 능현이라 했으며 붉은 깃발이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불렀다.
![]() |
구지봉 쪽에서 바라본 허황후릉이다. |
이런 역사를 지닌 가야는 9대 구형왕 때까지 존속했으나 이내 신라에 병합됐다. 그런데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아들인 김무력은 신라의 장군이 돼 백제 성왕을 관산성 전투에서 죽였고 그 아들인 김서현은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 등에서 승리했으며 김무력의 손자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어 18세에 국선(國仙)에 오른 뒤 문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주역이 됐다.
그런가 하면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한반도의 명운을 걸고 벌인 전쟁에서 마지막 결전장이 된 매초성 전투에서 당군 20만을 격파하는 데 공헌했다. 김유신의 경주 저택은 경주에 있는 39개 금입택(禁入宅) 가운데 으뜸이었다. 경주 최부자집 인근에는 김유신이 살던 재매정이라는 터가 지금도 보존돼 있다.
![]() |
김유신의 집이 있었다는 재매정터다. |
이집트 나일강 중류 룩소르의 서쪽 교외에 있는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왕릉이 집중된 좁고 긴 골짜기를 세계인들은 왕가(王家)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투트모세 1세부터 람세스 11세에 이르는 제18, 19, 20왕조의 거의 모든 왕들이 묻혀 있다. 최대 규모인 세티 1세의 능은 길이 100m이며 널길(羨道)과 널방(玄室)이 15개나 있다.
그곳은 1922년에 발굴된 제18왕조 투탕카멘 왕릉을 제외하고 모두 도굴당해 유물은 물론 왕의 미라조차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1995년 카이로에 있는 아메리카대학의 미국인 교수 켄트 위크스에 의해서 람세스 2세의 가족묘로 추정되는 거대한 묘를 발견하고 ‘5호고분’이라고 명명했다. 이 고분은 1820년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버튼이 발굴하다 실패한 것을 1910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가 다시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것으로, 10여 년의 발굴작업 끝에 위크스가 발견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로마에 가면 일곱 개의 언덕의 빼곡한 유적 밑에 유적이 켜켜히 쌓여 있으며 옛 페르시아의 왕조나 터키 지역에도 이런 왕가의 계곡들이 저마다 역사를 빛내고 있다. 그런데 등잔밑이 어둡다고 우리는 경주를 고교시절 수학여행이나 가는 곳으로 알고 있다. ‘경프리카’라는 말처럼 경주나 김해의 여름은 뜨겁다. 하지만 이런 신화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는 여정(旅程)은 한여름의 폭양(暴陽)보다 더 뜨거운 감동과 한민족에 대한 열렬한 자부심을 심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