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다!) 돌연 뜨겁게 타오르던 설연청의 눈이 차갑게 굳어들었다. 그와 아울러 그녀의 단전(丹田)이 활짝 열렸다. [허억-!] 단사영의 입에서 헛바람이 토해졌다. 설연청의 밀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자신의 불기둥 끝! 그 끝이 돌연 꿀처럼 끈적하고, 늪처럼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기이한 액체에 휘감기는 것을 깨달았다 . 불기둥을 뽑아내려고 했지만 용이하지가 않았다. 문어의 흡반에 빨리듯 그의 불기둥은 그녀의 밀궁 안에서 요동도 치지 못한 것이다. 그와 동시, 꽈--우--우-! 거대한 해일(海溢)! 삼라만상을 한꺼번에 파괴시킬 것만 같은 엄청난 폭풍이 그녀의 밀궁 안에서 일어난다. 그 힘은 그의 불기둥 끝부분에 난 작은 입구를 활짝 개방시켰다. 미처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기도 전 열려진 구멍을 통해 해일과도 같은 힘이 짖쳐들었다. [크흐흑!] 단사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의 불기둥이 공기가 잔뜩 든 풍선마냥 마구 부풀며 미증유의 거력이 불기둥을 통해 단전까지 치달렸다. 아아, 그 힘은 바로 설연청의 본연지기(本然之氣)와 그녀가 복용한 자소신단(紫消神丹)의 정화(精華)였다! 그녀는 환희섭정술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단사영의 몸 안으로 불어 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하악!] 두 사람의 몸이 삽시간에 침몰되어 갔다. 단사영은 의식의 한가닥 끈을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그는 무아(無我)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그의 몸이 설연청의 따스한 배 위에 축 늘어졌다. 여전히 자신의 불기둥을 그녀의 밀궁 안에 수용한 자세 그대로였다. (되었다! 이걸로 다 된 것이다!) 그런 단사영을 부드럽게 끌어안은 설연청의 눈가엔 스산한 빛이 번들거렸다. (세상은 곧 내가 만든 악몽을 보게 될 것이다!) 설연청은 염두를 굴리며 풍만한 둔부를 소리없이 움직였다. 단사영은 비록 혼절했지만 결합된 부위를 통해서는 끝없이 설연청의 본신 정기가 그의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폭풍일과후, 오십이 다된 나이였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탄력을 잃지 않았던 설연청의 피부는 지금 메마른 나무껍질처럼 까칠까칠하기 그지 없었다. 검은 머리칼은 그 탐스러움을 잃고 희끗희끗한 흰머리까지 보인다. 정기가 넘쳐 흐르던 커다란 눈엔 어느새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니… 설연청은 그런 무참한 모습으로 단사영의 가슴에 안겨져 있었다. 반면 단사영은 온몸에 주체할 수 없는 잠력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바로 설연청이 환희흡정술로 불어 넣어준 자소신단의 약기운과 그녀의 본신진기였다. 단사영은 자신의 내공이 단기간에 배이상 막강해진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소신단의 효능이었다. 물론 자소신단의 약효가 단지 내공을 두 배로 늘려주는 정도는 아니다. 자소신단은 제련기간이 채 일천 일을 채우지 못한 관계로 당장 그 약력이 모두 내공으로 화하지는 못한 때문이다. 하지만 일 년 정도만 꾸준히 수련하면 단사영은 장차 천하무적의 내공을 지니게 될 것이다. 마치 한몸이 된 듯 부등켜 안은 단사영과 설연청은 둘다 벌거벗은 알몸인 상태였다. 설연청의 하체에는 격렬했던 교합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부끄럽다느니, 수치스럽다느니, 어머니처럼 따랐던 설연청을 범했다는 죄의식과 자괴감과도같은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지 않았다. 오직 두 사람 사이엔 그들을 극단까지 몰고가 버린 운명(運命)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영…영아…!] 파리하게 마른 입술이 힘겹게 열리며 설연청이 단사영을 올려다 보았다. [잊지 말아라! 검성은 그 자들 일곱 명의 흉수에 의해서 무너진 것 뿐만이 아니다! 강호무림 전체가 검성을 버렸다는 것을…!] [……] 단사영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설연청은 단사영의 차갑게 식은 뺨을 까칠한 손으로 더듬거렸다. [날 범한 것에 대해 너 자신을 너무 학대하지 마라. 자학(自虐)은 너에겐 해가될 뿐이다. 나에게… 죄스러운 감정이 있다면…처절한 복수를… 그들이 택한 배신의 말로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내가 구천에서나마 볼 수 있게끔 넌 너의 복수의 길만… 욱!] 다시 설연청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눈은 급격히 빛을 잃었고 안색은 검게 변했다. 쏟아낸 피가 단사영의 탄탄한 가슴을 검붉게 물들였다. [사고님!] 단사영의 울부짖음이 비통하게 새벽 공기를 뒤흔들었다. 설연청은 꺼져드는 음성으로 말했다. [영아야, 내 죽어 철혈검제…그 분을 뵐 낯이 없구나! 