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장산기행
김 학 수
*김학수(金學洙 :1891~1974). 본관은 광산, 字는 자헌(子憲), 호는 술암(述菴)이며, 단성(丹城) 가술(可述)*[현 산청군 신등면 가술리]에 거주하였다. 퇴촌(退村) 열(閱)의 후손으로 곽종석(郭鐘錫)의 문인이며, 어려서 천자영민(天資英敏)하여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다. 시국의 변난에 엄연히 대처하였으며 항상 유학의 본성을 지켜 사우(士友)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만년에 유교의 쇠퇴함을 탄식하면서 임거서당(林居書堂)을 세워 훈도하여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사후 제지들이 유계(儒契)를 조직하여 공(公)을 추모하고 있으며 문집 6권3책이 전한다.
■ 산행일자 : 1937년 8월 16일~8월 22일
■ 여로 및 산행코스 : 신등면 가술리→운령(정수산자락)→척지(둔철산자락)→경호강→산청읍→매촌리→수철리→외곡리→작은조개골→하봉→중봉→천왕봉→유평리→대원사→덕천서원→입석리(현재의 지명으로 추정하여 표기)
● 특징 : 근대의 기록물이지만 옛산행기로서는 유일하게 수철리에서 왕등재를 넘어 지리산을 찾은 흔적과, 독바위 양지마을을 상기할 수 있는 문장 및 쑥밭재(본문에서는 애전령"艾田嶺"으로 표기)의 어원을 정확하게 명기한 가치있는 산행기이다.
● 수록문집 : 술암유집(述菴遺集)
방장산(方丈山)은 남도의 진산(鎭山)이다. 그 산세는 서로 섞여 특출나고 빼어나며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버티고 있는데, 13개 읍 사이를 내달려서 백성들이 머물러 살 곳을 정하고 물품이 생산되는 것을 이루다 셀 수가 없음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은 그 뜻을 상세히 알 수 없고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부르는 것은 산맥이 백두산에서 흘러 왔기 때문이다. 그 가장 높은 봉우리는 천왕봉(天王峯)이다. 상고 시대부터 방장산이라는 이름이 삼신산(三神山) 사이에 나열되었으니 천하의 명산이다.
선배들이 노닐던 성대한 자취가 있는데다가 호사가들이 왕왕 그려내어 세상에 전해진다. 지금 나의 거처는 이 산과의 거리가 백 리가 되지 않기에 항상 한번 올라가 구경하고픈 소원이 있었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정축년 8월 법물(法勿)*[현 신등면 평지리]에 사는 여러 분들이 나에게 요청하기를,
“옛날 이한주(李寒洲), 박만성(朴晩醒), 단계(端磎) 김인섭(金麟燮),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등 여러 선생들이 이 해 이 달에 천왕봉에 올라갔으니 한 시대의 인물이 모이고 풍운(風韻) 성대하기로는 근세에 비할 바가 없었다. 차츰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갑자가 한 번 돌았는데 우리들의 문장과 사업이 그 분들에게는 비록 미치지 못하지만 유상(遊嘗)의 흥은 남들에 뒤처지지 않으니 어찌 한번 가보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기에 내가 흔쾌해 하면서 훌륭하다고 하고서 드디어 16일 출발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이의헌(李宜軒), 공숙(孔肅), 이우(李友), 임사운(林士雲), 법물(法勿)에 사는 임계(臨溪) 김영숙(金英淑), 존곡(存谷) 김경오(金敬五), 회천(晦川) 김영수(金永遂), 물헌(勿軒) 김경백(金警百), 운천(雲川) 김양원(金養源)이 함께 갔다. 김치삼(金致三)이 행장을 준비하였는데 서계(西溪) 김복원(金福源)의 집에 들어가니 명절날의 술을 주어 각가 몇 잔씩 마시고 서계(西溪)도 동행하였다.
등정할 때 10명이 나이에 따라 가다가 앞 산을 넘어 운룡(雲龍)을 지났는데 하늘이 맑고 맑은 바람이 옷소매에 불었다. 물헌(勿軒)이,
“내가 이미 성심으로 묵묵히 기도한 지 오래되어서라오.”
라고 하기에 이어서 서로 함께 한 번 웃었다. 회천과 물헌, 운천, 서계가 작은 길을 찾아 운룡에 들어가 그의 집안 어른의 병문안을 하였다.
나는 임계 및 여러 사람들과 율현정(栗峴亭)*[현 신등면 율현리]의 나무 아래에 이르러 잠시 쉬었는데 회천과 물헌 등 여러분들이 잠시 후에 와서 모였다. 이어서 작은 고개로 향하였는데, 척지점(尺旨店)*[현 산청읍 척지리]에 도달하여 술을 사와서 갈증을 풀고 아울러 점심 식사를 장만하였다.
