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세상을 읽는 사람
“자네하고 산타는 게 한 3, 4년 됐나?”
뒤를 힐끔 돌아본 선배가 무거운 입을 씰룩거렸다. 당신보다 앞서가는 꼴을 절대 못 보는 줄걸음이라 차라리 젊은 놈이 눈치껏 뒤를 쫓는 게 내 몸이나 마음이 한결 편했다. 승가사로 올라가는 갈림길을 지나 약수터를 거쳐 가팔라진 언덕배기를 넘자마자 그 계곡의 작은 애기봉우리에서, 가까이 깎아지르게 우뚝 들어선 보현봉과 문수봉을 좌장군, 우장군인 양 거느린 대남문의 둥근 아치가 멀리 한가운데 눈높이로 내다보였다. 차가운 바람만큼이나 시원스런 풍경이 달아오른 내 몸뚱이를 식혀주었다. 크고 작으며 가깝고 먼 대칭에, 구도까지 딱 맞춰진 언제 보아도 영락없이 한 폭의 산수화였다. 혼자 나선 길이면 항상 땀을 닦으며 잠시 눈을 즐기는 풍경이지만, 선배는 역시 걸음을 늦출 낌새라곤 보이지 않았다. 달래 ‘북한산 공비’라고 불릴까 하며 나는 쓴 입맛을 다셨다.
“제가 학교를 옮겼을 때부터니까 그쯤 됐죠, 아마? 가끔 제자들하고 같이 오세요?”
“성가셔. 다 떨거지들인데 뭐.”
나는 뭐 아니고요, 하는 대꾸가 목에 더럭 걸렸다. 꼬박 10년을 가까이 붙어 지냈지만, 여전히 어려워서 말이 곱살스레 가려졌다. 워낙 사람을 가리는 양반이라 곁에 오래 붙어 지내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작가들이 존경하는 작가라는 말이 한결같이 따라다니지만, 인사치레를 꺼려서 문단모임마저 잘 나서질 않는 데다, 산행을 쫓아다니던 사람들까지 산악 마라톤 같은 총총걸음에 길어야 1년을 못 넘긴 채 떨어져나갈 뿐, 엉덩이 뭉그적거리는 짓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음을 내세워 “난 가르치기 정말 싫어”하는 입버릇을 뻔질나게 주워섬겼는데, 8년째 문창과 전임교수로 이름을 떡하니 올려놓은 속내가 외아들 학비마련이라곤 해도 의뭉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까지 모두 열셋을 문하생으로 거두었지만, 대학 강의는 사뭇 달랐다. 우리는 죄다 소설에 목을 맨 지망생들이었는데, 요즘 문창과는 순수문학을 걷는 학생들이라곤 한 손도 못 채운 채 모조리 방송극본이네 시나리오 쪽으로만 빠져 소설 강의 때는 잠이나 퍼질러 자기 바빴다. 연극영화과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무대를 꿈꾸는 학생은 씨가 마른 채 강의실은 이불보따리만 없을 뿐, 아예 코까지 골아대다가 4학년 막판으로 몰려서 방송이나 영화판 기웃거림에 지쳐 허파를 채운 바람이 어설피 빠지면 연극이라도 하다가 눈도장이 찍히지 않을까 하는 신둥진 꿍꿍이로 나를 찾아오곤 했다. 차라리 ‘영상문예학과’와 ‘영상연기학과’로 간판을 짜 맞춰야 할 판이었다. 나도 답답하다 못해 복장이 터질 지경인데, 꺽꺽한 당신은 오죽 짜증이 날까 하는 애틋한 기분이 수굿하게 어루만져졌다.
애기봉우리를 내려가는 비탈길엔 등산객들이 줄을 서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북한산 자락은 온통 사람물결이었다. 하나같이 검정색으로 맞춰 입은 옷차림이 소나무를 빼곤 나뭇잎이 다 떨어진, 그나마 맑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는 시퍼런 물을 뚝뚝 흘리고 있지만, 오히려 칼라와 흑백사진을 맞대놓은 양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더 칙칙하게 물들였다. 청바지 따위가 더러 눈에 띄기는 했다. 웃옷이든, 바지든 하나는 검은 데다 옷 모양이며 꾸밈새도 엇비슷해서 마치 단체복을 맞춰 입은 모습이었다. 기다리며 숨을 고르는 사이, 안 그래도 언제나 퉁명스런 얼굴인데 사람들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못마땅한 선배 표정이라니, 올봄에 학생들이 등산복을 생일선물로 마련했을 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다 똑같아 보여야 하는 거야? 문학도 그래. 유행이나 쫓고 남들 하면 지도 하는 거지, 자기 게 뭐 있어?”하며 떨떠름하게 씹어대던 말본새가 새삼스레 내 코웃음으로 새어나왔다.
겨우 능선을 빠져나온 우리는 곧장 계곡을 타고 오르막길로 올라갔다.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들을 피해 성큼성큼 내딛는 선배의 걸음걸이는 드세고 뻣뻣한 소설 속 문장만큼이나, 항상 똑같은 옷차림 그대로 아직도 힘이 넘쳤다. 너무 재미없고 따분한 게 탈이었다. 아직 글을 버무리는 손이 크게 놀질 못해 건들거리긴 해도 산을 타는 버릇이나 성격은 빼닮아서 사람들 꽁무니에 걸음이 거치적거리면 얼굴에 끼얹는 끈끈한 입김만큼이나 나 역시 짜증이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산은 기를 써서 따라붙는데, 글 힘은 선배를 쫓아가자면 까마득히 멀었다. 숨이 가쁘게 차오를수록 사람들은 눈에 띠게 줄어들었다. 둘러싸고 있던 봉우리들도 저만큼 낮아지고, 산등선이까지 똑바로 질러 오르는 고갯길이 바위더미를 당장 쏟아낼 양 눈앞으로 까마득히 올라섰다. 산행이 낯선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숨을 시근덕거릴 듯했다.
선배는 걸음새를 조금 늦추긴 했지만, 쉬지 않고 바로 고개를 타올랐다. 이미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은 나는 숨이 턱에 걸려 입이 바싹 말라붙었다. 다리도 몹시 후들거렸다. 젊은 놈이 이쯤 골골거리면 환갑을 바라보는 당신도 어지간히 지칠 만한데 쉬어갈 기미라곤 없이, 고갯길이 아닌 우리끼리 소설쓰기처럼 우직하고 진득한 힘겨루기를 한바탕 벌여 나갔다. 서로 이기고 올라서야 하는 시시포스의 걸음걸음이었다. 바윗돌 사이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 힘겹게 내딛는 발에 먼저 거쳐 간 사람들이 다져놓은 자리가 놓이고 내 걸음도 길을 굳히며, 살아온 시간이 그렇듯 발치 아래 아슬아슬한 내리막길이 밀려나 있어도 눈앞으론 끝 모를 오르막이 떡하니 버텨선 채 가슴이 터져라 헐떡거리는 나를 비웃었다. 미처 자신을 이겨내지 못한 씁쓸함이었다. 중턱쯤 올라서자 드디어 선배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배낭 옆구리에 끼워둔 물병을 꺼내 단내 기득한 입안을 헹구고 목을 축였다.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껑충한 몸을 뒤로 뉘인 선배는 남은 고갯마루를 지긋이 올려다보며 입김을 길게 내뿜었다.
“저번에 팔공산 가신다더니… 어땠어요?”
“뭐 절간이 너무 많아서 버렸어. 시끌벅적, 아주 요란해.”