그 분은 날 무척 욕하실 것이다. 널 복수귀로 만들었다고…! 그러나…후…후회는 없…없다 …세상이 우릴…너와 날… 버렸기 때문에 택한 길…길이니까…] 그것이 끝이었다. 화사마녀(花蛇魔女) 설연청(薛姸淸)! 보리빛 꿈많던 소녀 때 사랑하던 정인에게 버림을 받고 세상 사내들을 증오하며 강호를 파탄으로 몰고갔던 여살성! 두 번에 걸친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철혈검제에게 받고 그를 통해 잃었던 사랑이란 감정을 다시 느꼈으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그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아픔뿐이었다. 자신에게 새 삶과 사랑을 주었던 철혈검제의 아들 단사영과 함께 검성을 잊은 세상에 대한 복수의 검을 갈던 그녀가 죽은 것이다. 한과 증오로 점철되어온 인생을 접은 것이다. [사고님…] 단사영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피를 토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은 작았으나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쳐 우는 대성통곡보다 더 아프고, 슬픈 절규였다. 어쩌면 그에게 이 통곡은 생(生)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이 물러가고 동녘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단사영은 설연청의 싸늘하게 식은 몸을 천천히 방바닥에 뉘였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히기 시작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제사장(祭祀長)이 성스러운 제전(祭典)을 수행하듯 고요하고 경건했다. 옷을 입히는 작업은 무척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차갑게 식은 설연청의 몸 구석구석까지 뇌리에 깊게 새기려는 듯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마침내 단사영은 설연청의 시신에 옷을 전부 입혔다. 그리고 자신도 옷을 걸친 후 반듯이 누워 있는 설연청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두번 다시는…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정(情)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사영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거부합니다. 제게 남은 것은 오직 차갑게 식은 피뿐입니다.] 그는 설연청의 손을 잡은 채 맹세했다. [지켜보십시오 사영이 어떻게 그들을 응징하는지를…] 그런데 그 때였다. 콰쾅! 갑자기 요란한 폭음과 함께 대청의 문이 박살이 났다. 스슷! 이어 무참히 부서져 나간 문을 통해서 일단의 무리들이 대청으로 들어섰다. [킬킬! 백화오절이 은밀히 망량산으로 움직인다 하여 뒤를 캤더니 뜻밖의 대어(大魚)를 낚았군! 백화맹이 무림공적으로 선포한 화사마녀 설연청과 검성의 후예 단사영이라! 괜찮은 수확이군.] [……] 단사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십여 명의 인물들이 나타나 있었다. 맨 앞에 선 자는 연신 호로병을 기울여 술을 들이키고 있는 중년의 거지였다. 중년 거지가 들고 있는 호로병은 검은 묵철(墨鐵)로 만들어져 있으며 호로병 표면에는 배불뚝이 미륵불(彌勒佛)이 새겨져 있었다. 중년 거지의 허리띠엔 다섯 개의 매듭이 져 있었다. 오결(五缺)과 미륵불이 새겨진 검은 호로병! 거지들의 집단인 개방 안에서 이와 같은 특징을 지닌 자는 한 사람뿐이다. -철담혈개(鐵膽血蓋) 하성운(河星雲)! 남개방(南蓋幇)의 순찰호법(巡察護法)인 그가 십여 명의 개방 고수들을 대동한 채 나타난 것이다. 이때 철담혈개는 호로병을 입에서 떼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세상만사가 다 이런 것이지, 올 때는 알몸이었지만 갈 때는 그래도 옷 한 벌 얻어 입고 가니 억울한 것은 아니지 , 화사마녀 설연청, 살아 전 강호인들의 표적이 되느니 차라리 일찍 죽어 모든 것을 잊는 것이 낫지!] 순간 단사영은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철담혈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피를 보고 싶지가 않다. 오 년 동안 내게 정성을 다하신 사고님 영전에 피를 뿌리고 싶지 않으니 가라.] 차가운 음성이었다. 너무나 차가워 내리던 빗줄기가 고드름처럼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하나 철담혈개 하성운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단사영의 말에 코를 벌름였다. [가라고? 가라면 가지! 한 가지 물건을 준다면 곱게 가겠다.] [……] [흐흐흐…바로 네놈의 목이다! 감히 대개방을 건드린 네놈의 목을 이 어르신께서 가져갈 테니 모가지를 길게 늘어뜨려라, 단사영!] [날 알면서도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 뒤에 있는 개벽십팔개(開闢十八蓋)를 믿느냐?] [후후후, 개벽십팔개를 알고 있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 그들이 펼치는 풍운개벽타구봉진(風雲開闢打狗俸陣)은 남개방은 물론 북개방까지 통틀어 천하최강이다.] [결국…피를 보겠다는 것인가?] 