정곡(正谷)*[현 산청읍 정곡리]에서 곧바로 산청읍(山淸邑)에 이르렀다. 민무호(閔武鎬) 군은 물헌의 사위이다. 거리에서 상봉하였는데 여관으로 들어가자고 굳이 청하여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반갑게 대접하였다.
환아정(換鵝亭)*[1395년 산음현의 객사(현 산청초교자리)의 후원에 세워졌던 정자.1950년 소실]에 올라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최한용(崔漢用)의 가게에 들어가 묵었다. 이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물헌에게 갑자기 복통이 있어 연이어 네다섯 번을 토해내어 놀랍고도 고민이 되었다. 한 편으로는 안마를 하고 한 편으로는 약을 올렸는데, 아침이 되자 약간 병이 가라앉았다. 서로 축하하기를,
“같은 사람이 전에는 울다가 뒤에는 웃었다고 하더니 오늘 일이 과현 그러하오.”
라고 하였다.
이어서 각종 물품 약간을 사서 예비할 생각을 하고서 곧바로 경호강(鏡湖江)을 건너 매촌(梅村)*[현 금서면 매촌리]을 지나 춘래정(春來亭)에 이르니 계강(稽岡) 오성규(吳性奎)가 정자 안에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고서 생미수(生米水) 한 그릇을 권하였다.
물헌은 장차 성령(城嶺)으로 향하려 하여 점심을 사양하고서 수철(水鐵)*[현 금서면 수철리]에 도착하였다. 고개 아래에 이르니 고개의 형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발걸음을 씩씩하게 하여 5리를 갔으니 등산하는 일이 아직 반도 차지 않았다.
회천이 낭낭하게 무이도가(武夷棹歌)를 읊고서 또한 시를 외워 마음을 붙였다.
배고품과 피곤함이 바야흐로 심해져서 옷고름을 풀고 다리를 쉬게 하였다. 대저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하며 계곡물이 곧게 쏟아져서 조망할 수 없으며 날씨가 흐릿흐릿하더니 보슬비가 간간히 내렸다.
드디어 있는 힘을 다해 전진하여 고생 끝에 고개 위에 올라가 잠시 서늘한 바람을 쏘이고 조금씩 서북쪽 아래로 몇 리를 가니 바위 사이의 인가 한 두 채가 있었다.*[현 외곡리쯤으로 추정]
의헌이 앞에서 가더니 바로 김치구(金致九)의 집을 찾았으니, 예전에 주인과 인사가 있었던 것이다. 마당 가에 멍석을 깔아 놓고 일행이 둘러 앉았는데, 잠시 후 햅쌀밥을 올려 일제히 맛있게 먹었다.
옹암(瓮岩) 사람 박양환(朴亮煥)*[독바위양지마을 사람인 듯...]이 마침 이곳에 와서 산에 올라갈 계획이라고 하였는데 일기가 맑을 때라서 그 말을 들어줄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회천이 뱃속이 편치 않다며 식사를 하지 않았으며 존곡은 다리에 병이 나서 돌아가려 하였다. 일행이 모두 무료하여 주저하다가 시간을 보내었는데 존곡과 회천이 점차 회복되고 날씨 또한 맑아져서 기쁨을 헤아릴 수 없었다.
드디어 천천히 가다가 이사중(李士仲)의 집에 이르렀다. 사중은 본래 우리 동네 사람인데 이곳에 산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주식(酒食)의 범절이 성시(城市)와 다름이 없었다. 서로 함께 배불리 먹고 유숙하였다.
다음날 드디어 출발하였다. 의헌이 이전에 갔다 온 적이 있어서 앞으로 갈 길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니 참으로 기연(奇緣)이다. 그러나 수풀이 삼[麻]처럼 어지럽고 풀들이 길에 가득하여 인적이 드물고 산 줄기 작은 길이 혹은 끊어지다가 혹은 이어져 앞사람이 부르면 뒷사람이 응답하면서 옹암(甕巖)*[산청독바위] 아래에 이르러 잠시 쉬었으니 이곳은 조개곡(朝開谷)*[현 조개골]의 입구이다.
사는 사람들 말로는 만약 애전령(艾田嶺)*[쑥밭재]에 이르면 길이 비록 약간 멀더라도 사람의 힘을 덜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조개곡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힘이 다소 고되더라도 길은 매우 빨라질 것이라고 하기에 분분히 토론을 오래하던 끝에 마침내 지름길로 가기로 하였는데 빽빽한 숲과 등나무 넝쿨, 무성한 풀들이 덮고 있어서 지척을 가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목을 숙이고 엎드려 가다가 거봉(耟峯)에 도착하니 집 한 채가 있었으니 바로 목공이 그릇을 만드는 곳이다.*[말바우산막터를 일컫는듯함]
드디어 점심을 먹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둑해지고 빗발이 약간 내려 여러 사람들이 실색(失色)하면서,
“우리가 며칠 동안 노력하여 이미 이 곳에 이르렀으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랴.”