말을 내뱉고 보니 생각이 짧았다며 나는 도리질을 쳤다. 고향 친구들에게 붙잡혀 주말 내내 서울 집에 올라오지 못하다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그 산을 찾았던 모양인데, 신라시대부터 공산(公山)이라 불리며 동쪽 토함산, 서쪽 계룡산, 남쪽 지리산, 북쪽 태백산까지, 일명 오악(五岳)의 하나인 중악(中岳)으로 자리매김해온 팔공산은 유교를 따른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원찰지(圓刹地)였던 터라 산 전체가 절이나 다름없으니, 북새통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당신이 좋아할 만한 곳은 분명히 아니었다.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도 절밥을 얻어먹으러 올라오는 엉뚱한 연인들이 판치기 일쑤였다. 쓸데없는 말을 한 셈이다.
“다나카(田中)가 언제 온다는 말은 없었어요? 그 친구 오면 바빠질 텐데.”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방학 때겠지 뭐. 무슨 일?”하고 선배가 뚱한 얼굴을 닦았다.
“취재요. 우리나라 도서대여점 문제를 취재한다고 그랬거든요, 전에.”
“거, 써먹을 데 있나? 그딴 걸 뭐해? 가자고.”
나는 일부러 입을 꾹 다물었다. 할말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 짧은 선배를 상대로, 게다가 세상 돌아가는 큰 이야기라면 얼굴색부터 바뀐다는 것을 뻔히 아는 놈이 계속 떠박지르기는 어렵고 성가셨다. 그저 당신도 정말 늙었구나 하는 눅눅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곰곰이 감돌았다. 대여점은 절대, 결단코 가벼이 대할 소재가 아니다. 맞물려 놓은 나라 꼬락서니가 아주 한심스럽다. 국가나 단체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은 수억씩 세금을 들여 사회와 대중을 빌미로 굴리니, 결국 개인의 돈벌이인 대여점은 국민의 피땀이 줄줄이 빠져나가는 바람구멍이었다. 쥐와 구렁이를 같은 우리 안에 밀어 넣은 셈이다. 더욱이 그 책들을 보면 순수문학이라곤 찾아보기 힘들다. 소위 무협지와 판타지만 넘쳐나고, 로맨스 나부랭이가 기껏 소설다운 책일 뿐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있을 만큼 정부의 잣대도 아주 엉뚱하고 뻔뻔했다. 국민을 당장 먹고살기만 하면 그만인, 돈이면 다라는, 돈을 그저 벌고 쓰는 속물로 길들이며 사회를 세세히 다져서 끌어갈 머리엔 똥만 찼다는 뜻이니, 나는 그 장사꾼들이 아닌 저 골 빈 윗대가리들에게 진저리를 낼 뿐이었다.
이른바 한류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시대라는 시시덕거림도 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속사정은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 ‘나는 미치지 않았다’며 우기는 멀쩡한 거짓말이고, 유통시장을 거머쥔 문어발 기업이 돈줄로 나서서 몇몇 감독과 배우가 손발을 맞춰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었다. 전국 개봉관을 뒤덮다시피 틀어쥔 채 방송이며 인터넷을 비롯한 숱한 매체를 끌어들여 광고 도배질로 쌀가루를 뿌려 몰려다니면서 남들 쫓아하기 좋아하는 그 병아리 떼 같은 불쌍한 유행병환자들로부터 구워낸 것이 소위 천만관객시대의 맛난 뻥튀기였다. 천만관객이 본 영화인데도 숨은 일꾼들은 손가락만 빨아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는 설 자리조차 없다. 윗선은 당장 돈을 돌리기 위해 편식을 모른 척하고, 밑에선 자라오는 동안 길들은 입맛만 맞춰서 쓸어내지 못한 쓰레기더미를 섞어 맛나다 비빔밥을 비벼대니 나라 건강이 참 좋아질 터이다.
한류도 부풀려지긴 마찬가지였다. 우리 음악과 드라마가 인기몰이를 하는 동남아 나라들치고 전통문화가 아닌 돈으로 먹고살며 즐기는 생활이 우리나라보다 앞선 경우는 절대 없다. 중국만 해도 아직 상업방송문화가 우리보단 한참 뒤떨어져 있다. 일본만 이미 앞서간 나라임에도 닳고 닳은 상업문화에 질린 중장년 아줌마들이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눈이 벌게지곤 한다. 문화를 주고받으며 얻어낸 알짜배기 돈벌이가 아니라 생활이 뒤쳐졌을 때 일어나는 한때의 부러움과 우러름으로 미국문화에 젖었던 우리나라 기성세대와 같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그 돈벌이에 눈이 멀어 마구잡이로 무대를 꾸며 사고나 치고 도망가는 베짱이들은 그야말로 불에 구워 내 술안주나 삼고 싶었다. 소위 종합예술인 영화는 관객을 천만이나 동원하는데, 그 바탕이자 이웃인 출판과 음반시장은 망해버린 이상한 나라, 이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 우리의 현주소다. 뭐 하나 서로 이가 맞물려 알차게 돌아가는 아귀라곤 없었다. 어느 장애우를 들어 주머니를 채운 영화는 사연의 주인공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노모와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도 동네 주민들이 나선 새집마련에 땡전 한 닢 내놓지 않으니, 정말 누가 장애자인지 나는 불쌍한 마음만 앞섰다. 정 많은 동방예의지국이라니 개가 풀을 뜯어먹을 소리다.
올라갈수록 길은 점점 좁아지고 오름세가 솟구치듯 심해져서 잦아들었던 숨이 씩씩대며 다시 끓어올랐다. 자연히 헝클어졌던 마음이 잠포록이 가라앉았다. 이 고개만 올라서면 다른 봉우리들이 모두 보현봉과 문수봉 아래로 내려앉아 크게 힘들이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는 산등선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이겨낸 만큼 얻을 수 있음이 삶과 산은 크게 닮아 있었다. 무릇 글쓰기도 힘 있게 뻗칠 때와 쉬엄쉬엄 풀어갈 때가 다르며 따라가야 할 길이 있되 지름길은 그만큼 험한 데다, 편하면 편할수록 사람들이 북적거려 시들방귀만 나오고, 같은 길만 다니면 발은 빨라도 마음까지 지레 시뜻해져서 건중건중 지나치기 일쑤였다. 힘들어도 부릅뜬 눈에 선배의 뒤꿈치를 매달아 그 발치를 한 걸음, 한 걸음 따라잡았다. 이를 악물어도 다리가 휘청거리다 못해 숫제 바들바들 떨렸다. 몸뚱이가 바윗덩이만큼이나 무거워서 내 입에선 '죽겠네'하는 외마디가 잘근잘근 씹혔다. 다행히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서 걸음이 차츰 느려졌다. 예전 같진 않은지 “거추장스럽게 저 딴 걸 왜 들고 다니는지 모르겠어”하고 투덜거리던 선배도 손에 들린 스틱으로 몸을 밀어 올리며 힘겹게 발을 디뎌갔다.
머리 위로 아가리를 휑하니 벌린 대남문이 올려다보였다. 성벽 위를 오가는 사람들 몸통이, 눈높이가 올라가며 그 아래 문루 주위로 볕 바라기를 하는 떼거리들이 바글바글 드러나고, 성문을 지나칠 때부터 들썩이던 숨결도 고르게 가라앉는데, 워낙 웅성웅성 시끄럽다 보니 쉬어가기는커녕 자리를 피할 생각만 나는 불끈 치밀었다. 숱한 등산로가 겹치는 교차로 같은 길목인 탓이었다. 서울시민 절반인 5백만이 해마다 누벼대는, 단위 면적당 연중 탐방객이 가장 많은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니, 북한산이야말로 사람에게 치여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도 성벽 윗길을 타더니 내처 정릉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릉 일대와 구기터널 언저리, 아파트며 주택가가 다닥다닥 들어앉은 서울시내 북쪽이 늘어진 산자락 밑으로 빽빽하게 내려다보였다. 눈은 답답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책상물림으로 담배와 술에 찌든 찌꺼기들이 땀구멍을 통해 송송히 빠져나오는 싱그러운 느낌이 내 머릿속까지 맑게 씻어주었다. 힘들어도 이 맛에 산을 찾기 마련이다. 어디선가 야호 하며 길쭉하게 목청을 뽑아 올리는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울려 퍼지고, 우리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젖히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역시 산등선을 따라 이어진 성벽 길은 숨고르기가 한결 편하고 좋았다.