단사영은 힐끔 설연청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사고님 영전에선 피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저들은 사영의 손에 피를 묻히길 원하는군요…) 오늘만큼은 살인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벌써부터 그에게 손에 피를 묻히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이 순간 철담혈개 하성운은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얘들아, 계집의 몸을 뒤져 자소신단과 혈왕의 비급을 찾아 보아라!] 그 말에 단사영의 눈빛이 가볍게 출렁였다. (철담혈개가 어떻게 그 사실을…?) 백화오절에 이어 이번에는 개방에서까지 설연청과 단사영이 혈왕의 문을 열어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음을 안다. 심지어 자소신단을 제조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개방이 천하 제일의 정보망을 지녔다고는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때 철담혈개의 명을 받은 수하 가운데 한 명이 어느새 단사영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죽어 있는 설연청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단사영은 다가오는 중년 거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을 받은 중년 거지가 일순 걸음을 멈추며 그 자리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 저것은 산 자의 눈빛이 아니다! 피에 굶주린 악마의 눈빛이다!) 중년 거지는 자신의 피가 모조리 단사영에게 빨려가는 듯한 공포를 맛보았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우뚝 서 있는 단사영의 모습은 중년 거지가 지금것 살아온 일생 가운데 가장 전율스러운 모습이었다. 중년거지는 절로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병신…!] 그 광경에 철담혈개는 냉소를 지으며 호로병을 기울여 벌컥벌컥 술을 들이겼다. 그리고, 푸앗-! 철담혈개가 입을 벌리자 한 줄기 술화살이 뻗어져 단사영을 치는 것이 아닌가? (주전사망폭(酒箭死亡爆)!) 단사영은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술화살 속에 죽음이 깃들어져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한 모금 술에 진기를 불어넣어 쏘아내는 개방의 주전사망폭공은 기공 가운데 최고로 치는 무공이다. 단사영은 선 채로 가볍게 옷소매를 흩뿌렸다. 펑! 퍼퍼펑! 그의 소맷자락에서 일어난 경기가 날아오는 술화살을 흐드려 놓았다. 그런데 뜻밖에 사태가 벌어졌다. 튕! 피피핑- 피잉-! 깨지고 흩어진 술화살이 이제는 술 한 방울, 한 방울마다 가공할 진력을 지닌 채 우산처럼 퍼지며 단사영 전신 곳곳을 짖쳐오는 게 아닌가? [흐흐흐! 개방의 비전 탄주살마공(彈酒殺魔功)이다.] 이 순간 단사영의 마음 속에는 살의(殺意)가 일어나고 있었다. 활화산처럼 그의 증오심과 원한은 터져 버렸다. 그의 두 눈은 완전히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불타올랐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음산무비하기 그지없는 괴소가 터져나왔다. [흐흐...날 원망하지 마라!] 그의 말은 으시시 했으며 소름이 오싹 돋는 전율마저 일으켰다. 단사영은 혈염지력(血炎之力)을 끌어올렸다. 츠츠츠츠… 그의 전신으로부터 붉은 핏빛 혈광이 피안개처럼 피어나는 찰라, 팅! 파파팍! 피안게에 부딪친 수백, 수 천의 술방울들이 되튕겨지며 허공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광경에 철담혈개는 그만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곧 거칠게 외쳤다. [얘들아, 저놈을 어서 잡아랏!] 휙! 휙! 열 여덟 명의 중년거지들은 동시에 쌍장을 벌리며 단사영에게 짓쳐들었다. 단사영은 피가 꺼꾸로 거세게 도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전신에서 엄청난 잠력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오냐! 전부 죽여주마!] 그는 양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그의 손이 붉게 변하더니 열 개의 손가락에서 시뻘건 혈무(血霧)가 뻗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으악!] [악!] 단사영이 휘두른 혈무가 뻗치자 달려들던 열여덟 명의 중년거지들은 일제히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버렸다. 허나 더욱 놀라운 일은 잠시 후에 벌어졌다. 