라고 하였다. 잠시후 구름빛이 점점 얕아지자 다시 전진하여 바로 거봉에 오르는데 가시가 옷을 당기고 낙엽이 정강이를 덮어 한걸음 나아가기도 매우 어려웠다.
몇 리를 가니 우뚝 선 봉우리가 있었으니 바로 중봉(中峯)이다. 일행이 모두 기뻐하여 용기가 절로 배가되어 바로 꼭대기에 올라가니 수풀이 가려서 그늘이 드리워 멀리 볼 수 없었다.
남쪽으로 상봉(上峯)*[천왕봉]을 바라보니 높이 하늘을 버티고 있어 더욱더 우러러 봄에 더욱 높다는 탄성을 금할 수 없었다. 손발을 같이 움직여 비늘처럼 부여잡고 올라가 봉우리 위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넓디넓고 망망하여 여러 산들이 눈 앞에 들어오는데 모두 구릉과 주먹만한 돌 정도로 보였다.
서북쪽에는 봉우리 하나가 우뚝 서 있었으니 바로 반야봉(般若峯)이다. 산세가 이곳에서 왔는데 이것이 천왕봉(天王峯)이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모두 암석이 반석이 되어 있었으니 일월대(日月臺)이다. 여러 계곡물들이 산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데 비록 큰 하천과 강이라 하더라도 한 국자의 물 같았다. 중간에 물길과 산 습지와 건조한 곳이 가득차 있는 것을 역역히 눈 앞의 물건이 되었으니 공자의,
“태산에 올라가 천하가 작은 것을 알았다.”
라고 하신 찬탄을 여기에서 상상할 수 있으리라.
바위 앞에는 산령사(山靈祠)*[성모사당을 일컬음]가 있는데 나뭇조각으로 덮여 있다. 바위 표면에 새겨진 이름은 몇 백명인 지 모르겠는데 혹은 마멸되고 혹은 선명하였다. 바위 사이에는 가옥 하나가 있는데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진주(晉州)의 강위수(姜渭秀)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는 천왕봉산장을 일컬음]
마침내 옷을 풀어헤치고 그 가운데에 행장을 풀고서 저녁을 먹을 생각을 하였다.
대저 산의 수목들이 모두 찬 기운이 항상 일찍 오기 때문에 겨우 한 자 정도였으니 몇 백번의 풍상을 겪은 것이 마땅하구나. 한 사람이 따라 왔는데 바로 칠불암(七佛菴)의 승려이다. 몇 자 정도의 아래에 있는 샘의 원천을 가리켰다.
이어서 밥을 먹은 후 날씨에 변화가 많아서 혹은 흐리고 혹은 맑았다. 시간은 장차 새벽으로 향하는데 옥같은 세계가 맑고 엄숙하며 달과 별이 밝고 환하였으며 은하수가 깨끗하였는데 멀고 먼 하늘 끝에 구름이 몇 길 정도로 빽빽하게 차 있는 모습이 병풍 같았다. 이어서 시 한 수를 지었다. 혹은 초은조(招隱操)를 외우고 혹은 무이도가(武夷棹歌)를 외우기도 하였다.
순식간에 함께 꼭대기에 올라가니 정신이 깨끗해져 마치 하늘나라의 삼청궁(三淸宮)에 간 것 같았는데, 단지 회오리바람이 불어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드디어 내려와 모닥불에 둘러 앉아 장차 일출을 보려고 하였는데 바람의 기세가 이러하니 바다에서 떨어진 변화하는 모습을 모두 기록하지 못하니 별도로 아쉬워한들 어찌하겠는가? 오직 흰 안개가 이어진 산골짜기 사이에 가득하여 명주솜을 방에 펴놓은 것처럼 완연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이다.
사방에 바야흐로 새벽빛이 다가오는데 아래 세상은 어둑어둑하였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이어서 하산하였다.
전의 길을 찾아 유평(柳坪)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었다. 이어서 대원사(大源寺)에 들아가 두루 보았는데, 그 웅장하고 기이하며 아름다움은 이루다 형용할 수 없었다.
다음날 대포(大浦)*[현 대포리]에서 경의당(敬義堂)*[덕천서원내의 강당건물]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선생의 후예로서 와서 모인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 걸어서 산천재(山天齋)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입석(立石)*[현 단성면 입석리]의 경강재(敬岡齋)*[안동권씨의 재실. 현재는 경강정사로 불림]에 들어가 입암(立菴) 권덕부(權德夫) 및 여러 사람들과 시 한 수를 읊었다.
다음날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여러 분들이 나에게 여정 중의 있었던 일을 기록하라고 청하기에 대략 위과 같이 기술하였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본문 국역 자료를 바탕으로, 저자 소개 및 산행 일시, 산행코스, 그리고 현재의 지명 설명 등을 덧붙여 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