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의 <성병에 걸리다> 감상 / 권순진
성병에 걸리다/ 유안진
하느님
저는 투명인간인가 봅니다
바로 앞 바로 옆에 있어도 없는 듯이 여깁니다
불쾌하고 기분 나빠
‘있다’고 ‘나’라고 주장하다가 지쳐 그만
성병(聲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초기 그리스도교도처럼
순교(殉敎)를 영광과 환희로 맞았던 초기기독교도처럼
명성을 영광과 환희로 맞이하고 싶은데
도저히 정복할 수 없어서 국교(國敎)로 삼아버린 로마제국처럼
제가 정복할 수 없는 명성(名聲)은
저의 종교가 되었나 봅니다
저의 하느님이 되었나 봅니다
정복할 수도 정복될 수도 없는
성병에 걸려서
스스로를 얼마나 속이며 기만했으며
꿈과 성병을 구별하지 못했던가를
선망과 조롱으로 우습게보았던 타인과 자신을
사람본래로 보게 눈 열어주십시오
죽는 순간까지도 해방될 수 없다는 그 성병을
저만은 반드시 살아서 고쳐서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 2009년 제7회《유심》작품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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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꼬질대 잘 못 놀리거나 냄비 함부로 굴리다 얻게 되는 몹쓸 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일이 ‘특별한’ 참석자를 소개하여 행사의 품격을 과시하고 그 손님들의 얼굴을 세워주는 일은 어느 행사장에서든 흔히 목격된다. 이럴 때 다른 사람은 다 소개하는데 자기만 빼먹는 것 같아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는 인사들을 더러 본다. 심지어는 소개 순서가 늦었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사람도 보았다. 백번 양보해서 내심 서운한 기분이야 들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대놓고 그걸 밖으로 드러낼 정도면 아무래도 ‘聲病’에 단단히 걸렸다고 해야겠다. 때로는 명예를 찾다가 되레 굴욕을 맛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행사인지는 몰라도 유안진 시인을 귀빈에서 배제시킬 정도이면 굵직굵직한 정치적인 이름을 가진 손님이 대거 참석한 행사였거나 단순한 사무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기도 했겠으나 시인의 평소 성품과 교양으로 미뤄보면 실은 손톱만큼도 내색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따위에 잠시 불쾌했던 자신을 가책한다. 그리고 한때 만해 한용운 선생께서 여기저기 강연과 축사 등에 불려 다니며 명성을 얻게 되자 ‘내가 드디어 聲病에 걸렸구나.’라고 탄식하고서 이후 일체 응하지 않았다는 일화를 떠올렸던 것이다. 이 시는 이 같은 명성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을 반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람의 욕구는 식욕, 성욕, 수면욕 등 생리적 본능 말고도 물욕이니 명예욕이니 하는 것도 있다. 놀부의 오장육부 옆에 심술보라는 장기가 붙어있듯이 남에게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장기 하나를 더 만들었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전쟁의 절반은 명예욕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명성과 자기 스스로를 알고 귀하게 여기려는 명예는 분명 다르다. 두리뭉실 묶어 그저 명성만을 탐하거나 무작정 선망 시기하며 남을 조롱하는 것도 성병의 한 증상이라 하겠다. ‘죽는 순간까지도 해방될 수 없다는 그 성병’만 잘 치유하고 살아도 한결 영육이 가뿐해질 텐데 누구라도 그게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 일찍이 공자도 허명을 경계하라고 말했다. 노자는 먹을수록 배가 고픈 것이 명예욕이라고 했다. 언젠가 한 시인으로부터 받은 명함의 이면에 ‘교과서 수록 시인’이란 문구가 있었다. 또 다른 한 시인은 자기 시집의 제목을 적고서 괄호에 ‘창비’를 넣었다. 나도 그 명함을 받고서야 그가 창비 씩이나 하는 출판사에서 발행한 시집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놀라워하지 않았고 약간 창피하기까지 했으며 여전히 나는 그 시인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오만상 나를 내세우지 못해 안달을 하지만 정말 나는 존재하는 것일까.
노자의 말씀을 다시 새긴다. “사람은 높이 오를수록 물러설 줄 알고, 낮은 곳에 있을 때일수록 두려움보다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높이 오르면 언젠가는 내려오게 되고, 낮은 곳에 있으면 언젠가는 그보다 높은 곳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명예를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물러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명예는 낮은 곳에 처할수록 더욱 높아지기 때문이다. 명예를 먹고 사는 지식인들이여, 그대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눈먼 소경과 다름없다. 명예는 먹을수록 배가 고플 뿐이다. 명예로 위만 커진 사람들은 결국허명으로 자신을 망친다. 명예도 적당히 먹고 배설하는 식습관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연의 생리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