허공으로 튕겨나간 거지들은 땅에 떨어지는 순간 마치 초가 불에 타서 녹듯 시뻘건 혈수로 화해 허공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아아! 시체는 흔적도 없고 주위에는 온통 시뻘건 핏방울만이 바닥을 물들이며 고약한 비린내를 풍겼다. 이것은 단사영의 내공이 전보다 두 배 이상 증강된 결과였다. 철담혈개는 도저히 눈앞에서 벌어진 이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이럴 수가!] 이때 단사영은 혈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철담혈개는 겁에 질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그는 털이 쭈뼛 일어섰다. [살성(殺星)이다. 대살성이 강호에 나타났다.] 넋을 잃듯이 이렇게 외친 철담혈개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더니 입을 딱 벌렸다. 촤아앗- 그의 입에서 수십 줄기의 주전(酒箭)이 쏘아져 나갔다. 퍼펑! 주전은 정확히 단사영의 가슴의 온몸에 격중되었다. 단사영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을 뿐 끄덕없이 다가왔다. [네놈은 인간이냐? 귀신이냐?] 철담혈개는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젓고 말았다. 그 순간 단사영이 쌍장을 앞으로 쳐내자 또다시 시뻘건 혈무가 뭉클 뻗쳐나왔다. [윽!] 미쳐 피할 겨를도 지 못한 철담혈개는 혈무에 적중되어 피화살을 뿜어내며 뒤로 날아갔다. 꽝! 우두둑! 대청의 두터운 벽이 그의 몸과 부딪치는 순간 그대로 터져나가며 요란한 소리를 질렀다. 벽을 부수고 밖으로 튕겨져나간 철담혈개는 바닥에 패대기쳐지듯 쓰러지며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으으! 개…개방은 절대…절대 오늘을 잊…잊지 않는…크으윽!] 그의 목이 힘없이 옆으로 꺽어졌다. 두 눈을 부릅 뜬 채 죽은 철담혈개의 눈엔 원한의 빛만이 가득했다. 단사영은 혈염지력을 거두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구든지 내 앞을 막는자는 그가 누구건 돌아가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는 철담혈개의 시신을 내려다 보며 싸늘히 중얼거렸다. 얼마전까지 뜨거운 열풍이 불어닦쳤던 대청에는 지금 이순간 역겨운 피비린내만이 진동하고 있었다. 동녘이 붉그레해지며 황량하던 폐장의 구석구석에도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 단사영은 여섯자루의 철검을 등에 짊어진 채 장승처럼 서 있었다. 그의 앞쪽에는 붉은 흙이 채 마르지도 않은 봉분이 하나 놓여 있었다. 바로 화사마녀 설연청이 묻힌 무덤이었다. 비석도 없는 그 무덤 앞에는 초혼간 용불군의 목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조금만…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나머지 여섯 흉수의 목도 사고님의 영전에 바치겠습니다!) 단사영은 움켜쥔 두 주먹에 피가 나도록 힘을 주며 맹세했다. (내 가슴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가닥의 온정도 여기 사고님의 유해와 함께 묻혔다) 설연청의 무덤을 바라보는 단사영의 눈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감정은 극한까지 메말라 이제 한방울의 눈물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편히 쉬십시오! 당신은 영원히 저의 유일한 여인으로 가슴 속에 기억될 것입니다!) 단사영은 봉분 앞에 큰절을 올린 뒤 일어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지 시작했다. 곧 단사영의 모습은 아침의 뿌연 안개속으로 멀어져 갔다. 헌데 단사영의 모습이 완전히 폐장에서 사라졌을 때였다. 투둑! 갑자기 설연청이 묻힌 봉분이 미미하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 아직 마르지 않은 흙이 봉분 아래로 흘러내리고 봉분의 진동은 점점 커져갔다. 마치 무엇인가 뛰쳐나오려는 듯…! 과연 설연청의 무덤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과연…! -태평주루(太平酒樓)! 하남(河南)과 산동(山東)의 접성지(接省地)인 강상현(江商縣)은 제법 큰 도성이다. 이 강상현의 중앙대로에 위치한 태평주루는 강상현에서도 가장 큰 주루라고 할 수 있다. 태평주루 안의 분위기도 몹시 어수선했다. 대부분 상인들로 꽉 메워져 있었고 간혹 강호 무림인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시끌버끌한 소음이 가득한 주루의 한 쪽에는 주루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인물이 한 사람 앉아 있었다. 검은 흑의, 묶지 않아 치렁한 검은 머리칼, 거기에 죽은 자를 보는 듯 감정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은 무심한 얼굴, 전신으로 뿜어내는 싸늘한 냉기 탓인지 흑의인의 자리에는 그 누구도 합석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등에 여섯 자루의 볼품없는 철검을 메고 있는 흑의인은 바로 단사영이었다. 