북한산은 지금 내 발 아래 산성 이름을 갔다 쓰고 있지만, 본래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렸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를 일컬어 고려 성종 때부터 봉우리 뒤에 아기를 업거나 뿔처럼 뾰족하게 솟았다는, 삼국시대 부아악(負兒岳)에서 부아 또는 횡악(橫岳)을 잇는 모두 모양을 본뜬 이름이었다가 일제의 꼭두각시인 대한제국을 맞아 갑자기 남한산성을 빗대 한강 북쪽에 산성을 품은 큰 산이라는 뜻으로 갈아 치웠다니, 아무래도 그들의 잔재가 아닌지 늘 의심스러웠다. 일제시대에는 아예 헌병대가 진을 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호랑이가 우글거릴 만큼 사람 발길이 드물어서 독립군과 의병이 붙박일까 두려웠던 그들은 사찰마다 불을 싸질러 백운대에 창살마저 둘러치고 철심까지 박아 넣었으니, 조선 숙종 때 겨우 반년 남짓 2킬로쯤 쌓아올린 북한산성이 천년 세월을 누누이 내려온 삼각산을 몰아내기란 뒷심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그 격이 남한산성과는 전혀 달랐다. 광해군이 손을 댔다가 인조가 경기도 광주에서 하남을 이어 성남까지, 2년여에 걸쳐 성을 쌓고 인화관(人和館)이며 연무관(演武館) 따위 행궁 자체를 통째로 세웠다가 군신의 예를 물어 쳐들어온 청나라에 맞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했으니, 또 다른 왕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북한산성은 어디까지나 산성일 뿐이었다.
“아, 이번에 후지산 갔는데, 좋더군. 온천도 좋고.”
기분 좋을 때면 누가 들으랄 것도 없이 내뱉는 혼잣말을 선배가 이죽거렸다. 일본 나들이라면 내게 어림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강의를 맡기 전까지 ‘문예세계’ 주간이자 소설가로 자질구레한 잡문마다 꾹꾹 눌러 써도 한 해 수입이 2천만원을 겨우 웃돌았던 선배가 “이래서 무슨 문학을 하겠어?”하며 싱겁게 툴툴거리곤 했는데, 들여다보면 소시민들의 삶에 새겨진 명암을 촘촘히 살피고 그것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를 불퉁스레 이겨온 소위 중산층 문학이라는 작품세계도 그 팍팍한 일상에서 옮아온 당신 이야기다. 우리나라 소설에선 오뚝 불거진 퍽 드문 작업이다 보니 선배만의 크고 높은 세계다. 당연히 같은 눈을 지닌 말동무가 없는 데다, 이른바 분단문학과 사회며 세태소설 이후로 구구절절 신변잡기 타령에 그때그때 한쪽으로 치우쳐 팔아먹기만 급급한, 말은 번드레하게 둘러치는 사탕발림들이 수두룩한 터라 당신은 가뜩이나 섬 같은 신세였는데, 내가 문하생으로 들어갔던 여름에 알음알음 건너갔던 일본에서 그곳 문인들과 어울려 “아, 필담(筆談)이 그렇게 좋은 줄 몰랐어. 말보다 더 나아”하는 재미를 붙여 해마다 다녀오곤 했다. 일본어라곤 인사 한마디조차 못하는 양반이었다. 글쟁이답게 말이 아닌 글로 통하는, 생각을 딱 건둥그리는 대화가 자연스레 더덜이 할 입말도 없어 꽤나 달가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일본은 우리나라와 문학시장부터 달랐다. 중앙이고 지방을 가리지 않는 출판사와 문예지의 자율등단제도가 곳곳의 지망생 모임인 동인회와 얼키설키 잇닿아 창작활동을 깐깐하게 부추기고 있다. 다양한 문학작품이 꾸준히 쏟아지고 독자층도 넓을 수밖에 없다. 책 역시 많이 읽는데, 전체 국민이 1년에 예닐곱 권씩은 꼬박꼬박 사들인다. 특히 헌책이 돌고 도는 양만 가리면 세계 최대라 이른다. 부러워하기에 충분한 현실이고 일본은 싫지만, 본 받을 것 하나 배우지 못할 양이면 역사를 왜곡한다며 삿대질할 건더기도 없었다. 그런 면면들이, 일본작가들의 폭넓은 관심사가 당신에게도 안타까운 한편, 아쉬움을 달랠 며칠 나들이를 나서게 하기엔 충분하지 싶었다. 생각을 공글리고 보니 저 딱딱한 표정으로 필담을 나눌 모습이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학생들도 무섭다며 피해 다니는, 언제나 화가 난 듯 짜증이 뚤뚤 넘치는 얼굴인데 상대는 툭하면 실쭉샐쭉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본 문인들이고, 더욱이 선배는 문단에서 키가 가장 크다는 덩치이니 그림이 아주 생뚱맞았다.
“어, 이리 가지. 좀 쉬었다 가자고.”
선배가 스틱을 들어 샛길을 가리켰다. 성벽을 벗어나 등성이에 덧쌓은 토성을 막 내려선 자리, 에이치자가 큼직하게 박힌 공터를 지나서 나무숲 어귀께, 벼랑 쪽으로 삐죽 튀어나간 커다란 바위가 드러누워 있었다. 벌써 누가 다녀갔는지 군데군데 오이껍질이 뒹굴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나는 펑퍼짐하게 주저앉아 볕을 쪼였다. 몸은 더워도 바람이 차서 머리가 서늘하니 기분은 아주 상쾌하지만, 열이 너무 빨리 식으면 몸뚱이가 빳빳한 가래떡처럼 굳어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입을 굳게 다문 선배는 배낭을 뒤적이고 있었다. 워낙 말이 적은 양반이라 처음엔 선뜻 곁을 주기가 무척 어려웠다. 술이나 한 잔 걸쳐야 두런두런 풀려나올까, 평소엔 입이 떨어져도 뚝뚝 분지른 말을 그나마 더 짤막하게 토막 쳐서 던질 뿐이었다. 말 많은 내가 붙어 다니는 꼴이 자못 신기했던지 시인인 배불뚝이 최선배가 “잘 생각했어. 너, 형 따라다녀서 말 좀 줄이면 글이 술술 풀릴 걸”하고 언구럭을 치기도 했는데, 아직 글말이건 글발이 내 성에 차지 않았다.
배낭에서 비닐봉지 속, 오이를 꺼낸 나는 꼭지만 따서 껍질째 덥석 베어 물었다. 속살이 물기를 그렁그렁 뱉으며 쪽빛 하늘 물을 고스란히 삼킨 양 달고 향긋하게 메마른 입안을 적셨다. 물외라는 옛 이름이 딱 알맞았다. 살랑살랑 옷깃을 들추어 알싸하니 땀을 말리는 바람도 좋았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고, 시장이 반찬이듯 온 몸이 쩍쩍 타들어봐야 보잘것없던 오이의 맛을 ‘자연’으로 느낄 수 있으니, 사람 속내란 참 반지라운 데다 별쭝스러웠다.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고 물외를 우걱우걱 씹어 삼키는데, 선배가 대뜸 “자”하며 홍옥 한 알을 들이밀었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불그데데한 사과를 넙죽 건네받았다.
“웬 거예요, 선배님 배낭에서 오이 말고 다른 게 다 나오고?”
“뭐 냉장고에 굴러다녀. 누가 먹을 사람 있나. 없어, 아무도.”
