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대림 제2주일 (이사40,1-5.9-11 ; 2베드3,8-14; 마르1,1-8)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벌써 대림 초 두 개에 불이 켜졌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만큼 맑고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 사랑 안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 15장9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국어 공부를 잘하면‘주제파악’을 잘하고, 산수공부를 잘하면 ‘분수’를 안다.
지리공부를 잘하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주제파악을 잘한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분별력, 자신의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자기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녀로서의 알맞은 처신입니다.
독일 속담에 ‘개구리는 금의자에 올려 줘도 다시 뛰어내려 연못 안으로 들어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각자는 자기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제 파악을 잘하였고 분수를 지켰으며,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그리스도라 사칭하고 사기 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1,7).고 말하며
자신을 확실히 낮추는 겸손함을 보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고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그는 결코 자신으로 말미암아 오실 주님이
가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이 분명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 구세주가 아니었고 주님의 도구요, 연장이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내 역할이 무엇이며 또 어디까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으로 실수와 잘못을 범하고 살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막지는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사랑하십니다.
그것을 안다면 나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다운 처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신앙은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역할이 분명해집니다.
이웃을 위한 구원의 도구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에 맛 들이지 않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곳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한껏 받들어 올리고 자신을 한껏 낮춤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11,11).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겸손함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도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2베드3,14)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 서 있는 나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1독서를 보면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곧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너희는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이사40,3)하고 외칩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우리 마음이 광야요, 메마른 사막이라면 곧게 길을 닦아야 하고
서로 간의 골이 진 골짜기라면 메우고, 나를 높이는 교만함이 산과 언덕이라면 낮추고,
거친 마음이면 평탄하게 하고, 험하다면 평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의 상급이 그분과 함께 오고, 그분의 보상이 그분 앞에 서서 온다”(이사40,10)는
은혜를 체험케 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르면 길을 닦을 수도 없고
골을 낮추거나 평야로 만들 생각 못하고 결국 주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하고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며
있어야 할 자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자리가 있습니다.
남편은 남편의 몫이 있고 아내는 아내로서의 몫이 있습니다.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자리가 있고 부모는 부모로서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자리가 있습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의 고귀한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요,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지만 때때로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두 마음을 품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부가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머릿속엔 텔레비전 드리마의 내용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혼한 여자가 멋진 남자를 보고, 아, 내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아내가 있는 남자가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왜 내 아내는 저런 매력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해 보세요.
그 가정 안에 화목함이 있겠습니까? 내 자식은 왜 저 모양일까?....
혹 두 마음을 품고, 엉뚱한 것에 빼앗긴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빼앗긴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요,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요,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연다.”고 하였습니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겸손함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또한 천국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 한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하는 한 주간 되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밥 먹는 시간보다 밥하는 시간이 더 길고, 돈 쓰는 시간보다 돈 버는 시간이 더 깁니다.
노력 없이는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시간보다 미워하며 사는 시간이 더 길고, 만족하며 사는 시간보다 후회하며 사는 시간이
더 길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천상을 향한
삶의 태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고 두고 묵상하고 깨우쳐 실천하려 자꾸 두고 두고 맘에 새기려 발버둥 쳐야할 말씀 입니다 자비하신 주님 당신의 은총 외에는 우리 모두가 행할수 없음을 꼭 맘속에 살아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