어두운 그늘이 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단사영의 탁자 주변엔 빈 술병들이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었다. 꽤 많은 량의 술을 마셨지만 그의 안색엔 취기(醉氣)라고는 을 길이 없었다.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괴로운 일이로구나!) 또 한잔의 독주를 입에 털어넣은 단사영의 창백한 얼굴로 한가닥 고통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죽어간 설연청의 모습이 한시도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어머니처럼 다르던 설연청과 살을 섞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저 한바탕의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흐드러진 설연청의 알몸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신의 무자비한 행위에 울며 몸부림치던 설연청의 고혹한 자태와 교성이 지금도 바로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설연청을 범했다는 죄책감보다도 더욱 더 그를 괴롭히는 것은 이제는 완전히 혼자 몸이 되었다는 고독감이었다. 유일한 친인이던 설연청의 죽음은 너무도 큰 빈자리로 느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인생에서 화사마녀 설연청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복수다! 하루빨리 나머지 여섯 흉수를 쳐죽이고 집으로 돌아가자. 평생을 사고의 무덤을 지키며 살리라!) 단사영은 다짐하며 빈 술잔에 다시 술병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미 그 술병도 비어진 후였다. 단사영은 마침 지나던 점소이에게 술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는 술이 올 동안 주루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네 명의 황의노인을 보는 순간 그의 눈에서 싸늘한 기운이 스쳐지났다. (저자들은…!)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자리엔 황의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오순 가량의 노인으로 장검을 휴대하고 있는 그들은 태양혈이 돌기되고 두 눈에 날카로운 섬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내공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내가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네명의 황의노인은 체격이나 얼굴 생김새가 똑같아 한 뱃 속에서 태어난 형제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 제법 위풍당당한 네 황의노인은 단사영이 자신들을 보자 힐끗 마주 쳐다보았다. 그러나 유심히 단사영을 살피던 그의 눈에는 이내 가소롭다는 빛이 스쳤다. (기도가 범상치 않아 고수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칼장수였군.) 아마도 그는 단사영의 등에 메어진 여섯 자루의 검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듯싶었다. 그리고 단사영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날카롭고 차가운 예기가 바로 그 검(劍)들 때문이라 단정한 듯 이내 콧방귀를 뀌고는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둘째, 정말 사대신왕중 용왕(龍王)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구운룡주(九雲龍珠)가 그 백의계집의 수중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느냐?] 두 번째 좌석에 앉아 있는 뱁새눈의 황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노응조살(怒熊爪煞) 천수양(天需良)의 말에 의하면 진운쌍검(震雲雙劍) 공손표(公孫豹)가 백의여인에게서 구운룡주를 탈취하려다가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세 번째 자리의 염소 수염을 한 황의노인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금 무림의 절정고수인 진운쌍검 공손표를 처치한 것을 보면 그 백의여인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겠군요, 형님?] 첫 번째 황의노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응조살 천수양의 말에 의하면 그 백의여인의 무공은 건곤마존(乾坤魔尊)의 무공을 구사한다고 한다.] [뭐라구요?] 나머지 세 황의노인은 아연실색하며 딱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단사영 역시 자기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건곤마존(乾坤魔尊)! 그는 무림개사 이래로 전무후무하게 백 년 동안이나 천하무림을 독패한 절대마존(絶代魔尊)이다. 