학기 중에 혼자 집을 지킬 부인을 떠올리며 아무리 퉁명스러운 선배라도 그리울 만하겠다 싶다가, 오히려 일벌레인 남편 그늘에서 헤어나 한가로이 독서며 나들이를 챙길 수 있겠지 싶어 나는 말을 아꼈다. 어느새 중학생이던 아들이 대학을 다니다 군대에 불려갔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10년이면 요즘은 강산이 서너 번쯤 바뀌고 글쟁이에겐 자기 목소리인 문체가 들어설 만큼 너울이 큰 시간인데, 여전히 손과 머리가 따로 놀아서 대학 때부터 지어 붙인 ‘세상을 읽는 사람’이란 한글 자호(自號)만 낯부끄러웠다. 시간이 나 자신만 저만치 비껴간 듯, 문하생들이 멀거니 지켜보는 앞에서 발기발기 찢겨졌던 첫 습작만큼이나 씁쓸한 기분이 울컥 일어났다.
“민수, 언제 면회는 다녀오셨어요?”
“어, 가야지. 깎아, 안 씻고 그냥 넣었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화물연대는 내년 2월까지 한시적 업무복귀를’하는 소리가 우리 뒤쪽으로 웅얼웅얼 지나갔다. 배낭에 라디오를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대개 나이가 지긋한 노인네들인데, 7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가 논일을 안 나갈 때면 목침삼아 베다시피 세상 돌아가는 소리를 항상 끼고도는 습관을 내게도 넘겨줬지만 산속에선 나무인 양, 돌인 양, 바람인 양 그 안에 묻혀 숨을 쉬는 게 더 좋았다. 산에서 사람은 손님일 뿐이다. 사랑방에 머무는 마음으로 이 큰 주인에게 기대고 얹혀서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예술이며 삶은 자기싸움을 통해 그 울을 이겨낼수록 구해지는 몫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픔이나 슬픔 따위 감정만 애면글면 둘러대 봐야 제 배설물로 더럽혀진 우물 속에 갇혀 떼를 쓰는 시시껄렁한 메아리이기 십상이었다. 자신이 우물 밖에서 버텨야 항상 깨끗한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 우물 속에 들어가 직접 길어야 할 때는 이미 앙금이 찐득찐득한 흙탕물이니, 남들에게 마시라고 내놓지 못해 끼리끼리 놀아나는, 그나마 자기 똥오줌물이 제일 좋은 줄 아는 어리석은 하마처럼 누가 넘어올까 툭하면 성난 입을 들이대며 제 웅덩이를 떠나지 못한다.
예술이란 저마다 다른 그릇일 뿐, 사람과 그 생활을 면면이 담아낸다. 그만큼 삶과 예술은 곧이곧대로 닮아간다. 내 옆으로 바위 틈새를 비집고 자라난 아름드리 소나무도 밑동이가 돌에 먹어 들어간 그 아픔을 이겨낸 끈끈한 생명이, 신비로움이 두드러져 보이는 법이다. 어차피 세상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람에게 발길질을 해대는 뿔난 망아지다. 치받고 날뛰는 세상을 어르며 달랠 틀거지가 머리에서 손맛으로 우려져 나와 켜켜이 쌓일 때 삶은 진국이고, 예술이란 그릇에 떠 담겨질 수 있다. 사과껍질 하나를 깎아도 서툰 칼질은 내 손만 다치기 쉬웠다. 곧 마음도 상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홀로 공비처럼 산타기를 즐기는 선배를 부득부득 쫓아왔을 때 동기들이 깎아낸 오이껍질을 일일이 봉지에 주워 담았더니, “버릴 건 버려, 가져가면 쓰레기야. 산짐승도 먹어야지, 뭐 하러 군더더기를 달고 다녀?”하고 다그치던 모습이 새곰새곰 다져졌다. 환갑만 넘기면 소설을 안 쓰겠다, 했으니 내년이 소설가로써 마지막일 터이다. 묵묵히 고물거리는 굵은 턱, 사뭇 꿋꿋하게 우러러보이곤 했는데 이젠 늘어난 눈 밑 그늘만큼이나 쓸쓸한 눈치가 자못 드러나 보였다.
김밥은 북한산대피소에 가서 먹을 참이라 대성문 방향 오솔길, 밋밋하게 오르막내리막이 구불구불 이어진 소나무 숲 속으로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성문을 지나면 보국문, 이어서 대동문, 그 다음에 대피소까지 쭉 힘들이지 않는 길이었다. 여름에 찾으면 가장 좋은 등산로이기도 했다. 불가마나 다름없는 바깥 열기에 찐득찐득하게 늘어졌던 몸이 나무그늘 아래 들어서는 순간, 솔향기를 가득 품은 차가운 공기가 달려들어 숨구멍이 쩌릿쩌릿 움츠러들고 땀기 하나 없이 가벼워지다가 시들먹하던 살갗이 간질이듯 피어나는 생기라니, 한마디로 허물을 벗은 느낌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봄에 솔솔 날리는 송홧가루도 좋았다. 한탕강을 거슬러 올라간 고석정 계곡에서 피어나는 송화의 운무만큼 짙진 않지만, 5월이면 황금빛 꽃을 피운 암송들이 바람결에 싯누런 꽃가루를 흩뿌려 걷는 동안 들숨으로 톡톡 쏘는 향기가 가득 채워지곤 했다. 노인네들은 아예 깔개를 깔고 누워 송홧가루를 빨아들이듯 마셔댔다. 고혈압, 지방간, 당뇨병 나부랭이에 좋기 때문인데, 혈관을 넓혀 피를 맑게 해주다 보니 무엇보다 치매예방과 노화방지가 그들을 불러들이는 이유일 것이다. 여드름 치료예방 화장품을 만들 만큼 피부미용에도 좋다고 한다. 여자들이 눈을 번뜩일 사실인데, 젊을수록 산을 모르고 이 높이까지 올라오는 경우도 몹시 드물었다.
산도 그렇지만 소설쓰기를 깨치게 허울을 까발리고, 송홧가루만큼이나 좋은 우리말을 알알이 들이마시도록 떠다밀어준 양반, 집으로 돌아가서 어린 아들을 앞세워 동네 목욕탕을 찾는 게 유일한 낙이라며 술기운을 다스리던 당신은 그 시절에 나에게도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첫 습작이 쓰레기로 버려진 뒤, 속으로 지 까짓게 하고 치를 떨기는 했다. 누구처럼 술에 취해 울고불고 나대진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실험극장’에서 연기자로 구르며 무대를 걷어낼 때마다 텅 빈 허허로움에 사로잡혀 아등바등 술을 퍼마시던 겉멋은 내게 ‘가출’한 지 오래였다. 연출로 돌아설 때도 그랬듯 똥배짱만 감사나웠다. 그 큰 코를 납작하게 짓뭉개주겠노라 이를 갈아대다가 정작 스승의 작품 하나 읽어보지 않은 우셋거리라 작품집을 몽땅 사들이고 보니, 정말이지 멋대가리 없게 쓰는 덴 대한민국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만했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무뚝뚝한 성질 그대로 녹여낸 문장의 힘이 핏줄처럼 불뚝불뚝 짚였다. 그 나름 제 맛이었다. 나만큼이나 짓짓이 외골수임을, 좋은 말로 야젓한 ‘선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극예술연구회 활동을 한 데다, 한때 희곡도 썼다니 가재는 게 편이라고 머리꼭지를 따갑게 찍어대던 부아가 은근슬쩍 날을 숨겼다.
두 달 만에 제주도 장군설화에 얽힌 두 자매의 삶을 괴발개발 옮겨낸 단편을 내가 들이밀었더니, 아 하는 창을 내지르며 “가르치는 보람이 느껴져. 어, 대단해. 단박에 이렇게 뒤바뀔 수 있나, 응? 이럴 수도 있는 모양이야. 정말 좋아졌어, 아. 그래 소설은 이렇게 써야지”하고 선배는 아니리 사이사이 추임새에 굼뜬 너름새도 야지랑스레 추어댔다. 첫 습작이 워낙 개판이었던 터라 그만큼 뒤집기가 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내 마음에 차지 않아서 또 개망신당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소재부터 장치며 주제까지 추켜세우기만 하니 시뻘겋게 물들었던 홍당무 속으로 이 양반이 약을 올리나 하는 칼이 슬며시 들어와 박히기도 했다. 당신을 이기겠다며 깝죽거린 시간이 그로부터 2년, 작품을 발표하자마자 이제 알아서 쓰라고 내몰았지만, 지금껏 그림자도 좇지 못한 나는 제자리걸음에 숨만 껄떡대는 떨꺼둥이였다.
선배가 “자네…”하고 부르더니 내 곁으로 걸음을 맞춰서 넌지시 주절거렸다. “요즘 글 열심히 쓰나? 빨리빨리 우겨 하나 묶어. 이것저것 다 따지지 말고. 너무 늦어.”
“쓰기야 쓰죠. 글말, 글발이 겉돌아서 탈이지만.” 속으로 혀를 차며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올해는 다 갔고, 내년에 작품집 한 권 더 내셔야죠?”
“누가 내 글 읽나? 그만 쓰고 남 글이나 읽지 뭐. 잡문 말고 소설 써, 소설.”
나도 질세라 “선배님 것도 안 읽는데 제 걸 누가 읽어요? 아무래도 전 그른 놈 같아요, 글쟁이로 남기는. 글보단 나대는 짓을 좋아하니….”하며 씁쓸하게 말꼬리를 말았다.
“무조건 쓰라고. 글 쓰는 게 작가지, 읽힐 걸 따지는 건 장사꾼들 할일이야.”
“예, 알죠. 저도 알아요. 써야죠, 선배님 말씀대로 주구장창.”
가슴이 빡빡하니 답답해서 나는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한갓진 숲길은 침목을 박아세운 얇은 계단으로 이어져 둔덕을 넘고 오른쪽으로 암벽을 끼고돌면서 좁아졌다. 글이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비비꼬였다고 할지, 쓸거리는 많았다. 일명 시디에 옮겨놓은 아홉 편 말고도 줄거리만 간추려서 잡아놓은 이야기는 마흔 개가 훌쩍 넘었다. 술자리에서 푸지게 취하면 꾸중인지, 칭찬인지 곧잘 “어, 자넨 진짜 이야기꺼리 하난 무궁무진한데 글을 너무 아껴. 아는 게 너무 많아도 성질 사납다고. 그게 탈이야. 연출이라 그런가? 쓰라고, 주구장창”하며 나를 챙기곤 했던 선배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대학 1학년 때 극단대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무실로 불러들여 그 느물느물한 말투로 한껏 느릿느릿, “너 보니까 말이지, 분석력이 아주 좋더구나. 연기보다는 연출이나 비평을 하는 게 좋겠어.”하며 코에 걸친 안경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최선배가 종종 “머릿속에 백과사전을 통째로 넣고 다니면 뭐해?”하고 나를 다그치는 닦달질도 매한가지였다.
아는 것 많음이 곧 글발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생각에 치일 수 있지만, 나는 발품 없이는 글을 쓰지 못하는데다, 방학 때면 하루 열댓 시간씩 버텨내니, 엉덩이가 가벼워 입심보다 ‘글심’이 딸리는 쪽은 또 아니었다. 글을 쓴다는 놈이 책상자리를 지킬 때면 정작 연출가에 가까웠다. 더넘차게 멋을 부리는 그림은 지나치게 연극적이라 너저분하고, 얼개는 단막드라마 티가 시글시글하니 선뜻 어디다 내밀기가 어쭙잖았다. 문장은 나 자신이 짜증나다 못해 지긋지긋했다. 하나를 녹여 넣기 위해서 예닐곱 개씩 예문을 만들어 고르고 골라서 다시 비틀어 짜는 갑갑함이라니, 왜 그리 손이 큼직큼직하게 놀지 못하는지 내 배를 갈라 속을 들여다보고 싶기도 했다. 정말이지 글쓰기란 시크무레한 사람 속을 몽땅 뒤집는 수술 같았다. 좁은 바윗길을 내려가는 선배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30년 동안 글만 다듬어온 그 댕댕하고 옹골찬 속내가 새삼 한없이 부러웠다.
바윗길 밑 내리막은 돌이 깎인 모랫길이라 발이 쭉쭉 미끄러졌다. 끌려 내려가는 몸무게를 따라 나는 흙벽을 디디며 지그재그로 종종걸음을 쳤다. 막상 내세울 만한 작품 하나 끼적이지 못한 채 여기저기 잡문이나 써대고 학생들이 듣는 시늉도 안 하는 강의로 진이 빠질 때면, 끝 모를 삶의 구렁텅이로 가뭇없이 빨려드는 억울함에 몸서리를 치곤했다. 모든 것이, 세상에 대해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 잘난 돈은 물론이고, 부동산 투기를 막겠노라 큰소리만 떵떵 치면서 연극쟁이와 글쟁이의 가난은 무슨 마녀사냥인 양 십자가에 못질을 해놓곤 국민이 안겨준 이익으로 영화나 방송 연기자, 프로운동경기 선수들의 몸값만 가없이 올려줘 그들이 강남땅을 투기로 몰아대는, 걸핏하면 어린 학생들 등이나 쳐 먹는 연예계 사기꾼들과 봉투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그 바닥의 생리 따위, 이 모든 것들을 글로 질근질근 씹어댔다. 학생들이 해대는 짓거리에도 나는 이를 갈았다. 몸뚱이 가꾸는 덴 빗을 내서라도 칼을 들이대면서 책읽기는커녕 페이퍼는 베끼기나 해댄 채 끼리끼리 짝짓기에나 꺼드럭거리는, 그 썩어빠진 바람잡이들이 뭐 하러 대학을 다녀 부모와 멍청한 제 머리를 고달프게 들볶는지, 삶을 아메바처럼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 나라의 앞날을 짚어보는 잣대이자 젊은 지성이라는 대학교 도서관 베스트셀러 1, 2위도 무협지와 판타지라니 이런 교육을 해서 무엇이 나아질지, 쉽고 편한 제 입맛이나 따지며 게임과 놀이에만 빠져 취업공부가 전부인 그 잘난 ‘직업학교’에 질릴 대로 질려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도 대개 껍데기였다. 일제시대 일본학자들과 친일파들이 우겨넣은 자료를 짜깁기해서 학생들에게 교과서랍시고 가르치며 말로만 역사청산을 외쳐대니, 그들이 “너희나 잘해라”하고 콧방귀나 뀔 수밖에 없었다. 지난 6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답답한 노릇이었다.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도 마찬가지였다. 시베리아개발이라는 잔칫상이 떡하니 차려져서 차후 철도가 동유럽을 가로질러 터키의 이스탄불까지 내달릴 때 오고가는 물류이동으로 봇물이 터질 텐데, 과거 일본도 그 넓은 땅덩이를 마음껏 아우르지 못했고 우리 같이 좁은 나라조차 지역주의로 자전거 체인이 빠져 헛돌아대니, 150개가 넘는 소수민족들에게 경제개발이라는 모이를 골고루 뿌려주지 못하면 가뜩이나 돈맛을 본 사회주의가 흔들릴 판인 데다, 위구르족과 더불어 독립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드높은 연변의 조선족들을 입막음해버릴 꿍꿍이로 마침 목안에 가시였던 간도를 달게 집어삼키기 위해 그 더러운 손을 들이민 마당이다.