건곤마존은 명실공히 천하무적의 패왕(覇王)으로 군림하였다 . 건곤마존의 무공이 얼마나 지고했으면 천하무림을 백 년 동안이나 장악했겠는가? 하지만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절대강자(絶對强者)란 존재할 수 없었다. -철혈검제(鐵血劍帝) 단천학(段天鶴)! 한 자루 육맥신검(六脈神劍)을 지닌채 홀연히 강호에 나타난 약관청년 단천학에 의해 건곤마존의 백년 군림이 무너질 줄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다. 건곤마존이 철혈검제의 신검에 쓰러짐으로 해서 강호엔 실로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철혈검제 단천학은 백도무림맹인 백화맹(白華盟)의 맹주로 추대되지만 그는 명예와 권력을 버린 채 사랑하는 여인 옥호접(玉蝴蝶) 매설란(梅雪蘭)과 함께 강호를 떠났다. 백화맹은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 경관 수려한 소흥성(紹興城) 근교에 거대한 장원을 지어 바치니 그곳이 바로 검성(劍城)이다. 그 후, 오 년 전 돌연 멸망할 때까지 검성은 강호제일의 성역(聖域)으로 불리워졌다. 그런데 구운룡주를 소유한 그 백의여인의 무공이 삼십여 년 전 철혈검제에게 죽음을 당한 건곤마존의 무공이라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특히 이 순간 단사영의 놀람은 그 누구보다 더 컸다. (건곤마존의 무공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를 끝으로 그의 사문(師門)은 단맥(斷脈)되었다고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단사영의 짙은 검미가 꿈뜰거렸다. (건곤마존의 무공을 사용한다는 백의여인, 그리고 용왕(龍王)의 신비를 풀 수 있다는 구운룡주(九雲龍珠)의 출현, 심상치 않구나!) 그는 네 명의 황의노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무렵 네 번째 황의노인이 실의의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나부사걸(羅浮四傑)이 구운룡주를 탈취하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겠으나 그 백의여인의 무공이 그토록 지고하다니, 탈취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겠군요…] 단사영은 그제서야 네 황의노인의 내력을 알 수 있었다. 네 황의노인은 자칭 나부사걸이라 했으나 사실은 나부사흉(羅浮四凶)이라고 하는 흑도의 고수들이었다. 친형제인 그들 나부사흉은 원래 나부파(羅浮派)의 제자들이었지만 온갖 악행을 자행하고 돌아다녀 나부파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그들은 나부산 장진동(藏珍洞)에서 나부파의 진산기보를 훔쳐 달아났다. 그로부터 십년 후 나부신공을 연마한 나부사흉은 강호에 출도하여 나부파를 멸망시키며 그 흉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런 흉악무도한 나부사흉이 태평주루에서 무엇인가를 작당하고 있었다. 헌데 대체 구운룡주란 무엇인가? -구운룡주(九雲龍珠)! 강호에 구운룡주가 등장한 것은 두 달 전의 일이다. 그 구슬(珠)이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 주먹만한 크기에 둘레에 아홉 마리의 용(龍)이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전해질 뿐이다. 하지만 구운룡주를 취득하면 개세신공을 터득할 수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여 강호인들은 눈에 불을 키고 백의여인은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정녕 구운룡주의 신공을 터득하면 뛰어난 고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때 나부사흉 중 첫째인 쌍부혈마(雙斧血魔) 탁천(卓天)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넷째, 우리 사형제가 어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나약한 위인들인가? 보이는 창은 피하기 쉬워도 보이지 않는 화살은 피하기 어려운 법, 백의계집의 무공이 아무리 신묘하다 해도… 후후…] 이어 그는 세 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은밀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세 동생들인 철심괴흉(鐵心怪凶) 탁운(卓雲), 십자연환검(十字連環劍) 탁명(卓明), 호리화마(弧狸火魔) 탁웅(卓雄)은 이구동성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대가의 지략은 비상하군요!] 이어서 그들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루 밖으로 나갔다. [……] 단사영은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 주루를 나섰다. 계 속 |
첫댓글 감사 드립니다
편안한 밤 보내셔요⊙•
잘읽어 보았어요
이밤도 고은 꿈 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