이제 일본은 아주 신이 나서 설쳐댈 게 뻔하다. 중국이 앞장서서 굵직한 붓으로 숫제 소설을 써대니, 해저자원을 노리고 독도에 군침을 질질 흘려온 똥개가 역사를 갈기갈기 물어뜯기란 내 눈에 안경처럼 훤히 내다보였다. 겉으론 서로 이를 갈아대지만 뒤로는 짝짜꿍을 맞출 사기꾼들이긴 똑같았다. 북한이 움쭉달싹 못하는 입장이니 중국과 일본은 어차피 질질 끌려갈 소위 6자회담을 핑계로 뒤에서 호박씨나 까다가 동북아 물류시장 앞머리에 서겠노라며 우리가 해마다 15조씩 알차게 적자를 토해내며 국민의 피를 말리는 인천공항과 고속철도가 녹이 슬어 무너지는 꼴을 보면 뒤로 자빠져 배꼽이 빠질 놈들이었다. 현실은 그야말로 20세기 초에 벌어졌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기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만 모른다. 우리만 정신없이 먹고, 싸고, 운동경기에나 국위선양을 내질러대며 누구는 근근이 벌어 먹기 위해 하루를 보내고, 누구는 외국까지 부동산 투기를 끌고나가 떨어진 그 나라 땅값을 알뜰하게 챙겨줘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이름을 높여줬다.
굳이 역사를 들추지 않아도 책을 안 읽는 나라치고 잘 된 경우가 없었다. 일본도 그렇지만, 중국은 해마다 적어도 열 권 이상씩 책을 읽는다. 우리의 잘나고 멋진 ‘국민들께서는’ 작년에 겨우 ‘0.47’권을 눈물겹게 고맙도록 ‘읽어주셨다.’ 얼마나 감사한지 몸 둘 바를 몰라 다리 힘이 빠져서 거품을 빼문 채 이대로 산길을 따라 고꾸라질 판이다. 자식에겐 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라면서 아이가 꿈이 소방관이라면 입을 막아버리곤 그 꼬맹이를 이해시키는 너른 아량이며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연기력이라니, 연출가인 나도 기가 질리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 정치꾼들이 왜 그리 거짓말을 잘 하는 지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세계 철학학회에서 동양의 칸트라 섬기는 퇴계 이황에 대한 논문은 우리나라에서 한 해 너덧 편을 넘기지 못하는데, 일본과 중국에서는 50편 이상씩 쏟아진다. 공자만 붙들고 늘어져서 그 귀신이 바짓가랑이 찢어진다며 투정을 부릴 만하다. 얼굴 팔린 인사가 티브이에 나와서 떠들썩하게 알려주면 그것만이 진리인 줄만 아니, 그야말로 방송영상이 신앙인 사이비 종교국가가 틀림없다. 작은 땅덩이에서 눈칫밥이나 먹어온 피를 못 속이는 모양이다. 더 멀리, 더 넓게, 더 깊이 생각하기는커녕 그저 자기 우물 속에 들어앉아 잔머리 굴리는 짓만 잘 한다.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나는 안 들었다. 정말이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댈 때마다 죽어라죽어라 하는 아우성이 귀를 잡아 뜯었다. 언제까지 일본이나 중국을 부러워하면서 마치 고까운 열등감인 양 때마다 아우성이나 치며 벼르지도 못할 담금질만 해댈지 답답하고 깜깜한 노릇이었다. 피가 펄펄 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세상에 소설을 써야 하는지 된수만 커져서 끝내 그물처럼 얼기설기 펴져나간 생각이 도통 다독여지질 않았다. 세상이 미쳤거나 내가 미쳤을 뿐이다, 하는 우격다짐으로 나날이 술만 퍼마시곤 했다.
위봉을 끼고돌자 보국문으로 이어진 성벽 끝자락이 내려다보였다. 문득 선배가 걸음을 늦춰 터벅거렸다. 고개를 살긋이 숙인 얼굴에 무언가 깊은 생각을 괴어 올리는 듯했다. 은퇴 기념 작품집을 묶을 수 있도록 다리품을 팔아봐야지 하던 나는 글쓰기에서 물러나기엔 아직 힘이 넘치고 당신이 켜켜이 앉혀온 작품들이 그 터가 좁아터진 우리나라 문학 갈래를 위해선 아직 더 엮여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새곰새곰 풀어갔다. 좁아터진 논바닥을 서둘러 넓혀야 했다. 여럿이 배불릴 터 닦기를 해야 하는데, 주인은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 손을 못 댄다며 물꼬를 틀어막고 버티니 멀지 않아 소작인들은 굶어죽든가, 다 도망을 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쑤셔댔다. 선배가 혼잣말하듯 주섬주섬 말을 흘렸다.
“소설, 너무 어렵게 대하지 마. 자네 보면 꼭 고시 공부하듯 글을 쓰데? 너무 완벽하려고 기를 쓸수록 욕심에 치이지. 스스로 무너져. 나도 그랬었어. 그래, 난 우겨왔잖아? 그냥 우겨넣어. 30년을 그렇게 버텼어. 대단한 이야기꺼리 하나 없이. 아무도 안 읽어도.”
“우길 깜냥이라도 되면 우기죠. 아무나 우기 나요 뭐.”
“자넨 자네 게 있잖아. 그거면 돼. 일단 쑤셔 넣고 나서 생각하라고.”
선배는 다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퍼뜩 나는 역시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날카롭게 쑤셔댔다. 없는 재료로도 맛을 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요리사가 아닌가! 속으로 저 양반이 또 되통스레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군, 하며 나는 웃음을 피식 터트렸다. 선배가 항상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러니 누가 내 글 읽겠어? 이런데도 글을 써야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내가 왜 글을 쓰지, 응? 왜 이러지?”하는 심드렁한 넋두리를 내두르곤 했는데, 예전엔 존경 받으면서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작가로써 그 신세타령인 줄만 알았더니, 지금 더듬어보면 제자리를 지켜온 책상물림조차 게으름이라고 몰아세우는 그 삐딱한 말투로 세상을 흉본 게 아닌가 싶었다. 무슨 뜻으로 ‘쑤셔 넣고 나서 생각하라’고 나 같이 못난 놈을 꼬드겨대는 지 어렴풋이 알만 했다. 문학은 평생 기어올라도 꼭대기가 없는 산이고 삶도 그렇다. 결국 그 순간에 다 이루려 하기보다 게워놓고 스스로 깨볼 일이지 미리 두려워할수록 생각만 더 널을 뛰어 중심부터 무너지기 일쑤다. 당신이 아니라도 선배들은 ‘무작정 쓰고 보라’는 가르침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문학에 대한 경외심이 지나치면 차마 자기 손에 쥐고 마음껏 주무를 수 없으니 일단 저질러놓아야 더 나아가든, 머물든, 꺾여버리든 취할 바가 분명해지는 뜻이었다. 열정을 게워내야지 미리 주저앉히지 말라는 소리다.
산을 즐겨 타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뚫고 싶은 욕심이 못내 컸다. 어디나 길은 있되 아무나 탈 수 없어서 자신이 길러놓은 발품이며 굳은살이 그 산을 올곧고 널리 아는 만큼 오르내릴 수 있는데, 욕심만 사나운 등반사고가 대개 그렇듯 잘 알지도 못하고 우겨내는 글쓰기나 삶은 제 마음부터 다잡지 못해 혼쭐이 나곤 했다. 멋만 성길수록 이기지도 못할 험한 길을 골라잡기 쉽다. 보기 좋고 멋들어진 풍경일수록 길은 더 가파르고 어렵기 마련이다. 모르면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하듯 내 생각을 모조리 몰아넣으려는 투망질부터 거두어야 했다. 투망질도 던질 줄 아는 사람에게나 쓸모가 있었다. 할 줄 모르면 차라리 한 마리씩 낚시질이나 할일이었다. 내가 소설이라는 산에 대해 아는 만큼, 더 하지도 덜 하지도 않게, 아는 길을 일단 올라가 능선을 타고 그 높이에서 보이는 풍경이 새록새록 다져지도록 끊임없이 발을 놀려야 했다. 고산자(古山子)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을 열 번이나 올랐다 하니, 이루고자 하는 열정 앞에 무너지지 않을 벽은 없었다.
내 목에 언제나 시퍼런 칼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임종국(林鍾國)선생, “글 안 쓰고 술이나 퍼질러 마시는 글쟁이 놈들은 다 숙청해야 해!”하고 유리창에 머리를 박아 곱상하던 얼굴을 스스로 뭉개버린 그 양반이었다. 전 재산을 털어 ‘민족문제연구소’를 일으키고, 평생 친일문제 연구라는 연자매를 홀로 중뿔나게 돌리는 동안 이 땅의 역사학자와 지식인이란 인간들은 어디에 나자빠져 있었던가! 나 자신부터 먼저 잡아 쳐 죽일 놈이다. 그 양반이 이상전집(李箱全集)까지 냈던 문학도임에도 뉘우침조차 없이 나라를 휘어잡은 친일파들의 두꺼운 얼굴 가죽을 벗기기 위해 화장품외판원부터 약장수까지 온갖 궂은일을 마다 않고 그 연구에 목숨을 걸었으니, 감히 이 썩은 낯짝을 들어 하늘을 볼 배짱이라곤 없었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그저 겉멋이고 이기심일 따름이다. 자기 울에서 자신을 스스럼없이 버릴 줄 알아야지 그 벽만 바라보며 머리를 찍곤 아프다고 발만 동동 굴러봐야 저 혼자밖에 알아줄 사람은 없었다. 임종국, 그야말로 우리가 깊을 수 없는 빚을 고스란히 떠맡은 이 시대의 마지막 독립군이자 글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보여준 진정한 글쟁이였다. 글을 써야 한다. 잘 쓰건, 못 쓰건, 누가 읽든, 읽지 않아도, 쓴 소리건, 단 소리건 무릇 글쟁이이고자 한다면 글로 써서 싸우고 이겨갈 노릇이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드솟게 걸어가는 선배를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떡갈나무와 너도밤나무가 우겨진 길을 앞만 보고 다리를 쭉쭉 뻗고 있는 당신, 무슨 대단한 글을 쓰겠다는 욕심이라곤 없이 그저 자신이 일상에서 느낀 삶의 모습을 소시민답게 녹여온 저 양반이 오늘따라 더 큰 산으로 느껴졌다. 평생 싸우듯 산을 타온 걸음걸음이 작품 그대로이니, 이제 따뜻한 아랫목에서 남의 글이나 읽을 때면 발이 무척 더뎌질 지도 모른다. 그때도 나는 한결같이 뒤에서 당신을 쫓아갈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어떠랴, 자신만의 크고 높은 그릇을 오롯이 빚어냈으니, 묻혀갈 흙은 다르다 해도 그 마음자세만큼은 아직도 깨우쳐주기를 바라고 싶었다. 소설이란 ‘나는 학교에 갔다’하는 뻔한 사실이 아니라 ‘나는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다’하고 적절한 한정과 돌출상황을 던져주는 것이듯 뜻대로 이루어지기만 하는 인생은 절대 없었다. 한 번 물러서면 밑도 끝도 없이 주저앉기 쉬웠다.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책상머리에서 체력싸움을 벌이는 노동이면서 돈은커녕 신선노름으로 휘둘리는 눈치꾸러기에 정말이지 도 닦듯 뛰어넘을 공부와 더딘 과정은 코앞도 안 보이는 안개 산을 타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서 수십 번은 넘어지고 떨어지며 아닌 말로 글이 아니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영락없이 어둠 속에 벌이는 그림자연극이다. 배우 혼자인 모노드라마라 해도 숨은 일꾼들까지 적어도 열 명씩 돌아가는 연극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어주고 당겨줄 수 있지만, 문학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궂은 산행이었다. 아직 삶도, 글쓰기도 나는 산중턱에도 이르지 못했다. 올라야 할 산이 있으니 오를 뿐 더 많은 생각은 헛힘만 뺄 뿐이었다. 나는 마음속에 앙앙한 다짐을 꿍쳐 두고 선배를 쫓아 다시 발걸음을 내질렀다. 이제 겨우 보국문에 다다랐을 뿐이다.
첫댓글 에... 수필로 올리지 않음을 탓할까 싶어 굳이 토를 달자면, 그냥 '썰'을 풀어낸 겁니다. 저번에 선배랑 산에 갔을 때 생각한 바가 많아서 쓰고 싶어 벼르다가 그냥 하룻밤 꼬박 새워 선배 말대로 우겨 넣었을 뿐인데, 수필처럼 있는 그대로 쓴 글이 아니라 일부러 의도한 설정이 있어서 소설로 올립니다. 이젠 자러갑니다. 하도 정신없이 끼적여서 시제불일치가 꽤 있을 듯한데, 자고 나서 손을 보겠지만 어쨌든 소설이랍시고 올렸으니 양껏, 마음대로 씹으시기 바랍니다. ㅋㅋ 입담으로 풀기도 힘들군요.
세상 형 작품 잘 읽었습니다. 저희 학교가 북한 산 아래 있는데 참 등산객들이 많이 다녀요. 그런데 저는 북한 산 곳곳에 있는 지명들은 생소하네요. 그리고 형 저 소개팅 좀 시켜주세요.
소개팅이라고라...? 내 딸들 중에 임자 없는 애들이... 그런데 딸을 소개해주려면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나? 안 그럼 맞아 죽을 텐데..ㅋ
글 잘 읽었습니다. 갑자기 소설가 이윤기씨의 숨은 그림 찾기1 이란 단편이 생각납니다. 윗 소설 뿐만 아니라 여기 저기 올려 두신 글들을 가만히 읽다 보면 꼭 그 분 문체가 떠오릅니다.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하룻밤에 소설을 완성할 수 있는 부지런함은 어디에서 나오시나요? 해박한 지식을 담기도 힘들어 골골대는데 부지런함까지 배워야 하니 게으른 지망생은 너무 힘이 드네요. ㅋ 글만 읽고 그냥 갈려고 했는데 하룻밤에 완성했다고 하니 부러워서 몇자 남깁니다. 아. 이윤기님 소설에서 일모선생이랑 하사장인가 하는 두 인물을 닮으신것 같아요. 님을 본적은 없지만 어째 괴짜 같은 느낌이 드네요. 절대 나쁜뜻 아님.ㅋ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해요. 저 자신이 아직 문체라고 내세울 바가 없는 문장력이라 굳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할 수가 없어요.ㅋ 아, 그리고 저 괴짜는 맞는데, 좀 안 좋은 쪽으로 괴짜예요. 하룻밤만에 완성이랄 순 없는 게 평소에 메모를 자주 해둔 것에 나머진 그냥 평소에 제가 입에 달고 다니는 이야기들이에요. 그걸 '노골적인 계몽주의 드러내기' 설정으로 우겨냈을 뿐... 소설도 아닌걸요. 문학적 완성도에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이야기 자체 전달만 주력했지요. 이윤기라... 글쎄.^^ 기분 나쁘진 않군요, 전혀!
흐흐흐, 틀린단어를 찾는 이 쏠쏠한 재미란.[인사치례], 눈에 [띠기]는 했다,[띠게]는 밑에 한 번 더 나온다,사전이 없어 바로 확인은 안되지만 [지긋이]와 [지그시], [개발새발]과 [괴발쇠발]은 좀 애매하다.
음... 감사합니다, 형님! 지금은 밥 먹으러 나온 길이고, 병실에 아버님 혼자 계시니 차후 살펴보고 수정합지요. 원래 그 재미가 쏠쏠하지요. ^^
아껴뒀다가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관촌수필의 경우처럼 연작물이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혹시 다음에는 보국문 이후의 코스로 이야기가 이어질까? 아니면 다른 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까? 글을 읽으며 많이 배웠습니다. 제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은 절감하게 되었네요. 사실 무척 게으른 편이라..... 글에 나온 것처럼 소설 작품을 우겨내려고 해봤는데 잘 안되네요. 거의 4일 동안 10줄 이상 못나갔어요. 잠시 포기모드로 돌입중, 결말부분이라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세상님이 박박 우기면 뭐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보기에 이 글은 소설방이 아닌 수필방으로 옮겨야 마땅하다. 이게 무슨 소설인가? 줄거리도 없고 감동도 없다. 이야기의 주제도 중구난방 널뛰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단지 있는 것은 사소한 백과사전적인 지식과 시니컬하게 독자를 가르치려는 의도 밖에 안보인다. 그래서 내 눈에 이 글은 수필에 더 가깝다. 아니 수필이다. --;; 소설이란 모름지기 작가가 화자 뒤에 있어야 한다고 안다. 물론 작가와 화자가 동일시 되는 소설도 있긴 있지만 이 글은 전적으로 화자 앞에 작가가 있다. 짐작에 게시판 상의 가독율 때문에 수필방이 아닌 소설방에 올린 것이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하나 더 시비를 걸면..... 문장이 왜 이리 길어? 중문에 복문에.... 초고라고 짐작은 하지만.. 비문이 너무 많다.
틀린 말 아님. 오직 하고 싶은 이야기 자체만 우겨 넣었을 뿐이니까. 주제 자체가 없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의심할 필요 없이 그 이야기 자체의 가독성 때문에 소설로 올린 의도도 있었음. 문제는 '있는 그래도 담은 내용'이 아니라서 수필로 올리긴 꺼림칙했고, 이야기 자체를 앞세운 만큼 작가가 앞서게 설정했으니 정확하게 본 것임. 있는 그대로라면 수필로 올렸지. 전에 이야기했지만, 단문을 좋아하던 놈이 갑자기 중문, 복문이 좋아져서 그대로 우겼는데, 비문이 있나? 지금 병원에서 돌아와 정신 없고, 따로 더덜이하고 건둥그려서 소설답게 수정할 계획임.
세상을읽는 사람님의 글은 제가 잘 안 쓰는 단어들을 많이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글을 살려 쓰자는 의도인가요? 아니면, 이제 습관적으로 쓰는 일상의 단어들인가요?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수필이든 소설이든 상관없이 잘 읽었고...제게는 열심히 글을 쓰자는 세상님의 세뇌가 먹힌듯 합니다.
ㅋ 기어코 우겨다짐의 희생양이 되시는군요. 우리말 사용은 글쟁이로써 덕목이자 기본인데, 외래어 사용에 눌려 지나치게 사장된 면이 짙지요. 우스운 게 시에서는 우리말 사용이 좋거나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소설 등 산문에서 우리말 사용은 낯설게 대하는 면이 독자들에게 왕왕 불거져요. 우리말을 곧잘 우겨낸 작가로 김소진선배를 꼽을 수 있는데, 보통 독자들은 사전 찾아 읽어야 하는 단어들도 많지요. 그만큼 우리말을 실생활에서 다스리지 못한 면이 커요. 글말이지만, 일부는 자주 사용하다 보니 입에 밴 입말이기도 해요. 그저 글 좀 열심히 써보자는 제 자신 우격다짐이라 별 것 없는 이야기예요. ^^
그렇군요, 좋아요. 우리나라 사람들 우리말부터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요. 물론 저부터가 그렇고요. 버리기엔 아까운 우리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진짜 많지요. 제 소원 중에 하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제 국어대사전을 다 독파해서 단어노트 다섯 권쯤으로 묶는 건데, 게을러 빠진 데다 연애질에 바빠 언제 할는지... 연애요? 글쓰기랑 목하 열애 중이지요. ㅋㅋ
작지 카페가 아니라 상상플러스 올드 앤 뉴 시청자 게시판에 온 듯한...ㅋ
죽어있는 우리글을 살려 쓰는 것도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뭔 소리야? 상상 플러스 올드 앤 뉴 시청자 게시판이라니??? 알듯 모를 듯 늙은 개소리라는 뜻인감? ㅋ
'편재' 말은 꿈보다 해몽이라는 소리예요, 형님. ㅋㅋ 소설도 아닌 것을 이래저래 말한다고... 맞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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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태 아저씨씩이나... ㅋ 그 양반에게 한고은님이 그랬다고 일러야겠군요. ㅋ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아직 뚝 부러진 제 문체랄 게 없다보니 글 내용에 따라 휘둘리겠지요. 새해 언제 뵐까나...? 이제 대학 새내기인 어린 여자친구들이 만나자고 줄줄이 대기 중이라 일단 스케줄부터 학인하고... ㅋㅋ 농담이에요. '편재'야, '야전' 동생 말대로 소개팅시켜주랴??? ㅋ
어, 아직 미혼이세요? 아니면 그냥 친구를 원하시는지? 친구라면 '편재'나 저나 다 친구해드릴 수 있지요. ㅋ 애인이 아는 여자, 특히 어린 여자친구들 다 정리하라고 눈치 줘서 신경 쓰여요. 그냥 친구들인데, 뭐가 어때서... 흠, '편재'에게 '한가은'님 나이를 물어보고 주변에 사내망신 안 시킬 수컷이 있나 살펴봐야겠군요. 전 아는 사람들은 많은데, 20대엔 주로 3,40대 연배들과, 지금은 '고딩'이나 대학생 친구들과 어울려요. ㅋㅋ
'편재'가 소문이 무서워요? 그거요, 운영자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일 거예요.^^ 저도 운영자나 지기일 땐 독재자, 독불장군 운운하며 심지어 협박 메일도 숱하게 받았거든요. 좀 시니컬하게 굴어서 그렇지 저보다 더 여리고 사람냄새 그렁그렁한 놈이에요. 저야말로 얼마나 꼴통인데요. ㅋ 왠지 '한가은'님이랑 대화하다 보면 '르네'님이라는 우리 회원이 생각나요. 그림을 그리던 시를 습작하는 분인데, 아마 지금 인도에 있지 싶어요. 장기간 외국에 나간다고 살졌으니. 30대에 20대 외모인데... 마음은 10대가 아니라서 탈이지만...ㅋㅋ 귀 간지럽겠다. ^^
글을 읽으며 감동적이거나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만 얻어도 그 글은 성공한 거라 생각하는 데요, 그런 면에서 세상님의 글은 수필이 됐든, 계몽주의가 됐든 제겐 만족스럽습니다. 좋은 구절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세상님.
희생양이 또 한 사람 늘었군요. ㅋㅋ 나중에 제대로 소설답게 들어앉힌 작품도 읽을 수 있기를 바라보지요. 개작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우와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글입니다. 묘사부터 구성까지 정말 틈이 없군요.^^ 이런 글을 쓰려면 전 언제쯤...ㅠ.ㅠ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도 이렇게나 많은데 저는 세상에 살면서 느끼는 감정이 왜이렇게 적은거죠? 역시 세상님은 제가 늘 생각하지만 민족계몽을 늘 주창하시는 분 같으세요.^^ 저는 그 점이 세상님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배우려고 하는 부분이구요.^^
'편재'가 이죽거리는 "계몽주의 자체지"에서 이젠 "민족계몽"씩이나~ ㅋㅋ 문학적으론, 즉 소설로는 영 아니에요. 절대 이렇게 우겨내면 안 돼요. 그냥 치기나 오기라도 부려서 글을 일단 열심히 쓰면서 자기와 열심히 싸워야 뭐가 되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끼적인 입심일 뿐... 동생, 언제 산에나 가자고! 딸 흘린 뒤에 마시는 얼음 같은 동동주가 죽인다고! ^^
세상형님!! 저도 산에 같이 가고 싶은데.. 무릎때문에..ㅠ.ㅠ 저는 술만이라도 같이 마실 수 있으면 됩니다.ㅋㅋ